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 

얼마 전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김영하 작가의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다룬 것을 들었다. 김영하 작가가 직접 출연했었는데, 그곳에서 여전히 김영하 작가는 '처음 문학상을 받을 때 염색을 하고, 귀고리를 하고 시상대에 올라간 작가'로 이야기 되고 있었다. 더 재밌는 건, 2010년에 재정비해 출간된 김영하 작가의 데뷔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의 알라딘 소갯글에도 똑같은 이야기가 있다는 점이다. 그 글에서 김영하는 '한국 문단 사상 처음으로 귀고리를 하고 문학상 시상대에 오른 남자'로 지칭되고 있었다. 

물론 그가 데뷔하던 해가 1996년이었고, 그때는 문단 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보수적이던 시기였다. 소설가가 문제가 아니라 남자가수가 귀고리를 하고 무대에 올라도 방송금지를 먹던 시절이었으니, 김영하라는 작가의 등장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는 익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렇지만 그 충격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빼어난 데뷔작이 아닌, '시상대에 염색과 귀고리를 하고 올랐던' 사건으로 기억되는 것에 대해서 과연 김영하는 할 말이 없을까. 

#. 

김영하가 그 이후로 별달리 대표할 만한 소설이 없어서 아직도 '문학상 시상대에 귀고리를 하고 올라간 남자'라고 불린다면, 그에게는 조금 억울한 일이리라. 걸출한 데뷔작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이후로 김영하는 인상적인 소설들을 많이 썼다. 많지 않은 나이에 여러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고, 판매량도 본인이 '생각보단 많지 않다'라고 밝혔지만, 어쨌든 꾸준히 팔리고 있는 작가 중 한 명이고, 심지어 영화계에도 진출하여 흥행한 영화의 시나리오도 썼을 뿐더러, 본인의 팟캐스트도 진행하는, 다방면에서 다양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주목받고 있는 젊은 작가인데, 왜 아직도 김영하의 앞엔 '검은 꽃'의 김영하나 '빛의 제국'의 김영하나 '퀴즈쇼'의 김영하가 아니라 '귀고리를 하고 시상대에 올라간 작가'가 먼저 붙는 것일까.

#.

김영하의 소설들은 - 소설적인 완성도와는 별개로 - 마치 김영하란 브랜드를 달고 나온 하나의 시리즈처럼 보인다. 김영하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지금 이 독자가 한국문단의 트렌드에 민감하다는 취향을 이야기 해주고, 동시에 쌔끈한 영문학 서적들처럼 스마트한 소설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대변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김영하의 '검은 꽃'은 초판본으로 겨우(?) 356페이지짜리 소설이다.참고로 '검은 꽃'은 애니깽으로 불리는 한국인들의 멕시코 이민사를 다루고 있다. 아마 조정래 같은 작가가 애니깽으로 비슷한 내용의 소설을 썼다면 최소한 5권 이상의 대하소설을 써냈을 것이다.  이 사건을 영화화한 김호선 감독의 애니깽은 1997년에 완성된 영화였는데, 러닝타임이 무려 130분이었다. 당시 한국영화의 상영시간은 대체적으로 100분에서 120분 사이였으며, 특히 120분을 넘지 않는 것은 불문율에 가까웠는데 애니깽은 다루고자 하는 소재가 너무 무겁고 커서 길어지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참고로 같은 해 개봉한 비트는 113분, 초록물고기는 114분, 넘버3는 109분, 편지는 102분, 접속은 각각 106분이었다. 그러나 김영하는 이 길고 무거운 이야기를 356페이지에 압축했는데, 반면 PC통신 세대의 연애담이라 할 수 있는 '퀴즈쇼'의 초판본은 무려 463페이지였다.

#. 

무거운 소재는 분량이 많아야 하고, 가벼운 소재는 분량이 적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물론 아니다. 하지만 이것은 김영하라는 작가의 세계를 이야기하는 데 재밌는 힌트를 준다. 김영하라는 작가의 등장 이후, 한국 문단의 젊은 작가들은 사회보다는 개인의 이야기를, 개인의 입장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많은 소설들이 3인칭보다는 1인칭을 사용했으며, 사건의 서사보다는 개인의 감정과 정서 변화를 중심으로 페이지를 채워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검은 꽃'처럼 거대한 사건들이 벌어지는 소설이, 오히려 90년대 PC통신 세대를 관통하는 추억담 보다 더 적은 분량으로 끝맺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

