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남의 인식론(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의 서문 격인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한 매니페스토>와 나란히 배치돼 있는 <지식인-행동가들을 위한 미니페스토>라는 글을 소개하려 합니다. 기존의 급진적 사유와 실천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급진주의의 불가능성과 새로운 가능성

이 글은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시대에 진정한 급진주의는 가능한가?” 저자는 오늘날 글로벌 노스(선진국 사회)에서 급진적 사상이 급진적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기존의 혁명적 담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급진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훈련 해제와 새로운 사유 방식

기존의 사유 방식과 실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저자는 이를 훈련 해제(Untraining)’자기 재발명(Reinvention)’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지식인들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보다 실천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학문적 이론이 현실과 단절되지 않고 실천과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결한 이들과 후위 이론

글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개념 중 하나는 좋은 삶(Buen Vivir)을 위해 집결한 이들입니다. 이는 기존의 정치적 혁명가나 지식인들이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서 변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실천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이론적 기반을 후위 이론(Subaltern Theories)’이라고 부릅니다. , 기존의 전위적 이론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태어나는 이론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인-행동가들을 위한 미니페스토>는 오늘날 우리가 변화와 혁신을 꿈꿀 때, 어떤 자세로 사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기존의 도그마와 정통성을 넘어서, 우리가 어떻게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고 있죠.

 

지난번 글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한 매니페스토>와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https://blog.aladin.co.kr/alephbook/16295520

 




 

지식인-행동가들을 위한 미니페스토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지음, 안태환·양은미·박경은 옮김, 남의 인식론, 알렙, 2025)

 

이 책은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하는 모든 이들의 성공에 기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이 제한적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책이 선의 이쪽에서 쓰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의 사유는 선의 저쪽에 있지만 책으로서의 삶은 이쪽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이 책을 가장 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읽힐 것이다. 내 판단으로는, 이 책으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도 있는 사람들은 아마 이 책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읽을 수 있다고 해도 아마 읽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것이고, 설사 관심을 갖는다 하더라도 십중팔구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잘해야 마지못한 동맹자일 뿐이다. 비록 이 책이 표현하는 연대는 결코 마지못한 것이 아니지만 말이다. 어떤 경우든, 동맹자는 기껏해야 상대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 책의 기여가 미미할 것이라고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다른 시대들, 예를 들어 유럽의 탁월했던 17-18세기와는 달리, 우리 시대의 글로벌 노스에서는 급진적 사상들이 곧 급진적 실천으로 번역되지 않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 급진적 실천은 현존하는 급진적 사상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이중적 불투명성은 이 책에서 분석될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오늘날 기성 권력이 현 상태의 유전적 코드와 부합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사상과 실천의 만남을 저지할 효율적인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급진주의는 반()자연, 존재의 일탈(aberratio entis)이 되었다. 1677, 유럽 열강들이 스피노자가 임종 직전에 자신의 범신론적 무신론을 포기하고 기독교로 개종했는지 알아내려고 애썼던 (예컨대 첩자들을 고용하는 방법을 통해) 그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신을 믿는 존재라는 증거앞에서의 스피노자의 항복이 몰고 올 파장을 그들은 간절히 기다렸다.

우리 시대에, 진정한 급진주의는 글로벌 노스에서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듯하다. 자신을 급진적 사상가라고 공언하는 이들은 자신을 속이고 있거나 다른 누군가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실천은 그들의 이론과 모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현실을 다루기 위해 보호모와 장갑을 필요로 하는 대학과 같은 기관에서 일한다. 서구 근대성이 지식인들에게 부리는 속임수 중 하나는 그들이 오직 반동적 제도들 안에서만 혁명적 사상을 생산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급진적으로 행동하는 이들은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남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말할 만한 것이 없거나, 말한다 해도 그들의 행동반경 밖에서는 아무도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고, 아니면 심지어 감옥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사회적 해방에 대해 어떻게 글을 써야 할 것인가? 누군가를 오도하거나 역으로 오도당하는 것을 피하려면, 급진적으로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러한 인정에서 출발하여 글을 쓰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서구 근대성의 급진주의로부터 남은 것이라고는 바로 그러한 불가능성에 대한 급진적 인정이 전부다. 그러나 남겨진 것은 결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를 향수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 앞에는 잘 정의된 계획보다는 폐허가 더 많다. 그러나 폐허 또한 창조적일 수 있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재생산과 반복을 조장하는 적대적 조건들 속에서도 창조성과 단절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핵심은 새로운 이론들, 새로운 실천들,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들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주로, 이론화하고 변혁적 집단행동을 생성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상상하는 것이다. 급진주의가 지닌 구성된 불가능성(constituted impossibilities)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구성적 가능성들(constituent possibilities)을 상상할 준비를 더 잘하게 될 것이다.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두 가지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 둘 사이에서 글을 계속 써 내려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가지 불가능성이란 말할 수 없는 것을 소통하는 것의 불가능성(impossibility of communicating the unsayable)과 집단적 저자성의 불가능성(impossibility of collective authorship)을 가리킨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소통하는 것의 불가능성. 지난 200년 동안 앎과 행함 사이의 관계는 그것이 지닌 일반적 성격을 상실하고 단지 근대 과학에 의해 타당성이 입증된 지식과 합리적인 사회공학 사이의 관계로 축소되어 왔다(Santos 2007b). 그 결과, 이러한 고도로 지성화되고 합리화된 영역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자의적으로 간주한 모든 것은 무시되거나 낙인찍혔다. 바깥에는 열정, 직관, 느낌, 정서, 감정, 신념, 믿음, 가치, 신화들로 이루어진 어두운 세계, 키르케고르가 말하듯이 간접적인 방식 외에는 소통될 수 없는 것들의 세계가 있었다. 여러 종류의 실증주의는 배제된 것들이 존재하지 않거나(그저 환상이거나), 혹은 중요하지 않거나 위험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한 환원주의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기하학적 상응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이론과 실천 모두가 자신들의 말할 수 없는 반쪽으로부터 분리되면서, 둘 사이의 관계가 지닌 복잡성과 우연성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론과 실천 모두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상상되면서 이 둘은 서로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의 인도를 받는다고 해서 두 배로 눈이 먼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더 잘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론가들과 지식인들은 기쁨이나 슬픔에 대해서도,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말하는 애도나 축하를 위해서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전자는 이러한 감정들의 이름을 지을 줄은 알지만, 이를테면 스피노자가 이를 정동이라 부른 것처럼, 그것들을 실제로 살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그들은 이러한 감정들의 부재를 사유나 이성의 문제로 만들 능력도 없다. 그들은 사유가 분리해 놓은 것, 즉 삶 그 자체를 통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만일 삶이 구별을 할 수 있다면 많은 구별을 하겠지만, 확실히 감정과 이성 사이의 이런 구별만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삶은 삶으로서의 자기를 부정하게 될 테니 말이다. 이는 특히 변혁적 행동의 삶에서 더욱 그러한데, 거기서 현실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으로 이루어지며, 그것은 오직 이성적 감정들과 감정적 이성들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지식인들의 관심사는 사유의 삶이며, 그것은 삶의 삶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살아진 삶(lived life)은 스피노자의 산출된 자연(natura naturata)처럼 사유보다 덜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살아 내는 삶(living life)과 산출하는 자연(natura naturans)은 분명 사유를 초월한다.

