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뒤흔드는 소설
헤르만
라르스 소뷔에 크리스텐센 지음, 한경희 옮김 / 낭기열라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시간이 정말 모든 상처를 치유해줄까?”

책의 뒤표지에 적힌 말을 보고 나는 어쩌면 이미 알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나를 아프게 할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러면서도 읽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시간

한때 시간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거라고 믿었던 적이 있었다. 바보처럼. 그때의 나는 시간이 그저 빨리 빨리 흘러가기만을 바랐고, 어서 나이를 먹기를 바랐다. 그때의 나는 시간이 지나가면 괜찮아 질 거야, 라는 말을 주문처럼 외우고 다녔다. 정말 그때의 나는 시간이 모든 상처를 치유해줄 거라 믿었던 걸까.

잠들기 전, 생각에 잠기는 헤르만. 불을 켜놓았는데도, 매일 밤 헤르만에게 다가오는 생각들은 도무지 끊이질 않는다. “시간이 모든 상처를 치유한다는 게 사실일까?” “시간은 오는 걸까, 아니면 가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일까?” 헤르만의 이웃, 술병 아저씨에게는 키우는 거북이가 있는데 거북이의 이름은 ‘시간’이다. “시간이 해결하도록 놔두는 것 말고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엄마에게 헤르만은 말한다. “시간은 상추 잎이나 먹지 나한테는 아무 도움도 안 된다”고. 그랬다. 시간은 그저 헤르만의 머리카락을 앗아가기만 했다.

어느 날 문득 아이의 머리카락이 빠져버리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리는 만난다. 삶 속에 숨어 있던 어떤 차가운 진실을.

#당신을 따뜻하게 쓰다듬어 준 순간

책을 읽으며 이제 막 세상에 나온 조카가 생각났다. 아마도 헤르만이 모자로 감추기만 했던 자신의 치부를 처음으로 드러내 보이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따뜻했던 순간에 나는 처음으로 이 세상에 발을 디딘 연약한 한 아이를 떠올리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그 아이는 잠들기 전 보챌 때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곧 잠이 들었다.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을 그 아이도 느끼는 걸까. 새근새근 부드러운 숨소리를 내며 잠으로 빠져드는 아이를 바라보면서도 나는 끝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어졌다. 앞으로 이 아이에게 펼쳐질 삶이 언제나 이처럼 평온하기를 바라면서. 책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그 따뜻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아직은 연약하게만 보이는 한 아이에게 온기를 느끼게 해주고 싶었던 그 순간이. 그리고 그 순간 어쩌면 우리를 위로해주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소설의 구성은 가을, 겨울, 봄으로 되어 있다.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쓸쓸한 가을에서 하얀 눈이 고요히 세상을 뒤덮는 겨울, 그리고 따뜻한 빛이 부드럽게 온몸을 감싸는 봄.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헤르만은 받아들일 수 없었던 끔찍한 시간들에서 자신의 상처를 이제 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는 시간에까지 이른다. 가을에서 겨울이 되는 시간, 가장 고독해졌다가도 다시 겨울에서 봄이 되는 시간, 어쩌면 행복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번쯤 하게 되는 것처럼. 끝없이 침잠해 내려갈 것 같던, 겨울의 시간들을 뒤로 하고 그래도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 같은 따뜻한 봄빛이 내려앉을 때 그래도 우리는 다시 한 번 ‘시간’을 믿어 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따스한 손길 같은 ‘시간’ 의 힘을. 


#나의 H


루비의 책상에 새겨져 있는 H를 보고 헤르만은 상상하기 시작한다. 호콘 왕? 황태자 하랄? 당신의 H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제 헤르만을 떠올릴 것 같다. 그저 조용히 쓰다듬어 주고 싶은 아이, 그래서 내 생의 어떤 연약한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헤르만. 매번 꿈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이. 눈물이 나오는 것을 샴푸 때문이라고 핑계를 댈 줄 아는 아이. 할아버지의 마지막 길에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를 선물로 안겨주는 아이. 그리고 비참한 생에 유머로 저항할 수 있는 조숙한 아이, 헤르만.

그런 헤르만을 만나고 나면 어떤 시간들이 겹쳐져 온다. 그 많은 시간들이 나뭇잎처럼 우수수 떨어져 다가온다.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서기도 전에 이미 너무나 쓸쓸한 고독을 맛보아 버린 시간들. 이미 길들여져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끔찍하다고 여기는 어떤 순간들, 그리고 삶에 새겨진 짙은 고독을 알면서도 어떻게든 살아내야만 할 시간들. 머리카락이 떨어지듯, 그렇게 어느 날 문득 어떤 차가운 진실을 마주하게 된 시간들......

시간이 정말 모든 상처를 치유해줄까.
헤르만을 만나고 나서, 나는 그것이 다시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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