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페르 닐손 지음, 정지현 옮김 / 낭기열라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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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어쩌면,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니,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머릿속에서 수십 번은, 아니 수백 번은 더 재생되는 기억들. 삭제 버튼을 눌러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 이젠 하도 많이 틀어서 너덜너덜해졌을 법도 한데, 오히려 더 생생히 다가오는 기억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우리를 살아가게 하고, 또 어느 한 순간 우리를 살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소설 속 남자는 되감기 버튼을 통해 그 사랑의 기억 한가운데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제는 너덜너덜해져버렸을 그 필름들을 다시 돌이켜 보면서 마지막 영화를 감상한다. 영화의 내용은 사랑의 기쁨.


책을 펼쳐들면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의 주인공은 그, 그리고 그녀.(아니, 어쩌면 나와 당신)
작가는 영화적 구성을 통해 지나간 시간의 기억을 따라가도록 만든다. 서서히 화면이 밝아오면 조심스레 물건들을 하나씩 없애는 남자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버스표, 그림엽서, 독일어 문법책, 레몬밤 화분 같은 것들을. 우리는 호기심 많은 관객처럼, 그 물건들 속에 숨겨진 사연들을 조용히 뒤따라간다.

이 소설은 영화적 구성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넘나든다. 이제는 아픈 추억이 되어버린 사랑과 한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던 충만한 사랑이 교대로 서술된다. ‘현재’라는 프리즘을 통과하기에 과거의 사랑은 낭만적이고, ‘기억’을 통과해야 하기에 과거의 사랑은 눈물겹다. 그렇다. 이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이야기다. 소설은 때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버리기도 하니까. 특히나 사랑이 끝날 때마다 사랑의 흔적들을 없애기 분주했던 당신이라면, 소설을 읽기 전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평범한 소품들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은 그 속에 숨어 있는 사랑의 사연 때문이다. 사진과 편지들, 선물들을 모두 없애지 않고서 사랑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아까운 물건들을 없애지 않고서, 아무렇지 않게 그 사람과 ‘안녕’할 순 없는 걸까. 조심스레, 그리고 집요함마저 보이며 물건들을 처리하는 그의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 지나간 사랑의 흔적들을 추적해보고 싶어졌다. 사랑의 흔적들을 폐기시킴으로써 사랑의 시간마저도 지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때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자꾸만 그 남자의 모습 속에 내 모습이 겹쳐졌다.


남자는 아주 처량하게(!) 사랑의 흔적들을 하나씩 폐기시켜나간다. 버스표를 찢어서 버리거나 엽서를 불에 태워 없앤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 그녀와의 운명적인 사랑의 시작이 묘사된다. 그리고 아름다웠던 사랑의 순간들. 사랑의 기쁨으로 마음이 가득 찼던 어떤 순간들이 그려진다. 그리고 또 다시 그녀와의 기억이 남아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없애가는 남자의 모습. 이렇게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고, 아픔과 행복이 교차된다.


아주 사소한 것조차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최대한의 무게로 다가옴을 보여주는 이 남자, 심지어 침대 시트 때문에 울기도 한다. 그냥 평범한 침대 시트였을 뿐인데, 침대 시트가 어떤 시간 때문에 아주 특별한, 그러면서도 아주 골칫거리의 물건이 되어버린다. 그녀와의 사랑의 기억이 스며 있는 침대 시트를 어떻게 처리할까 심각하게 고민하는 남자. 결국 세탁의 수준에서 원만한 결정을 내리는 이 남자의 모습을 보며, 나는 울음 섞인 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이 소설의 영화적 장르(?)는 어쩌면 ‘사랑’이라는 비극적 코미디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침대 시트를 세탁기에 쑤셔 넣고 세제를 넉넉히 붓고는 ‘삶는 빨래’, ‘90도’에 다이얼을 맞추고 스위치를 켠다.

자.
기계가 물을 빨아들이고 윙윙거리며 작동하기 시작한다.
빨아라, 세탁기야, 빨아! 이 침대 시트 위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기억을 모두 빨아버려.
침대 시트도 기억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침대 시트의 기억을 빨아 없애버려, 라고 그는 생각한다. 아무것도 남지 않게 완전히 빨아버려.”

