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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비 공포가 피임을 부른다

성차별에 대한 격렬한 저항이자 대학입시전쟁과도 깊이 연관된 출산파업… 엘리트층의 명문대 출신 독식을 제어하도록 ‘경쟁의 병목현상’ 뚫어줘야

▣ 강준만 전북대 교수·신문방송학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일제 말기에 일제는 “낳아라! 불려라! 길러라!”라는 표어를 내걸고 10명 이상의 자녀를 낳은 가정에 대한 표창식을 거행하며 출산을 장려했다. 해방 뒤 이승만 정권도 다산 여성에 대한 표창을 계속했다.

‘3·3·35운동’에서 ‘1·2·30운동’까지

5·16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1962년부터 가족계획 사업을 국가 시책으로 실시했다. 국가 시책으로서의 가족계획 사업 채택은 인도와 파키스탄에 이어 한국이 세 번째였다. 가족계획 사업은 전국의 모든 군에 보건소가 설치된 65년부터 본격화됐다. 이른바 ‘3·3·35운동’이 벌어졌다. “3명의 아이를 3살 터울로 35살 이전에 낳자”라거나 “3살 터울 셋만 낳고 35살 단산하자”는 구호를 내건 운동이었다.

1970년대 가족계획의 목표는 둘로 줄었다.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하루 앞선 가족계획 십년 앞선 생활 안전”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와 같은 구호들이 외쳐졌다. 80년대는 “둘도 많다.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로 바뀌었다.


△ 2006년 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아이는 1.08명으로 세계 최저를 기록했다. 저출산 재앙은 아이 낳기가 두려운 우리의 모순된 현실의 반영이다. 서울의 한 병원 신생아실 풍경.

그러한 구호 뒤에 숨은 치열한 노력은 눈물겹기까지 했다. 정관수술 받으면 예비군 훈련 면제해준다고 유혹하던 것도 눈물겨웠지만, 자식에 대해 다다익선이라고 여기는 고정관념에 도전하는 일도 눈물겨웠다. 소현숙이 쓴 <너무 많이 낳아 창피합니다: 가족계획>이라는 글에 따르면, “가족계획 사업 초기만 하더라도 마을에 들어간 가족계획 지도요원들은 마을 할아버지들이 지팡이를 들고 쫓아나와 도망나오기 일쑤였다고 한다. 이렇게 보수적인 분위기 때문에 여성들은 남편이나 시부모 몰래 피임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1973년까지만 해도 남편 몰래 피임한 여성들이 57.4%나 되며, 시부모가 모르는 경우가 55.4%나 된다.”

그런 눈물겨운 노력 덕분에 출산력은 1960년을 정점으로 해서 빠른 속도로 감소하다가 80년대 후반엔 재생산 수준 이하로까지 떨어졌다. 90년대 들어선 더욱 낮아졌다. 60년대 초 3%였던 인구증가율은 90년대에 이르러 1% 미만으로 감소했으며 출산율로는 1.6명으로까지 떨어졌다.

이런 출산율 감소의 주요 원인은 산업화로 대변되는 사회구조 변동이었지만, 2000년대 들어선 자녀의 교육 문제가 출산을 억제하는 최대 요인으로 등장했다. 2004년 12월 전북여성정치발전센터가 전주에 거주하는 20~40대 여성 5천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는 “교육비 무서워 자녀 못 낳는다”고 답한 사람이 42.1%로 나타났다.

2005년 3월28일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가 출산억제 기관에서 출산장려 기관으로의 변신을 선언하면서 ‘1·2·30운동’을 시작했다. 결혼 뒤 1년 내에 임신을 해서 2명의 자녀를 30살 이전에 낳아 잘 기르자는 의미였다.


△ 전국적으로 뿌려진 1960~80년대가족계획 포스터들.

