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쇼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이십대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가
     장  아름다운 자들이 가장 불행하다는 역설. 그들은 비극을 
     살면서도  희극인 줄 알고 희극을 연기하면서도 비극이라고 
     믿는다.  굳이 말하자면 이 소설은 컴퓨터 네트워크 시대의 
     성장담이고  연애소설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십대에 PC통
     신을 경험했고, 거기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어쩌면 나
     는 익명의 인간과 인간이 실시간으로 대화하며 친구와 연인
     으로  발전해갈  수 있음을 알게 된 첫 세대일지도 모른다. 
     온라인은  언제나 부당하게 폄하돼 왔다. 그것은 일회성의, 
     익명의, 무책임한 그리고 심지어는 부도덕한 공간으로 치부
     되었다.  뭐,  전혀 터무니 없는 얘기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나를  비롯한 새로운 세대는 바로 그 '쓰레기' 위에서 자라
     났다.  우리는 거기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연애를 하고 
     논쟁을 벌였다. 
     
     - 김영하, <퀴즈쇼> 작가의 말 중에서
     
     #. 
     
     때로는  소설 본문보다 서문이나 작가의 말이 훨씬 더 멋진 
     소설이  있다. 이를테면 최인훈의 <화두>는 본문이 아닌 서
     문이  수능 언어영역 문제집에 예문으로 나올 정도로, 본문
     보다 서문이 멋진 소설이다. (실제로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
     만  <화두>의 본문은 무척 지루하다) 김영하의 <퀴즈쇼>는? 
     본문도  멋지지만  '작가의 말'은 더더욱 멋지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 PC통신이라는 공간을 통해 전화선으로 소통하
     던  인간들. <접속>이라는 영화로 주목 받았으되, 연애라는 
     작은  틀 안에 갇혀버림으로써 정작 그 소통의 중요성은 폄
     하되어  왔던 그 공간이 키운 아이들... 뒷표지에 적혀있는 
     "그들의 20대에 바치는 소설"이라는 말을 읽었을 때부터 이
     미 나는 감동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 
     
     많은  아이들이 <접속> 이후로, 자연스럽게 '여자를 꼬시는 
     공간'이나 '작업을 걸 수 있는 공간'으로 사이버 월드를 받
     아들여  왔지만,  정작 그 시대를 관통해 왔던 사람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낯선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어려움
     을 겪고 내가 겉돌고 있을 때, 정작 나와 마음 통하는 이야
     기를 나눌 사람들은 파란색 채팅창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영화의 이야기를 하며, 때론 무라카미 
     하루키와  왕가위에 대해서 떠들고, 밤을 새우며 결국 서로
     에 대해 얼굴도 모르면서 나누었던 속 깊은 이야기들... 그
     러면서  언젠가는  저 아이와 커피숍에 앉아 얼굴을 맞대고 
     더 깊고 멋진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 꿈꾸던 환타지, 때
     론  밖에서 누군가에게 짜증나고 화가 나는 일을 당했을 때 
     전화비가 나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
     서 내 이야기를 들어 줄 그 아이를 기다렸던 시간들...
     
     내 남은 평생을 지배할 안타까운 첫사랑을 PC통신에서 만났
     고,  아직도 고맙고 미안한 사람으로 남아있는 첫번째 연인
     도  PC통신에서 만난 사람으로서, 느끼는 첫번째 감동은 김
     영하라는 작가가 얼마나 '그 시대의 우리들'에 대해서 정확
     히 알고 있는가, 에 대한 것이었다. 
     
     #. 
     
     김영하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미장센에 있어서 의외의 예리
     함을  갖춘 작가이다. 이를테면 비행청소년들을 그린 <비상
     구>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도로를 질주
     할  때 그들의 카스테레오에선 젝스키스의 <기사도>가 흘러
     나온다.  문단의 누구도, 그 어떤 평론가도 그 점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지만 김영하의 예리한 감각이 가장 빛나는 곳이 
     바로  그러한 지점이다. "폭주 뛸 때는 누가 뭐래도 젝스키
     스,  <로드파이터>는 너무 직접적이고(사실 소설 발표 당시 
     미발매곡), <폼생폼사>는 조금 가볍지, 역시 <기사도>가 가
     장 좋아!"라고 말할 수 있는 작가는 흔하지 않다. 젝스키스
     의  <기사도>  때문에 평가를 받는 작가는 흔치 않지만, 난 
     그 점 때문에 김영하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시대의 공기를 감각적으로 파악해 내는 작가"라
     고. 
     
     <퀴즈쇼>  역시 당시 시대의 공기와, 무엇보다 당시에 꿈꾸
     던 청춘들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묘사한 장면과 문장들로 가
     득하다. 무엇보다 이 책에 대해 한석주 군과 휴대폰 배터리
     가 닳도록 얘기를 나눌 때 지적한 것처럼(서른 하나 평생에 
     남자랑 통화하다 휴대폰 배터리가 나가본 건 처음이다) '벽 
     속의 요정'이란(물론 대화명이다) 인물 자체가 90년대에 파
     란 화면을 보며 PC통신으로 소통하던 세대의 가장 광범위한 
     판타지이다. 재치있는 말솜씨(정확히는 채팅솜씨)와 얕지만 
     광범위한  교양(퀴즈방으로 대변되는), 그리고 우리가 항상 
     채팅의  상대를  대상으로 꿈꾸어왔던 남의 눈에는 잘 띄지 
     않고,  일반인들은  알아보지 못하나 (유독) 우리의 눈에만 
     보이는 귀여움과 미모. 
     