다소 비장함이 서려 있는 이 마지막 의식 속에서 미처 사랑이 이런 것인 줄 몰랐다는 사람처럼 눈물을 짓게 되는 것은 이 남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랑이 얼마나 눈부셨는지 알기 때문이다. 폐기되는 물건들 속에서 마지막 찬란한 빛을 띠며 사라져가는 사랑의 기억들. 그 눈부셨던 사랑의 기억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안 울 거야, 이렇게 유치한 장면에서 우는 건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찬란했던 사랑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이러한 장면에선 꼭 눈물이 나오고야 만다. 그래서 이 작가는 똑똑하다.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첫사랑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 지 꿰뚫어보고 있는 이 사람. 그 사랑의 기억을 폐기시키는 작업 또한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를 알고 있는 이 사람. 시시하지만 눈물겹고, 유치하지만 가슴 아픈 영화처럼 ‘첫사랑’에 관한 애틋한 연서를 우리에게 건넨다.


“빛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야

매일 밤 사랑 위로 달빛이 비추어 내리길
때로는 이런 기분이 들어
오로지 우리의 존재, 우리의 느낌만이 진짜인 것 같다고”

소설 속에 인용되어 있는 ‘빨간 머리’라는 노래의 구절 같은, 그런 시간이었을 것이다. 빛 속

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살았던 시간. 환한 햇살이 언제든 비추고 있었던 그런 시간. 사랑의 기쁨으로 가득 찼던 시간들. 그러나 이제 그 시간들이 ‘과거’가 되어, 가슴 아픈 ‘기억’이 될 수밖에 없다. 소설은 그렇게 사랑이 과거가 되는 과정을, 가슴 아픈 기억으로 스며드는 과정을 천천히 비춘다. 작가는 그저 한 소년, 어린애에 불과했던 아이가 사랑으로 들뜨고 사랑으로 행복해하고, 그리고 사랑으로 무너지고 사랑으로 아파하는 시간들을 한 편의 영화처럼 애틋하게 그려냈다.

사랑에 관련된 기억은 한 편의 영화처럼 생생하고, 또 영화처럼 흐릿하다. 생생하지 말아야 할 부분에서 생생하고, 흐릿하지 말아야 할 부분에서 흐릿하다. 몇 번을 돌려보고, 또 돌려볼 수밖에 없는 영화. 사랑의 기억들은 그런 영화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영화적 구성은 효과적으로 여겨진다. 흐릿해져가는 사랑의 시간이 선명하게 재생되는 순간, 우리 삶은 한 편의 영화가 되고, 소설 속 이야기는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책을 펼쳐든 순간, 당신의 첫사랑은 더 이상 과거의 낡은 필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영화가 시작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영화 속에서 당신은 이미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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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북 - 젊은 독서가의 초상
마이클 더다 지음, 이종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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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좋아하는 책을 구하기 위해 헌책방을 순례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이라면 그리고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을 사서 떨리는 마음으로 첫 장을 펼쳐들 때의 기분을 좋아하는 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에 책이 얼마나 행복한 순간들을 선사하는지를. 마이클 더다의 <오픈북>은 그런 행복한 순간들을 떠올리게 한다.

책이 자신의 성격을 어떻게 형성했는지를 돌이켜보고 싶었다는 저자는 유년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자신의 삶 속에 녹아들어 있는 책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많은 책들이 나오지만, 책들의 내용은 일부러 서너 줄을 넘기지 않도록 애썼다고 하는 저자의 말에도 알 수 있듯, 이 책은 유년 시절부터 대학시절까지 일어났던 책과 관련한 삶의 에피소드들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화책에 빠져들었던 유년 시절, 도스토옙스키와 카네기, 셰익스피어를 만났던 중학 시절, 공산당 선언에서 음란 서적까지 섭렵했던 고교 시절, 시의 매력에 빠져들었던 대학 시절에 이르기까지.