나는 나 자신을 지식인-행동가라고 부름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소통하는 불가능성을 생산적으로 살아 내는, 그리하여 새로운 가능성들을 창출해 내는 하나의 가능한 방식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책은 간접적 소통에 자주 의존한다. 이 책 자체가 많은 간접적 소통을 바탕으로 사유되었다.

집단적 저자성의 불가능성. 저자성에 관한 한, 이 책은 경계가 흐릿하다. 최근 몇 년간 나는 세계사회포럼에서 행동가로 참여하며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투쟁에 깊이 관여해 왔다. 나는 나의 사유가 어느 정도까지 이름도 없고 분명한 윤곽도 없는 집단적 사유의 일부인지 판단할 수 없다. 이 책에서 나 자신의 것은 단지 개인적으로, 그리고 이중의 부재를 완전히 자각하면서 표현된 것뿐이다. 첫 번째 부재는 합리적 형식화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오직 집단적으로만 형식화될 수 있는 것의 부재이고, 두 번째 부재는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합리적으로 형식화될 수 없는 것의 부재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절반은 영원히 쓰이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쓴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을 집단으로부터 분리하는지를 자각함으로써 집단의 일부가 된다.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은 오늘날 세 가지 요인으로 인해 이전보다 더 희망적이다. 첫 번째 요인은 도그마 게임의 종말, 두 번째는 좋은 삶을 위해 집결한 이들이 지식인들에게 맡긴 후위 이론의 임무, 세 번째는 세계의 고갈되지 않는 다양성과 그것이 보여주는 것, 또는 말로 표현될 가능성과 무관하게 그것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도그마 게임의 종말. 지난 200년 동안 낡은 도그마에 대항한 사회적 투쟁들은 거의 항상 새로운 도그마들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회적 해방은 새로운 사회적 규제가 되었고, 낡은 정통성은 새로운 정통성으로 대체되었다. 수단이었던 것이 목적이 되었고, 반란이었던 것은 순응이 되었다. 이제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하는 사회 운동들은 새로운 도그마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서도 낡은 도그마에 맞서 싸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운동들에 따르면, 사회적 해방은 사회적 규제를 전제한다. 즉 규제되지 않은 해방된 사회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해방을 규제하는 것과 규제를 해방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해방을 규제하는 것은 이제는 극복된 옛 조건들을 주도했던 같은 규제의 논리를 (반드시 같은 종류의 규제는 아닐지라도) 새로운 조건에 적용하는 것이다. 반면, 규제를 해방한다는 것은 규제하고자 하는 대상의 조건 그 자체를 새로운 형태의 규제로 확립하는 것이다. 사회적 해방의 목적이 끝-없는-민주주의(democracy-without-end)를 구축하는 것이라면, 규제를 해방한다는 것은 변혁적 실천의 결과로 생겨나는 필요에 맞춰 민주적 해결 방안들을 심화하고 다양화하는 것을 포함한다. 오직 이것만이 수단이 목적이 되는 것을, 새로운 우상들이 옛 우상들을 대체하고 시민들에게 이전과 같은 종류의 복종을 요구하는 것을, 새로운 규칙들이 옛 규칙들이 그랬듯 삶의 필수적인 요소로 자연화되는 것을, 대안의 제거에 맞선 투쟁이 대안 없는 사회로 이어지는 것을, 기술적 해결책에 맞서 정치를 회복하기 위해 채택된 정치적 행동들이 오히려 정치 기술의 해결책이 되어버리는 것을, 행동의 자유와 창의성에 대한 제한이 정확히 이전의 제한과 같은 것이 되어버리는 것을, 변화를 가능하게 했던 비순응이 변화를 방해하는 순응으로 변질되는 것을, 그리고 사회 변혁에 투입되었던 감정과 환상과 열망이 이후에는 정작 그 자체로 단죄되는 것을, 옛 기능들과 단절했던 새로운 기능들이 오히려 새로운 기능들을 가로막는 구조가 되는 것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던 것의 역사화가 다시 새로운 비역사적 진리가 되어버리는 것을, 그리고 위험을 수반하는 변화에 참여한 모든 자들이 지닌 필연적으로 상대적인 무의식이 도리어 그 변화로부터 이익을 얻는 자들의 최대로 가능한 의식이 되어버리는 것을 막을 것이다. 요컨대 목표는, 한때 억압받던 사람들의 무기가 새로운 억압자들의 무기로 변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나는 좋은 삶을 위해 집결하는 이들이 말하듯이, 이것이야말로 내다보이는 목적지를 향한 여정을 끝없는 여정으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새로운 입장은 지식인-행동가들에게 거대한 도전을 제기한다. 특히 그동안 글로벌 노스에서 지식인들의 주도성은 주로 도그마와 정통성의 게임 덕분이었다. 도그마는 공식화(정확한 말)에 있어서나 방향(행동과 태도에 대한 정확하고도 구속력 있는 지침)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로 강렬하다. 도그마는 너무나 강렬하게 지시적이라서 방향의 실재를 실재의 방향과 혼동한다. 도그마는 자율적인 삶의 형태들을 형성한다. 그러한 게임 속에서, 그리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지식인들은 다른 어떤 삶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종류의 삶을 위해 훈련받았고, 그들의 임무는 그것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하에서 집결한 이들이 지식인들에게 제기하는 도전은 거의 딜레마적이다. 그들은 자신이 받은 훈련을 해제하고(untrain) 자신을 재발명해야 하거나, 아니면 이미 그러하듯 앞으로도 계속해서 무의미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 지식인들은 훈련 해제를 선택하기에 앞서 이 딜레마에 대해 의아해한다. 더 강력한 다른 도그마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그마에 맞서 싸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것을 열어 두는 것은 결국 적을 풀어주는 것과 같지 않을까? 삶과 사유를 통합하려는 시도가 둘 모두를 해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반()도그마도 다른 종류의 도그마가 아닌가?