김영하의 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그러한 특성들에서 보이는 일종의 문학적 댄디즘이다. 그의 소설은 역사를 태백산맥처럼 구질구질하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현실의 벽도 처연하게 그리지 않는다. 그가 직접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어두운 청소년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다뤄보고 싶었다'라고 밝힌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델리스파이스의 '챠우챠우' 가사에서 제목을 차용했다. 이것을 보고 그의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느끼는 문학적 댄디즘과, 인디 음악을 향유하는 계층이 느끼는 일종의 댄디즘이 연결되어 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는 '현실'이라는 세계에 들어가서 리얼하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하지만, '너의 목소리가 들려'는 시점이 이동하는 것은 물론이고, 의도적으로 성경의 복음서의 구성을 차용하고 있기도 하며, 독특하게 에필로그를 40페이지 정도나 길게 가져가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여러 문학적인 시도들로 그 리얼함을 상쇄시키고 있다. 그는 '빨간 책방'에서 '작가들이 점점 더 부르주아 화(化) 되어 가고 있으며, 문학 역시 그것을 향유하는 계층에 맞춰 중산층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어두운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 중산층들이 감당하지 못할 현실에 대해서는 필터링하고, 동시에 문학적인 시도들로 그들이 받아들이지 못할 부분들에 대해서 일종의 조미료를 친 것은 아니었을까. 

#. 

드디어 '살인자의 기억법'으로 넘어가자. 이것은 더 어두운 이야기이다. 하지만 김영하는 사이코패스 살인자를 다루면서도 기시 유스케처럼 어둠의 극한으로 내려가지 않는다. 누가 보아도 아멜리 노통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제목을 뽑은 것부터, 역시 그는 또 한 번 그의 문학적 댄디즘을 확인시켜준다. 생각보다 얇은 책의 두께로 보면 알겠지만, 채 200페이지가 되지 않는 아주 짧은 소설인데, 그 분량과는 상관없이 꽤 어둡고 강한 이야기다. 하지만 동시에 김영하 식 조미료가 여기저기 쳐져 있어, 심성이 약한 책을 사랑하는 여성독자들도 쉽게 읽을 수 있는 연쇄살인범에 대한 소설이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소설은 참 영리하게 잘 썼다는 생각이 든다. 1인칭 독백체의 짧은 문장으로 멈출 틈 없이 달려나가니, 200페이지가 되지 않는 소설을 끝까지 읽는 것에 채 3시간이 걸리지 않으며, 그 안의 내용들도 흥미진진하다. 꽤 강한 내용의 살인사건들이 소설 안에 있지만, 눈쌀을 찌푸리게 하는 장면이나 정신적으로 데미지를 주는 장면은 없다. 몇 번 안타까운 감정이 들긴 하지만, 결국 결말에 이르면 그 모든 것을 예술적인 모호함 안에서 정리하고 깔끔하게 마무리 한다.

#.

누가 보아도 참으로 '김영하다운' 소설이라 하겠다.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성실하게 자신의 작품으로 만든 것도 사실이다. 자신의 이름값에 걸맞게 어느 정도 이상의 퀄리티의 소설을 꾸준히 뽑아내 주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살인자의 기억법' 역시 그런 범주에 충분히 들어갈만한 작품인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댄디한 문학가에게, '그래도 그 이상의 뭔가, 좀 세련되지 못하더라도 걸죽한 것'을 뽑아주기를 바라는 것은 독자의 촌스러운 욕심일까? 어쨌든 다음 작품이 나올 때도 김영하는 '살인자의 기억법'의 김영하가 아니라 그냥 '문단 사상 최초로 귀고리를 하고 시상대에 올라간 작가'일 것 같다. 물론 그게 임팩트가 강한 사건이긴 했겠지만, 그래도 그것보다 임팩트가 강한 소설이 하나 쯤 있다면 더 괜찮은 커리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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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즈쇼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이십대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가
     장  아름다운 자들이 가장 불행하다는 역설. 그들은 비극을 
     살면서도  희극인 줄 알고 희극을 연기하면서도 비극이라고 
     믿는다.  굳이 말하자면 이 소설은 컴퓨터 네트워크 시대의 
     성장담이고  연애소설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십대에 PC통
     신을 경험했고, 거기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어쩌면 나
     는 익명의 인간과 인간이 실시간으로 대화하며 친구와 연인
     으로  발전해갈  수 있음을 알게 된 첫 세대일지도 모른다. 
     온라인은  언제나 부당하게 폄하돼 왔다. 그것은 일회성의, 
     익명의, 무책임한 그리고 심지어는 부도덕한 공간으로 치부
     되었다.  뭐,  전혀 터무니 없는 얘기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나를  비롯한 새로운 세대는 바로 그 '쓰레기' 위에서 자라
     났다.  우리는 거기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연애를 하고 
     논쟁을 벌였다. 
     
