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가을산 >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 ^^

     

    오늘 이 책 시리즈 12권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습니다 .
    호씨 성을 가진 어떤 분이 보내주셨습니다.   정말 대단히 감사합니다.  (/^-^)/

    망하게 생긴 학교를 망하게 생긴 변호사가 망하게 생긴 학생들을 통해서 
    살려낸다는 줄거리인 것 같습니다.  이제 1권 읽고 2권 막 시작했는데요.... 
    '목표를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라는 것이 사쿠라기 선생의
    표면적인 모토인 듯 합니다.

인성 교육을 중시하는 선생에게
"당신이 수업할 때는 (학생들이) 잠자코 앉아 있었던 적도 없지?"
 (지금은 열심히 공부하겠다는)이유를 가르쳐 줄까?
 날 따라오면 동경대에 넣어 주니까 그런 거야"            라고 당당하게 말하네요.

뒤의 내용이 어떻게 풀릴지 자뭇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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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감사 페이퍼를 쓰면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생각들입니다.

1. 오호라!  예비 고등학생의 학부형이 되는 가을산을 위한 수험생 부모 지침서가 될지도 모를 일이다.
    아들놈과 같이 읽어볼까? ^^a  

2. 나도 학생 때는 ABBA의 'The winner takes it all" 이란 노래에 맞추어 체력장 연습을 한 적이 있다.
   당시에는 실력은 곧 내가 성취하는 자유와 비례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실력과 자유가 행복과 비례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때때로 목표를 위해 스스로 강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특히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유일한 정당한 방법일 때에는.

3.  강자 독식의 원리..... 지금의 현실은 분명 이것을 부인할 수 없다. 똑바로 보아야 한다.
강자를 효율적으로 생산해 내는 무한 경쟁 체제에 대항해서, 이른바 조화롭고 개인중심적인 삶을 어떻게 지켜야 할까? 
무한 경쟁에서 태어나는 강자는 "대체로" 특정 분야에서는 강할지 몰라도, 시야가 무척 좁다는 특징이 있다.
자신의 시야가 좁은 것은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 자신을 엘리트로 자부한다.  
우리 사회의 많은 결정들은 이런 시야가 좁은 자들에 의해서 내려진다.

한편, 조화롭고 개인중심적인 삶이 곧 나약한 것이랑 동의어는 아니다. 
자신과 자신의 지향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는
역시 강해져야 하고, 같은 경쟁을 거쳐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을 것이다.  
이부분이 문제이다. 어느 쪽을 택하든 결국 그 지속성은 '파워'에서 결정된다는 것.

내가 책 한권만 보고 오버하는건지도 모르겠다.

아참! "신의 물방울" 한 권도 왔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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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끊이지 않는 논쟁 (조희연 선생님 홈페이지에 갔다가)

2005.3.2 (수) 18:55   동아일보   동아일보 기사보기
"[학술]임지현 vs 조희연 ‘박정희 논쟁’"
[동아일보]
조희연(49·사회학) 성공회대 교수와 임지현(46·역사학) 한양대 교수가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를 놓고 지상 논쟁을 계속하고 있다.
임 교수가 저서와 학술 세미나 등을 통해 박정희 시대를 ‘대중독재론’(지배자의 강압과 민중의 동의가 결합돼 독재가 출현했다는 입장)으로 평가하자, 조 교수가 계간 ‘역사비평’ 지난해 여름호에서 이를 비판하고 나섰다. 조 교수는 대중독재론이 대중의 순응적 침묵을 전면적이고 능동적 동의로 확대해석함으로써 박정희 독재를 정당화하는 보수 우익에 이용당할 우려가 있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조 교수는 또 박정희 시대는 군대까지 동원해 유지됐으며 박 전 대통령이 최측근에게 암살된 것은 민중의 저항이 권력의 내부균열을 낳을 만큼 강력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임 교수는 ‘역사비평’ 지난해 가을호에 바로 반론을 제기했다. 임 교수는 조 교수의 인식에는 민중을 영웅시하고 독재자를 악마시하는 도덕적 이원론이 작용하고 있다며, 대중독재론이 우익화에 이용당할 것을 우려하는 것은 학문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이라고 반박했다. 임 교수는 오히려 독재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 메커니즘을 철저히 해부함으로써 새로운 독재의 대두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임 교수는 “대중독재론은 소수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대중에게는 면죄부를 부여하는 방식의 과거 청산이 아니라, 과거를 반성적으로 성찰하는 사회적 기억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조 교수는 ‘역사비평’ 올해 봄호를 통해 재반론을 폈다. 조 교수는 “대중독재론은 폭압과 저항을 강조하는 진보적 분석의 정반대의 지점(보수적 입장)으로 이동한 것 아니냐”고 따졌다. 그는 또 사실상 박정희 체제는 1987년 6월 민주항쟁 전까지 유지됐다고 주장하며 “박정희 독재에 대한 분석의 출발점을 6월 민주항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 교수는 이어 박정희 체제에 대한 현재의 동의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라는 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밝혔다.
임 교수는 여름호에 다시 반론을 제기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임 교수는 “대중독재론은 박정희 체제뿐 아니라 북한의 김일성 체제에도 적용되는데, 조 교수가 대변하는 진보 진영에서는 박정희 체제만 문제 삼고 있다는 점도 지적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정치권의 과거사 청산과 맞물려 이 논쟁은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2005.3.3 (목) 09:16   서울신문   서울신문 기사보기
학계 일부 ‘脫 민족주의 수용론’ 눈길
[서울신문]최근 학계 논란의 중심에는 탈민족주의가 있다. 이 논란은 단지 학문적 논쟁에만 그치지 않는다. 논리의 순수성과는 별도로 ‘현재 정치’에 접속되면 보수주의와 뚜렷한 친화성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핵심은 DJ정부 이래 집권한 ‘민족주의 좌파’에 대한 위기감과 반감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크게 다루는 자칭 ‘민족지’가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의 논의 역시 비중있게 다루는 어색한 풍경의 원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는 계간지 ‘역사비평’ 봄호에서 다시 한양대 임지현 교수를 비판했다. 지난해 여름호부터 이어지고 있는 논쟁의 연장선상이다.