새천년의 시작에 희망적인 것은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전에는 예견되지 않았거나 또는 이론적으로 허용 가능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던 가능성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가능성들은 비이성만이 현재 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의 유일한 대안이 아니며, 혼돈만이 질서의 유일한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진리보다 덜한 것(불확실한 결과를 위한 투쟁의 바탕을 이루는 뒤죽박죽된 이성과 감정들)에 대한 우려는 진리보다 더한 것(예전의 실패들을 설명하면서 진실성을 주장했던 반증된 거대 이론들의 아비투스)에 대한 우려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새로운 가능성들은 새로운 담론과 개념을 가진 새로운 행위자들이 실천하는 새로운 행동들로부터 출현한다. 그것들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중 일부는 정말 매우 오래된 것으로 조상들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것들이 더욱 가시화된 것은 지적으로 인증되었던 사회적 해방의 레퍼토리가 이미 붕괴했기 때문이며, 실상은 새로운 형태에 담긴 낡은 것에 불과한 새로운 것들의 패션쇼가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도그마의 부재는 사실 묘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부재는 맥박에서 느껴지며 보기는 쉽다. 그것은 행동, 에너지, 열망, 또는 지식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열망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대화의 변화와, 공동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합의된 침묵에서 볼 수 있다.

집결한 이들의 참신함을 인정하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그것은 단지 집결한 이들이 침묵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연대의 한 방식일 뿐이다. 분명히, 집결한 이들은 서구 근대성이 저항적 행동들을 침묵시키는 기술들에 얼마나 특화되어 있는지를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지배적 상식에 의하면, 그러한 저항적 행동들은 무지하고 열등하며 후진적이고 퇴행적이며 로컬적이고 비생산적인 사람들, 요컨대 진보와 발전의 장애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기에, 침묵당해 마땅하다. 어떻게 이 강력한 침묵시키는 기계에 맞서되, 대안적이지만 다시금 침묵시키는 기계를 만들어내지 않을 것인가. 이것이 지식인-행동가들이 직면한 더 큰 도전이다. 바로 여기가 그들의 훈련 해제와 자기 재발명이 필요한 지점이다.

후위 이론. 내가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 두 번째 이유는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지식인-행동가들에게 부여한 임무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바로 후위의 이론들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이 책 전반에 걸쳐 더욱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이 임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이 달성될 수 있다면, 이는 새천년의 시작에 가장 위대한 참신함이자, 특히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모든 위성적 억압들이 극복될 수 있다고 진정으로 믿는 이들에게 가장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목격한 이러한 정치적 경험들은 놀라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그 경험들이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를 포함한 서구 근대성의 정치 이론들에 의해 예견은커녕 상상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다른 사례들 중에서도 특히 의미 있는 것은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운동들과 그것들이 몇몇 국가에서 최근 중요한 정치적 변화에 기여한 사례다. 이러한 놀라움은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모두가 원주민들을 사회적정치적 행위자로서 무시해 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위대한 페루의 마르크스주의자인 호세 마리아테기는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건설에서 원주민들에게 역할을 부여했다는 이유로 낭만적이고 포퓰리스트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러한 놀라움은 이론가들과 지식인들 전반에게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 그들이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경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쉬운 대답은 없다. 비판이론가들은 특히 이러한 어려움에 갇혀 있는데, 이는 그들이 전위적(아방가르드) 이론화를 훈련받아 왔기 때문이다. 전위 이론은 그 본성상 스스로가 놀라움에 사로잡히거나 경이로움을 느끼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전위 이론가들의 예측들이나 명제들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존재하지 않거나 무의미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자신이 놀라는 것을 허용하는 도전에 긍정적으로 응하는 것은 훈련 해제와 재발명의 과정이 진행 중이며 성공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신이 놀라움에 사로잡히도록 기꺼이 허용하는 지식인들은 전위 이론의 상상된 참신함이 아무리 기발하고 매혹적일지라도 더 이상 이에 놀라지 않으며, 이미 전위 이론의 시대(선형적 시간관, 단순성, 통일성, 총체성, 결정성의 시대)가 끝났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이들이다. 일단 지식인들이 훈련 해제 과정에 들어서면, 전위 이론들이 지닌 학문 중심적이고 과도하게 지성화되었으며 정체된 성격이 점차 더 분명해진다.

