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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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의 한국 문단은 김훈의 [칼의 노래]로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을 맞았다. 2003년의 한국문단엔 박민규라는 괴물 같은 신예가 [지구영웅전설]과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믿을 수 없는 데뷔작을 들고 (차마 얘기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진부한 레토릭을 빌려 말하자면)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리고 2004년에 또 천명관의 [고래]가 발표 되었다. 마치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포수'라던 최기문이 등장하고, 그 다음해에 다시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포수'인 진갑용이 등장했는데, 또 그 다음 해에 홍성흔이 등장한 90년대 중후반의 프로야구 같다고 할까? 그것은 신인 등장의 법칙이었다. 

꾸준히 한국 소설의 흐름을 따라 잡아왔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천명관의 소설을, 그것도 [고래]를 아직 읽지 않았다고 고해하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맹세컨대 대충 김훈과 김영하와 김연수와 박민규와 김애란 정도만 챙겨주면 2000년대 이후의 한국 소설을 이해하는 것에 그닥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할 뿐더러, 가끔 김중혁과 이기호와 박형서까지 언급해 주면 어느 정도 양식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최제훈 정도까지 챙기면 '아니 그런 것까지 읽으세요?'란 소리를 들을 정도였기에, 그 흐름 바깥에서 등장한 천명관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허세와 겉핥기의 법칙이었다. 

뒤늦게 읽어본 [고래]에 대해선, 내가 구태여 이야기 하지 않아도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지점을 지적하고 있어서 당혹스러울 정도. 혹자는 예술의 위대함은 수많은 해석을 가능케 하는 '모호함'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고래]는 여러 모로 해석의 여지가 적은 작품이다. 읽을 때 처음 느껴지는 가장 강렬한 느낌은 당연히 마르케스를 비롯한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에 대한 한국적 번안과 보르헤스의 영향이다. 물론 변사의 어투를 차용한 문체라든지, 전래동화를 연상시키는 서술방식 등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을 쓰겠다'는 의도에서 바라봤을 때, 먼저 보르헤스나 마르케스의 소설을 한국식으로 번안하겠다는 의지가 존재하고 나서, 그 이후에 실천적 방법론으로 변사적 문체라든지 전래동화적 서술방식을 끌어들였다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한때 소설을 써보았던 동업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지레짐작의 법칙이었다. 

한국의 소설은 80년대에 이미 조세희의 '난.쏘.공'의 성공을 시작으로 리얼리즘의 세계에서 그 전통을 세웠다. 한국 소설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현실에 기반한 리얼리즘이 메인스트림을 형성했으며, 이문열이나 고원정, 이승우 등이 어느 정도 우화적인 세계로 도망치면서 문학적인 완성도를 보여주는 와중에도 그 우화의 핵심은 정치적 현실에 기반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하루키 열풍이 몰아치고, 그것이 다시 하루키를 따라 피츠제랄드 등의 영미문학의 감수성을 세례받은 젊은 작가 세대들이 등장하면서, 한국 문학의 전통은 완벽하게 기존의 리얼리즘과 단절되고,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고독과 감성을 이야기하는 단계로 전환하게 된다. 80년대의 메인스트림이자 베스트셀러였던 이문열, 황석영, 조정래, 박경리의 소설과 하루키의 등장 이후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이후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된 김영하, 김연수, 박민규, 김애란, 김중혁의 소설들이 같은 전통에서 쭉 이어져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의 세대가 90년대에 극심한 단절을 겪었던 것처럼, 소설 역시 그러하다. 90년대 후반 이후에 등장한 젊은 한국 소설가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80년대의 한국소설보다는 20년대 재즈 제너레이션 시대의 영미소설가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영미문학의 전통에 더 기대어 있는 듯 보인다. 