조 교수의 논리는 기본적으로 임 교수가 박정희체제의 특수성을 외면한다는 데 있다. 서구의 몇몇 파시즘을 일반화한 뒤 박정희체제를 끼워맞추는 것은 ‘지적 종속’의 한 형태다. 이는 임 교수가 좁은 맥락의 비슷한 점에 집착, 역사적 맥락을 놓치고 있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예를 들어 ‘부시-빈라덴’은 적대적 공범관계다. 하지만 ‘제국적 질서와 권력구조’를 놓치면 일면적인 해석에 그친다. 임 교수의 논지라면 구한말 위정척사파와 일본제국주의는 똑같다.‘반근대적 성격’을 공유했기 때문이다.

과거청산문제도 비슷하다. 나치재판을 마무리한 뒤 ‘몇몇 전범만 처벌해 독일 국민은 면죄부를 얻은 게 아니냐.’는 독일의 경험에서 뒤의 것만 임 교수가 따오고 있다는 것이다.

법적 제도적 과거청산마저 안 된 우리 상황은 지워져 있다. 조 교수가 “현재의 과거청산이 실패한다면 (임 교수 주장은)학문적 연구로 끝나버린다.”고 비판하는 까닭이다.

조 교수는 그러나 각주를 통해 박정희체제의 헤게모니를 과도하게 강조했다고 시인하는 등 임 교수의 논의가 지나친 좌파적 해석에 대한 ‘해독제’로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4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릴 ‘한·중·일 3국의 근대사인식비교’ 학술대회에서도 최근 다시 일기 시작한 식민지근대화론 주장 가운데 일부분이 수용될 조짐이다.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신주백 책임연구원은 한국 역사교과서의 일제시대 서술이 지나치게 ‘한국수탈론’에만 매몰되어 있다고 비판했다.

지주제 발달 등 한국의 대응이 빠진 데다 한국의 수탈만 있을 뿐 타이완과 만주의 사례는 없다.

도쿄대 마쓰모토 다케노리 교수 역시 식민시대 서술에서 수탈론 외의 서술은 찾기 힘들다는 점을 지적했다.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근대성에 대한 얘기가 없다는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자들은 기존 역사연구에 대해 실증적 연구없이 ‘일제=악’이라는 도덕론으로만 접근하고 있다고 비판해 왔다.

이에 비춰볼 때 일제시대 중국의 피해상황을 구체적으로 나열한 중국 사회과학원 롱웨이무 부주간의 발표도 눈길을 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저작권자 (c) 서울신문사]

 

 조희연 선생은 역사를 ‘과거’를 소재로 한 ‘미래’를 향한 ‘현대’적 투쟁 이라고 말한다.
 신영복 선생 역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은, 과거를 생환하는데에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임지현 교수가 주장하는, 박정희 독재정권시절의 밑바탕을 대중의 지지라는 것에 우리는  수긍할 수 있는가?
 공포정치에 의해 내재화된 자기검열이 과연, 자발적인 동의 인가?
 푸꼬는 물론 대중이란 이중적이어서 저항하다가도 독재를 원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게  과연 박정희 시절과 잘 어울리는 말인가?
<우리안의 파시즘, 임지현외, 삼인>