     그리고 무엇보다.
     
     #. 
     
     "저는 얼마 전까지 태어난 곳에서 쭈욱 살아왔거든요. 그래
     서 그런지 하루하루가 무한히 반복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
     요.  그런데 아니더라구요. 다시 반복되는 것은 없는 것 같
     아요.  퀴즈방에서  처음 지원 씨 만났을 때 정말 좋았거든
     요. 그런데 그 느낌, 그 감정은 다시 되살안 날 수 없는 거
     잖아요. 벌써 지나가버린 거죠. 오늘도 이대로 지나가 버리
     면 영원히 다시 경험할 수 없을 거에요."
     
     - 김영하, <퀴즈쇼>
     
     #.
     
     라는 말에,
     
     #. 
      
     "우리 말 놓을까요?"
     
     "왜 갑자기?"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에  민수 씨가 한 말을 반 말로 다시 듣고 싶어서
     요."
     
     - 김영하, <퀴즈쇼>
     
     #.
     
     라고 말해주는 여자. 
     
     #. 
     
     채팅의  위대함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서로의 대화가 무의미
     하게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 아니하고, 조용히 파란 화면 위
     로 스크롤 되어 올라간다는 것이고, 그것이 더더욱 좋은 점
     은  육성으로  들으면 유치하고 낯 부끄러울 이야기도 전혀 
     그렇지  않게  보이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아아, 나는 이 
     뛰는 가슴과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너에게 타이핑하여 전달
     해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민했고, 그 말을 하기 
     위하여  얼마나  오래동안 너를 기다렸으며, 자연스럽게 그 
     말을  꺼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돌려가며 꺼내야 
     했었던가. 가까스로 꺼낸 나의 수줍은 고백에 땀 흘리는 이
     모티콘으로 답하는 너와 점점 위쪽으로 스크롤 되어 올라가
     는 내 고백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 위에 너의 찡그린 얼굴
     을 겹치던 스무 살 무렵의 시간들... 사진과 이미지도 없고 
     동영상도 없고, 음성채팅과 화상캠도 없었으되, 훨씬 더 진
     솔했고 가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시절. 
     
     #. 
     
     고백하자면 현실은 김영하의 <퀴즈쇼>와는 많이 달랐다. 내
     가  진심을 털어놓고 고백한다고, 그것을 반대편의 저 아이
     가 꼭 진지하게 받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 아이에게 그냥 
     저 파란 화면은 일상에서 벗어나 잠깐씩 들리는 놀이공간에 
     불과할  수도 있었고, 어렵게 이야기한 나의 속사정은 스카
     이러브에서  만난  다른 남자와 나눈 시시한 농담보다 못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파란 화면이 구원이라 믿었고, 현실에 
     오고 가는 저 무표정한 인간보다 그녀가 타이핑한 이모티콘
     이  훨씬 더 따뜻하다고 생각했던 소년은, 이모티콘이란 결
     국 부호의 조합일 뿐임을 인정해야 했으니까. 
     
     #.
     
     하지만,  아아  -  김영하는 어쩌면 우리를 이렇게 잘 알고 
     있을까. 그는 우리가 꿈꾸었던 모든 것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보여준다. 우리를 이해해주는 파란 화면 속의 귀엽고 
     어여쁘고  (심지어는) 부유한 연인, 우리의 무용한 퀴즈 지
     식들이  유용을 거쳐, 무협지적 경쟁의 중요한 무공으로 취
     급되는 세계까지. 현실에선 가져보지 못했지만, 그 모든 것
     이 이루어진 <퀴즈쇼>의 세계는 90년대의 PC통신과 파란 화
     면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매혹의 공간이
     다.
     
     #. 
     
     무턱대고  자신을  열어젖히고, 너도 열어달라고 떼를 쓰던 
     소년에게 현실의 자신의 연인을 밝히던 여자는 이렇게 말했
     었다;
     
     "그 사람을 만난 것도 널 만난 것보다 나중이었고, 그 사람
     보다 네가 나를 더 잘 알 거야."

 

     
     그  이후에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있었는데 기억 
     못하는  것일지도. 어쨌든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 파란
     화면 위에 우리가 나눠왔던 이야기는 그냥 심심풀이였을까. 
     그건 그냥 나우누리 서버 어딘가에 흔적으로만 남아있을 소
     모품이었을까.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던 속 깊은 이야기들
     을  털어놓고는, 그것은 그냥 아무 의미도 아니었다고 이야
     기하는 사람에게 대꾸하는 법을, 그때 난 배우지 못했었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김영하의 <퀴즈쇼>에는 그런 
     일 따윈 없다. 원래 그때 내가 알았고, 꿈꾸던 세상은 김영
     하의  <퀴즈쇼>같아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난  활자  속에서 그때 내가 꿈꾸었던 세상을 본다. 그래서 
     결국, <퀴즈쇼>는 일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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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들린다 1
히무로 사에코 지음, 김완 옮김 / 길찾기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
     
     해피 엔딩 영원히 간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
     
     아주 어릴 적부터 옛날 얘기 읽다
     고개 갸우뚱 했었지
     
     그 이후로 그들은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단 마지막
     
     신데렐라 결혼 일 년만에 성격 차이로 헤어져
     평생 혼자 살았을지도 몰라
     
     시비 걸자는 건 아니지만 혹시 둘이 만난 것이
     일생 후회되는 일일지도 몰라
     
     삶은 길고 그렇게 쉽지도 않고
     언제나 또 다른 반전
     
     - 이적, <해피 엔딩>
     
     #.
     