     - 김영하, <퀴즈쇼> 작가의 말 중에서
     
     #. 
     
     때로는  소설 본문보다 서문이나 작가의 말이 훨씬 더 멋진 
     소설이  있다. 이를테면 최인훈의 <화두>는 본문이 아닌 서
     문이  수능 언어영역 문제집에 예문으로 나올 정도로, 본문
     보다 서문이 멋진 소설이다. (실제로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
     만  <화두>의 본문은 무척 지루하다) 김영하의 <퀴즈쇼>는? 
     본문도  멋지지만  '작가의 말'은 더더욱 멋지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 PC통신이라는 공간을 통해 전화선으로 소통하
     던  인간들. <접속>이라는 영화로 주목 받았으되, 연애라는 
     작은  틀 안에 갇혀버림으로써 정작 그 소통의 중요성은 폄
     하되어  왔던 그 공간이 키운 아이들... 뒷표지에 적혀있는 
     "그들의 20대에 바치는 소설"이라는 말을 읽었을 때부터 이
     미 나는 감동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 
     
     많은  아이들이 <접속> 이후로, 자연스럽게 '여자를 꼬시는 
     공간'이나 '작업을 걸 수 있는 공간'으로 사이버 월드를 받
     아들여  왔지만,  정작 그 시대를 관통해 왔던 사람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낯선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어려움
     을 겪고 내가 겉돌고 있을 때, 정작 나와 마음 통하는 이야
     기를 나눌 사람들은 파란색 채팅창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영화의 이야기를 하며, 때론 무라카미 
     하루키와  왕가위에 대해서 떠들고, 밤을 새우며 결국 서로
     에 대해 얼굴도 모르면서 나누었던 속 깊은 이야기들... 그
     러면서  언젠가는  저 아이와 커피숍에 앉아 얼굴을 맞대고 
     더 깊고 멋진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 꿈꾸던 환타지, 때
     론  밖에서 누군가에게 짜증나고 화가 나는 일을 당했을 때 
     전화비가 나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
     서 내 이야기를 들어 줄 그 아이를 기다렸던 시간들...
     
     내 남은 평생을 지배할 안타까운 첫사랑을 PC통신에서 만났
     고,  아직도 고맙고 미안한 사람으로 남아있는 첫번째 연인
     도  PC통신에서 만난 사람으로서, 느끼는 첫번째 감동은 김
     영하라는 작가가 얼마나 '그 시대의 우리들'에 대해서 정확
     히 알고 있는가, 에 대한 것이었다. 
     
     #. 
     
     김영하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미장센에 있어서 의외의 예리
     함을  갖춘 작가이다. 이를테면 비행청소년들을 그린 <비상
     구>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도로를 질주
     할  때 그들의 카스테레오에선 젝스키스의 <기사도>가 흘러
     나온다.  문단의 누구도, 그 어떤 평론가도 그 점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지만 김영하의 예리한 감각이 가장 빛나는 곳이 
     바로  그러한 지점이다. "폭주 뛸 때는 누가 뭐래도 젝스키
     스,  <로드파이터>는 너무 직접적이고(사실 소설 발표 당시 
     미발매곡), <폼생폼사>는 조금 가볍지, 역시 <기사도>가 가
     장 좋아!"라고 말할 수 있는 작가는 흔하지 않다. 젝스키스
     의  <기사도>  때문에 평가를 받는 작가는 흔치 않지만, 난 
     그 점 때문에 김영하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시대의 공기를 감각적으로 파악해 내는 작가"라
     고. 
     
     <퀴즈쇼>  역시 당시 시대의 공기와, 무엇보다 당시에 꿈꾸
     던 청춘들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묘사한 장면과 문장들로 가
     득하다. 무엇보다 이 책에 대해 한석주 군과 휴대폰 배터리
     가 닳도록 얘기를 나눌 때 지적한 것처럼(서른 하나 평생에 
     남자랑 통화하다 휴대폰 배터리가 나가본 건 처음이다) '벽 
     속의 요정'이란(물론 대화명이다) 인물 자체가 90년대에 파
     란 화면을 보며 PC통신으로 소통하던 세대의 가장 광범위한 
     판타지이다. 재치있는 말솜씨(정확히는 채팅솜씨)와 얕지만 
     광범위한  교양(퀴즈방으로 대변되는), 그리고 우리가 항상 
     채팅의  상대를  대상으로 꿈꾸어왔던 남의 눈에는 잘 띄지 
     않고,  일반인들은  알아보지 못하나 (유독) 우리의 눈에만 
     보이는 귀여움과 미모. 
     