 독재자란 모두 악마라고 생각하는 굳어버린 도덕관념이라고 임교수가 탓을 하기엔, 그 시절 우리가 군과 경찰에 의해 흘렸던 피는 무엇인가.
박정희 향수는 사실 제대로 겪어보지 않은 세대, 혹은 그러한 탄압을 실질적으로 받지 않았던- 루소의 표현에 따르면- 무지몽매한 민중들 아니었나?
일반의지(헌재)가 집합의지(국회)를 아직도 간단히 부러뜨리는 시대에서, 우리에게 이 사회계약을 파기할 권한은 없나?
하긴... 집합의지도 집합의지가 맞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임교수의 시선이 더 탐탁찮은 것은, 왜 역사를 끊어서 보느냐는 말이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폭력이 아닌가? 헤게모니는 폭력이 아닌가?
거기에 장악된 민중은 과연 민중인가?
'자발적 지지'에 퇴색되어가는, 아직도 빛을 보지 못하고 어둠속에 있는 수많은 희생양의 목숨과 저항자들의 명예는 어디있는가?
과거를 청산해야 하는 이유는 사회적, 법적, 역사적 처벌이기도 하지만 권력에 힘없이 스러져간 넋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명예를 되살리는데에도 의의가 있다.

 

 

[사회과학논문] <당대비평,2001,봄>일상적 파시즘론에 대한 논평 
 
 < 일상적 파시즘 다시읽기>를 읽고
김 동 춘(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1. 임교수의 문제 제기에 일단은 공감한다. 임교수의 문제제기는 군부독재가 퇴진한 이후 이제 '합리적 지배'( 즉 자본의 지배)의 영역에 포섭되어 가는 한국 민중들의 의식과 실천 일반, 그리고 권위주의의 비판자였지만 그것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운동가들을 나름대로 적절하게 비판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특히 '민주'와 '진보'를 대변한다고 자임했던 운동진영 내부의 반민주성, 귄위주의, 가부장주의 문제는 크게 문제거리가 된 바 있고, 민중들의 일상 생활의 영역에서 착근해 있는 권위주의와 군국주의 잔재 역시 90년대 초 들어서 본격적으로 부각된 바 있으며 필자도 그러한 문제의식을 갖고서 일련의 작업을 한 바 있다. 그러나 과거의 계급론자, '민중메시아주의'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비판자들에게 그러하였듯이 임교수 역시 때늦은 시점에서 80년대 식의 민중주의, 계급주의를 과도하게 단순화한 다음 그러한 가공의 대상을 향해 공격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87년 6월 항쟁과 7,8월 대투쟁이 발생한지 14년이 지난 오늘 누구도 민중을 타자화하는 그러한 투박한 민중 메시아주의를 견지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비판은 시체에 칼을 들이대거나 허수아비를 보고 소리지르는 것일 수도 있다. 즉 일상적 파시즘론이 2001년 오늘의 시점에서 한국사회의 과학적 이해 혹은 한국 민중들과 운동가들의 의식과 행동을 이해하는데 어떤 유관성(relevance)를 갖는지 다시 묻고 싶으며, 아울러 {당대비평}이 이 주제에 그렇게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다루어야 할 정도로 시급한 쟁점인지 묻고 싶다.

