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즈쇼 - 2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
     
     이 소설을 쓰는 내내 이십대라는 존재에 대해 생각했다. 가
     장  아름다운 자들이 가장 불행하다는 역설. 그들은 비극을 
     살면서도  희극인 줄 알고 희극을 연기하면서도 비극이라고 
     믿는다.  굳이 말하자면 이 소설은 컴퓨터 네트워크 시대의 
     성장담이고  연애소설이라 할 수 있다. 나는 이십대에 PC통
     신을 경험했고, 거기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났다. 어쩌면 나
     는 익명의 인간과 인간이 실시간으로 대화하며 친구와 연인
     으로  발전해갈  수 있음을 알게 된 첫 세대일지도 모른다. 
     온라인은  언제나 부당하게 폄하돼 왔다. 그것은 일회성의, 
     익명의, 무책임한 그리고 심지어는 부도덕한 공간으로 치부
     되었다.  뭐,  전혀 터무니 없는 얘기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나를  비롯한 새로운 세대는 바로 그 '쓰레기' 위에서 자라
     났다.  우리는 거기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연애를 하고 
     논쟁을 벌였다. 
     
     - 김영하, <퀴즈쇼> 작가의 말 중에서
     
     #. 
     
     때로는  소설 본문보다 서문이나 작가의 말이 훨씬 더 멋진 
     소설이  있다. 이를테면 최인훈의 <화두>는 본문이 아닌 서
     문이  수능 언어영역 문제집에 예문으로 나올 정도로, 본문
     보다 서문이 멋진 소설이다. (실제로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
     만  <화두>의 본문은 무척 지루하다) 김영하의 <퀴즈쇼>는? 
     본문도  멋지지만  '작가의 말'은 더더욱 멋지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 PC통신이라는 공간을 통해 전화선으로 소통하
     던  인간들. <접속>이라는 영화로 주목 받았으되, 연애라는 
     작은  틀 안에 갇혀버림으로써 정작 그 소통의 중요성은 폄
     하되어  왔던 그 공간이 키운 아이들... 뒷표지에 적혀있는 
     "그들의 20대에 바치는 소설"이라는 말을 읽었을 때부터 이
     미 나는 감동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 
     
     많은  아이들이 <접속> 이후로, 자연스럽게 '여자를 꼬시는 
     공간'이나 '작업을 걸 수 있는 공간'으로 사이버 월드를 받
     아들여  왔지만,  정작 그 시대를 관통해 왔던 사람들은 알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낯선 사람들과의 소통에서 어려움
     을 겪고 내가 겉돌고 있을 때, 정작 나와 마음 통하는 이야
     기를 나눌 사람들은 파란색 채팅창 안에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영화의 이야기를 하며, 때론 무라카미 
     하루키와  왕가위에 대해서 떠들고, 밤을 새우며 결국 서로
     에 대해 얼굴도 모르면서 나누었던 속 깊은 이야기들... 그
     러면서  언젠가는  저 아이와 커피숍에 앉아 얼굴을 맞대고 
     더 깊고 멋진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거라 꿈꾸던 환타지, 때
     론  밖에서 누군가에게 짜증나고 화가 나는 일을 당했을 때 
     전화비가 나가는 줄도 모르고, 하루 종일 모니터 앞에 앉아
     서 내 이야기를 들어 줄 그 아이를 기다렸던 시간들...
     
     내 남은 평생을 지배할 안타까운 첫사랑을 PC통신에서 만났
     고,  아직도 고맙고 미안한 사람으로 남아있는 첫번째 연인
     도  PC통신에서 만난 사람으로서, 느끼는 첫번째 감동은 김
     영하라는 작가가 얼마나 '그 시대의 우리들'에 대해서 정확
     히 알고 있는가, 에 대한 것이었다. 
     
     #. 
     
     김영하는  사소하고 디테일한 미장센에 있어서 의외의 예리
     함을  갖춘 작가이다. 이를테면 비행청소년들을 그린 <비상
     구>라는 소설이 있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도로를 질주
     할  때 그들의 카스테레오에선 젝스키스의 <기사도>가 흘러
     나온다.  문단의 누구도, 그 어떤 평론가도 그 점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지만 김영하의 예리한 감각이 가장 빛나는 곳이 
     바로  그러한 지점이다. "폭주 뛸 때는 누가 뭐래도 젝스키
     스,  <로드파이터>는 너무 직접적이고(사실 소설 발표 당시 
     미발매곡), <폼생폼사>는 조금 가볍지, 역시 <기사도>가 가
     장 좋아!"라고 말할 수 있는 작가는 흔하지 않다. 젝스키스
     의  <기사도>  때문에 평가를 받는 작가는 흔치 않지만, 난 
     그 점 때문에 김영하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는 
     누구보다도 시대의 공기를 감각적으로 파악해 내는 작가"라
     고. 
     
     <퀴즈쇼>  역시 당시 시대의 공기와, 무엇보다 당시에 꿈꾸
     던 청춘들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묘사한 장면과 문장들로 가
     득하다. 무엇보다 이 책에 대해 한석주 군과 휴대폰 배터리
     가 닳도록 얘기를 나눌 때 지적한 것처럼(서른 하나 평생에 
     남자랑 통화하다 휴대폰 배터리가 나가본 건 처음이다) '벽 
     속의 요정'이란(물론 대화명이다) 인물 자체가 90년대에 파
     란 화면을 보며 PC통신으로 소통하던 세대의 가장 광범위한 
     판타지이다. 재치있는 말솜씨(정확히는 채팅솜씨)와 얕지만 
     광범위한  교양(퀴즈방으로 대변되는), 그리고 우리가 항상 
     채팅의  상대를  대상으로 꿈꾸어왔던 남의 눈에는 잘 띄지 
     않고,  일반인들은  알아보지 못하나 (유독) 우리의 눈에만 
     보이는 귀여움과 미모. 
     