2005년 8월24일 통계청이 발표한 ‘2004년 출생·사망 통계 결과’에 따르면 여성 1명이 평생 낳는 아이(합계출산율)는 1.16명으로 전년보다 0.03명이 더 줄었다. 1.16명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인 미국(2.04명·2003년), 영국(1.79명·2004년), 일본(1.29명·2004년) 등보다 훨씬 낮은 수준이었다. 언론은 이를 ‘1.16 쇼크’라 부르면서 위기의식을 고조시켰다.

특정 도의 인구 감소는 ‘재앙’ 아닌가

<중앙일보>는 “이러다가 우리는 17년 뒤부터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웃돌아 절대 인구 수가 감소하는 이른바 ‘죽음에 이르는 사회’를 맞게 된다”고 했고, <조선일보>는 “답답하고 한심스러운 것은 일본식으로 표현하면 ‘유사 이래의 재난 사태’라 할 인구의 감소를 눈앞에 두고 이 정부가 딴전만 부리고 있는 것이다”고 했다.

2006년 5월8일엔 ‘1.08 쇼크’가 찾아왔다. 통계청이 발표한 합계 출산율이 1.08로 세계 최저를 기록한 것이다. 언론은 또 한 번 ‘재앙의 도래’를 선언하고 나섰다. <중앙일보>는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면서 “서두르지 않으면 나라가 저출산 때문에 망하게 생겼다”고 했고, <조선일보>는 ‘비상 상황’을 선포하면서 “이렇게 가다간 경제는 주저앉고 복지는 부도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저출산 재앙’에 대한 반론도 있지만 그건 극소수고, 다른 언론과 대부분의 지식인들도 ‘1.08 쇼크’에 심각한 우려를 표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나라의 인구 감소가 ‘재앙’이라면, 특정 도(道)의 인구 감소는 ‘재앙’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여러 도가 해당될 것이나, 가장 대표적인 전라북도의 경우를 살펴보자. 1966년 전북의 인구는 252만 명이었다. 당시 한국 인구는 2900만 명이었다. 그간의 인구증가율을 따진다면, 전북 인구는 오늘날 417만 명이 되어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그런데 얼마인가? 178만 명이다! 다른 도들처럼 무슨 광역시가 떨어져나가 그런 게 아니다. 전북엔 광역시가 없다. 먹고살 길이 없어 무작정 다른 지역, 특히 수도권으로 빠져나간 것이다.


△ 1973년 한 호텔에서 ‘낳는 것은 여자가, 안 낳는 것은 남자가’라는 가족계획 세미나 광경이다. 애를 낳지 말라는 국가주의적 구호는 30년이 지난 오늘 애를 더 낳자는 구호로 변했다.(사진/ 연합)

우리 언론이 지방 인구 준다고 걱정해준 적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국제경쟁력을 앞세워 수도권 규제를 풀지 않는다고 아우성치면서 정부 욕하기에만 바빴다. 무슨 대안을 제시하면서 욕한 것도 아니었다. 맹목적인 폭격이었다. 그런 폭격 받다가 헷가닥한 건지는 몰라도 노무현 정권은 가장 대표적인 업적으로 기록될 뻔했던 ‘지방 살리기’ 프로젝트를 스스로 다 망쳐놨다. 노 정권의 업적은 정반대로 수도권 신도시 개발과 수도권 공장 신·증설 허용이 될지도 모른다. 수도권에 국내 대기업 공장 신·증설이 허용되는 것은 10년 만이라고 하니, 이 얼마나 거룩한 업적인가.

나라의 인구 감소하는 게 ‘재앙’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방 인구 감소 문제에 대해서도 눈을 돌려야 한다. 그게 정상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 할 일이다. 또 하나 주목할 건 출산율이 감소하는 이유다. 그 이유도 규명하지 않은 채, 출산율 감소를 부추길 정책을 고집하면서 출산율 감소를 재앙으로 보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정희진은 “저출산의 주원인은 가임 적령기 여성이 결혼 자체를 기피하기 때문이다. 여성의 평균 출산 연령이 서른 살에 육박하는 29.7살이다. 통계청 조사에 의하면, 여성(41.5%)이 남성(19.9%)보다 두 배 이상 부정적인 결혼관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여성 출산 독려는 ‘불가능한 임무’