2. 지배는 언제나 가시적인 폭력과 내면화된 동의를 수반하게 마련이고, 군부독재는 전자를 전면에 등장시킨 시기라면 정치적 민주화는 어떤 점에서건 후자의 측면을 두드러지게 만드는 전기가 된다. 폭력이 전면화되고 가시화되는 시기라고 해서 민중들의 내면화된 복종이 뒷받침되지 않는 것은 아니며, 민중들의 내면화된 복종이 더욱 문제가 되는 시기에도 권력은 언제나 피지배자의의 일상생활의 통제를 통해서만 자신의 지배를 관철할 수는 없다. 이 모든 과정에서 권력은 사회, 문화적으로만 관철되는 것은 아니며 언제나 물리력을 배후에 깔고 있다. 2000년 여름 롯데호텔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전경들의 폭력은 80년 광주 사태의 재연이었다. 그것이 '일상'의 영역으로 지배권력의 행사가 변화된 시대의 우연하고 돌출적인 사건이었는가?
따라서 일상의 영역이 구조적 영역과 어떻게 연관되는지는 밝히지 않는다면 이러한 문제제기는 자본주의 국가와 그 지배기구에 대한 오도된 설명에 도달하게 된다. 크게 보아 이러한 문제제기는 이것은 서구 자본주의가 상당한 물질적인 성공을 거둔 70년대 이후 유럽의 신좌파의 역사학과 사회학에서 ( 하버마스의 '생활세계의 식민화' 논의, 톰슨의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 스코트의 "일상투쟁"의 개념, 베링턴 무어의 "Injustice" 등의 저서) 충분히 제기된 바 있고, 그것은 정통좌파의 경제주의적 편향을 사회 혹은 문화 현상에 대해 새롭게 주목할 것을 제한하는 흐름들이다. 유럽의 신좌파의 지적 반성이 68년 혁명의 경험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일상으로의 관심 전이 역시 80년대적 교조적 마르크스주의 주의의 경험에 대한 반성에서 제기된 것과 유사한 맥락 속에 있다. 그러나 한국의 6월 항쟁은 68혁명은 아니었다. 이것이 임 교수의 문제제기는 실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90년대 초에 민중운동, 민주화운동 진영을 향해 공개적으로 제기되었어야 할 것이 지금 제기되는 것이기 때문에 너무 뒤늦은 점도 있고, 이론적으로 본다면 아직 분단체제 하의 억압기구나 억압적 법이 사라지지 않은 시점에서 제기되고 있기 때문에 탈맥락적인 측면도 동시에 갖고 있다.

3. 한편에서의 수동성과 다른 편에서의 공격성을 가진 파시즘, 권위주의 체제 하의 민중의 행동 양상, 가부장제 사회에서 길들여진 남성들의 행동 양식에 대한 개념화는 '일상적 파시즘'의 개념이 없이도 충분히 비판될 수 있고, 또 해석 비판되어 온 바 있다. 임교수가 설명하는 오늘 민중들의 정서와 의식 속의 수동성과 보수성, 지식인들의 이중성과 일상에서의 보수성 등은 일상에서의 파시즘이라고 개념화하기보다는 오랜 왕조체제를 거치는 동안 침전된 전통적 보수주의가 군부독재 주도하의 자본주의적 근대화 과정에서 새로운 형태로 변형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통상 지배 체제를 설명할 때 사용되는 '파시즘'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민중들을 지배자와 동일한 주체위치로 올려놓는 것이 어떤 점에서 오늘날 민중들의 의식과 행동의 특성을 잘 부각시켜줄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다.
물론 일상의 영역 혹은 코드 등의 개념이 하나의 문화현상 혹은 단순히 상부구조가 아니라는 점에 대해서는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것은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를 매개하는 습관의 영역이라고 부를 수 있겠다. 그것은 브로델이 말하는 사회변화의 장기지속의 개념에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언어의 영역이자 사회학에서 말하는 일상적 실천의 영역에 가까운 것이다. 이것을 부르디외는 하비투스(habitus)라고 명명한 바 있다. 그렇다면 이 개념이 부르디외의 그것보다 더 현실 설명력이 있는가? 그냥 가부장주의와 군부독재에 길들여진 민중의 하비투스라 부르는 것이 더욱 정확한 것이 아니겠는가?
즉 일상적 파시즘론은 역사적 국면에서 나타난 파시즘의 개념을 너무 일반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1차 대전 이후 자유경쟁 자본주의의 세계적 위기 속에서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 혁명을 거치지 않는 후발자본주의 국가, 특히 농촌에서의 계급분화와 계급갈등이 첨예하게 전개되지 못한 나라에서 나타난 바, 농민들의 권위주의적 정서와 후발자본주의의 위기가 맞물려서 나타난 역사정치적 지배체제를 설명하는 개념인데, 이것을 오늘의 수동적인 민중들의 의식과 태도 일반으로 확대시키는 것이 타당한가? 그렇게 본다면 모든 후발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복지국가가 자본의 지배가 내면화된 체제라는 점을 강조한다면 복지국가 역시 변형된 파시즘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의 개념이 지나치게 넓은 외연을 가질 경우 그 개념의 유용성이 상실되는 문제점을 안게 된다.