나는 후위 이론들이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의 투쟁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기여함으로써 출현할 수 있는 정서적-지적 지평의 창출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 후위 이론은 오직 그것이 일구어낸 실천적 결과들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이론의 모든 주역들이 이루어낸 변화들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만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 주역들 중 지식인-행동가는 언제나 부차적인 인물일 뿐이다. 다시 말해, 후위 이론들은,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리자면 소품(parerga)과 부록(paralipomena), 즉 비이론적 삶의 형태들의 작은 부분들이다. 그것들은 삶의 형태들 속에 엮인 이론적 개입의 행위들이다. 그것들은 본디오 빌라도처럼 손을 씻지도 않고,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도 아니다. 그것들은 뼈대, 밑그림, 기록, 봉투, 우편 주소를 전문으로 다룬다. 중요하지만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은 것들을.

세계의 무궁무진한 경험과 간접적 소통.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기에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 세 번째 이유는 세상의 문화적, 인지적, 사회적, 민족적-인종적, 생산적, 정치적, 종교적 다양성이 방대하다는 인식이 오늘날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단순히 묘사되고 재현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서, 이제 눈에 보이고 드러나며 느껴지고 시적으로 표현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요인들이 이를 설명해 주고 있고 그중 일부는 이 책에서 분석될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최근 얻게 된 가시성과 그들이 드러내고 축하하는 내부적 다양성이다. 이것이야말로 채널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방식 또는 생태-민족-문화 관광의 단일문화적 다양성을 전면적으로 전복시키는 종류의 다양성이다. 이는 다양성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을 가진 다양성으로, 단일문화적 다양성과 달리 무기력한 동시성을 복잡한 동시대성으로 변모시킨다. 또한 비동시대적 사람들 사이에서 동시성의 행위를 만들어내는 관광객의 시선이나 오락적 시선과는 달리,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의 다양성은 서로 다른 동시대성들 간의, 다시 말해, 동시대적으로 되는 서로 다른 형식들 간의 만남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세계의 다색성(polychromy)과 다성성(polyphony)을 드러내되 그것들을 불연속적이고 통약불가능한 급진적 이질성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통일성은 어떤 본질에도 있지 않다. 그것은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건설해 나가는 과제 속에 있다. 여기에 참신함과 정치적 당위가 자리한다. 즉 동시대성을 확장한다는 것은 평등의 원칙과 차이의 인정이라는 원칙 사이의 상호성의 영역을 확대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사회적 정의를 위한 투쟁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확장된다. 사회적 정의의 통상적 개념에 근거한 부의 분배와 관련된 부정의에, 다양한 시간적 지속을 가지며 따라서 각기 다른 모델의 동시대성을 지니는 다른 많은 차원의 부정의들이 더해진다. 식민주의와 노예제라는 역사적 부정의, 가부장제,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라는 성적 부정의, 젊은이들에 대한 증오와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들에 대한 증오라는 세대 간 부정의,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라는 민족적-인종적 부정의, 그리고 과학의 독점과 과학이 승인한 기술들을 명분으로 세계의 지혜에 대해 저질러진 인지적 부정의가 그것이다.

구조적(기능적이 아닌) 다양성은 매혹적인 만큼이나 위협적이다. 구조적 다양성은 그 안에서 도그마의 종말과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창조할 기회를 보는 이들에게 매혹적이다. 만약 세계의 다양성이 무궁무진하다면, 유토피아는 가능하다. 모든 가능성은 유한하지만, 그 수는 무한하다. 구성된 경험은 구성하는 경험의 잠정적이고 지역적인 구체화일 뿐이다. 현존하는 현실이 이상들과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이상의 불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현실이 이상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은 위협적이기도 하다. 특히 글로벌 노스에서 그러한데, 이는 그것이 서구의 고립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세계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것은 서구 예외주의의 전환점을 나타낸다. 한때 본원적(원형, archetypus)이고 상승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나머지에게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던 것이, 이제는 파생적(모사, ectypus)이고 하강하는 것이 되어, 지속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되고 있는 세계 인식이자 사회와 자연을 경험하는 양식이 되었다.

