전출처 : 국경을넘어 > 격물치지
주자학과 양명학
시마다 겐지 지음, 김석근 옮김 / 까치 / 2001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은 이전에 전공을 공부하기 위해 또 한편으로는 일본어 공부하기 위해서 샀던 책이다. 문고판으로 나왔던 것이 이제는 판형이 좀 더 큼직하게 변형되었다.  암파문고의 원본을 번역본과 대조해 보면서 띠엄띠엄 읽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책은 주자학과 양명학이 어떠한 배경 속에서 등장하는 지 잘 보여준다. 주자학이 태어나게 되는 것에서 시작하여 이것을 딛고 양명학이 어떻게 나오는 지 잘 나타나 있다. 관념적으로 흐르는 철학책이 아니라서 좋았던 기억이 난다.

이 책에서 제일 인상적인 곳은 양명의 대나무 실험 장면이다. 양명이 친구와 함께 격물치지에 도전하는 장면이다.

격물치지는 사서의 하나인 <대학>에 나오는 말이다. 주희는 “세상의 모든 사물은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할 것 없이 모두 그 이치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사물(物)을 끝까지 연구하면(格) 그 이치(知)를 환히 알 수 있게(致) 된다”라고 했다.

광적인 주자학의 신봉자 왕양명은 한번 도전하였다. 그는 말한다. “격물[사물에 대한 연구]은 주자의 학설에 의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것이라고 누구라도 말하는데, 주자의 학설을 실제 행해 본 사람이 있을까? 나는 실제로 해 보았다“


그는 이어서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는 천하의 사물을 격(格;연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선 화단의 대나무를 격물한 것이다. 같이 격물을 시작한 친구는 3일 만에 노이로제 증상을 보였다. 그리고 나는 격물을 시작한 지 7일 만에 드디어 병이 나고 말았다. 결국 성인이라는 경지는 되려고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하면서 탄식을 한다. 친구와 함께 대나무를 뚫어지게 처다보고 있는 왕양명을 생각해 보라. 대나무의 이치를 연구하여 그 속에 담긴 만물의 이치를 알려고 했던  그의 시도는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그리고는 격물치지를 다르게 해석한다. ‘격’을 정(正)이라 해석했다. 그리고 물(物)이라는 것은 맞닥뜨린 사태이며 사람의 의지가 지향하는 곳이다. 즉 ‘물’이란 의지가 있는 곳이다. 격물은 (마음 속에 있는) 사물(物)을 바로 잡는(格) 것이란 의미가 된다. 요약하면 마음의 바르지 못함을 바로 잡는 것이 격물이다. 지(知)는 마음 속에 선험적으로 지니고 있는 지혜인 ‘양지(良知)’이며 결코 외연적인 지식의 의미가 아니다. 따라서 양명의 격물치지는 ‘행동과 마음을 바로 잡아 마음속의 양지를 실현하는 것’이다.


“나는 하늘의 보살핌에 의해 뜻하지 않게 양지의 학을 깨닫게 되었고, 이로써만 천하를 다스릴 수 있다고까지 확신했다. 그 때문에 백성이 고통과 죄악에 빠짐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심이 아팠다. 그래서 나 자신의 어리석음도 잊어버리고 양지의 학으로 백성을 구제하고 싶었다. 이런 나의 행동을 보고 세상 사람들은 비웃고 헐뜯으면서 나를 보고 말하기를 미친 사람이니 얼빠진 사람이고 한다. 부모, 형제가 깊은 골짜기에서 떨어지려는 것을 보게 되면 소리 지르며 맨발로 달려가 벼랑 끝에 매달려 ….  사대부라는 자들은 그 옆에서 서로 인사를 주고받고 담소하면서 손짓하며 말하기를 ‘예의범절을 잊어버리고 의관도 갖추지 않고 저렇게  보기 흉하게 허둥대며 소란을 피우는가. 필시 미친 사람이거나 얼빠진 사람일 것'이라고 말한다"며 사대부들에게 일격을 가한다.


양명의 사상이라는 것이 결국은 ‘실천’이 빠져 있는 사대부 사회의 허위 의식의 고발이었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다. 그가 죽은 후 양명학은 좌파와 우파로 분열되었다. 좌파는 사회적 통념과 권위에 도전하여 기성 도덕을 극단적으로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양명학 좌파는 이론이나 실천적인 면에서 과격주의자(래디컬리스트-이 부분을 보면 어수갑씨의 <베를린에서 18년 동안 부치지 못한 편지>가 생각난다. 어수갑씨의 삶은 공지영씨가 쓴 소설 <별들의 들판>에) 였다.

 

 

그리고 유교의 반역자라고 하는 이지(이탁오)가 등장한 것이다. 그의 사상은 <분서>에 잘 나타난다. “ 사람들은 내가 아직 동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꾸짖는다. 그러나 동심은 진심이다. 만약 동심을 옳지 않다고 한다면 이는 곧 진심을 옳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진심이란 거짓의 반대 개념이다. 동심이란 거짓과는 무관한 순수한 진실이며 최초의 한 가지 생각의 본심이다. … 만약 배우는 사람이 도리어 책을  많이 읽고 의리를 안 탓으로 동심을 저해한다면 이는 그릇된 것이다. 무릇 학자들이 책을 많이 읽고 도리를 알아서 오히려 동심을 저해하고 있을 따름이니 … ” 그 역시 사대부 사회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물론 여기서 동심(童心)은 양명이 말한 양지의 다른 표현이다.

 

사대부들의 박해를 받아 추종자들과 함께 피신 생활하던 그는 1602년 2월에 체포되었고 3월 16일 베이징의 옥중에서 자살하였다. 이지가 죽은 것은 중국의 루소라 불리는 황종희(<명이대방록>의 저자. 박노자가 유교적 사회주의라면서 언급한 적이 있다)가 태어기 8년 전이다. 때는 명이 망하기 42년 전이었다. 그의 저작들은 모두 소각되었고 다음 대인 청조에 들어서도 그의 저술은 금서 목록에 들어가 있었다.

 

양명학이 얼마나 과격했는(?) 지는 한홍구의 <대한민국사> 1에서도 잘 나타난다. 보수와 수구는 된장과 똥 만큼이나 다르다고 한 그 글을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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