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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진 1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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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결말을 알고 있으면서도 읽게 되는 소설이 있다. 아니, 결말을 알고 있기에 읽어야만 하는 소설. 읽을 수밖에 없는 소설.

소설 속에서 리진은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낭독하고 나서 결국 눈물을 참지 못한다. 왜 우느냐는 질문을 받고서 그녀는 대답한다. 결말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내 마음도 그러했던 것 같다. 무언가에 마음을 뜨겁게 데인 것처럼 아팠다.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하던 리진의 목소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든 서사가 결말을 암시하듯, 슬프게 읽혔다. 그러면서도 그 슬픈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신경숙은 우연히 알게 된 역사 속의 인물, 프랑스 공사를 따라 조선을 떠난, 조선의 궁중 무희였던 여인에게 ‘리진’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프랑스 공사 콜랭이 한 눈에 빠져버릴 정도로 매혹적인 검은 눈, 붉은 입술, 그렇게 꽃과 같은 얼굴을 한 리진. 그녀가 춤을 추는 장면에선 숨죽여 읽어 내려가야 할 것만 같이 매혹적인 묘사가 인상적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같고, “금빛 모래의 흩어짐”같은 그녀의 몸짓. 눈을 감으면 나비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고 한, 그리고 한 떨기 아름다운 꽃 같은 춤추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보일 것만 같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서 머무르고 싶지만, 그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떠날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은 리진을 프랑스라는 낯선 곳으로 데려간다. 왕비의 얼굴도 강연의 대금소리도 그저 뿌옇게만 존재하는 낯선 공간에서 그녀의 외로움은 필연적이었다. 그녀는 낯선 나라, 자신을 그저 신기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세상 속에서 꿈을 꾸듯 방황한다. ‘소인’이 아니라 ‘나’로 살 수 있었지만, 활기차고 자유롭게 사는 사람들 속에서 그녀는 그저 외로운 이방인에 불과했다. 어느 때 가장 외로웠느냐는 왕비의 질문에 그녀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을 때 가장 외로웠다고 대답한다. 궁에서 길을 잃어버렸듯이, 파리에서도 길을 잃어버릴까봐 콜랭의 팔을 꼭 붙잡았던 그녀, 리진. 그녀가 우수에 찬 눈으로 콜랭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일까요.

시간이 날 때면 프랑스로 가 그녀의 흔적을 찾았다는 작가는 그녀가 정말 실존 인물일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정말 그녀는 존재했던 것일까. 정말 그녀는 누구였을까.

신경숙은 작가의 말에서 “리진이라는 여자를 복원시키는 일은 서로 완벽한 타자들이었던 존재들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서로의 삶 속에 끼어들고 어떻게 친밀감을 느끼고 어떻게 서로를 구경하며 종내는 어떻게 생을 다하는가를 재구성하는 일이기도 했다.”라고 말한다. 소설 <리진>속에는 엇갈릴 수밖에 없는 슬픈 관계들이 있다. 사랑하는 마음을 그 어떤 것과도 견줄 수 없지만, 그저 바라보는 일밖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고통스러운 이, 사랑하는 마음을 알면서도 그 마음을 알기에 떠날 수밖에 없는 이, 그러면서 부칠 수 없는 편지를 매일같이 쓰는 이, 영원할 것 같던, 어디든 함께할 거라고 맹세하던 사랑이 어느 순간 식어버리는 이가 있다. 그들이 서로 바라보고 서로에게 스며들고, 서로에게서 멀어지는 순간 한 사람의 삶이 꽃처럼 지고, 나비처럼 날아가 버린다. 그렇게 아스라이 스며드는 슬픔들.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나를 루브르에 데려가세요.”라고, “나를 노트르담 대성당에 데려가세요.”라고 끝없이 이어지는 장소를 대며, 애달프게 말하던 여인. 마치 한 마리 나비처럼, 꽃처럼, 바람처럼, 구름처럼 춤을 추던 매혹적인 여인, 떨리는 목소리로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낭독하던 여인, 사랑이 식어버린 남자에게 이미 많은 것을 받았다고 말하는 여인,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서 외로웠다고 말하는 여인, 리진.

백 여 년 전의 한 여인이, 과거 속에서 잊혀질 뻔 했던 여인이 ‘리진’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태어났다. 프랑스 공사의 부인이었던 조선의 궁중 무희,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인의 이야기는 소설의 매혹적인 모티프가 되어 우리 곁에 왔다. 한 여인의 삶에 허구로 덧붙여진 그 매혹적인 이미지들은 “먼지 같고 풀 같고 구름 같은” 삶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느끼는 과정에 관한 아픈 은유처럼 여겨진다.

나는 누구일까요. 이제, 백 여 년 전의 한 여인을 나는 이렇게 기억하게 될 것 같다. 뜨겁지만 고통스러운, 단 하나의 문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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