     그리고 무엇보다.
     
     #. 
     
     "저는 얼마 전까지 태어난 곳에서 쭈욱 살아왔거든요. 그래
     서 그런지 하루하루가 무한히 반복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
     요.  그런데 아니더라구요. 다시 반복되는 것은 없는 것 같
     아요.  퀴즈방에서  처음 지원 씨 만났을 때 정말 좋았거든
     요. 그런데 그 느낌, 그 감정은 다시 되살안 날 수 없는 거
     잖아요. 벌써 지나가버린 거죠. 오늘도 이대로 지나가 버리
     면 영원히 다시 경험할 수 없을 거에요."
     
     - 김영하, <퀴즈쇼>
     
     #.
     
     라는 말에,
     
     #. 
      
     "우리 말 놓을까요?"
     
     "왜 갑자기?"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에  민수 씨가 한 말을 반 말로 다시 듣고 싶어서
     요."
     
     - 김영하, <퀴즈쇼>
     
     #.
     
     라고 말해주는 여자. 
     
     #. 
     
     채팅의  위대함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서로의 대화가 무의미
     하게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 아니하고, 조용히 파란 화면 위
     로 스크롤 되어 올라간다는 것이고, 그것이 더더욱 좋은 점
     은  육성으로  들으면 유치하고 낯 부끄러울 이야기도 전혀 
     그렇지  않게  보이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아아, 나는 이 
     뛰는 가슴과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너에게 타이핑하여 전달
     해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민했고, 그 말을 하기 
     위하여  얼마나  오래동안 너를 기다렸으며, 자연스럽게 그 
     말을  꺼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돌려가며 꺼내야 
     했었던가. 가까스로 꺼낸 나의 수줍은 고백에 땀 흘리는 이
     모티콘으로 답하는 너와 점점 위쪽으로 스크롤 되어 올라가
     는 내 고백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 위에 너의 찡그린 얼굴
     을 겹치던 스무 살 무렵의 시간들... 사진과 이미지도 없고 
     동영상도 없고, 음성채팅과 화상캠도 없었으되, 훨씬 더 진
     솔했고 가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시절. 
     
     #. 
     
     고백하자면 현실은 김영하의 <퀴즈쇼>와는 많이 달랐다. 내
     가  진심을 털어놓고 고백한다고, 그것을 반대편의 저 아이
     가 꼭 진지하게 받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 아이에게 그냥 
     저 파란 화면은 일상에서 벗어나 잠깐씩 들리는 놀이공간에 
     불과할  수도 있었고, 어렵게 이야기한 나의 속사정은 스카
     이러브에서  만난  다른 남자와 나눈 시시한 농담보다 못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파란 화면이 구원이라 믿었고, 현실에 
     오고 가는 저 무표정한 인간보다 그녀가 타이핑한 이모티콘
     이  훨씬 더 따뜻하다고 생각했던 소년은, 이모티콘이란 결
     국 부호의 조합일 뿐임을 인정해야 했으니까. 
     
     #.
     
     하지만,  아아  -  김영하는 어쩌면 우리를 이렇게 잘 알고 
     있을까. 그는 우리가 꿈꾸었던 모든 것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보여준다. 우리를 이해해주는 파란 화면 속의 귀엽고 
     어여쁘고  (심지어는) 부유한 연인, 우리의 무용한 퀴즈 지
     식들이  유용을 거쳐, 무협지적 경쟁의 중요한 무공으로 취
     급되는 세계까지. 현실에선 가져보지 못했지만, 그 모든 것
     이 이루어진 <퀴즈쇼>의 세계는 90년대의 PC통신과 파란 화
     면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매혹의 공간이
     다.
     
     #. 
     
     무턱대고  자신을  열어젖히고, 너도 열어달라고 떼를 쓰던 
     소년에게 현실의 자신의 연인을 밝히던 여자는 이렇게 말했
     었다;
     
     "그 사람을 만난 것도 널 만난 것보다 나중이었고, 그 사람
     보다 네가 나를 더 잘 알 거야."