     "도쿄에  정말  보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욕조에서 
     자는 사람이야."
     
     화려한  조명으로  밤에 찬란하게 빛나던 코오치 성(城), 그리고 
     수많은 멜로드라마에서 계속해서 인용되었던 지하철 역에서의 애
     절한 재회와 리카코의 허리숙인 인사를 마지막 장면으로, 지브리
     에서  제작한 72분 짜리 애니메이션은 끝났다. 그리고 나를 비롯
     한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이 이야기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히무라 사에코가 쓴 두 권 짜리 소설 <바다가 들린다>는 
     그것과는 좀 많이 다른 이야기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은 소년기
     의  아련한 추억과 첫사랑의 재회, 그리고 오랫동안 감춰왔던 진
     심과  새로운 로맨스의 시작을 알리며 마무리 한다. 하지만 히무
     라  사에코의 소설은 잊지 않는다. 친구와 같은 여자를 좋아한다
     는  이유로 자신은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여자에게 외려 무심하
     게  대하는 것이 의리라고 생각했었던 순진하지만 어리석은 소년
     이 대학에 진학하고 여러 여자를 만나면서도 아직 성장하거나 자
     라지  않았음을, 아버지의 불륜에 대해 "엄마가 갑갑하다고 생각
     했어.  그냥 좀 참으면 될 걸, 괜히 일을 크게 만든다고"라고 중
     얼대고,  필요할  때마다 남자 아이를 곤란하게 만들던 이기적인 
     소녀는, 거절할 줄 모르고 여자에게 끌려다니는 우유부단한 소년
     을  끝까지 이용하며 힘들게 할 것임을. 삶은 길고, 그렇게 쉽지
     도  않고, 영화처럼 그 순간의 해피 엔딩으로 모든 게 끝나는 것
     이 아니라는 것을. 
     
     #.
     
     "이건 새로운 사실이었다. 난 여자애들은 원하는 걸 정확하게 알
     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모든 걸 알고 계획이 있다고... 
     그런데 그들도 몰랐나 보다. 어쩌면 우리만큼 혼란스러웠는지 모
     른다."
     
     - [Wonder Years] Season 2. Episode 5
     
     #. 
     
     그래, 원래 소년기의 감정이란 혼란스러운 것이다. 소녀여, 우리
     들은  그랬다.  하얀 피부와 너의 싱그러움을 동경하면서도 외려 
     낯설다는  이유로 피하려 했었고, 내 마음 저 깊은 곳에 너에 대
     한 애틋한 감정이 있음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이미 넌 내 친구
     가 마음에 두었다는 이유로 피하려 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너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 그저 피
     하고 싶어했다. 
     
     소년들은  그렇다. 모든 것이 두렵고, 알 수 없는 일들은 미뤄두
     고  싶어하며, 확신하지 못하는 모든 것에 대해 우유부단하게 행
     동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너희들은 빠르게 변해간
     다. 어쩌면 바다 건너의 소녀들도 내가 만나고 겪은 이들과 조금
     도  다르지 않은지. 우린 그렇게 혼란스러운 가운데, 너희들에게 
     다가갈 수 없이 "그저 의논상대로 고착되어버린" 사람이 된 적도 
     있고, "부르면 달려오는 남자"로 취급받은 적도 있다. 심지어는 
     
     기가 죽어있는 모습보다 째려보는 것이 리카코 답다
     
     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을만큼 너희에게 조련당한 적도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너희는 끊임없이 어른이 되어갔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해서  혼돈스러웠다. 그래, 우린 너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안다고 믿었었지만, 너희 역시 혼돈스러웠을지도 모른다.
     
     #.
     
     그래서  그랬겠지. 나와, 대학의 선배와, 그리고 그 유부남 사이
     를 왔다갔다 하는 것도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서였겠지. 그러면서
     도  끊임없이 어른인 척 나에게는 충고하길 원했겠지. 그렇게 너
     는  그  남자와 그 가족에게 상처받고, 그 선배는 너에게 상처받
     고, 나는 또 다른 이에게 상처받고...
     
     차라리  다행인 것은, 그런 상처가 문제라면 아직까지 내가 너에
     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남아있었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스무살의 
     소년에겐  청춘과 열정만은 남아돌 정도로 충분히 남아 있고, 우
     린  단 한 번의 거절도 없이, 어떠한 보답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네가  부를 때마다 달려가곤 했었다. 때로는 우리의 진실한 친구 
     중 한 명이 
     
     "여자한테  부르면 오는 남자로 찍히면 남자 쪽이 지는 거야. 난 
     고등학교 때 진 이후로 아직도 만회 못 했다니까."
     
     라고 충고해 주어도 말이다. 모리타키는 자랑스럽게 말하지 않았
     던가. 
     
     "응,  부르면  달려오는 만만한 남자라고 생각한데도 말야. 이럴 
     때 내게 기대줘서 기뻤어."
     
     라고.
     
     #. 
     
