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D현경 시리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최고은 옮김 / 검은숲 / 2013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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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꾸준히 사고, 또 읽는 사람이라면 대충 깨닫고 있을 것이다. 책의 띠지나 뒷표지에 적힌 출판사 관계자의 과장된 문구는 어느 정도 걸러 들어야 한다는 것을. 책의 띠지만 보면, 출판되는 모든 책은 내 삶의 폐부를 찌르는 엄청난 깨달음을 담고 있거나,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책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흥미진진한 내용들만을 담고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당연히, 세상엔 띠지의 휘황찬란한 찬사를 감당할 수 있는 책보다 그러지 못한 책이 훨씬 더 많다. 

  쉽게 예를 들자면 - 죄송하지만 - 이응준의 [국가의 사생활] 같은 경우, 작가가 3년 동안 300권의 논문을 조사하며 내놓은 소설이라는 홍보문구를 사용했는데, 소설을 읽고 나서 든 솔직한 심정은 '이딴 걸 쓰는 데 3년이나 걸렸다면, 웬만하면 작가 말고 다른 일을 찾아보시는 게..' 였다. 
 
   각설하고. 

   요코야마 히데오의 [64]의 뒷표지를 보면 '집필기간 10년! 치밀한 구성과 압도적인 스토리 텔링으로 일본소설의 수준을 단번에 끌어올린 걸작'이라는 홍보문구가 달려있다. 책을 다 읽고 난 이후, 지금 생각해보면 요코야마 히데오에겐 참 죄송하고 미안한 일이지만, 그땐 제일 먼저 이응준의 저 소설에 당한 사기가 생각났었다. "선수끼리 왜 이래, 추리소설 한 편을 10년 동안 썼다고? 이봐 히가시노 게이고는 1년에 10권도 쓰더라." 이런 생각도 했었고. 그렇지만 소설을 다 읽고 난 지금의 생각은 조금 바뀌었다. '일본소설의 수준을 단번에 끌어올린'은 조금 호들갑스러운 과장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요코야마 히데오의 [64]는 근래 보기 드문 경찰소설(추리소설이 아니다)의 걸작이고, 이 정도의 소설이라면 충분히 10년 정도의 시간을 성실하게 집필에 할애하면 써야 할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만큼 성실하게 잘 쓰여졌을 뿐더러, 독자를 완벽하게 거머쥐고 가는 소설이다. 

  아무래도 경찰서 내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다룬 추리소설이라면, 그 첫머리에 에드 멕베인의 '87분서 시리즈'를 연상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FBI라는 연방수사국을 제외하면, 각 경찰조직이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미국의 경찰과 일본의 경찰조직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아무래도 요코야마 히데오의 [64]를 에드 멕베인의 소설에 비견하는 것은 곤란하겠지만, 적어도 경찰서 내의 이야기를 최대한 사실적으로 접근한다는 지점은 비슷하다. 하지만 그 둘을 완전히 다른 소설처럼 보이게 하는 것은, 아무래도 독특한 일본의 경찰조직이다. 

  '춤추는 대수사선', '파트너', '케이조쿠'를 비롯한, 일본의 수많은 경찰 추리드라마를 즐기는 이에게라면, 전혀 낯설지 않은 단어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캐리어'라는 단어인데, 이는 한국의 행정고시에 해당하는 국가공무원시험 1종 합격자 중 경찰직에 배속되어 경부보로 임명된 사람을 가리키는 은어이다. 그들은 고속승진이 보장되고 진급에 제약이 없는 위치로, 보통 도쿄대 법학부 같은 명문대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은 반면, 현장 경험이 없는 책상물림이나 현실을 모르고 범죄수사보다 자신의 출세에만 눈이 먼 관료 같은 느낌이 강하다. (실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추리물에서 이런 모습으로 그려진다) 또한 젊은 나이에 높은 계급에 오르면서 지휘권을 가지지만, 동시에 현장경험이 많고 계급은 낮은 논캐리어들과 많은 갈등을 초래하기도 한다. (이 역시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겠고 대부분의 추리물에서 그렇게 그려진다) 

  잠깐. 다시 뒷표지 이야기로 돌아가자. 

  검은숲의 편집자가 정리한 뒷표지의 줄거리는 이렇게 쓰여있다; "14년 전 미제로 끝난 소녀 유괴살해사건. 일명 '64'. 새로 취임한 경찰청장이 시효만료 1년을 앞둔 지금 사건을 마무리하겠다고 나서지만 유족은 청장의 방문을 거절한다. 경찰 홍보실의 미카미는 유족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64'의 담당형사들을 찾아가고, 사건 후 퇴직하거나 은둔형 외톨이가 된 동료를 보면서 그들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직감한다. 그러던 중 '64'를 모방한 유괴사건이 일어나는데......"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이 소개를 보면, 이 줄거리 소개가 얼마나 큰 트릭인지 깨달을 것이다. 거의 애거서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에서 쓰인 텍스트 트릭에 버금갈 정도의 완벽한 트릭이다. 왜 그러냐면.

