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부르디외-디스탱숑-RDA-톰프슨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만큼 내가 많은 관심을 갖고 있으면서도 책읽기에서 별로 재미를 못 보고 있는 사회학자도 드물다. 이건 그의 책 대부분이 동문선에서 출간되고 있다는 사정과 무관하지만은 않다. 어지간하지 않은 책값에도 불구하고 읽어나갈 수 없는 책들과 몇 번 대면하다 보면 지레 의욕을 상실하기 마련이다. 그의 책 <실천이성>(동문선, 2005)의 경우도 '최근에 나온 책들'에서 한번 소개한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없는 책으로 치고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또 도서관에서 그 책을 집어들게 되었고(서점에서라면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이게 외국의 청중들을 상대로 한 강연문집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어쩌면 부르디외의 사회학에 대해서 그 자신이 가장 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는 '입문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자도 이 점에 있어서는 의견을 같이 하고 있었고: "부르디외가 설명하는 부르디외의 사회학 이론을 접한다는 것은 독자에게 행운이라 할 터이다. 그의 직접적인 목소리로 듣는 해설서로서 <실천이성>이 그의 독창적 학문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보탬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278쪽)
하지만, 나의 행운과 기대는 멀리 가지 못했다. 도서관에서 불어본과 영역본(어떤 이유에서인지 한 장의 번역이 누락돼 있다)까지 대출하여 만반의 준비를 하고서 제일 처음 읽은 것은 1장의 부록인 ''소련의' 변형과 정치적 자본'이었다. 국역본상으로 6쪽짜리의 글인데(불어본과 영역본은 5쪽), 내용에 들어가기 이전에 몇 가지 사항이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고 번역에 대해 의문을 갖게 했다.
일단 첫문장: "나는 여러분들 가운데 상당수가 <디스탱숑>을 깊이 있게 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32쪽) 부르디외를 읽어본 독자라면 이 <디스탱숑La Distinction>이 <구별짓기>를 가리킨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은 번역에 대한 불만들이 지적되기도 했지만 작년에 국역본 재판(새물결, 2005)까지 나온 바 있다(부르디외 전공자인 역자는 이 책의 제목을 '탁월화'라고 엉뚱하게 소개한 전력이 있다). 같은 책이 동문선에서는 아마도 새물결판과 구별짓기 위해서 <디스탱숑>이란 음역 제목으로 근간 목록에 올라놓고 있는데, 한국어판 판권이 과연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수 없다. 사정이 어떻든간에 우리말로 아무것도 전달해주지 않는 '디스탱숑'을 책의 제목으로 삼는 태도 자체가 불만스러웠는데, 막상 번역서에서 그런 제목을 읽으려니까 심사가 아주 디스탱숑해진다.
동베를린에서 강연한 강연문인 이 글에서 부르디외가 '여러분'이라고 호명하는 대상은 1989년 10월 25일 당시 동독인들이었다(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건 불과 며칠 후인 11월이었다). 그리고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구별짓기>의 모델이 프랑스 밖에서도 적용가능한가에 대한 '여러분들'의 의문에 대해 답하겠다는 것(국내에도 부르디외 사회학의 한국적 적용을 탐색하는 시도들이 있었다). "즉, 이 책에 제안되어 있는 모델은 프랑스의 특수한 사례를 넘어서 유효한 것인가? 그것은 독일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 적용된다면 그 조건들은 무엇인가?"를 부르디외는 따져보고자 한다.
이때 인용문에서 "독일의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는가"는 주의를 요한다. 부르디외의 발화시점에서 '통일 독일'은 아직 없었으며 그가 쓴 표현은 '동독'이기 때문이다. 불어로 동독은 RDA이며 영어로는 GDR(German Democratic Republic)이다. 사실 어차피 통일된 마당에 동독이나 독일이나 뭐가 대수이겠는가?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강연의 제목/주제와 맞물려 있다는 점이다. 역자가 '소련의 변형'이라고 옮긴 표현은 'La Variante 'Sovietique'(The 'Soviet' Variant)이며, 이건 ('미국형'이나 '자본주의형'에 대응하여) '소련형' 혹은 '소비에트형'으로서의 동독을 가리킨다. 오늘날의 독일을 '소련의 변형'이라고 간주할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RDA/GDR은 원래대로 '동독'이라고 옮겨야 하는 것이다(더불어 이 글의 제목은 '소비에트형 사회와 정치적 자본'이라고 옮기고 싶다).
RDA가 나오는 여러 대목들이 '독일'이라고 옮겨진 것까지는 그래도 참을 만했다. 그런데, 후반부에 가서 "확인의 명목으로 우리는 그렇게 획득된 사회적 공간의 모델이 오늘날 RDA가 현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갈등들을 최소한 대략적으로라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는지 자문할 수 있을 것이다."(36쪽)에서 'RDA'는 왜 튀어나오는 것인지(이 불어 약자는 GDR과 달리 단번에 검색되지도 않는다)? 역자의 부주의를 탓하기 이전에 우리가 스스로에게 자문해야 하는 문제일까?
그렇게 이맛살을 찌푸리게 되니까 곧 흠잡을 것 투성이가 된다. "그래서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구축 작업, 나아가 - <영국의 노동계급 만들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E. P. 톰프슨이 사용하는 의미에서 - 제조 작업을 대가로 해서만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사용하는 의미에서 동원된 작용적 계급들이 될 수 있다."(33쪽)
내가 아직 톰슨의 명저를 읽어보지 않아서 'mobilized and active classes'라고 영역된 문구를 '동원된 작용적 계급들'이라고 옮기는 것이 타당한지는 모르겠다(사정은 역자도 마찬가지겠지만). 하지만, 적어도 'Thompson'이 '톰프슨'이 아니라 '톰슨'으로 옮겨지며, 그의 주저는 <영국의 노동계급 만들기>가 아니라 <영국 노동계급의 형성>(창비, 2000)이라는 것 정도는 안다. 적어도 국역된 번역본이 있는 경우에(더구나 그게 무시할 만한 번역본이 아닌 이상) 이를 참조해줄 수는 없는 것일까? 그건 일반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서비스 아닐까?
부르디외가 강연문에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프랑스와 같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라면 경제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이 중요한 사회적 변수인 반면에 (동독과 같은) 소련형 체제에서는 '정치적 자본'이라는 게 중요하게 기능하며 (당연한 일이지만) 사회학적 분석에서 이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 이런 내용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암시받을 수 있고 상식에서 벗어나지도 않는다(내가 읽기에 부르디외의 사회학은 새로운 상식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기존의 상식을 확증하게 해준다). 하지만, 이 상식으로의 여로는 '디스탱숑'과 'RDA'와 '톰프슨' 등을 거쳐가야 하는 울퉁불퉁한 험로이다. 짧은 강연문에 대한 브리핑을 기획했다가 이런 식의 불평만을 늘어놓는 게 과연 나의 결벽 탓인지?..
06. 07.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