     그 혼돈스러운 날들, 우리에겐 충분히 낭비할 수 있는 젊음과 청
     춘이 있었다. 지금에서야 너에게 바친 그 날들의 댓가로 아무 것
     도  돌려받지 못했음이 한스럽지만 - 부탁인데 그날의 추억이니, 
     하는 개소리는 하지 말도록. 네가 필요한 것은 도쿄에 갈 여행자
     금을 빌리는 것 뿐이었지 않았나 -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차피 그 
     청춘은 낭비될 것 뿐이었다면, 욕할 수 있는 소녀가 등장하는 이
     야기 몇 개 쯤은 확실하게 얻을 수 있었지. 내 평생 기타를 잡고 
     노래를 만들 몇 가지 사연과. 
     
     히무로  사에코의  소설에서 리카코는 "보고 싶은 사람이 도쿄에 
     있는데  그 남자는 욕조에서 자는 사람이야"라고 말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것을 기억하지조차 못했다. 그녀에게 그저 모
     리사키는 "부르면 오는 만만한 남자"였을 뿐이고, 모리사키는 두 
     명의 여자 사이에서 우유부단하게 오가며 그런 병신짓을 하는 혼
     돈스러운 소년일 뿐이었다. 
     
     삶은  길고, 지브리의 애니메이션처럼 쉽지도 않았다. 그리고 확
     실한  해피엔딩도 없다. 리카코와 여전히 데이트를 하지만, 리카
     코는  여전히 상처받은 소녀 노릇을 하며 이기적으로 모리사키를 
     괴롭힐  것이다. 그리고 그 상처를 극복해내는 순간, 모리사키는 
     필요없게  되고 그녀는 다시 영악한 여자로 변해갈 것이다. 지브
     리의  애니메이션은  딱 좋은 곳에서 끝났다. 하지만 모리사키와 
     리카코의 삶은 계속 된다. 소설이 끝난 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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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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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심장을 쏴라]나 [7년의 밤]을 아직 읽지 못했다. 그러므로, [28]은 내가 처음 읽는 정유정의 소설인 셈이다. 사실 읽기 전에 꽤 기대가 많았다. 그녀의 전작인 [7년의 밤]은 천명관의 [고래]와 함께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꼽은 '2000년대 가장 재미있는 소설' 중 한 편이었다. 그리고 [28]은 [7년의 밤]을 쓴 그녀가 또 한 번 수 년간의 준비기간을 통해 내놓은 신작이었고,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다룬, 한국에서 보기 드문 '재난소설'이기도 했다. 전작인 [7년의 밤]에서도 보여준(그러나 역시 난 아직 보지못한)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을 절묘하게 줄타기 하는 솜씨와, 동시에 수없이 많은 퇴고를 거쳐 치밀하게 엮어놓은 구성과 정밀하게 가다듬은 문장들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처음 독서를 시작하고 느낀 것은 '불친절하다'는 것이었다. 문장을 가다듬고 가다듬어서 수식어가 최대한 절제되어 있고 문장들이 건조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사실 그건 코맥 맥카시나 데니스 루헤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전염병이 시작되고 사건이 진행되기 시작하면서는 초반에 비해 훨씬 잘 읽히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드는 느낌은 문장과 문장 간의 '점도'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글들이 읽다. 점도가 높아 끈적끈적대는 문장.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이 늘어진 엿가락처럼, 더럽게 표현하자면 늘어진 가래침처럼 끈덕이며 붙어 있어, 한 문장을 읽고 나면 끊지 못하고 다음 문장, 다음 문장을, 또 다음 문단, 다음 문단을 계속해서 읽게 된다. 그런데 정유정의 문장은 그런 끈적임이 거의 없다. 너무 정제하고 정제해서 맑아지기는 했는데, 그러다보니 맛조차 없어져서 목넘김 없이 넘기게 되는 물맛이랄까. 

아, 물론 익히 들어온 바와 같이 이게 구상과 자료조사에 대단한 노력을 들였다는 것은 알겠다. 실제 소설을 읽어보면, 사실 자료조사에 쓰인 데이터들이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선수끼리는 아는 법이니까. 정유정은 자신이 만들어 낸 '화양'이라는 가상도시를 완벽하게 틀어쥐고 그 안에 지옥도를 펼쳐 놓는다. 조사한 자료들을 따옴표 없이 직접 인용하면서 난 체 하는 것은 사실 하수들이 하는 짓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그 지옥도를 묘사하기까지 몇 번이고 많은 밑그림을 그리고 지웠는지는 충분히 알겠다. 그리고 인물간의 관계들도 얼마나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고심해서 만들어 냈는지도 알겠다. 아마 [28]을 쓰는 그녀의 방의 벽은 포스트잇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정성스럽게 만들어 낸 관계들의 끝은 그닥 정성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인간성의 밑바닥을 긁어내는 듯한 지옥도라는 상황에 던져진 탓인지 정유정의 인물들은 기계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악역으로 등장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활동이나 최후도 그닥 임팩트 있지 않고, 보살펴주던 개에게 최후를 맞이하는 수의사의 모습도 그닥 숭고해 보이지 않으며, 한 때는 적이었다가 연인이 된 남자의 마지막을 보는 여자의 슬픔도 그닥 와닿지 않는다. 그리고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를 담당하고 있는 '대학살'의 밤도 그닥 마찬가지다. 정제되어 건조한 문장으로 묘사하는 그런 모습들엔 뭔가 있어야 할 점도가 빠져 있다. 