아마도 이 자율적이고 가능성을 부여하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이 책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진 바와 같이, 훈련 해제 과정의 핵심적 특징일 것이다. 내가 남의 인식론을 제안하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다. 이러한 인정은 과학적 지식만이 유일하게 타당한 종류의 지식이고 그 너머에는 오직 무지만이 있다는 확신을 잃을 때 빠지게 되는 심연들에 대한 안전망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단일언어(monolanguage)와 단일문화(monoculture)에 완전히 사로잡힌 비트겐슈타인식 침묵시키기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해독제이다. 한 언어 또는 문화에서는 말할 수 없거나 명확히 말할 수 없는 것이 다른 언어나 문화에서는 말해질 수 있고, 그것도 명확히 말해질 수 있다. 다른 종류의 대화를 위한 다른 종류의 지식과 다른 대화 상대들을 인정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코드화와 수평성을 지닌 무한한 담론적·비담론적 교환의 장을 여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의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 유리한 세 가지 이유는,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부르는 대로 지식인-행동가 또는 후위 지식인들의 출현을 간접적으로 촉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집결한 이들 중 일부는 어쩌다 이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심지어 그 읽기에 흥미를 느끼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책에 쓰인 채로 남은 것은 하나의 사유-행동 실험이며, 나 자신이 후위 지식인, 따라서 유능한 반란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일종의 사유의 체육관이다. 어쩌면 집결한 이들이 나로부터 배울 수도 있는 것은 내가 계속해서 그들로부터 배우고 있는 것의 충실한 거울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이 (좋은 삶을 위해) 집결한 이들 외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읽히기를 희망한다. 집결한 이들은 아마도 이 책을 살 수 없거나, 어쨌든 이 책에 충분한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이 책은 비록 선의 이쪽에서 쓰였지만, 그 내용은 선의 저쪽에서 생성되었다. 이 책은 오직 내가 이어지는 장들에서 쓰게 될 심연적 선의 종말을 상상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이해 가능하고 희망적일 것이다.

후위 이론들의 출현에 기여하고자 하는 시도는 진행 중인 훈련 해제와 재발명에 대한 반복적인 자기성찰의 연습을 요구한다. 이 맥락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고백록(Confessions)을 쓰면서 했던 웅변적 발언 나는 나 자신에게 문제가 되었다(Quaestio mihi factus sum)”와 비슷하다. 차이는, 그 문제가 더 이상 과거의 오류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오류가 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확신 없이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미래의 건설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독자들은 내가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 여전히, 비록 희망이 없거나 희망 없을 정도로 정직할지라도, 기성 권력이 방심하거나 경계를 느슨히 한 틈을 타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급진주의를 되찾으려는 하나의 시도라는 것을 틀림없이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덧붙이자면, 나는 내가 성공했는지 알 방법이 없다. 따라서 나는 내가 유능한 반란자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내가 쓰는 것을 쓰고자 하는 절박한 충동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침묵되어야 할 것을 침묵시키고자 하는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마지막 문장은 전율스럽다.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운 만큼이나 드물다(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상당 부분 미완성으로 남을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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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삶/부엔 비비르(buen vivir)라는 개념은 케추아어 수막 카우사이(sumak kawsay)에서 유래했으며,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의 이 책에서 그 인식론적 토대가 제시되는 사회적 해방의 개념의 핵심을 이룹니다.

<남의 인식론>은 일반적인 서문 외에 <~~~매니페스토>와 <~~~미니페스토>가 프롤로그 식으로 병치돼 있는데요. 특이하게도 짝수 페이지에 <매니페스토>가, 홀수 페이지에 <미니페스토>가 배치돼서 서로 대위법적 구조를 이룹니다.

오늘 소개하는 글은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한 매니페스토>입니다. 먼저, 요약문을 읽어보시고, 산투스 교수의 원문(한국어 번역)을 읽어 보시지요. 요약문은 ai의 도움을 받아 작성했습니다.



남의 인식론

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정의

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지음

안태환 · 양은미 · 박경은 옮김|536쪽|25,000원|신국판(152*225)

출간일 2025년 2월 25일|ISBN 979-11-89333-90-4 [93300]

사회과학 > 사회학 > 사회학 일반

사회과학 > 정치학/외교학/행정학 > 정치사상사

인문학 > 서양철학 > 서양철학 일반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한 매니페스토> 요약문

좋은 삶을 위한 선언: 부엔 비비르(El Buen Vivir)의 길

지금, 우리는 새로운 대화가 필요합니다. 과거를 돌아보되 거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더 가깝게 끌어당기며, 현재를 넓히고 확장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우리가 모두 같은 곳을 향해 가는 것은 아닐지라도, 같은 출발점을 공유하며 함께 걸어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존재들입니다.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의 억압 속에서 희생당했지만, 저항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피해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존엄을 가지고 있으며, 저항하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원주민이자, 땅과 물, 조상과 미래 세대를 잇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두려움과 현실

우리는 일자리, 땅, 가족, 깨끗한 물,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빼앗길까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가장 불행한 사람들은 이 두려움이 이미 현실이 되어버린 이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함께 연대하며, 이러한 두려움을 바꿔 나갈 수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는 존엄한 삶을 원합니다. 사회적 해방, 21세기 사회주의, 부엔 비비르(Buen Vivir), 식량 주권, 연대 경제, 생태 사회주의 등 다양한 목표를 향해 가지만, 공통된 것은 단 하나, 잘 사는 삶을 위한 투쟁입니다. 우리가 마주한 장애물은 자본주의, 가부장제, 상품물신주의, 불평등한 권력구조이며, 우리는 그것을 넘어설 것입니다.

우리의 연대와 행동

우리는 서로 다른 언어와 사상을 가지지만, 번역하고 소통하며 함께 나아갑니다. 민주주의, 인권, 철학, 대학, 시민사회 같은 기존의 개념들을 새롭게 해석하며, 기존 체제의 틀을 넘어선 변화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본과 권력이 만들어 놓은 경계를 허물고,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고자 합니다.

우리의 교육과 지식

우리가 가진 지식은 학문적 자격증이 아니라, 몸과 삶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배제된 대학과 지식 시스템을 해체하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학습하고 성장할 것입니다. 우리의 지식은 실용적이고 직관적이며, 우리의 경험과 투쟁 속에서 진화합니다.

우리의 무기와 희망

우리는 생명을 위한 무기를 사용하며, 죽음을 위한 무기는 사용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진 무기는 민주주의, 인권, 연대, 그리고 우리의 문화와 역사입니다. 우리는 기쁨 속에서 저항하며, 삶의 예술을 만들어갑니다.