 

     
     그  이후에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있었는데 기억 
     못하는  것일지도. 어쨌든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 파란
     화면 위에 우리가 나눠왔던 이야기는 그냥 심심풀이였을까. 
     그건 그냥 나우누리 서버 어딘가에 흔적으로만 남아있을 소
     모품이었을까.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던 속 깊은 이야기들
     을  털어놓고는, 그것은 그냥 아무 의미도 아니었다고 이야
     기하는 사람에게 대꾸하는 법을, 그때 난 배우지 못했었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김영하의 <퀴즈쇼>에는 그런 
     일 따윈 없다. 원래 그때 내가 알았고, 꿈꾸던 세상은 김영
     하의  <퀴즈쇼>같아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난  활자  속에서 그때 내가 꿈꾸었던 세상을 본다. 그래서 
     결국, <퀴즈쇼>는 일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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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 정유정 장편소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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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심장을 쏴라]나 [7년의 밤]을 아직 읽지 못했다. 그러므로, [28]은 내가 처음 읽는 정유정의 소설인 셈이다. 사실 읽기 전에 꽤 기대가 많았다. 그녀의 전작인 [7년의 밤]은 천명관의 [고래]와 함께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서 꼽은 '2000년대 가장 재미있는 소설' 중 한 편이었다. 그리고 [28]은 [7년의 밤]을 쓴 그녀가 또 한 번 수 년간의 준비기간을 통해 내놓은 신작이었고, '인수공통전염병'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다룬, 한국에서 보기 드문 '재난소설'이기도 했다. 전작인 [7년의 밤]에서도 보여준(그러나 역시 난 아직 보지못한) 장르문학과 순수문학을 절묘하게 줄타기 하는 솜씨와, 동시에 수없이 많은 퇴고를 거쳐 치밀하게 엮어놓은 구성과 정밀하게 가다듬은 문장들을 처음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처음 독서를 시작하고 느낀 것은 '불친절하다'는 것이었다. 문장을 가다듬고 가다듬어서 수식어가 최대한 절제되어 있고 문장들이 건조하다는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사실 그건 코맥 맥카시나 데니스 루헤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전염병이 시작되고 사건이 진행되기 시작하면서는 초반에 비해 훨씬 잘 읽히기는 했지만, 계속해서 드는 느낌은 문장과 문장 간의 '점도'가 떨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런 글들이 읽다. 점도가 높아 끈적끈적대는 문장. 앞의 문장과 뒤의 문장이 늘어진 엿가락처럼, 더럽게 표현하자면 늘어진 가래침처럼 끈덕이며 붙어 있어, 한 문장을 읽고 나면 끊지 못하고 다음 문장, 다음 문장을, 또 다음 문단, 다음 문단을 계속해서 읽게 된다. 그런데 정유정의 문장은 그런 끈적임이 거의 없다. 너무 정제하고 정제해서 맑아지기는 했는데, 그러다보니 맛조차 없어져서 목넘김 없이 넘기게 되는 물맛이랄까. 

아, 물론 익히 들어온 바와 같이 이게 구상과 자료조사에 대단한 노력을 들였다는 것은 알겠다. 실제 소설을 읽어보면, 사실 자료조사에 쓰인 데이터들이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선수끼리는 아는 법이니까. 정유정은 자신이 만들어 낸 '화양'이라는 가상도시를 완벽하게 틀어쥐고 그 안에 지옥도를 펼쳐 놓는다. 조사한 자료들을 따옴표 없이 직접 인용하면서 난 체 하는 것은 사실 하수들이 하는 짓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그 지옥도를 묘사하기까지 몇 번이고 많은 밑그림을 그리고 지웠는지는 충분히 알겠다. 그리고 인물간의 관계들도 얼마나 정성스럽게 하나하나 고심해서 만들어 냈는지도 알겠다. 아마 [28]을 쓰는 그녀의 방의 벽은 포스트잇으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정성스럽게 만들어 낸 관계들의 끝은 그닥 정성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단순히 인간성의 밑바닥을 긁어내는 듯한 지옥도라는 상황에 던져진 탓인지 정유정의 인물들은 기계적으로 움직인다는 느낌을 저버릴 수 없다. 악역으로 등장하는 사이코패스 살인마의 활동이나 최후도 그닥 임팩트 있지 않고, 보살펴주던 개에게 최후를 맞이하는 수의사의 모습도 그닥 숭고해 보이지 않으며, 한 때는 적이었다가 연인이 된 남자의 마지막을 보는 여자의 슬픔도 그닥 와닿지 않는다. 그리고 이 소설의 클라이맥스를 담당하고 있는 '대학살'의 밤도 그닥 마찬가지다. 정제되어 건조한 문장으로 묘사하는 그런 모습들엔 뭔가 있어야 할 점도가 빠져 있다. 