뜬금없이, 얼마 전 읽었던 이사카 고타로의 [종말의 바보]가 생각났다. [종말의 바보]는 미국의 대통령이 '8년 후에 지구에 거대한 소행성이 떨어져서 지구가 멸망합니다'라는 뉴스를 전한 뒤 5년 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처음엔 혼란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내 자리를 잡고 저마다 자신들의 일상을 소소하게 지켜내면서 3년 후의 종말을 기다린다. 집나간 딸과 화해를 하고, 비디오 가게에서 영화를 빌려보고, 때론 종말을 함께 할 남자친구를 찾아보기도 하면서.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아무리 그래도 종말이 3년 후인데!) 참 일본적인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종말이 다가오면 대형수퍼마켓을 약탈하고, 모터사이클을 탄 스킨헤드가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가 미국적이라면 [종말의 바보]는 일본적인 이야기가 아니겠느냐고. 

근데 솔직히 [28]이 보여주는 지옥도는 한국적인 종말의 이야기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김이환의 [절망의 구]를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한국적인 정서보다는 뭔가 더 유니버설한 컨벤션에 기대고 있는 느낌이랄까. 

사실 [28]은 건조한 문체도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영미권의 장르문학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사이코패스 살인마인 '동해'의 존재가 그러한데, '동해'는 (나름 어린 시절의 학대를 이유로 제시하긴 하지만) 서양의 스릴러 소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인물상으로 보인다. 또한 이 소설의 어느 누구도 '한국적인 정서'의 이유를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설사 한국적인 정서라고 해도 그것은 '타워' 등의 재난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1차원적인 모티프에 한정되어 있다. 

나는 [28]이 한국문단에서 어떻게 평가받을지 모르겠다. 다만 종종 느끼는 점인데, 순수문학계에 있는 작가가 장르적인 소설을 썼을 때, 그 장르적인 완성도와는 별개로 평가하려는 분위기가 나는 못내 신경쓰인다. [28]은, 그냥 평범한 장르소설이다. 전염병을 다룬 재난 소설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모두 그런 장르적인 기능 하에서 작동한다. 물론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카뮈의 [페스트]나 코넬료의 [눈 먼자들의 도시]도 장르소설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면 대답하겠다. 이 안의 인물들은 장르적인 기능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고. 
그 와중에 정유정은 (내가 들었던 그녀의 명성과는 달리) 잘 짜인 장르소설을 만드는 것에는 많이 실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인물들은 때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많이 하기도 하고, 때론 너무 멍청하게 행동하며, 때론 너무 어이없이 죽어버린다. 자신에게 걸맞은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 채. 그리고 죽어야할 타이밍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끝까지 살아남아 악마가 되어야 할 박동해는 너무 빨리 죽고, 한기준은 뭘 해야 하는지 모르고 헤맨다. 김윤주는 필요에 따라 등장했다 사라졌다 하고, 이는 나수진도 마찬가지다)

장르적으로 실패하면 보통 순수문학 작가는 이제 순수문학의 영역으로 도망쳐 비평적 실패를 보충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28]은 그냥 장르소설이다. 장르의 실패는 깨끗하게 장르 내에서 인정하는 것이 옳다. 

난 아직 [7년의 밤]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명성은 익히 들었다. 그녀가 써낸 [7년의 밤]이라는 스릴러는 부디 순수문학의 영역으로 도망칠 필요없는 진짜 장르문학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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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cool 2013-09-02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는 '7년의 밤'을 읽기 전에 써놨던 글이며, 지금은 '7년의 밤'을 읽은 후입니다. '7년의 밤'은 두말할 필요없는 수작이라고 생각하며, 이에 대해서는 페이스북에 짧게 쓴 바 있으나, 정식 리뷰로 등록하기에는 너무 짧은 글이라 이곳에선 생략합니다.
 
64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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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꾸준히 사고, 또 읽는 사람이라면 대충 깨닫고 있을 것이다. 책의 띠지나 뒷표지에 적힌 출판사 관계자의 과장된 문구는 어느 정도 걸러 들어야 한다는 것을. 책의 띠지만 보면, 출판되는 모든 책은 내 삶의 폐부를 찌르는 엄청난 깨달음을 담고 있거나,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흥미진진한 내용들만을 담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세상엔 띠지의 휘황찬란한 찬사를 감당할 수 있는 책보다 그러지 못한 책이 훨씬 더 많다. 

  쉽게 예를 들자면 - 죄송하지만 - 이응준의 [국가의 사생활] 같은 경우, 작가가 3년 동안 300권의 논문을 조사하며 내놓은 소설이라는 홍보문구를 사용했는데, 소설을 읽고 나서 든 솔직한 심정은 '이딴 걸 쓰는 데 3년이나 걸렸다면, 웬만하면 작가 말고 다른 일을 찾아보시는 게..' 였다. 
 
   각설하고. 

   요코야마 히데오의 [64]의 뒷표지를 보면 '집필기간 10년! 치밀한 구성과 압도적인 스토리 텔링으로 일본소설의 수준을 단번에 끌어올린 걸작'이라는 홍보문구가 달려있다. 책을 다 읽고 난 이후, 지금 생각해보면 요코야마 히데오에겐 참 죄송하고 미안한 일이지만, 그땐 제일 먼저 이응준의 저 소설에 당한 사기가 생각났었다. "선수끼리 왜 이래, 추리소설 한 편을 10년 동안 썼다고? 이봐 히가시노 게이고는 1년에 10권도 쓰더라." 이런 생각도 했었고. 그렇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난 지금의 생각은 조금 바뀌었다. '일본소설의 수준을 단번에 끌어올린'은 조금 호들갑스러운 과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요코야마 히데오의 [64]는 근래 보기 드문 경찰소설(추리소설이 아니다)의 걸작이고, 이 정도의 소설이라면 충분히 10년 정도의 시간을 성실하게 집필에 할애하면 써야 할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성실하게 잘 쓰여졌을 뿐더러, 독자를 완벽하게 거머쥐고 가는 소설이다. 