     그리고 무엇보다.
     
     #. 
     
     "저는 얼마 전까지 태어난 곳에서 쭈욱 살아왔거든요. 그래
     서 그런지 하루하루가 무한히 반복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
     요.  그런데 아니더라구요. 다시 반복되는 것은 없는 것 같
     아요.  퀴즈방에서  처음 지원 씨 만났을 때 정말 좋았거든
     요. 그런데 그 느낌, 그 감정은 다시 되살안 날 수 없는 거
     잖아요. 벌써 지나가버린 거죠. 오늘도 이대로 지나가 버리
     면 영원히 다시 경험할 수 없을 거에요."
     
     - 김영하, <퀴즈쇼>
     
     #.
     
     라는 말에,
     
     #. 
      
     "우리 말 놓을까요?"
     
     "왜 갑자기?"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에  민수 씨가 한 말을 반 말로 다시 듣고 싶어서
     요."
     
     - 김영하, <퀴즈쇼>
     
     #.
     
     라고 말해주는 여자. 
     
     #. 
     
     채팅의  위대함은 대화를 나누면서도 서로의 대화가 무의미
     하게 공기 중으로 흩어지지 아니하고, 조용히 파란 화면 위
     로 스크롤 되어 올라간다는 것이고, 그것이 더더욱 좋은 점
     은  육성으로  들으면 유치하고 낯 부끄러울 이야기도 전혀 
     그렇지  않게  보이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아아, 나는 이 
     뛰는 가슴과 솟구쳐 오르는 감정을 너에게 타이핑하여 전달
     해  주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고민했고, 그 말을 하기 
     위하여  얼마나  오래동안 너를 기다렸으며, 자연스럽게 그 
     말을  꺼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돌려가며 꺼내야 
     했었던가. 가까스로 꺼낸 나의 수줍은 고백에 땀 흘리는 이
     모티콘으로 답하는 너와 점점 위쪽으로 스크롤 되어 올라가
     는 내 고백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 위에 너의 찡그린 얼굴
     을 겹치던 스무 살 무렵의 시간들... 사진과 이미지도 없고 
     동영상도 없고, 음성채팅과 화상캠도 없었으되, 훨씬 더 진
     솔했고 가슴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던 그 시절. 
     
     #. 
     
     고백하자면 현실은 김영하의 <퀴즈쇼>와는 많이 달랐다. 내
     가  진심을 털어놓고 고백한다고, 그것을 반대편의 저 아이
     가 꼭 진지하게 받아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 아이에게 그냥 
     저 파란 화면은 일상에서 벗어나 잠깐씩 들리는 놀이공간에 
     불과할  수도 있었고, 어렵게 이야기한 나의 속사정은 스카
     이러브에서  만난  다른 남자와 나눈 시시한 농담보다 못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파란 화면이 구원이라 믿었고, 현실에 
     오고 가는 저 무표정한 인간보다 그녀가 타이핑한 이모티콘
     이  훨씬 더 따뜻하다고 생각했던 소년은, 이모티콘이란 결
     국 부호의 조합일 뿐임을 인정해야 했으니까. 
     
     #.
     
     하지만,  아아  -  김영하는 어쩌면 우리를 이렇게 잘 알고 
     있을까. 그는 우리가 꿈꾸었던 모든 것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보여준다. 우리를 이해해주는 파란 화면 속의 귀엽고 
     어여쁘고  (심지어는) 부유한 연인, 우리의 무용한 퀴즈 지
     식들이  유용을 거쳐, 무협지적 경쟁의 중요한 무공으로 취
     급되는 세계까지. 현실에선 가져보지 못했지만, 그 모든 것
     이 이루어진 <퀴즈쇼>의 세계는 90년대의 PC통신과 파란 화
     면을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매혹의 공간이
     다.
     
     #. 
     
     무턱대고  자신을  열어젖히고, 너도 열어달라고 떼를 쓰던 
     소년에게 현실의 자신의 연인을 밝히던 여자는 이렇게 말했
     었다;
     
     "그 사람을 만난 것도 널 만난 것보다 나중이었고, 그 사람
     보다 네가 나를 더 잘 알 거야."

 

     
     그  이후에 그녀는 아무 말이 없었다. 아니, 있었는데 기억 
     못하는  것일지도. 어쨌든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 파란
     화면 위에 우리가 나눠왔던 이야기는 그냥 심심풀이였을까. 
     그건 그냥 나우누리 서버 어딘가에 흔적으로만 남아있을 소
     모품이었을까.  아무에게도 할 수 없었던 속 깊은 이야기들
     을  털어놓고는, 그것은 그냥 아무 의미도 아니었다고 이야
     기하는 사람에게 대꾸하는 법을, 그때 난 배우지 못했었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김영하의 <퀴즈쇼>에는 그런 
     일 따윈 없다. 원래 그때 내가 알았고, 꿈꾸던 세상은 김영
     하의  <퀴즈쇼>같아야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고, 
     난  활자  속에서 그때 내가 꿈꾸었던 세상을 본다. 그래서 
     결국, <퀴즈쇼>는 일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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