어머니의 부드러운 품속에 파고들어 편안하게 책을 읽고 아버지를 따라 도서관에 가면서 자연스럽게 책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던 시간들, 거의 활자 중독에 가까웠던 어린 시절의 풍경들, 휘트먼의 시를 떠올리는 가출 소년의 모습까지 흥미로운 책벌레의 삶을 읽으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의 추억들이 겹쳐진다. 다음 사건이 궁금해서 밤이 새도록 책장을 넘겼던 기억이나 해질 무렵까지 학교 도서관을 빙빙 둘러보던 기억 같은 것들 말이다.

그렇게 이 책에는 책읽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공감할만한 감미로운 순간들이 등장한다. 책을 펴들면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서, 밥 먹으러 오라고 불러도 ‘이 장만, 이 장만’하면서 한없이 페이지를 넘기는 시간이나 헌책방을 뒤적이며 이 곳이 바로 나의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혹은 비오는 날 안락의자에 앉아 따뜻한 이불을 덮고서 추리소설을 읽어 내려가는 시간 같은. 이 책을 읽으며 살포시 떠오르는 웃음을 어찌할 수 없었던 것은 그런 행복한 순간들에 대한 묘사 때문이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서평가이자, 서평기사로 퓰리처상까지 받은 마이클 더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그의 다채로운 독서 이력을 읽으면서 완전히는 아니겠지만, ‘마이클 더다’라는 사람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말하는 대로 어떻게 해서 “역마살이 끼었고, 독립적이며, 멜로드라마의 성향이 강하고, 낭만적이면서도 내성적인 성격”의 마이클 더다가 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 이 책은 중요한 힌트들을 제공해주는 건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회고를 통해 책이 어떻게 한 사람의 성격을 형성시키고, 삶에 녹아드는지를 추측해볼 수 있다.

어린 시절 읽었던 그 무수한 책들을 기억하고 있는 저자의 기억력에 놀라기도 했고, 고교 시절 읽었던 책들의 목록을 보고는 감탄이 절로 나오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내가 읽었던 도서 목록은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지는지) 책의 향기를 아이에게도 전해주고 싶다면 이 책은 유용한 힌트를 제공해줄 수도 있을 것이고, 또 잊고 있었던 책에 관한 추억들만으로도 마음 넉넉해지는 경험을 하게 했을 것이다. 

“나의 스토리란 결국 책과 독서에 관한 것”이라고 확신하는 저자처럼 나도 책들로 이루어진 나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나의 성격을 이루고 있는 것 또한 내가 읽어온 책들이 대부분을 차지할 테니까. 내가 읽어왔고, 그리고 지금 읽고 있는 책들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이루어나가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고 나서, 누군가의 집에 가면 제일 먼저 책장의 책들을 유심히 바라보게 되는 것도, 그리고 처음으로 누군가를 만나게 되었을 때 책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는 것도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어쩌면 이제 나는 누군가를 만나서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불쑥 이런 질문부터 던질지도 모르겠다.

“당신을 이루고 있는 책들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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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자무시 - 인디영화의 대명사, 짐 자무시 인터뷰집 마음산책 영화감독 인터뷰집
루드비그 헤르츠베리 엮음, 오세인 옮김 / 마음산책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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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광고와 예고편이 끝난 후, 영화가 시작되기 전 불이 꺼지는 그 순간을 좋아한다. 그 짧은 순간의 어둠. 그 긴장되면서도 편안한 순간 때문에 영화관에 가기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일상에서 벗어나 영화 속으로 빠져들 준비를 하는 그 짧은 순간의 고요. 짐 자무시의 인터뷰집을 읽으면서 그 순간들을 떠올렸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의 캄캄한 순간. 고요한 정적의 순간. 그 나른하면서도 편안한 순간의 느낌은 그의 영화들을 닮았다.

삶의 순간들에 관해 무채색빛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짐 자무시. 그의 인터뷰집은 그의 영화만큼이나 강렬한 순간들의 모음 같다. (인터뷰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 인터뷰집을 읽게 된 건 순전히 브로큰 플라워 DVD에 수록되어 있었던 감독 인터뷰 때문인데, 좀 더 흥미진진한 그의 이야기들이 더 남아 있을 거라는 나의 예감은 들어맞은 셈이다. 자신을 겉으로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사람이 자신이 품고 있던 이야기들을 들려줄 때 더 귀를 기울여 듣게 되는 것처럼, 영화의 바깥에서도 만나고 싶었던 그이기에, 그의 이야기들을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천천히 읽었다. 그의 영화에 숨어 있는 고요한 언어들을 이해하고 싶은 욕심으로. 기대했던 대로, 밑줄 긋고 싶은 부분이 넘쳐날 정도로 천천히 읽고 싶은 이야기들이 참 많다.