“이제까지 한국이 과도한 군사비 지출에도 경제성장이 가능했던 것은, 사회복지 비용을 전혀 부담하지 않고 이를 가족 내 여성의 성역할 노동으로 대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여성들은 더는 이러한 이중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며, ‘현모양처’와 ‘커리어우먼’ 사이에서 분열과 고통을 감수하지 않는다. 저출산은 그간의 성차별에 대한 여성들의 조용하지만 격렬한 저항이다. 가부장제 사회가 던진 부메랑인 것이다. 저출산은 전통적인 여성 억압의 기제였던 출산을 저항의 무기로 삼은 여성들의 정치적 선택이다.”

이어 정희진은 “여성의 출산을 독려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은 대책이기 이전에, ‘불가능한 임무’다. 국민과 노동자의 개념을 바꾸고 인종적, 성적, 연령적 다양성을 보장하는 사회를 만들어나가는 것이 더 현실적인 대안이다”고 말했다.

동의한다. 다만 하나 더 추가하고 싶다. 작게는 사교육비, 크게는 대학입시 전쟁의 문제다. 앞서 거론한 전북여성정치발전센터 조사 외에도 여러 조사 결과 사교육비 부담 문제가 출산율 저하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됐다.

“네 성적에 잠이 오냐?” “쟤 깨워라” “30분 더 공부하면 남편 직업이(마누라 몸매가) 달라진다” “10분만 더 공부하면 마누라가 바뀐다” “대학 가서 미팅할래, 공장 가서 미싱할래?” “끝없는 연습만이 살길이다. 10시간: 서울대, 8시간: 연대, 7시간: 이대”

일부 고교 교실의 급훈들이다. 지난 3월 교육부가 비교육적이라며 전국 시·도 교육청에서 장학지도를 통해 해당 학교장들이 재검토할 수 있도록 당부해달라며 예시한 것들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비교육적 급훈들이야말로 대학입시 전쟁의 진실을 말해주는 건 아닐까? 이즈음 사이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죽음의 트라이앵글: 누가 우리를 미치게 만드는가’라는 제목의 동영상은 2008년 대입이 내신-수능-대학별 고사로 이뤄진 ‘최악의 삼각형’이라고 주장하면서 “친구를 짓밟고 적으로 만드는 것이 창의적 인재인가”라고 물었다. 그 동영상을 만든 학생들은 “우리 가슴속의 분노와 피해의식, 그 모든 것은 바로 당신들이 키웠다”면서 “당신들을 용서하지 않는다”고 했다.


△ 대학입시를 목표로 하는 사교육비 부담은 출산율 저하의 주범이다. 묻지마 교육비 투자를 불러온 입시 전쟁의 해법 없인 출산율 저하에 대한 해법도 없다.(사진/연합)

이 동영상이 말한 ‘당신들’은 정부·학교·학원·대학 등이었지만, 기성세대는 누구도 그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지난 2003년 대학입시 전쟁으로 인해 자살을 하는 어린 학생들이 속출했으며, 그 연령대가 초등학교 5학년 학생으로까지 내려갔을 때, 언론은 자살 사건들을 개탄하듯이 보도하면서도 기본적으로는 한국형 약육강식 시스템을 사실상 옹호했다.

대입 입시 전쟁 자체를 없앨 수는 없지만 그걸 정상적인 ‘경쟁’의 수준으로 완화하는 방법은 이미 나와 있다. 그건 부모의 책임으로 간주되는, 10대 후반에 한 번 치르는 입시전쟁으로 평생을 결정하게 만드는 기존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다.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엘리트층의 대부분이 지금처럼 서너 개 또는 대여섯 개 대학 출신이 독식하는 한, 그 그룹에 끼고자 하는 전쟁은 사라지지 않게 돼 있다.