그 와중에 등단 이전의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특이하게도) 한국문학도, 영미문학도 아닌 보르헤스를 흉내낸 습작들을 한두 편 씩 써본 경험이 있다는 것은, 천명관의 [고래]를 이야기 해보기에 앞서 한 번 흥미롭게 바라보아야 할 지점이다. 실제로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의 대학생들은 도서관에서 접한 보르헤스의 소설과 마르케스의 세계에 적잖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그중 작가를 지망하는 많은 이들은 이를 모방하려는 시도들을 많이 했었다. 그것은 습작의 법칙이었다. 이러한 시도들은 때론 발표와 출판으로 이어지기도 했었는데, 등단한 작가 중 대표적인 경우로는 김연수의 단편집 [스무 살]에 수록된 소설들이 그러하고, 정식 등단을 거치지 않은 작가로는 이적의 [지문사냥꾼]이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지는 사례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명관의 [고래]는 이러한 시도의 연장 선상에 있지만, 앞서의 단순한 시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한 강력한 무게감을 가진다. 그것은 이 소설이 문학동네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서사의 분량과 완성도를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3대에 이르는 가족사를 정리하며 수십 명의 등장인물들을 움직이면서도 숨막히는 흡인력으로 독자를 몰고 가는 힘은 가히 명불허전이다. 더군다나 이야기 전개가 간결하거나 절정을 향해 직선으로 돌파하는 진행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러한 성과는 더 놀랍다. 이야기는 - 전래동화적 구성에 걸맞게 - 때로는 시간을 건너뛰기도 하고, 때로는 곁가지로 새기도 하며, 때로는 한없이 먼길을 구성지게 돌아가기도 하는데도 그 호흡이나 흐름에는 한 줌의 흐트러짐도 없이 독자를 몰고 간다. 이는 숨쉴 틈 없이 떠들어 대는 변사의 너스레처럼 압도적인 서사의 분량에 있을 것이다. 천명관 작가 스스로도 본인은 소설을 쓸 때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를 내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있다'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고래]의 이야기의 분량이 그러하다. 447페이지라는 것이 한 권의 소설로는 결코 적은 분량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지만, [고래]가 다루고 있는 서사의 양 - 3대에 얽힌 가족사와 그에 얽힌 수십 명의 이야기 - 에 비하자면, 사실 엄청나게 압축된 이야기인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스토리를 가지고 [토지] 정도의 분량의 소설을 쓸 수도 있지 않은가.

사실 [고래]의 이야기는 경제적인 작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낭비'에 가까운데, 낭비도 그냥 낭비가 아니라 거의 90년대 거품경제의 극점에 서있는 오렌지족 급의 과소비다. 핵심에서 한없이 벗어나 있어서 쳐내야 할 이야기조차도 만연체로 길게 길게 늘어지는데, 그러한 '장황함'이 단점보다는 외려 재미를 준다. 하드보일드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를 타고 질주하는 경제적인 여행이라면, 천명관의 [고래]는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다시 경상도로, 다시 남해의 섬으로, 통영으로 조선팔도를 볼 것 다 보고 먹을 것 다 먹고 가는 유람의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가 여타의 비슷한 시도들과 구분되면서 위대한 작품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지점은, 보통 이러한 류의 작품들의 빠지게 되는 가장 큰 함정인, 집중력을 잃고 이야기와 서사와 문체에 스스로 함몰되어 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 돌아 온갖 것들을 보고 즐기고 맛보며 왔는데도, 클라이맥스에 이른 이야기는 독자의 심장을 정확하게 저격한다. 절정까지 지치게 만들지 않은 것이다. 춘희의 아이가 죽고, 춘희가 정신을 잃은 채 쌓아놓은 벽돌을 발견하는 장면에서 느끼게 되는 정서적인 감동은, 앞의 혼돈스런 여행에도 전혀 지치지 않은 순수한 카타르시스를 그대로 간직하게 한다. 그것이 [고래]를 진정으로 위대하게 만드는 지점인데, 이것은 앞의 너스레와 서사가 사방팔방으로 튀면서도 정서적인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작품을 쓰는 것은 진정으로 작가에게 어려운 일인데, 그것은 이러한 균형을 절묘하게 유지한 대부분의 작품이 그러하듯 - 이를테면, 액션과 드라마와 서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면서도 절묘하게 균형을 지키면서 놓지 않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를 들 수 있겠다 - 작가의 역량보다는 절묘한 우연과 행운에 의해, 즉 '예술의 신이 굽어 살피셔서 점지하신' 작품에만 찾아오는 행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기 보다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놀란과 천명관은 그리고 그러한 하늘의 간택을 받았고. 그리고 불행히도 대부분의 예술가는 그러한 행운을 보통은 생에 한 번 밖에 누리지 못한다. 만약 두 번 이상 그러한 행운이 계속 된다면 그때는 그것이 하늘의 점지가 아니라 본인의 역량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천명관이나 놀란 모두 아직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것은 로또의 법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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