“전 어떤 것들 사이의 순간에 더 관심이 있어요. 택시 안에 있는 사람보다는 택시를 기다리는 사람이 더 흥미롭죠. 저는 늘 작고 평범한 것들에 더 관심이 있어요.”

 

누군가를 기다리고,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순간들. 소소한 대화를 나누는 순간들, 그리고 대화 중 이야기가 끊어진 그 짧은 순간, 침묵의 순간들, 누군가의 대답을 기다리고 무슨 말을 할 지 생각하는 순간들. 그러한 삶과 삶의 순간들에 관해 관심이 많다고 하는 짐 자무시. 영화 속에선 쉽게 삭제되고 편집되지만 우리 일상에서는 변함없이 계속되는 그러한 순간들. 그래서 자신의 영화들은 삭제되는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는 그.(그의 영화를 보면서 지루한 우리의 일상과 마주하는 느낌이 들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을까.)

건조하고 나른하면서도 보고 난 후, 무언가 알 수 없는 마음의 울림을 남겼던 그의 영화처럼, 그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의미 있는 대사처럼 들렸다. 많은 것을 말하지 않지만 더 많은 말을 담고 있는 대사처럼, 그의 이야기들은 삶과 영화에 관한 나른하면서도 매력적인 사유의 단편들 같다. 이 감독의 매력에 더욱 반하게 되는 건 다음과 같은 말들 덕분이다.

“단지 자신의 신념을 지키면서 “웃기지 마쇼. 난 못해. 관두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많지 않다는 거죠. 그게 바로 저의 태도인데, 거만하다고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거예요. 하지만 사실이에요. 전 관두는 쪽을 택하죠. 인생은 너무 짧거든요. 물론 계속 일을 하고 싶죠. 얼마나 길지 모르지만 평생토록 하고 싶어요. 그와 동시에, 제가 어떤 특정한 시스템 아래에서는 작업을 할 수 없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저는 제 작업을 하기 위해 저만의 시스템을 만들어야 하죠. 잘 진행되기를 바라고요. 만일 프로듀서가 저에게 “이러 이러한 스타 배우를 이번 영화에 꼭 출연시켜야 해. 무난하게 얀 해머의 음악을 써야 해. 촬영이 끝나면 우리가 편집을 할 테니 자넨 그저 어디 여행이나 다녀오게. 걱정할 거 없어”라고 말한다면 전 아마도 누군가를 총으로 쏴서 철창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 거예요.”

 

자신의 신념대로 영화를 만들기를 원하는 감독, 짐 자무시. 이 배짱 두둑한 감독의 신념을 마주할 때 약간의 감동마저 느끼게 된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어쩐지 그가 더 마음에 든다. 거창한 서사보다 아주 작은 것들에 더 관심이 많은 이 사람. 그래서 자신을 “그저 소소한 시를 쓰는 마이너 시인”으로 생각한다는 그. 심지어 인터뷰 후, 자신이 들려준 이야기가 마음에 걸려 다시 전화를 걸어 빼달라고 말하는 소심함(?)마저도 마음에 들었다. 돌아보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자신의 영화를 완성하고 나서 다시는 보지 않는다는 짐 자무시. 그의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외로움과 우울함을 이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언어의 문제들이 이 행성을 그토록 아름답고 낯설게” 만든다고 말하는 이 감독의 다음 작품에선 또 어떤 고요하고 아름다운 언어들이 숨겨져 있을까. 단순하고 작은 것들이지만 아름답고 깊은 울림을 가져다주는 이야기들, 소소한 일상이지만 묵직한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들, 바로 우리 삶의 순간들에 관한 그의 영화가 더욱 더 기대되는 건 순전히 이 책 덕분이다. 너무 황량해서, 너무 외롭고 우울해서, 너무 나른하고 건조해보여서 때로는 낯설게 느껴졌던 그의 영화들이 이제 더 이상 낯설지 않을 것 같다.