이제, 우리는 변화의 시대에 서 있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억압받는 자로 남지 않기 위해, 존엄한 삶을 위한 선언을 실천할 때입니다. 우리는 부엔 비비르(Buen Vivir)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길에서 함께 걸어갈 준비가 되셨습니까?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한 매니페스토

이제 대화를 바꿀 때가 되었다. 과거는 더 넓게 열어두되 거기에 덜 얽매이게 하는 것이 좋겠다. 미래는 더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좋을 것이다. 현재를, 그리고 세계의 공간을 확장해 나가자. 앞으로 나아가자. 투박한 지도를 들고 여행을 떠나자. 이론과 행동 사이에는 상응 관계가 있을 수 있으나 연속성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반드시 같은 장소에 도달하지는 않을 것이며, 우리 중 많은 이들은 알아볼 만한 어떤 장소에도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같은 출발점을 공유하며,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모두 같은 주소로 향하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함께 걸을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 중 소수는 식민지 언어를 말하고, 대다수는 다른 언어들을 말한다. 우리 중 오직 소수만이 목소리를 가지고 있기에, 우리는 복화술사들에게 의지한다. 우리는 그들을 후위 지식인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그들이 자신들이 늘 잘해 왔던 것, 즉 뒤돌아보는 일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우리로부터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우리 중 뒤처진 이들을 돌보아 다시 투쟁으로 이끌고 누가 뒤에서 우리를 계속해서 배신하는지 밝혀내 우리가 그 이유를 알아내도록 돕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우리를 잘 모를 수 있지만 우리는 마르크스를 안다. 거대이론은 굶주린 이들을 위한 요리책이다. 우리는 보편적이지도, 영원하지도 않다. 우리는 우리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 모든 철학을 폐기한다. 우리는 간디(Mahatma Gandhi)를 알고 간디는 우리를 안다. 우리는 파농을 알고 파농은 우리를 안다. 우리는 투생 루베르튀르(Toussaint L'Ouverture)를 알고 투생 루베르튀르는 우리를 안다. 우리는 파트리스 루뭄바(Patrice Lumumba)를 알고 파트리스 루뭄바는 우리를 안다. 우리는 바르톨리나 시사(Bartolina Sisa)를 알고 바르톨리나 시사는 우리를 안다. 우리는 카타리나 에우페미아(Catarina Eufémia)를 알고 카타리나 에우페미아는 우리를 안다. 우리는 로자 파크스(Rosa Parks)를 로자 파크스는 우리를 안다. 그러나 우리를 아는 이들 중 대부분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는 서류 없는 혁명가들이다.

우리는 우리와 관련된 것으로 여겨지는 사상들을 인증하는 데 전문화된 공인된 지식인들이 많다는 말을 들어 왔다. 그들은 자신들에게는 선의 이쪽 편에 있는 것, 다시 말해 그들이 대학이라 부르는 접근 불가능한 동네들과 요새화된 기관들 안에 거주한다. 그들은 박식한 방종가들이며 면책특권을 소중히 여긴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글로벌 사우스, 즉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그것들에 딸린 모든 위성적 억압들(satellite-oppressions)의 무한한 탐욕에 희생되어 온 창조물들과 피조물들의 거대한 집합이다. 우리는 모든 방위에 존재한다. 우리의 지리는 곧 부정의와 억압의 지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를 대표하지 않는다. 우리는 희생에 순응하지 않으며 따라서 저항하는 자들이다. 우리는 존엄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모두 원주민들이다. 우리에게 주인, 지배자, 또는 관리자가 있기 전부터 우리가 원래부터 항상 있었던 자리에 있기 때문에, 혹은 우리의 의지에 반해 옮겨진 곳에, 그리고 우리에게 주인과 지배자, 또는 관리자가 군림하게 된 곳에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관리자를 두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관리자를 두지 않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강요하고 싶어 한다. 우리가 두려움 없는 우리를 상상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저항한다. 우리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들은 서구의 세계 이해보다 훨씬 더 크다는 생각으로 하나가 된 매우 다양한 인간들이다. 우리는 세계의 변혁이 글로벌 노스(global North)가 예견하지 못한 방식으로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동물과 식물이고, 생물 다양성과 물이며, 대지와 파차마마이고, 조상과 미래 세대이다. 우리의 고통은 인간의 고통보다 뉴스에 덜 등장하지만, 그 고통은 인간의 고통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비록 인간이 그것을 자각하지 못할지라도 말이다.

우리 중 가장 운 좋은 이들은 오늘 살아 있지만 내일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한다. 오늘은 먹을 음식이 있지만 내일은 아무것도 없을까 두려워한다. 그들은 오늘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경작하지만 내일 몰수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오늘은 거리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지만 내일은 오직 폐허만 남을까 두려워한다. 오늘은 가족을 돌보지만 내일 강간당할까 두려워한다. 오늘은 일자리가 있지만 내일 해고당할까 두려워한다. 오늘은 인간이지만 내일은 동물처럼 취급당할까 두려워한다. 오늘은 깨끗한 물을 마시고 원시림을 즐기지만 내일은 물도 없고 숲도 없을까 두려워한다. 우리 중 가장 불행한 사람은 이러한 두려움들이 이미 오래전에 현실이 되어 버린 사람들이다.