뜬금없이, 얼마 전 읽었던 이사카 고타로의 [종말의 바보]가 생각났다. [종말의 바보]는 미국의 대통령이 '8년 후에 지구에 거대한 소행성이 떨어져서 지구가 멸망합니다'라는 뉴스를 전한 뒤 5년 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처음엔 혼란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이내 자리를 잡고 저마다 자신들의 일상을 소소하게 지켜내면서 3년 후의 종말을 기다린다. 집나간 딸과 화해를 하고, 비디오 가게에서 영화를 빌려보고, 때론 종말을 함께 할 남자친구를 찾아보기도 하면서.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아무리 그래도 종말이 3년 후인데!) 참 일본적인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종말이 다가오면 대형수퍼마켓을 약탈하고, 모터사이클을 탄 스킨헤드가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가 미국적이라면 [종말의 바보]는 일본적인 이야기가 아니겠느냐고. 

근데 솔직히 [28]이 보여주는 지옥도는 한국적인 종말의 이야기로는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김이환의 [절망의 구]를 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한국적인 정서보다는 뭔가 더 유니버설한 컨벤션에 기대고 있는 느낌이랄까. 

사실 [28]은 건조한 문체도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영미권의 장르문학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사이코패스 살인마인 '동해'의 존재가 그러한데, '동해'는 (나름 어린 시절의 학대를 이유로 제시하긴 하지만) 서양의 스릴러 소설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인물상으로 보인다. 또한 이 소설의 어느 누구도 '한국적인 정서'의 이유를 가지고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 설사 한국적인 정서라고 해도 그것은 '타워' 등의 재난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1차원적인 모티프에 한정되어 있다. 

나는 [28]이 한국문단에서 어떻게 평가받을지 모르겠다. 다만 종종 느끼는 점인데, 순수문학계에 있는 작가가 장르적인 소설을 썼을 때, 그 장르적인 완성도와는 별개로 평가하려는 분위기가 나는 못내 신경쓰인다. [28]은, 그냥 평범한 장르소설이다. 전염병을 다룬 재난 소설이며,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은 모두 그런 장르적인 기능 하에서 작동한다. 물론 그런 식으로 따지자면 카뮈의 [페스트]나 코넬료의 [눈 먼자들의 도시]도 장르소설이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그러면 대답하겠다. 이 안의 인물들은 장르적인 기능 밖으로 단 한 발짝도 나가지 못했다고. 
그 와중에 정유정은 (내가 들었던 그녀의 명성과는 달리) 잘 짜인 장르소설을 만드는 것에는 많이 실패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녀의 인물들은 때론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많이 하기도 하고, 때론 너무 멍청하게 행동하며, 때론 너무 어이없이 죽어버린다. 자신에게 걸맞은 지위를 부여받지 못한 채. 그리고 죽어야할 타이밍도 제대로 맞추지 못하고. (끝까지 살아남아 악마가 되어야 할 박동해는 너무 빨리 죽고, 한기준은 뭘 해야 하는지 모르고 헤맨다. 김윤주는 필요에 따라 등장했다 사라졌다 하고, 이는 나수진도 마찬가지다)

장르적으로 실패하면 보통 순수문학 작가는 이제 순수문학의 영역으로 도망쳐 비평적 실패를 보충하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 [28]은 그냥 장르소설이다. 장르의 실패는 깨끗하게 장르 내에서 인정하는 것이 옳다. 

난 아직 [7년의 밤]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명성은 익히 들었다. 그녀가 써낸 [7년의 밤]이라는 스릴러는 부디 순수문학의 영역으로 도망칠 필요없는 진짜 장르문학이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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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excool 2013-09-02 2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는 '7년의 밤'을 읽기 전에 써놨던 글이며, 지금은 '7년의 밤'을 읽은 후입니다. '7년의 밤'은 두말할 필요없는 수작이라고 생각하며, 이에 대해서는 페이스북에 짧게 쓴 바 있으나, 정식 리뷰로 등록하기에는 너무 짧은 글이라 이곳에선 생략합니다.
 