(그런데, 도대체 왜, 원서에 있는 2편의 인터뷰를 빼버린 것일까?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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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8-03-20 0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브로큰 플라워가 이분 영화가.. 맞지요? 이 책을 읽으면 드디어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거? -_-

ALINE 2008-03-24 23:42   좋아요 0 | URL
아쉽게도, 브로큰 플라워에 관한 인터뷰는 실려 있지 않아요.^^;
책이 나오고 난 후 영화가 개봉했다고, 적혀 있네요.
브로큰 플라워에 관해서는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의 현란한(?) 영화평이 실려 있답니다.^^
 
영혼의 시선 -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 에세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지음, 권오룡 옮김 / 열화당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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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순간이 있다. 한 번 지나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순간.

지나간 사진들을 뒤적이다 보면 그런 순간과 만날 때가 있다. 이제 한 장의 사진 속에서만 존재하는 그 순간들. 충만한 삶의 한 순간. 죽어버린 시간 속에서 생생한 삶의 한 페이지를 만나게 되는 순간.

여기, 결정적 순간을 담아내는 사진가가 있다. 한 순간의 충만함을 ‘카메라’라는 스케치북으로 그려내는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그의 이름은 ‘결정적 순간’이라는 단어로 기억된다. “카르티에- 브레송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은 셔터를 누르기 전후의 사이에 자리잡고 있었다.”고 한 피터 갤러시의 말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그에게 사진을 찍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일. 카메라는 스케치북이 되고, 그의 눈은 “관찰하고, 관찰하고, 또 관찰한다.” 회화에 대한 그의 열정은 사진 작업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나에게 사진은 순간과 순간의 영원성을 포착하는, 늘 세심한 눈으로부터 오는 자연스러운 충동이다. 드로잉은 우리의 의식이 순간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섬세한 필적으로 구현해낸다.
사진은, 성찰을 드로잉하는 순간적인 행위이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p.41

 

그가 순간을 담아내는 방식은 조심스럽고, 신중하다. “사진가들에게는 한 번 사라진 것은 영원히 사라진 것”이기에. “머리와 눈 그리고 마음을 동일한 조준선 위에” 놓고, “달아나는 현실 앞에서 모든 능력을 집중해 그 숨결을 포착”해내는 순간, 그의 카메라는 아름다움을 기록한다. 스쳐 지나갈 뻔 했던 찰나의 아름다움이 영원이 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그 자신도 포함되어 있다. 그렇게 카메라는 그에게 스케치북이 되고, “직관과 자생(自生)의 도구”가 되며 “시각의 견지에서 묻고 동시에 결정하는 순간의 스승”이 된다.

이 짧으면서도 매력적인 그의 사진에 관한 단상들을 읽노라면, 그에게 사진은 무엇보다도 삶을 고민하고 삶을 살아가게 하는 하나의 방식이었던 것 같다. 순간을 향한 우리의 열망은 삶을 향한 진지한 물음들과 닮은 면이 있다. 그에게 카메라는 “물음에 답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물음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듯이.


알베르토 자코메티, 에른스트 하스, 로베르 드와노, 로버트 카파, 앙드레 브르통, 장 르누아르 등 사진가들과 친구들에 대해 적은 간략한 글들 속에는 그가 사진으로 담아낸 순간들만큼이나 매혹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 삶과 사람을 바라보는 그 농밀한 시선들. 서문에서 제라르 마세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의 글은 늘 간결한 예술작품, 거의 언제나 정곡을 찌르는 문장 감각 덕분에 성공을 거두는 즉흥곡”이다. 간결하지만 그 속에 결정적 순간이 들어 있기에 그의 글은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의 사진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우정은 시간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제 우리는 연민으로 가득 찬 그의 웃음도, 익살과 깊이를 지닌 그의 촌철살인의 응답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결코 두 번 말하지 않으면서도 매번 우리에게 주는 경이로움. 하지만 그의 깊은 친절, 모든 존재와 소박한 삶에 대한 사랑은 그의 작품 속에서 영원할 것이다.”
로베르 드와노에 관해.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p.82

 