  아무래도 경찰서 내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다룬 추리소설이라면, 그 첫머리에 에드 멕베인의 '87분서 시리즈'를 연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FBI라는 연방수사국을 제외하면, 각 경찰조직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미국의 경찰과 일본의 경찰조직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아무래도 요코야마 히데오의 [64]를 에드 멕베인의 소설에 비견하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적어도 경찰서 내의 이야기를 최대한 사실적으로 접근한다는 지점은 비슷하다. 하지만 그 둘을 완전히 다른 소설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독특한 일본의 경찰조직이다. 

  '춤추는 대수사선', '파트너', '케이조쿠'를 비롯한, 일본의 수많은 경찰 추리드라마를 즐기는 이에게라면, 전혀 낯설지 않은 단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캐리어'라는 단어인데, 이는 한국의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국가공무원시험 1종 합격자 중 경찰직에 배속되어 경부보로 임명된 사람을 가리키는 은어이다. 그들은 고속승진이 보장되고 진급에 제약이 없는 위치로, 보통 도쿄대 법학부 같은 명문대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은 반면, 현장 경험이 없는 책상물림이나 현실을 모르고 범죄수사보다 자신의 출세에만 눈이 먼 관료 같은 느낌이 강하다. (실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추리물에서 이런 모습으로 그려진다) 또한 젊은 나이에 높은 계급에 오르면서 지휘권을 가지지만, 동시에 현장경험이 많고 계급은 낮은 논캐리어들과 많은 갈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 역시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고 대부분의 추리물에서 그렇게 그려진다) 

  잠깐. 다시 뒷표지 이야기로 돌아가자. 

  검은숲의 편집자가 정리한 뒷표지의 줄거리는 이렇게 쓰여있다; "14년 전 미제로 끝난 소녀 유괴살해사건. 일명 '64'. 새로 취임한 경찰청장이 시효만료 1년을 앞둔 지금 사건을 마무리하겠다고 나서지만 유족은 청장의 방문을 거절한다. 경찰 홍보실의 미카미는 유족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64'의 담당형사들을 찾아가고, 사건 후 퇴직하거나 은둔형 외톨이가 된 동료를 보면서 그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던 중 '64'를 모방한 유괴사건이 일어나는데......"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이 소개를 보면, 이 줄거리 소개가 얼마나 큰 트릭인지 깨달을 것이다. 거의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서 쓰인 텍스트 트릭에 버금갈 정도의 완벽한 트릭이다. 왜 그러냐면.

  일단 줄거리만 보면, 독자는 당연히 '64'가 14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두 개의 유괴사건의 범인을 잡는 추리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두 사건의 범인은 밝혀지지만, 추리물의 방식은 아니다. 조금 과장되게 이야기하자면, 그 두 유괴사건은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소재이기는 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64'는 689페이지에서 끝난다. 초반에 주인공이자 화자 역할을 하는 미카미의 이야기가 세팅되고, 14년 전 벌어진 유괴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80페이지 언저리에서 나온다. 자 이제 줄거리 소개에 따르면 64에 대해 사람들이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은 300페이지 근처에 가서 밝혀진다. 줄거리 소개에 따르면 64를 모방한 유괴사건이 바로 벌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500페이지가 넘어서야 벌어진다. 그런데 놀랍게도 채 100페이지가 되지 않아서 범인이 밝혀지고, 이야기가 정리된다. 심지어 탐정의 추리도,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도 거의 없다! 

  그럼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궁금할 것이다. 도대체 두 개의 유괴사건 없이 이 책의 남은 내용 - 그러니까 64가 첫 소개되는 80페이지부터 두 번째 모방 유괴사건이 일어나는 4백 페이지 넘는 공간 - 은 어떻게 채워진 것인가! 줄거리 소개에 담긴 내용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대한 분량을 어떻게 채웠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것은 추리물도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과연 700페이지에 가까운 이 두꺼운 소설은 무슨 재미로 읽을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 중간에 담겨진 내용은 두 개의 유괴 사건보다 훨씬 더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지방경찰서 내의 캐리어와 논캐리어 간의 갈등, 본청과 지방경찰 간의 조직에서 발생하는 갈등, 또한 경찰과 언론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경찰서를 배경으로 한 [하얀 거탑]을 만든다. [64] 내에 등장하는 경찰들은 유괴범과 두뇌싸움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경무부와 형사부가 서로의 배에 칼을 하나씩 삼켜두고 두뇌싸움을 벌이고, 경찰 홍보부와 지방지 기자들이 음모와 배신으로 반목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엎치락 뒷치락 하는 사건의 전개는 사건을 추리하는 재미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형사부에서 밀려나 홍보부에 자리잡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미카미를 비롯한 홍보부의 인물들, 경무부의 간부들, 형사부의 형사들, 기자들까지 모든 캐릭터가 살아있고, 그들이 부딪치는 모습에 넋을 잃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64의 범인이 궁금하다는 사실조차 잊게 될 때가 있는 것이다.

