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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집을 찾아서 ㅣ 한젬마의 한반도 미술 창고 뒤지기 2
한젬마 지음 / 샘터사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언젠가 운보의 집에 다녀왔던 적이 있다. 미술관을 둘러보면서 김기창 화백의 그림들을 천천히 감상했었고, 운치 있는 분위기 속에서 고즈넉한 상념에 젖어들기도 했다. 고요한 시간이었고 운치 있는 여행이었다. 그런데 막상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내가 그곳에서 느낀 것은 한 화가의 삶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누군가를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어쩌면 그가 머물렀던 곳의 흔적을 찾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도 같다. 내가 그 날, 보았던 것은 어쩌면 한 화가가 남겨놓고 떠난 마지막 창조의 근원은 아니었을까. 돌아오고 나서 나는 평생 듣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했던 화가, 침묵의 세계 속에서도 작품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던 화가 김기창 화백을 떠올렸다. 그렇게 운보의 집은 내게 운치 있는 여행의 장소일 뿐만 아니라 한 화가의 삶, 그 화가가 남기고 간 풍경으로 기억되고 있다.
한젬마는 지금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이 땅에 스며있는 화가들의 흔적들을 찾아 떠난 기나긴 여정을 <화가의 집을 찾아서>라는 책으로 펴냈다. 모네의 집이나 고흐의 집에는 가고 싶어 하면서도 정작 이 땅의 화가들의 생가에는 관심조차 갖지 못했던 문화적 풍토에서 이러한 기획이 시도되었다는 점에서 반가움이 앞서는 책이다. 그녀의 글을 읽지 않더라도 이 책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힘든 과정이 있었을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경제 논리에 의해 예술은 늘 뒷전으로 밀려나고, 우리의 문화에 대한 지독한 무관심은 그 여정을 더 힘들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젬마는 온갖 시행착오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우리 미술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을 힘들게 완성해냈다. 그녀에게 먼저 찬사부터 보내고 싶은 이유는 누군가는 꼭 했어야 할 일을 해냈다는 것, 그리고 우리 미술에 대한 지독한 무관심에 대한 각성의 기회를 제공해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전국의 구석구석을 밟는 그녀의 여정은 여행의 길동무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따라갈 수도 있지만, 책을 읽을수록 그리고 생소한 화가와 마주칠수록 우리 미술에 대한 무지를 실감하는 여행이 될 수도 있다. 이 땅에서 태어나 이 땅에서 스러져간 수많은 예술가들에 관해 내가 얼마나 무관심했었는지를 느낄 때마다 뜨끔한 기분을 느껴야 했던 것도 사실이다. 화가의 생가가 제대로 보존되어 있지 않은 사실 앞에선 내 무관심이 그렇게 황폐하게 내버려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책에는 충청도, 경상도, 강원도를 중심으로 화가의 생가에서 미술관 그리고 화가의 자취가 조금이라도 남겨져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뛰어다닌 한젬마의 여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운보의 그림 속에 표현된 풍경들을 만날 수 있는 운보의 집에서는 “호탕하고 자신감 넘치는 한국의 자연과 정서를 담아낸 그의 작품 세계를” 느낄 수 있다. 한 사람만으로도 꽉 차는 방에 머물렀던 장욱진의 방에서는 작은 것을 사랑했던 화가를, 유영국이 즐겨 찾았다는 마을 앞 바닷가에서는 화가가 느꼈을 기다림의 깊이를, 부단한 자기 성찰 속에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작품 세계를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기도 한다. 그녀의 발끝이 닿는 곳에서 우리는 화가가 거쳐 갔던 사람들, 공간, 그리고 그 화가의 삶을 그려보게 된다. 그래서 이 책은 으레 화가나 작품 중심이기 싶던 미술서에서 벗어나, 화가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화가의 생가까지 답사함으로써 화가와 작품 이해에 있어 보다 깊이있고 생생한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의 글은 화가를 향한 여정 속에 자신의 작품 이야기와 화가들에 대한 개인적인 감상들을 곁들임으로 해서 자칫 지루해지기 쉬운 여행의 분위기를 그녀만의 발랄함과 깊이로 채워 넣었다.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화가이기에 먼저 떠나간 화가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진한 교감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교감을 바탕으로 한젬마는 자신의 작품들이 선배 화가들에게서 부단히 영향을 받은 결과물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 화가들이 남기고 간 작품들과 교감하고 끊임없이 영향을 받음으로써 새로운 작품을 탄생시키는 화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책을 읽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부수적인 산물이기도 할 것이다.