4. 일상적 파시즘론은 실천적으로 허무주의와는 무관하다고 말하고 있으나 결과적으로는 허무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많다. 단순히 개인의 윤리와 의식의 문제로 돌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광수 식의 민족개조론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겠으나, 유럽의 문화적 좌파들의 실천지향과 유사하게 자본주의 문화 비판론으로 나아갈 가능성이 높다. 파울로 프레이리 식의 민중 의식화의 대안이 제시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는 일단 현실분석이기 때문에 그 까지는 나아가지 못한 것 같다. 어떤 문화적인 변혁론도 정치 경제적 변혁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운동의 패배를 다른 방식으로 정당화하는 것일 수도 있다. "민중들도 문제있다"고 말하는 것은 대단히 쉬운 일이다. 그러나 민중들이 주인으로서 행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본말을 전도시킨 것이다. 한국의 경우 특히 그러하다. 즉 민중들이 자신의 생활세계의 체험을 통해 확립한 나름대로의 '합리성'(rationality)을 지식인이 설정하고 있는 민중의 이상적인 상태 혹은 지식인적인 관점에서의 '민중의 비합리성'의 기존으로 보는 것은 지식인, 사회과학자가 빠질 수 있는 가장 큰 위험이다. 그리고 그러한 접근은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충분히 제시해 주기도 어렵다. 새 주민등록증 신청 작업에 그렇게 자발적으로 동원된 민중들을 비판하기 이전에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이 왜 소수의 메아리가 되고있는지 먼저 반성할 일이다.

5. 한가지만 더 제안하면 그래도 한국에서 일상의 파시즘이 분명히 중요한 현실이라는 점을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라이히의 {파시즘의 대중심리}, 서구의 급진적 페미니즘, 탈식민화 담론 등만 읽지 말고 일제 식민지 말기의 동원체제와 한국전쟁 기에 발생한 민간인학살에 관해서 알아야 한다. 파시즘과 유태인 학살에 동조한 독일 민중들이 오늘의 독일사회의 보수화의 주역이라면 한국사회에는 군사독재의 원조격인 식민지 지배와 전쟁체험이 사회적으로 내재화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언제까지 남의 경험에서 나온 이론을 받아들이는데는 그렇게 신속하면서 오늘의 우리가 겪은 현실이 과거 우리 조상들이 겪은 역사의 경로 속에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데는 그렇게 둔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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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평전이란 무엇인가

어제 날짜 교수신문에 게재됐던 글이다. '평전에서의 비평정신'에 대한 곽차섭 교수의 글로서 제목은 '너와 나 사이의 인간적 공감'. <마키아벨리 평전>을 옮긴 경험에서 나온 통찰을 담고 있어서 음미해볼 만하다(문학비평쪽으로 자리를 옮기면 제네바학파의 '공감의 비평'을 자연스레 떠올리게 한다). 평전 장르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요즘 출간되는 '두툼한' 평전들을 다 챙겨볼 수 없다는 게 유감스럽다. '휴식' 같은 책들일 텐데...

 

교수신문(06. 07. 04) 평전에서의 비평정신에 대한 글을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아직 내가 쓴 평전 저작을 가지고 있지도 못한데 이런 원고 청탁은 부담이 된다. 아마 몇 년 전 리돌피 작(作) 마키아벨리 전기를 <마키아벨리 평전>이란 제목으로 옮겼던 일이 이런 식으로 되돌아오는가 보다. 우선은 내가 왜 리돌피의 책에다 하필 ‘평전’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는지, 그것부터 해명해야 될 것 같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알라딘이나 예스24와 같은 대표적인 인터넷 서점에서 ‘평전’이란 단어로 검색해보니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평전들이 간행되고 있었다. 그 중 몇 종류는 상당한 인기를 누리고 있었다. 한국의 평전 베스트셀러 상위권은 체 게바라, 전태일, 등소평, 마르크스, 여운형 등 주로 정치적 인물이 차지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 정치가 갖는 헤게모니가 어느 정도인지를 말해주는 것이리라 (거꾸로 이는 사상적·문화적 측면에서 전기를 쓰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그런데 ‘평전(評傳)’이란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아마도 그것은 근대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비평적 전기’란 뜻일 게다. 알다시피 전기에 해당하는 ‘전(傳)’은 동아시아권에서도 오랜 연원을 가지는 글쓰기의 한 형식이었다. 사마천의 <사기>의 ‘열전’이 효시다. 문학에서도 이 형식을 빌렸다. '전우치 전' 같은 작품이 그것이다. 요컨대 동아시아 역사와 문학에서 ‘전(傳)’이란 어떤 특정 주제, 특히 인물에 대한 독특한 글쓰기 형식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것은 서양도 다를 바 없다. 고대 수에토니우스의 '12황제 전'이나 중세 초 이를 모방한 아인하르트의 '샤를마뉴 전'이 그렇고, 중세 내내 넘쳐났던 수많은 ‘성인전’들도 일종의 속류 전기들이다.