브레송의 사진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 그 모든 이들에게 그의 유일한 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은 “순간의 충만한 의미를 포착”해내기 위해 삶에 끊임없이 몰두했던 한 거장의 깊이 있는 사색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는 “마치 현장범을 체포하는 것처럼 길에서 생생한 사진들을 찍기 위해 바짝 긴장한 채로 하루 종일 걸어 다니곤 했던” 한 사진가의 모습을, 컴컴한 작업실이 아니라 삶이 활기차게 생동하는 거리를 자신의 작업실로 만들었던 거장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이 짧지만 매혹적인 글들을 통해 그가 남긴 사진들을, 그의 삶을 추억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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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된 건축, 건축이 된 그림 2 - 모던의 유혹, 탐색의 시대
김홍기 지음 / 아트북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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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종류의 드나듦은 매혹적이다. 그림이 된 건축. 그리고 건축이 된 그림.

서로 다른 빛깔의 예술적 교감이 만나는 곳을 추적하는 일엔 늘 설렘이 뒤따른다. 이 책을 펼쳐들기 전 마음이 들떴던 것도 그 때문인 것 같다.

이 책은 다양한 예술 장르들을 통해 격동의 시기, 19세기를 보여준다. 책에서 논의되고 있는 예술 장르는 회화와 건축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이야기의 주축이 되는 것은 미술과 건축이지만, 음악과 문학, 영화까지 자연스레 녹아 있어서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이야기는 두 권의 책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첫 번째 책이 고대 그리스 건축에서 시작되었다면 두 번째 책은 눈부신 기술의 발전이 구현되는 19세기의 공간에서 시작된다.

저자는 모네가 그린 생라자르역, 증기기관차가 그려진 터너의 그림을 통해 ‘속도미학’을 이야기하며 생라자르역을 배경으로 쓴 에밀 졸라의 소설, 영화 <남과 여>에서 이별의 장소로서 등장한 생라자르역까지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이야기의 주제가 철 건축의 등장으로 인한 건축 방식의 변화, “근대성의 상징”으로서의 철도역사라고 한다면 그 속에 철도를 소재로 삼은 다양한 그림들과 소설, 영화까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상징이 된 에펠탑. 그 속에 숨어 있는 비밀스런 역사를 엿보는 일도 꽤 흥미로웠다. 철로 대변되는 19세기의 공학의 발전이 있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에펠탑은 1000피트로 상징되는 “인류 문명의 한계에 도전하는 대단한 기획”이었지만 “거대한 야만적 구조물”이라 하여 예술가들의 만만찮은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다. 에펠탑에 영감을 얻어 ‘그노시엔’을 작곡한 에릭 사티, “파리에서 유일하게 탑이 보이지 않는 곳”이라서 에펠탑에서 식사를 하곤 했던 모파상, 그리고 화가들의 관심 대상에서 벗어났던 에펠탑이지만 51점이나 에펠탑을 그린 들로네의 이야기까지 철거의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파리를 지키고 있는 에펠탑에 숨겨진 이야기들은 다양한 예술적 장르들을 거치며 흥미를 더한다.

이외에도 여러 예술가들을 따라 다양한 문화 탐험을 하듯 읽을 수 있다. 모네를 따라 생라자르역을, 터너와 영국 의회의사당을, 드가와 파리 오페라하우스를, 들로네와 에펠탑을, 그리고 워커 에번스와 브루클린 브리지까지 다양한 공간들을 여러 가지 빛깔의 예술적 시선에서 둘러볼 수 있다.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회화와 건축이 지닌 고유한 특질, “소진된 역사의 기억을 진실의 눈으로 끊임없이 환기시키는 능력” 때문일까. 기억을 환기시키는 그 강렬한 힘 덕분에 19세기로 떠난 여행은 충분히 즐거울 수 있다. 시각성이 두드러지는 두 가지의 장르, 건축과 미술을 주인공으로 선정하여 지나간 세기를 돌아보는 것은 근사한 방법임에 분명한 것 같다.

서문에는 “건축은 말하는 텍스트”라는, 18세기 프랑스 건축가들의 말이 인용되어 있는데 이것은 미술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회화와 건축물 사이를 넘나드는 작업은 그래서 흥미로울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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