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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
페르 닐손 지음, 정지현 옮김 / 낭기열라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첫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어쩌면, 헤어짐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니, 기억에 관한 이야기다.
머릿속에서 수십 번은, 아니 수백 번은 더 재생되는 기억들. 삭제 버튼을 눌러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 이젠 하도 많이 틀어서 너덜너덜해졌을 법도 한데, 오히려 더 생생히 다가오는 기억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어쩌면 ‘사랑’에 관한 이야기일지도.
우리를 살아가게 하고, 또 어느 한 순간 우리를 살지 못하게 만들어버리는.
소설 속 남자는 되감기 버튼을 통해 그 사랑의 기억 한가운데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제는 너덜너덜해져버렸을 그 필름들을 다시 돌이켜 보면서 마지막 영화를 감상한다. 영화의 내용은 사랑의 기쁨.
책을 펼쳐들면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의 주인공은 그, 그리고 그녀.(아니, 어쩌면 나와 당신)
작가는 영화적 구성을 통해 지나간 시간의 기억을 따라가도록 만든다. 서서히 화면이 밝아오면 조심스레 물건들을 하나씩 없애는 남자의 모습이 보일 것이다. 버스표, 그림엽서, 독일어 문법책, 레몬밤 화분 같은 것들을. 우리는 호기심 많은 관객처럼, 그 물건들 속에 숨겨진 사연들을 조용히 뒤따라간다.
이 소설은 영화적 구성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넘나든다. 이제는 아픈 추억이 되어버린 사랑과 한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었던 충만한 사랑이 교대로 서술된다. ‘현재’라는 프리즘을 통과하기에 과거의 사랑은 낭만적이고, ‘기억’을 통과해야 하기에 과거의 사랑은 눈물겹다. 그렇다. 이건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이야기다. 소설은 때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버리기도 하니까. 특히나 사랑이 끝날 때마다 사랑의 흔적들을 없애기 분주했던 당신이라면, 소설을 읽기 전 조금은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평범한 소품들이 아주 중요한 의미를 띠는 것은 그 속에 숨어 있는 사랑의 사연 때문이다. 사진과 편지들, 선물들을 모두 없애지 않고서 사랑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왜일까. 아까운 물건들을 없애지 않고서, 아무렇지 않게 그 사람과 ‘안녕’할 순 없는 걸까. 조심스레, 그리고 집요함마저 보이며 물건들을 처리하는 그의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나는 내 지나간 사랑의 흔적들을 추적해보고 싶어졌다. 사랑의 흔적들을 폐기시킴으로써 사랑의 시간마저도 지워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그 때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자꾸만 그 남자의 모습 속에 내 모습이 겹쳐졌다.
남자는 아주 처량하게(!) 사랑의 흔적들을 하나씩 폐기시켜나간다. 버스표를 찢어서 버리거나 엽서를 불에 태워 없앤다. 그리고 그 사이, 사이 그녀와의 운명적인 사랑의 시작이 묘사된다. 그리고 아름다웠던 사랑의 순간들. 사랑의 기쁨으로 마음이 가득 찼던 어떤 순간들이 그려진다. 그리고 또 다시 그녀와의 기억이 남아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없애가는 남자의 모습. 이렇게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들고, 아픔과 행복이 교차된다.
아주 사소한 것조차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최대한의 무게로 다가옴을 보여주는 이 남자, 심지어 침대 시트 때문에 울기도 한다. 그냥 평범한 침대 시트였을 뿐인데, 침대 시트가 어떤 시간 때문에 아주 특별한, 그러면서도 아주 골칫거리의 물건이 되어버린다. 그녀와의 사랑의 기억이 스며 있는 침대 시트를 어떻게 처리할까 심각하게 고민하는 남자. 결국 세탁의 수준에서 원만한 결정을 내리는 이 남자의 모습을 보며, 나는 울음 섞인 웃음이 나오는 걸 간신히 참아야 했다. 이 소설의 영화적 장르(?)는 어쩌면 ‘사랑’이라는 비극적 코미디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침대 시트를 세탁기에 쑤셔 넣고 세제를 넉넉히 붓고는 ‘삶는 빨래’, ‘90도’에 다이얼을 맞추고 스위치를 켠다.
자.
기계가 물을 빨아들이고 윙윙거리며 작동하기 시작한다.
빨아라, 세탁기야, 빨아! 이 침대 시트 위에서 벌어졌던 일에 대한 기억을 모두 빨아버려.
침대 시트도 기억을 가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침대 시트의 기억을 빨아 없애버려, 라고 그는 생각한다. 아무것도 남지 않게 완전히 빨아버려.”
다소 비장함이 서려 있는 이 마지막 의식 속에서 미처 사랑이 이런 것인 줄 몰랐다는 사람처럼 눈물을 짓게 되는 것은 이 남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랑이 얼마나 눈부셨는지 알기 때문이다. 폐기되는 물건들 속에서 마지막 찬란한 빛을 띠며 사라져가는 사랑의 기억들. 그 눈부셨던 사랑의 기억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레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난 안 울 거야, 이렇게 유치한 장면에서 우는 건 웃기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찬란했던 사랑의 기억을 상기시키는 이러한 장면에선 꼭 눈물이 나오고야 만다. 그래서 이 작가는 똑똑하다.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첫사랑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 지 꿰뚫어보고 있는 이 사람. 그 사랑의 기억을 폐기시키는 작업 또한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를 알고 있는 이 사람. 시시하지만 눈물겹고, 유치하지만 가슴 아픈 영화처럼 ‘첫사랑’에 관한 애틋한 연서를 우리에게 건넨다.
“빛 속을 걷는 듯한 기분이야
매일 밤 사랑 위로 달빛이 비추어 내리길
때로는 이런 기분이 들어
오로지 우리의 존재, 우리의 느낌만이 진짜인 것 같다고”
소설 속에 인용되어 있는 ‘빨간 머리’라는 노래의 구절 같은, 그런 시간이었을 것이다. 빛 속
을 걷는 듯한 기분으로 살았던 시간. 환한 햇살이 언제든 비추고 있었던 그런 시간. 사랑의 기쁨으로 가득 찼던 시간들. 그러나 이제 그 시간들이 ‘과거’가 되어, 가슴 아픈 ‘기억’이 될 수밖에 없다. 소설은 그렇게 사랑이 과거가 되는 과정을, 가슴 아픈 기억으로 스며드는 과정을 천천히 비춘다. 작가는 그저 한 소년, 어린애에 불과했던 아이가 사랑으로 들뜨고 사랑으로 행복해하고, 그리고 사랑으로 무너지고 사랑으로 아파하는 시간들을 한 편의 영화처럼 애틋하게 그려냈다.
사랑에 관련된 기억은 한 편의 영화처럼 생생하고, 또 영화처럼 흐릿하다. 생생하지 말아야 할 부분에서 생생하고, 흐릿하지 말아야 할 부분에서 흐릿하다. 몇 번을 돌려보고, 또 돌려볼 수밖에 없는 영화. 사랑의 기억들은 그런 영화 같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영화적 구성은 효과적으로 여겨진다. 흐릿해져가는 사랑의 시간이 선명하게 재생되는 순간, 우리 삶은 한 편의 영화가 되고, 소설 속 이야기는 바로 나 자신의 이야기가 된다.
책을 펼쳐든 순간, 당신의 첫사랑은 더 이상 과거의 낡은 필름 속에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영화가 시작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영화 속에서 당신은 이미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