 

 

 

 

-오랜 연원을 가진 ‘전’란 말을 두고 굳이 ‘평전’이란 이름을 붙인 데는 역시 객관성, 비판성, 대상과 글쓴이 간의 비평적 거리 같은 것을 중시한 근대정신이 작용했을 것이다. 비평적 거리라는 점에서 그래도 전기가 자서전보다는 나을 게 아닌가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자서전을 두고 검증할 수 없는 자의성의 소산이라고만 보는 것은 얕은 발상이다. 자서전에는 실증적 측면과 자기 성찰적 측면이 함께 담겨 있는데, 전자는 검증 대상이 되지만 후자는 해석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카사노바나 첼리니의 자서전은 그 자체가 일종의 문학 작품이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말 그대로 자기 회심의 과정이 그리스적 합리주의를 매개로 역사와 종교적 비전 속에 버무려져 있다.

-평전에서 글쓴이는 그 대상이 되는 인물의 삶과 어느 정도로 거리를 두어야 할까? 이는 답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이며 사람마다 다른 답이 나올 개연성이 높다. 나의 생각은 이렇다. 어쩌면 모든 역사 글쓰기가 그렇기는 하겠지만, 평전만큼 사실과 해석 간의 균형의식이 절실히 요구되는 분야도 없다는 것이다. 연구 대상이 다름 아닌 인물이다 보니 글쓰는 이는 어느 덧 그/그녀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될 가능성이 없지 않다. 특히 저자는 대상 인물에 호의를 가지는 경우가 많으므로 더욱 거리두기가 어렵게 된다. 자칫하면 ‘성인전’을 쓰게 될 위험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그 거리가 너무 멀면 대상 인물과의 공감도가 떨어져 생생한 삶의 궤적이 잘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그 거리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지 이론화 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보자. 리돌피의 <마키아벨리 평전>은 비평가들로부터 마키아벨리에 관한 최고의 전기라는 평을 받아 왔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무엇보다도 사실적 측면에서 가장 정확하고 풍부하다는 것이다. 리돌피는 마키아벨리의 아버지 베르나르도가 남긴 '비망록'을 포함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모든 중요 기록들을 이용하는 행운을 누렸고, 또 이를 대단히 조심스럽게 다루었기 때문에, 마키아벨리의 행적과 저작을 둘러싼 각종 논쟁들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었다. 그의 전기 이후 새롭게 발견된 주요 문서는 거의 없다.

-둘째 이유는 그의 문학적 필치에 있다. 그는 마키아벨리의 복잡다단한 삶을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면서도 부드럽고 유연한 문체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서 그는 마키아벨 리가 ‘시인의 정신’을 가지고 있다고 평하였다. 정치라는 냉혹한 현실을 ‘과학적으로’ 관찰하면서도 동시에 언제나 그것을 예술가와 시인의 즉흥성과 이상 속에 녹여내는 묘한 성품의 소유자가 바로 마키아벨리라는 것이다. 이는 평전의 문학성이 곧 대상 인물의 해석과 긴밀히 얽혀 있다는 증좌이다. ‘검증 가능했던’ 사실은 어느 사이에 ‘공감적’ 해석 속에 융합되어 버린 것이다.

-대상에 대한 이러한 공감적 융합은 리돌피가 마키아벨리에 대해 품었던 애정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리돌피의 저작에서 문제가 될 소지가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만의 독특성을 부여해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나는 그의 평전이 사랑받는 보이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비평가들 중에서는 마키아벨리에 대한 리돌피의 애정이 전기 작가로서는 좀 과도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쓰고자 하는 인물이 ‘표본실의 청개구리’가 아닌 다음에야 그에 대한 인간적 애정 없이, 어떻게 그의 삶과 사상과 고뇌를 이해하고 공감하고 나아가서는 그것을 글로 재현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가 나에게 평전에서 대상 인물과 어느 정도로 거리를 두어야 하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그에게 인간적 애정, 적어도 인간적 공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평전을 쓰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대답하겠다. 이러한 애정과 공감이 사실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전제는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다. 평전은 사실들 간의 인과관계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요체는 너와 나 사이의 인간적 공감이다. 따라서 나는 사실과 해석 간의 균형의식도 산술적 중간이 아니라 공감적 융합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공감의 비평과 관련하여 떠오르는 이는 김현이다. '수정의 메아리'라고 그는 불렀던가?). 

06. 07. 05.

 

 

 

 

P.S.  평전은 올해도 수없이 출간되었다. 가장 최근에 나온 평전으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마리안느 레스쿠레의 <레비나스 평전>(살림, 2006). 올해가 레비나스 탄생 100주년을 맞는 해여서 뜻깊다(적당히 제쳐놓은 관심에 다시 불을 당기는군!). 그리고 마키아벨리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자 하는 또다른 평전으로 마이클 화이트의 <평전 마키아벨리>(이룸, 2006)도 올해 나온 책이다. 두 권의 루쉰(노신) 평전과 <민촌 이기영 평전>(심지, 2006)까지 더해도 평전의 트렌드는 다 따라잡을 수 없다. 참고로, 현재 가장 많이 팔린 평전은 여전히 <체 게바라 평전>(실천문학사, 2000)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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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라주미힌 > 18세의 이자벨 아자니...