보수언론이여, 진정한 국가주의자가 돼라

따라서 기존 학벌의 ‘경로 의존’에 변화를 주는 게 필요하다. 기존 명문대들의 정원을 대폭 줄여 소수 정예주의로 가게 하면서 그들의 엘리트층 독식을 제어하고, 수십 개 대학 출신이 엘리트층 다수의 자리를 놓고 경쟁하게 한다면, 지금과 같은 경쟁의 병목 현상은 크게 완화될 수 있다. 일단 대학에 들어간 다음에 다시 한 번 경쟁을 해볼 수 있고 대학 졸업 뒤에도 경쟁이 가능하게끔 하자는 것이다. 자녀의 생존경쟁 책임을 부모가 지지 않게끔 해주자는 것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 보자면 지금과 같은 ‘고교 평준화’ 정책은 올바른 대안이 아니다. ‘고교 평준화’ 철폐는 더더욱 아니다. 엘리트층의 명문대 출신 독식은 이미 오랜 ‘경로’로 설정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경로를 바꿔주지 않는 한 그 어떤 입시정책 변화도 하나 마나 한 짓이다. 그럼에도 그런 하나 마나 한 짓이 계속 반복되고 있는 이유는 입시정책을 다루는 사람들은 물론 정부 밖에서 교육운동을 하는 사람들조차 기존 경로의 기득권자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예 그런 문제의식이 없을 수도 있다.

이러한 경로 변경 주장이 무조건적인 학벌 타파로 오해받은 측면도 있다. 진정 변화를 이뤄내고자 한다면, 교육운동가들도 학벌 타파는 불가능한 목표라는 걸 인정하고 경쟁의 병목 현상을 뚫어주자는 현실적인 목표로 이동하면 좋겠다.

보수언론에도 당부하고 싶다. 비판이 아닌 호소를 하고 싶다. 담론상으론 이미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한국에선 국가주의는 비판의 대상이지만, 과연 한국에 진정한 국가주의자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보수언론이 부디 진정한 국가주의에 충실해주면 좋겠다. 진정 국가를 생각한다면, 그리고 앞뒤가 맞는 주장을 하고자 한다면, ‘출산율 재앙’의 주요 원인이 대학 입시 전쟁에 있다는 걸 인정한다면, 기존 대학 입시 전쟁을 무조건 옹호하거나 더욱 가열찬 전쟁을 해야 한다고 선동하는 일만큼은 다시 생각해보면 좋겠다.

보수언론이 대학 입시 문제를 다룬 지면을 보라. ‘평등주의’니 ‘포퓰리즘’이니 ‘하향 평준화’니 운운하는 이데올로기 공세가 난무한다. 입만 열었다 하면 그 소리인지라 신물이 날 지경이다. 보수언론이 원하는 대로 대학 입시 정책이 이루어진다면, 출산율은 더욱 감소할 것이다. 자신들이 믿는 어떤 ‘재앙’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이 믿는 또 다른 ‘재앙’을 자초하는 그런 어리석은 게임을 언제까지 계속할 셈인가?

보수언론이 진보 진영을 향해 쏟아내는 독설 중엔 타당한 것들이 많다. 그런데 비극은 그런 독설이 자기들에게도 해당된다는 건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역설 같지만, 이는 그들이 진정한 국가주의자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시야는 국가에까지 뻗어 있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협소한 당파적 범주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서울대 총장은 서울대만 생각할 것인가

서울대 총장도 마찬가지다. 서울대 총장쯤 되면 대한민국 교육 전체를 생각하는 발언을 할 법도 한데 여태까지 그런 총장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서울대 기득권 지키기에만 일로매진했다. 서울대가 잘되면 무조건 한국이 잘된다는 그들의 신앙은 자기 재벌그룹이 잘되면 그게 곧 한국이 잘되는 거라는 재벌 총수들의 신앙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이처럼 국가주의자의 씨가 마른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국가주의자는 없는데 국가주의 비판이 난무하는 한국의 모습은 보기에 처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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