  물론 요코야마 히데오는 64를 허투루 다르지는 않는다. 이 사건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64의 망령에서 허우적 대고 있다. 캐리어 출신들은 64를 이용해 경찰서를 장악하려 하고, 반면 형사들은 64로 인해 발생한 커다란 함정에 버거워 하며 그들에 맞선다. 그렇게 인물들을 따라가며 독자 역시 허우적 대고 있노라면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소설을 어떻게 끝내려고 하지?"

  500페이지가 넘어서야 64를 모방한 유괴사건이 벌어지는데, 이쯤 되면 독자 역시 소설 내내 기자와 경무부와 형사부에 치이며 완전히 지쳐버린 미카미의 심정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이미 빠져나갈 길은 없어 보이는데, 책은 200페이지가 채 남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끝내지? 어떻게 끝내지? 하며 미친 듯이 책장을 넘기고 나면 약간은 허무한 요코야마 히데오의 결말과 만나게 되는데, 다소 그곳에서 실망할 수는 있겠지만, 뭐 그 정도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재밌게 600페이지 이상을 읽고 난 후다. 

  다 읽고 난 후 뒷표지를 다시 본다. 솔직히 말해 아직도 '일본소설의 수준을 단번에 끌어올린'이란 호들갑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아니, 일본 전체 소설의 수준을 단번에 끌어올릴 정도의 위대한 소설이 지구상에 존재하긴 할까. 뭐, '선수끼리' 그 정도의 과장은 접어주고 읽어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소설을 쓰려면 성실하게 써도 10년 정도 걸릴 수 있다는 것에는 충분히 동의한다. 아마 다 써놓고도 두 번 정도 다시 썼을 것이다. 경찰조직과 주변의 인물과 사건을 묘사하는 데 들인 정성과 노력은 단 100페이지만 읽어도 확실히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작가가 경찰생활을 따로 해본 것도 아니니, 모든 것은 취재와 조사의 결과일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너무 생생하게 잘 살아 있는 소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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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ple 2015-04-29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면서 `64를 모방한 사건은 대체 언제 일어나는 거지?!`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네요 ㅋㅋ
 
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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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의 한국 문단은 김훈의 [칼의 노래]로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을 맞았다. 2003년의 한국문단엔 박민규라는 괴물 같은 신예가 [지구영웅전설]과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믿을 수 없는 데뷔작을 들고 (차마 얘기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진부한 레토릭을 빌려 말하자면)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리고 2004년에 또 천명관의 [고래]가 발표 되었다. 마치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포수'라던 최기문이 등장하고, 그 다음해에 다시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포수'인 진갑용이 등장했는데, 또 그 다음 해에 홍성흔이 등장한 90년대 중후반의 프로야구 같다고 할까? 그것은 신인 등장의 법칙이었다. 

꾸준히 한국 소설의 흐름을 따라 잡아왔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천명관의 소설을, 그것도 [고래]를 아직 읽지 않았다고 고해하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맹세컨대 대충 김훈과 김영하와 김연수와 박민규와 김애란 정도만 챙겨주면 2000년대 이후의 한국 소설을 이해하는 것에 그닥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할 뿐더러, 가끔 김중혁과 이기호와 박형서까지 언급해 주면 어느 정도 양식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최제훈 정도까지 챙기면 '아니 그런 것까지 읽으세요?'란 소리를 들을 정도였기에, 그 흐름 바깥에서 등장한 천명관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허세와 겉핥기의 법칙이었다. 

뒤늦게 읽어본 [고래]에 대해선, 내가 구태여 이야기 하지 않아도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지점을 지적하고 있어서 당혹스러울 정도. 혹자는 예술의 위대함은 수많은 해석을 가능케 하는 '모호함'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고래]는 여러 모로 해석의 여지가 적은 작품이다. 읽을 때 처음 느껴지는 가장 강렬한 느낌은 당연히 마르케스를 비롯한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에 대한 한국적 번안과 보르헤스의 영향이다. 물론 변사의 어투를 차용한 문체라든지, 전래동화를 연상시키는 서술방식 등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을 쓰겠다'는 의도에서 바라봤을 때, 먼저 보르헤스나 마르케스의 소설을 한국식으로 번안하겠다는 의지가 존재하고 나서, 그 이후에 실천적 방법론으로 변사적 문체라든지 전래동화적 서술방식을 끌어들였다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한때 소설을 써보았던 동업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지레짐작의 법칙이었다. 

한국의 소설은 80년대에 이미 조세희의 '난.쏘.공'의 성공을 시작으로 리얼리즘의 세계에서 그 전통을 세웠다. 한국 소설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현실에 기반한 리얼리즘이 메인스트림을 형성했으며, 이문열이나 고원정, 이승우 등이 어느 정도 우화적인 세계로 도망치면서 문학적인 완성도를 보여주는 와중에도 그 우화의 핵심은 정치적 현실에 기반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하루키 열풍이 몰아치고, 그것이 다시 하루키를 따라 피츠제랄드 등의 영미문학의 감수성을 세례받은 젊은 작가 세대들이 등장하면서, 한국 문학의 전통은 완벽하게 기존의 리얼리즘과 단절되고,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고독과 감성을 이야기하는 단계로 전환하게 된다. 80년대의 메인스트림이자 베스트셀러였던 이문열, 황석영, 조정래, 박경리의 소설과 하루키의 등장 이후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이후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된 김영하, 김연수, 박민규, 김애란, 김중혁의 소설들이 같은 전통에서 쭉 이어져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의 세대가 90년대에 극심한 단절을 겪었던 것처럼, 소설 역시 그러하다. 90년대 후반 이후에 등장한 젊은 한국 소설가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80년대의 한국소설보다는 20년대 재즈 제너레이션 시대의 영미소설가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영미문학의 전통에 더 기대어 있는 듯 보인다. 