이름 : 이자벨 아자니 (Isabelle Adjani)
본명 : Isabelle Yasmine Adjanian
출생 : 1955년 6월 27일
출생지 : 프랑스 파리
데뷔작 : 1976년 '재회'
수상경력 : 1988년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

★1972년 18살때 ★


 꺄~~~~~~~~~~~~~~~~~아아아아아아

 

★1988년 34살때 ★

★1992년 38살때 ★


★1993년 39살때 ★


★1994년 40살때 -..-★


★1996년 42살때 ★


★1997년 43살때 ★


★2000년 46살때 -..-★



 

 

★2002년 48살★


★2003년 49살 ★



★2004년 50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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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중국이라는 거짓말

신흥 경제대국 BRICs에서 꼬리에 매달려 있지만, 21세기 중반에는 세계최대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거라고 점쳐지기도 하는 나라가 이웃 중국이다. '눈부신' 압축 경제성장으로 국내외적으로 '중국 바람'을 일으킨 지 벌써 오래다(대학가의 경우는 전공 지원률이 이를 말해준다). "떼놈들이 오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 대한 개인적 관심은 그런 경제력과는 다소 무관하게 최근 중국에서 불고 있다는 '공자 열풍'에 힘입고 있다. 공자와 모택동의 나라, 그게 나의 상식을 구성하는 중국이다. 최근 이 '중국의 힘'에 대해서 신랄하게 비판/폄하하는 책 <중국이라는 거짓말>(문학세계사, 2006)이 출간되었는데, 저는 프랑스의 보수주의 지식인 기 소르망이다(내가 오래전에 읽었던 책은 <20세기를 움직인 사상가들>이다). 번역본의 출간에 맞춰 내한한 모양인데, 그의 인터뷰를 옮겨온다.   

경향신문(06. 07. 04) 기 소르망 “中, 공산당 있는 한 진보·변화 없어”

-“마오쩌둥 시대에 중국 공산당은 아기를 삶아 비료로 썼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실각한 이탈리아의 우파 성향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중국과의 관계악화를 무릅쓰면서 새삼스레 중국의 과거사를 들춰낸 것은 자국 내 총선에서 좌파를 견제하려다 뱉은 외교적 ‘실언’이다.

 

 

 



-프랑스의 자유주의 또는 신보수주의 성향 문화평론가 기 소르망(62)은 현재의 중국 공산당에 대해 확신을 갖고 비판하는 사람이다. 그는 4일 자신이 쓴 <중국이라는 거짓말>(문학세계사) 홍보차 방한한 자리에서 기자들과 만나 “서구가 가진 중국에 대한 이상한 ‘신비화’를 교정해주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했다(*이러한 교정의 대상이 어찌 중국뿐이랴! '미국이라는 거짓말' '일본이라는 거짓말', 그리고 '한국이라는 거짓말'...).

-서구에 비친 중국은 환상‘반만년 역사에 빛나는 문화대국’ ‘왕조국가의 전통을 이어받은 권위주의 정부’ 등 서구에 비친 중국의 모습이 잘못된 신비화라고 굳게 믿는 그는 지난해 초 작심하고 중국의 한 농촌마을에 들어가 꼬박 1년을 보냈다(*책상머리에서 잔머리 굴리는 지식인은 아닌 것이다). 반체제 성향 중국인들의 도움을 받아 농촌 사람들과 톈안먼 사태 희생자 유족 등의 애환을 들었다. 그리고는 ‘닭의 해:중국인들과 폭동’이라는 프랑스어판 원제목을 가진 책을 내놨다. 그 책이 프랑스에서 히트를 친 지 5개월도 안 돼 한국어판이 나온 것은 유독 한국에서 그가 ‘유럽의 지성’ ‘세계적 석학’으로 알려져 있는 풍토와 무관치 않다(*작가 베르베르처럼 소르망도 한국에서 '통하는' 지식인인 듯. 한국통?).