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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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의 한국 문단은 김훈의 [칼의 노래]로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을 맞았다. 2003년의 한국문단엔 박민규라는 괴물 같은 신예가 [지구영웅전설]과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라는 믿을 수 없는 데뷔작을 들고 (차마 얘기하기도 민망할 정도의 진부한 레토릭을 빌려 말하자면) 혜성처럼 등장했다. 그리고 2004년에 또 천명관의 [고래]가 발표 되었다. 마치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포수'라던 최기문이 등장하고, 그 다음해에 다시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포수'인 진갑용이 등장했는데, 또 그 다음 해에 홍성흔이 등장한 90년대 중후반의 프로야구 같다고 할까? 그것은 신인 등장의 법칙이었다. 

꾸준히 한국 소설의 흐름을 따라 잡아왔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천명관의 소설을, 그것도 [고래]를 아직 읽지 않았다고 고해하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맹세컨대 대충 김훈과 김영하와 김연수와 박민규와 김애란 정도만 챙겨주면 2000년대 이후의 한국 소설을 이해하는 것에 그닥 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할 뿐더러, 가끔 김중혁과 이기호와 박형서까지 언급해 주면 어느 정도 양식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고, 최제훈 정도까지 챙기면 '아니 그런 것까지 읽으세요?'란 소리를 들을 정도였기에, 그 흐름 바깥에서 등장한 천명관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것은 허세와 겉핥기의 법칙이었다. 

뒤늦게 읽어본 [고래]에 대해선, 내가 구태여 이야기 하지 않아도 이미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같은 지점을 지적하고 있어서 당혹스러울 정도. 혹자는 예술의 위대함은 수많은 해석을 가능케 하는 '모호함'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고래]는 여러 모로 해석의 여지가 적은 작품이다. 읽을 때 처음 느껴지는 가장 강렬한 느낌은 당연히 마르케스를 비롯한 남미의 '마술적 리얼리즘'에 대한 한국적 번안과 보르헤스의 영향이다. 물론 변사의 어투를 차용한 문체라든지, 전래동화를 연상시키는 서술방식 등을 지적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까지나 '소설을 쓰겠다'는 의도에서 바라봤을 때, 먼저 보르헤스나 마르케스의 소설을 한국식으로 번안하겠다는 의지가 존재하고 나서, 그 이후에 실천적 방법론으로 변사적 문체라든지 전래동화적 서술방식을 끌어들였다고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한때 소설을 써보았던 동업자들만이 느낄 수 있는, 지레짐작의 법칙이었다. 

한국의 소설은 80년대에 이미 조세희의 '난.쏘.공'의 성공을 시작으로 리얼리즘의 세계에서 그 전통을 세웠다. 한국 소설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현실에 기반한 리얼리즘이 메인스트림을 형성했으며, 이문열이나 고원정, 이승우 등이 어느 정도 우화적인 세계로 도망치면서 문학적인 완성도를 보여주는 와중에도 그 우화의 핵심은 정치적 현실에 기반해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90년대 들어 하루키 열풍이 몰아치고, 그것이 다시 하루키를 따라 피츠제랄드 등의 영미문학의 감수성을 세례받은 젊은 작가 세대들이 등장하면서, 한국 문학의 전통은 완벽하게 기존의 리얼리즘과 단절되고,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고독과 감성을 이야기하는 단계로 전환하게 된다. 80년대의 메인스트림이자 베스트셀러였던 이문열, 황석영, 조정래, 박경리의 소설과 하루키의 등장 이후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이후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가 된 김영하, 김연수, 박민규, 김애란, 김중혁의 소설들이 같은 전통에서 쭉 이어져 나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한국의 세대가 90년대에 극심한 단절을 겪었던 것처럼, 소설 역시 그러하다. 90년대 후반 이후에 등장한 젊은 한국 소설가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80년대의 한국소설보다는 20년대 재즈 제너레이션 시대의 영미소설가로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영미문학의 전통에 더 기대어 있는 듯 보인다. 