우리 중 일부는 2000년대의 첫 10년 동안 열린 세계사회포럼 모임에 참여할 수 있었다. 우리는 참여자들과 연대한다. 비록 참여자들이 우리에 대해 모든 것을, 더구나 가장 중요한 것들조차 말하지 않았을지라도 말이다. 어쨌든 그들은 우리가 우리의 적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우리가 그들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에 대해 그들보다 더 잘 생각한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는 항공모함 같은 생각(aircraft-carrier-ideas)에 연과 같은 생각(kite-ideas)으로 맞서 싸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행동할 만큼 대담하다는 것도 보여주었다. 비록 항공모함은 항공모함이고 연은 연일지라도 말이다. 이것이 정확히 우리 중 일부가 2000년대 두 번째 10년의 시작에 카이로와 튀니스, 마드리드와 아테네, 뉴욕과 요하네스버그의 거리에서, 한마디로 부유한 나라들이 단지 부유한 사람들의 나라라는 것(반면 99%의 가난한 사람들과 그 가족들은 1%의 초부유층 가문들에게 속하는 신봉건적 요새의 바깥에서 산다는 것)이 밝혀진 세계의 거리에서, 분노를 표출하며 입증해 온 것이다. 비존엄에 분노하는 많은 이들이 우리처럼 선 저편에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그들과 연대를 형성해 갈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리 중 일부는 사회적 해방을 향하고 있고, 또 다른 이들은 21세기 사회주의, 부엔 비비르 사회주의를, 또 다른 이들은 공산주의를, 다른 이들은 수막 카우사이(sumak kawsay) 또는 수막 카마냐(sumak qamaña)를, 다른 이들은 파차마마(pachamama) 또는 움마(umma)를, 또 다른 이들은 우분투(ubuntu)를, 또 다른 이들은 인권을, 또 다른 이들은 실질적이고 참된 민주주의를, 또 다른 이들은 존엄과 존중을, 다른 이들은 복수국민성을, 또 다른 이들은 상호문화성을, 또 다른 이들은 사회적 정의를, 또 다른 이들은 스와데시(swadeshi)를, 또 다른 이들은 데모카라시(demokaraasi)를, 또 다른 이들은 민쭈(minzhu)를, 또 다른 이들은 식량 주권을, 또 다른 이들은 연대경제를, 또 다른 이들은 생태사회주의, 그리고 대형 댐과 메가프로젝트에 맞선 반대 투쟁을 향해 가고 있다. 우리는 모든 개념은 개념적 괴물이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경고를 받아 왔다. 우리는 두렵지 않다.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것은, 존엄하게 살기 위해서는, 즉 잘 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수많은 장애물과 싸워야 한다는 사실이다. 많은 장애물이 있지만 그것들은 모두 서로 가족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인간들 사이에, 그리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상품물신주의, 지식의 단일문화, 진보의 선형적 시간관, 자연화된 불평등, 지배적인 척도, 경제 성장과 자본주의적 발전의 생산주의가 그것이다. 존엄한 삶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매우 다양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공통점을 갖고 있다. 바로, 극소수의 이익을 부당하게 대변하며 이루어지는 불평등한 차이들의 무한한 축적이다. 우리는 지상의 빼앗긴 자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지하고 열등하고 지역적이고 특수하며 후진적이고 비생산적이거나 게으르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우리가 겪는 측량할 수 없는 고통과 그것이 초래하는 세계 경험의 소외는 부당하지만, 그것들은 역사적 숙명이 아니다. 우리는 그것들이 제거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그에 맞서 투쟁한다. 그러나 우리의 투쟁은 우리의 목표 그 자체보다는 그것들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우리의 행동과 감정의 질에 더 많이 달려 있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는가? 세계는 우리 자신과 어머니 대지, 이 모두와 관하여 잘 살 수 있는 기회들로 가득하다. 우리는 그 기회들을 활용할 기회를 갖기를 원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원하지 않는 것을 더 잘 안다. 그들 스스로가 ‘선의 이쪽’이라고 부르는 곳에 사는 자들은 우리에 대해 많이 생각한다. 우리 중 가장 운이 좋은 이들을 위해, 그들은 우리의 마을에서 수많은 바자회와 상담 부스가 있는 박람회를 조직한다. 그들은 유전자 변형 식품, 성경책, 지식재산권, 공인 컨설턴트, 역량 강화 처방전, 구조조정, 인권, 사유재산, 잘 포장된 민주주의, 병에 든 생수, 그리고 환경과 관련한 우려를 전시대에 올려놓는다. 우리는 한때 소크라테스가 광장을 거닐면서 많은 호화로운 상품들을 보고 “세상에는 내가 원하지 않는 것들이 이렇게나 많구나!”라고 말했다는 것을 읽은 적이 있다. 오늘날이라면 소크라테스는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우리는 타인들을 통해 언급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말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선의 저쪽에 있는 자들로 여겨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선을 없애기를 원한다.