-“우리가 아는 중국은 공산당의 프로파간다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소르망이 기자회견 내내 강조한 말이다. 그는 현재 중국 내 인권상황이 ‘아기를 삶아 비료로 쓰는’ 마오쩌둥 시대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여전히 매우 비관적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중국 공산당의 권위주의 통치 때문이다. 그는 “중국 공산당은 어떤 변화나 개혁에도 반대한다”고 말했다. “기자와 종교인, 지식인들을 광범위하게 탄압하는 중국 공산당 체제 하에서 어떠한 진보와 변화도 있을 수 없다”고도 말했다.

-그는 중국의 경제성장에 대해서도 “놀라울 것이 없다”고 평가했다. “중국의 성장은 기적도 아니고, 창의성도 없다”는 것이다. 중국 경제성장의 토대가 저가 노동력을 이용한 저가 수출품에 기반한 것일 뿐 어떤 새로운 모델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중국 경제성장이 ‘열매가 비교적 고루 나눠진’ 한국 모델과도 대조적이라고 했다. 아울러 중국 경제의 미래에 대해서도 “부가가치성 산업으로 나아갈 어떠한 조짐도 안 보인다는 점에서 비관적”이라고 말했다.(*아래 사진은 상하이시 전경.)



-소르망은 중국 농촌의 빈곤문제 해결에 대해서도 비관적이다. 후진타오 주석이 농촌 발전에 힘쓰겠다고 한 최근 발표도 ‘구두선’이라고 일축했다. 그는 “사실 농민 출신이 거의 없고 도시에서 자란 기술관료가 대부분인 공산당은 농촌 발전으로 득볼 게 전혀 없다”면서 “게다가 농촌에 투자하게 되면 중국의 경제성장률이 둔화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공산당 입장에선 농촌 발전보다 농촌의 저가 노동력을 활용하는 데에만 주력할 것”이라고 말했다(*사실 중국이란 나라가 놀라운 것은 일부 지역의 비약적인 경제성장이 아니라 13억이 넘는 인구가 그냥 먹고산다는 거 아닌가? 식량난에 허덕이는 북한과 비교해 보더라도 이건 그 자체로 그냥 놀라운 일이다).

-그는 “이 모든 절망보다 더한 것은 자신의 책이 중국어로 출간됐지만 그 책을 공산당 간부들만 볼 뿐 일반 독자들은 전혀 접할 기회가 없다는 데 있다”고 했다. 미래 경제성장도 비관적그는 이번에 한국에 오기 전에 중국에 들렀을 정도로 중국 출입에 제약을 받고 있지 않다. 그는 “아마도 베이징 당국은 서구 지성인들이 2012년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 운동을 벌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느라 우리의 활동은 제약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소르망은 민주국가들이 중국 내 반체제 인사들을 지원해줘야 할지에 대해서는 매우 신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 내에 만연한 민족주의 성향 때문이다. 그는 “중국인들은 심지어 반체제 인사들도 외국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얘기하면 ‘내정간섭’으로 받아들인다”면서 “만약 베이징 올림픽 보이콧 운동을 벌이면 반체제 인사들도 공산당을 중심으로 더욱 단결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 5월 중국을 방문해 ‘민주주의’에 대해 강연한 것과 같이 미국 정부도, 한국 정부도 중국 공산당에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한국 정부도?! 소르망이 한국에 대해서는 별로 공부하지 않은 모양이다).

-한국인들에겐 그리 새롭게 다가오지 않는 이 책이 미국 국무부가 매년 발표하는 ‘중국인권보고서’와 차이점이 있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는 “미 인권보고서는 피상적이고 개별 사례에만 주목했지만 나는 인권을 탄압하는 것은 결국 시스템의 문제라고 봤다”고 대답했다. 미 정부가 중국 공산당을 대놓고 비판하지 못하지만 자신은 공산당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점을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 북한 인권에 대해 물었다. “북한에 몇번 가보고 느낀 점은 중국의 식민지 같았어요. 북한의 인권상황은 중국의 60년대 인권상황과 흡사해 보여요.” 그의 다음 책 제목이 연상되는 대목이다.

06. 07. 05.

 

 

 

 

P.S. 현재의 중국과 그 장래에 대해서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는 책들도 드물진 않다. <중국은 가짜다>나 <중국의 몰락> 같은 책들이 그런 종류이다(기억에 중국인 자신들의 비판서들도 출간된 적이 있다). 보다 균형잡힌 시각을 얻기 위해서는 조너선 스펜스의 <현대 중국을 찾아서1.2>(이산, 1998) 정도는 교양으로 읽어둬야겠다. 한비야의 <중국견문록>(푸른숲, 2001)나 정운영의 <중국경제산책>(생각의나무, 2001)은 가장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한국인의 시각으로 읽은 중국이다. 5년쯤 전이니 지금의 중국은 또 달라졌을지 모를 일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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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6-23 0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