  일단 줄거리만 보면, 독자는 당연히 '64'가 14년의 간격을 두고 일어나는 두 개의 유괴사건의 범인을 잡는 추리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물론 최종적으로는 두 사건의 범인은 밝혀지지만, 추리물의 방식은 아니다. 조금 과장되게 이야기하자면, 그 두 유괴사건은 이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소재이기는 하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요코야마 히데오의 '64'는 689페이지에서 끝난다. 초반에 주인공이자 화자 역할을 하는 미카미의 이야기가 세팅되고, 14년 전 벌어진 유괴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80페이지 언저리에서 나온다. 자 이제 줄거리 소개에 따르면 64에 대해 사람들이 비밀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밝혀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실은 300페이지 근처에 가서 밝혀진다. 줄거리 소개에 따르면 64를 모방한 유괴사건이 바로 벌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500페이지가 넘어서야 벌어진다. 그런데 놀랍게도 채 100페이지가 되지 않아서 범인이 밝혀지고, 이야기가 정리된다. 심지어 탐정의 추리도,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도 거의 없다! 

  그럼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은 당연히 궁금할 것이다. 도대체 두 개의 유괴사건 없이 이 책의 남은 내용 - 그러니까 64가 첫 소개되는 80페이지부터 두 번째 모방 유괴사건이 일어나는 4백 페이지 넘는 공간 - 은 어떻게 채워진 것인가! 줄거리 소개에 담긴 내용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대한 분량을 어떻게 채웠을지 짐작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이것은 추리물도 아니라고 했다. 그렇다면 과연 700페이지에 가까운 이 두꺼운 소설은 무슨 재미로 읽을 것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 중간에 담겨진 내용은 두 개의 유괴 사건보다 훨씬 더 재밌고 흥미진진하다. 

  요코야마 히데오는 지방경찰서 내의 캐리어와 논캐리어 간의 갈등, 본청과 지방경찰 간의 조직에서 발생하는 갈등, 또한 경찰과 언론 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경찰서를 배경으로 한 [하얀 거탑]을 만든다. [64] 내에 등장하는 경찰들은 유괴범과 두뇌싸움을 벌이는 것이 아니다. 경무부와 형사부가 서로의 배에 칼을 하나씩 삼켜두고 두뇌싸움을 벌이고, 경찰 홍보부와 지방지 기자들이 음모와 배신으로 반목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엎치락 뒷치락 하는 사건의 전개는 사건을 추리하는 재미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 형사부에서 밀려나 홍보부에 자리잡은 주인공이자 화자인 미카미를 비롯한 홍보부의 인물들, 경무부의 간부들, 형사부의 형사들, 기자들까지 모든 캐릭터가 살아있고, 그들이 부딪치는 모습에 넋을 잃고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64의 범인이 궁금하다는 사실조차 잊게 될 때가 있는 것이다.

  물론 요코야마 히데오는 64를 허투루 다르지는 않는다. 이 사건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64의 망령에서 허우적 대고 있다. 캐리어 출신들은 64를 이용해 경찰서를 장악하려 하고, 반면 형사들은 64로 인해 발생한 커다란 함정에 버거워 하며 그들에 맞선다. 그렇게 인물들을 따라가며 독자 역시 허우적 대고 있노라면 이런 질문이 머릿속에 들기 시작하는 것이다. 

  "도대체 이 소설을 어떻게 끝내려고 하지?"

  500페이지가 넘어서야 64를 모방한 유괴사건이 벌어지는데, 이쯤 되면 독자 역시 소설 내내 기자와 경무부와 형사부에 치이며 완전히 지쳐버린 미카미의 심정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이미 빠져나갈 길은 없어 보이는데, 책은 200페이지가 채 남지 않았다. 도대체 어떻게 끝내지? 어떻게 끝내지? 하며 미친 듯이 책장을 넘기고 나면 약간은 허무한 요코야마 히데오의 결말과 만나게 되는데, 다소 그곳에서 실망할 수는 있겠지만, 뭐 그 정도쯤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재밌게 600페이지 이상을 읽고 난 후다. 

  다 읽고 난 후 뒷표지를 다시 본다. 솔직히 말해 아직도 '일본소설의 수준을 단번에 끌어올린'이란 호들갑에는 동의하지 못하겠다. 아니, 일본 전체 소설의 수준을 단번에 끌어올릴 정도의 위대한 소설이 지구상에 존재하긴 할까. 뭐, '선수끼리' 그 정도의 과장은 접어주고 읽어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의 소설을 쓰려면 성실하게 써도 10년 정도 걸릴 수 있다는 것에는 충분히 동의한다. 아마 다 써놓고도 두 번 정도 다시 썼을 것이다. 경찰조직과 주변의 인물과 사건을 묘사하는 데 들인 정성과 노력은 단 100페이지만 읽어도 확실히 알 수 있다. 더군다나 작가가 경찰생활을 따로 해본 것도 아니니, 모든 것은 취재와 조사의 결과일 것이다. 그 모든 것이 너무 생생하게 잘 살아 있는 소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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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iple 2015-04-29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으면서 `64를 모방한 사건은 대체 언제 일어나는 거지?!`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네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