그 와중에 등단 이전의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특이하게도) 한국문학도, 영미문학도 아닌 보르헤스를 흉내낸 습작들을 한두 편 씩 써본 경험이 있다는 것은, 천명관의 [고래]를 이야기 해보기에 앞서 한 번 흥미롭게 바라보아야 할 지점이다. 실제로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의 대학생들은 도서관에서 접한 보르헤스의 소설과 마르케스의 세계에 적잖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그중 작가를 지망하는 많은 이들은 이를 모방하려는 시도들을 많이 했었다. 그것은 습작의 법칙이었다. 이러한 시도들은 때론 발표와 출판으로 이어지기도 했었는데, 등단한 작가 중 대표적인 경우로는 김연수의 단편집 [스무 살]에 수록된 소설들이 그러하고, 정식 등단을 거치지 않은 작가로는 이적의 [지문사냥꾼]이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지는 사례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명관의 [고래]는 이러한 시도의 연장 선상에 있지만, 앞서의 단순한 시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한 강력한 무게감을 가진다. 그것은 이 소설이 문학동네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서사의 분량과 완성도를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3대에 이르는 가족사를 정리하며 수십 명의 등장인물들을 움직이면서도 숨막히는 흡인력으로 독자를 몰고 가는 힘은 가히 명불허전이다. 더군다나 이야기 전개가 간결하거나 절정을 향해 직선으로 돌파하는 진행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러한 성과는 더 놀랍다. 이야기는 - 전래동화적 구성에 걸맞게 - 때로는 시간을 건너뛰기도 하고, 때로는 곁가지로 새기도 하며, 때로는 한없이 먼길을 구성지게 돌아가기도 하는데도 그 호흡이나 흐름에는 한 줌의 흐트러짐도 없이 독자를 몰고 간다. 이는 숨쉴 틈 없이 떠들어 대는 변사의 너스레처럼 압도적인 서사의 분량에 있을 것이다. 천명관 작가 스스로도 본인은 소설을 쓸 때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를 내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있다'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고래]의 이야기의 분량이 그러하다. 447페이지라는 것이 한 권의 소설로는 결코 적은 분량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지만, [고래]가 다루고 있는 서사의 양 - 3대에 얽힌 가족사와 그에 얽힌 수십 명의 이야기 - 에 비하자면, 사실 엄청나게 압축된 이야기인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스토리를 가지고 [토지] 정도의 분량의 소설을 쓸 수도 있지 않은가.

사실 [고래]의 이야기는 경제적인 작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낭비'에 가까운데, 낭비도 그냥 낭비가 아니라 거의 90년대 거품경제의 극점에 서있는 오렌지족 급의 과소비다. 핵심에서 한없이 벗어나 있어서 쳐내야 할 이야기조차도 만연체로 길게 길게 늘어지는데, 그러한 '장황함'이 단점보다는 외려 재미를 준다. 하드보일드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를 타고 질주하는 경제적인 여행이라면, 천명관의 [고래]는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다시 경상도로, 다시 남해의 섬으로, 통영으로 조선팔도를 볼 것 다 보고 먹을 것 다 먹고 가는 유람의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가 여타의 비슷한 시도들과 구분되면서 위대한 작품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지점은, 보통 이러한 류의 작품들의 빠지게 되는 가장 큰 함정인, 집중력을 잃고 이야기와 서사와 문체에 스스로 함몰되어 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 돌아 온갖 것들을 보고 즐기고 맛보며 왔는데도, 클라이맥스에 이른 이야기는 독자의 심장을 정확하게 저격한다. 절정까지 지치게 만들지 않은 것이다. 춘희의 아이가 죽고, 춘희가 정신을 잃은 채 쌓아놓은 벽돌을 발견하는 장면에서 느끼게 되는 정서적인 감동은, 앞의 혼돈스런 여행에도 전혀 지치지 않은 순수한 카타르시스를 그대로 간직하게 한다. 그것이 [고래]를 진정으로 위대하게 만드는 지점인데, 이것은 앞의 너스레와 서사가 사방팔방으로 튀면서도 정서적인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작품을 쓰는 것은 진정으로 작가에게 어려운 일인데, 그것은 이러한 균형을 절묘하게 유지한 대부분의 작품이 그러하듯 - 이를테면, 액션과 드라마와 서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면서도 절묘하게 균형을 지키면서 놓지 않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를 들 수 있겠다 - 작가의 역량보다는 절묘한 우연과 행운에 의해, 즉 '예술의 신이 굽어 살피셔서 점지하신' 작품에만 찾아오는 행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기 보다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놀란과 천명관은 그리고 그러한 하늘의 간택을 받았고. 그리고 불행히도 대부분의 예술가는 그러한 행운을 보통은 생에 한 번 밖에 누리지 못한다. 만약 두 번 이상 그러한 행운이 계속 된다면 그때는 그것이 하늘의 점지가 아니라 본인의 역량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천명관이나 놀란 모두 아직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것은 로또의 법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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