그 와중에 등단 이전의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특이하게도) 한국문학도, 영미문학도 아닌 보르헤스를 흉내낸 습작들을 한두 편 씩 써본 경험이 있다는 것은, 천명관의 [고래]를 이야기 해보기에 앞서 한 번 흥미롭게 바라보아야 할 지점이다. 실제로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의 대학생들은 도서관에서 접한 보르헤스의 소설과 마르케스의 세계에 적잖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그중 작가를 지망하는 많은 이들은 이를 모방하려는 시도들을 많이 했었다. 그것은 습작의 법칙이었다. 이러한 시도들은 때론 발표와 출판으로 이어지기도 했었는데, 등단한 작가 중 대표적인 경우로는 김연수의 단편집 [스무 살]에 수록된 소설들이 그러하고, 정식 등단을 거치지 않은 작가로는 이적의 [지문사냥꾼]이 이러한 현상을 잘 보여지는 사례로 꼽힐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천명관의 [고래]는 이러한 시도의 연장 선상에 있지만, 앞서의 단순한 시도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한 강력한 무게감을 가진다. 그것은 이 소설이 문학동네 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압도적인 서사의 분량과 완성도를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3대에 이르는 가족사를 정리하며 수십 명의 등장인물들을 움직이면서도 숨막히는 흡인력으로 독자를 몰고 가는 힘은 가히 명불허전이다. 더군다나 이야기 전개가 간결하거나 절정을 향해 직선으로 돌파하는 진행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러한 성과는 더 놀랍다. 이야기는 - 전래동화적 구성에 걸맞게 - 때로는 시간을 건너뛰기도 하고, 때로는 곁가지로 새기도 하며, 때로는 한없이 먼길을 구성지게 돌아가기도 하는데도 그 호흡이나 흐름에는 한 줌의 흐트러짐도 없이 독자를 몰고 간다. 이는 숨쉴 틈 없이 떠들어 대는 변사의 너스레처럼 압도적인 서사의 분량에 있을 것이다. 천명관 작가 스스로도 본인은 소설을 쓸 때 '쏟아져 나오는 이야기를 내 스스로 감당할 수 없을 때가 있다'라고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고래]의 이야기의 분량이 그러하다. 447페이지라는 것이 한 권의 소설로는 결코 적은 분량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지만, [고래]가 다루고 있는 서사의 양 - 3대에 얽힌 가족사와 그에 얽힌 수십 명의 이야기 - 에 비하자면, 사실 엄청나게 압축된 이야기인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스토리를 가지고 [토지] 정도의 분량의 소설을 쓸 수도 있지 않은가.

사실 [고래]의 이야기는 경제적인 작가의 관점에서 보자면 '낭비'에 가까운데, 낭비도 그냥 낭비가 아니라 거의 90년대 거품경제의 극점에 서있는 오렌지족 급의 과소비다. 핵심에서 한없이 벗어나 있어서 쳐내야 할 이야기조차도 만연체로 길게 길게 늘어지는데, 그러한 '장황함'이 단점보다는 외려 재미를 준다. 하드보일드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KTX를 타고 질주하는 경제적인 여행이라면, 천명관의 [고래]는 충청도에서 전라도로 다시 경상도로, 다시 남해의 섬으로, 통영으로 조선팔도를 볼 것 다 보고 먹을 것 다 먹고 가는 유람의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래]가 여타의 비슷한 시도들과 구분되면서 위대한 작품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 지점은, 보통 이러한 류의 작품들의 빠지게 되는 가장 큰 함정인, 집중력을 잃고 이야기와 서사와 문체에 스스로 함몰되어 버리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 돌아 온갖 것들을 보고 즐기고 맛보며 왔는데도, 클라이맥스에 이른 이야기는 독자의 심장을 정확하게 저격한다. 절정까지 지치게 만들지 않은 것이다. 춘희의 아이가 죽고, 춘희가 정신을 잃은 채 쌓아놓은 벽돌을 발견하는 장면에서 느끼게 되는 정서적인 감동은, 앞의 혼돈스런 여행에도 전혀 지치지 않은 순수한 카타르시스를 그대로 간직하게 한다. 그것이 [고래]를 진정으로 위대하게 만드는 지점인데, 이것은 앞의 너스레와 서사가 사방팔방으로 튀면서도 정서적인 긴장의 끈을 놓지 않게 하는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절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작품을 쓰는 것은 진정으로 작가에게 어려운 일인데, 그것은 이러한 균형을 절묘하게 유지한 대부분의 작품이 그러하듯 - 이를테면, 액션과 드라마와 서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면서도 절묘하게 균형을 지키면서 놓지 않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나이트]를 들 수 있겠다 - 작가의 역량보다는 절묘한 우연과 행운에 의해, 즉 '예술의 신이 굽어 살피셔서 점지하신' 작품에만 찾아오는 행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기 보다는 하늘에 달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놀란과 천명관은 그리고 그러한 하늘의 간택을 받았고. 그리고 불행히도 대부분의 예술가는 그러한 행운을 보통은 생에 한 번 밖에 누리지 못한다. 만약 두 번 이상 그러한 행운이 계속 된다면 그때는 그것이 하늘의 점지가 아니라 본인의 역량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물론 천명관이나 놀란 모두 아직 그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것은 로또의 법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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