또한, 우리의 화가들이 남긴 흔적들을 좇으며 우리의 미술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그들이 남기고 간 작품들 속에서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것 또한 한젬마의 여정이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일 것이다. 문화란 바로 우리 삶의 모습을 담는 것이 아니던가. 그리고 지금 이 땅을 살고 있는 우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를 생각해보는 거울이 아니던가. 그런 점에서 한젬마의 여정은 지금 이 땅을 살고 있는 우리 삶의 자취를 더듬어보는 기행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미술의 뿌리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굳이 화가의 생가까지 찾아갈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히 화가들에 대한 관심을 부여하기 위한 동기로서만 이해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고흐가 마지막으로 묵었던 방에서 고흐의 삶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그래서 그의 그림에 표현되는 고독을 느낄 수 있거나 모네의 집에서 모네가 그토록 사랑했던 자연을 느낄 수 있다면, 또는 운보의 집에서 운보 김기창이 그의 그림 속에 담아내고자 한 한국의 자연과 정서를 발견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화가와의 만남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생가는 그 작가에 대한 보다 원론적이고 본질적인 사색의 시간을 제공한다.”고 한젬마가 말하는 것처럼, 화가가 머물렀던 집은 화가와 화가가 남긴 그림들에 대한 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공간이다. 화가의 집은 단순히 화가가 머물렀던 것 이상의 의미가 담겨 있다. 화가의 창조적 근원이기도 하고, 화가가 그림 속에 담고 싶었던 메시지였을 수도 있다. 우리가 집에서 우리의 삶을 표현하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의 삶을 우리의 집에 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화가의 생가를 찾는다는 것은 화가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화가에 대한 이해는 미술관에서 끝내기에 아쉬운 부분들이 너무도 많다. 미술관에서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했던 것을 이 책 속에서 찾았을 때, 때때로 흥분하기도 했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미처 알지 못했던 화가들을 만나고 화가들의 자취를 찾아가볼 수 있어서 편안하고도 흥미로운 여행이었지만, 책을 읽는 동안 씁쓸한 기분이 들 수밖에 없었던 건 우리 미술의 현주소를 자연스레 떠올려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고흐의 집이나 모네의 집에 가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우리 화가들의 흔적에 대해 궁금해 본 적이 얼마나 많을까. 외국의 유명한 화가들의 집이 관광명소가 된 것에 비해 우리의 현실은 얼마나 미약한가. 관광 명소로 개발하기에 앞서, 한젬마의 지적처럼, “수익적인 면보다는 왜 그러한 보존이 필요한지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장욱진 고택을 문화재로 등록시키기 위한 과정에서 단순히 자신들의 경제적 이익이 침해받는다는 이유로 반대한 주민들의 모습을 보면 그러한 이해가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함을 절실히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미술에 대한 관심일 것이다. 미술관 가는 것을 즐겨한다고 생각했음에도 이 책을 읽는 동안 생소한 화가들의 이름에 부끄러워지기도 했다. 서양미술사에만 관심을 두었던 내 편협한 취향 탓도 있다. 나의 가까운 곳에 우리 화가들의 흔적들이 있는데도 말이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지역에 어떤 화가들의 자취가 남겨져 있는지, 그리고 지금 어떤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는지에 대한 작은 관심에서부터 우리 미술이 자라날 수 있는 든든한 토대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반가운 기획이고 칭찬받아야 할 결과물이지만, 이 책에서 못내 아쉬웠던 것은 책의 내부적인 것이 아니라, 책의 외부적인 데 있었다. 그것은 이 책을 통해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부실한 위치에서 존재하고 있는 우리 미술에 대한 위기감이었다. 한국 미술의 대가들을 따라간 여정이었음에도 자료가 부족해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는 것 자체가 우리 미술이 얼마나 허술하게 자리하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일인 것이다. 다시 한편으로는 그러한 위기감을 제시해줄 수 있다는 것이 한젬마의 여정이 거둔 수확일수도 있겠다. 미술에 대해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서양미술에 치우쳐져 있는 현재의 문화적 여건에 대한 반성의 시각과 아울러 우리의 문화적 토양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점, 그리고 이러한 작은 관심에서부터 점차 우리가 외면하고 있었던 우리의 화가들에 대한 자료와 유적들이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고 보존될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이 거둔 수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을 통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미술과 우리의 화가들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러한 작은 관심 속에 우리 미술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한젬마의 힘들었던 여정이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