우리는 어디에 사는가? 우리는 치아파스에, 안데스에, 아마존에, 대도시의 무허가 정착지에,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새로운 그리고 옛 식민자들이 탐내는 땅에, 글로벌 도시들의 게토에, 그들이 댐을 건설하고 싶어 하는 강둑과, 그들이 광석과 광물을 캐내고 생명을 파괴하려는 언덕에, 미국과 브라질, 방글라데시의 노예노동을 이용하는 새로운 플랜테이션에, 우리가 땀과 슬픔으로 주인들의 소비 지상주의적 쾌락을 생산하는 세계의 마킬라도라들에 살고 있다. 우리는 관광객이 절대 가지 않는 곳에, 또는 가더라도 절대 살지는 않을 곳에서 실제로 살고 있다. 세계는 두 종류의 경계에 의해 나뉜다. 하나는 우리가 조건부로 받아들이는 경계들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무조건 거부하는 경계들이다. 전자는 우리가 태어나고 자란 국가의 경계선이다. 우리는 우리의 힘을 아끼기 위해, 그리고 그것이 다른 경계들에 비해 덜한 장애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을 받아들인다. 후자는 벽, 참호, 수로, 철조망 울타리, 경찰차의 저지선, 검문소이다. 무엇보다도 그것들은 사람들의 마음과 법과 정치 속에 심연적 선들을 그어 옴으로써 우리를 선의 저쪽으로 추방해 버린 지도들이다. 최악의 경계는 선의 이쪽 편, 즉 수도가 엑스크레멘티아(Excrementia)인 카카니아(Kakania)에서는 보이지도, 읽히지도, 들리지도 않는, 또는 느껴지지도 않는 경계들이다. 우리는 누군가가 우리에 대해 생각하면서도 더 이상 우리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는 목적으로 그은 선의 저쪽에 살고 있다. 우리는 이전의 혁명들의 성공이 우리를 포함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며 읽히지 않는다. 만일 우리의 여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지금은 더욱 그렇다. 그 혁명들에 의하면 우리에게는 기껏해야 과거만 있을 뿐 미래는 없다. 우리에게는 단 한 번도 역사책을 쓰도록 허락된 적이 없다.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항상 질병이 아닌 다른 원인으로 죽을 위험 속에서, 친목 경기가 아닌 상황에서 부상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할 위험 속에서, 집, 땅, 물, 성스러운 영토, 아이들과 조부모를 잃기 일보 직전의 상황 속에서, 항상 전쟁을 피해 먼 곳으로 이주당하거나 우리의 동네(바리오, barrio) 또는 수용소에 갇힐 위험 속에서 산다. 우리의 민중적, 연대적, 협동적 저축이 GDP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 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위험 속에서, 그들이 발전이라고 부르는 것의 이름으로 우리의 강이 오염되고 우리의 숲이 벌목당하는 것을 볼 위험 속에서, 우리가 열등한 젠더, 인종, 계급 또는 카스트에 속한다는 이유로 대응할 힘도 없이 모욕을 당할 위험 속에서, 우리에게 치명적일 수도 있는, 부유한 아이들의 장난의 표적이 될 위험 속에서, 빈곤해질 위험 속에서, 우리를 도와주는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지 않으면서 가난한 자로서 도움을 받게 될 위험 속에서, 또한 어머니 대지를 지키길 원한다는 이유로 테러리스트로 간주될 위험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는 실로, 너무 많은 위험을 마주하고 있어 결국에는 순응하고 말 수도 있는 위험 속에서 살고 있다.

어떤 종류의 열정이 우리를 추동하는가? 가장 강렬하고 다양하게 경험된 진실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가장 주관적이고 다양한 열정이다. 그 진실은 바로 우리는 존엄한 삶을, 폭력과 수탈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서 자유로운 삶을,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삶을 살 자격이 있으며, 그것을 위해 싸우는 것이 가능하고 우리가 성공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열정적 진실과 진실된 열정의 자녀들이다. 우리는 현실이 현존하는 것으로 축소되지 않으며 현존하지 않는 것의 대부분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었고 또 마땅히 존재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열정적으로 알고 있다. 시간은 우리의 열정을 가라앉히지 못한다. 우리의 형제 에보 모랄레스는 교황 바오로 3세가 1537년 교황 칙령에서 인디오들에게도 영혼이 있다고 선언한 이후 대통령이 되기까지 무려 5세기를 기다려야 했다. 우리가 지금 있는 이 자리에 도달하게 된 것은 바로 그 교활한 칙령으로부터였다.

우리는 누구에 대항하여 싸우는가? 선의 이쪽에서는 모든 것이 매혹적이고, 선의 저쪽에서는 모든 것이 무섭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선에는 양편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일한 존재들이며, 자신이 살고 있지 않은 삶을 상상할 줄 아는 유일한 존재들이다. 우리의 맥락은 다른 모든 것이 가능해지기 위한 조건으로서의 존엄한 삶이 지닌 긴급성이다. 우리는 오직 문명적 변화만이 이를 보장할 수 있음을 알지만, 우리의 긴급성이 그러한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우리는 오래 살기 위해 오늘을 살아 내야만 하고, 역으로, 오늘을 살기 위해서는 오래 살아야만 한다. 우리의 지속(durée)과 시간들은 오로지 우리의 투쟁에 쓸모 있는 것만을 강조한다. 우리의 시간은 평면적이거나 동심원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더 이상 아님(No Longer)’과 ‘아직 아님(Not Yet)’ 사이의 통로들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선의 우리 쪽의 시대가 선의 그들 쪽의 시대와 일치하지만, 이 두 시대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우리와 그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동시대적이다. 우리의 시대는 이전의 모든 시대보다 잠재적으로 더 혁명적이다.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에게 이토록 많은 부당한 고통이 가해진 적이 없었고, 권력과 억압의 원천이 이토록 다양하고 강력했던 적도 없었다. 이 행성의 인간 존재들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비록 모호하고 뒤틀려 있을지언정, 어떤 생각이라도 가지는 것이 오늘날처럼 가능했던 적도 없었다.

지금은 인간과 어머니 대지를 포함하는 전 지구적 차원의 판가름의 시대이다. 아직까지는 어떤 규칙도 없는 판가름의 시대이다. 한편에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그에 딸린 모든 위성적 억압들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글로벌 노스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는 지리적 위치가 아닌 정치적 위치이며 고통의 초국가화(transnationalization)에 점점 더 특화되어 가고 있는 곳이다. 공장이 이전되면서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들, 메가프로젝트와 기업농, 광산업으로 인해 수탈당한 인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농민들, 인종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은 아메리카와 호주의 원주민들, 시우다드 후아레스(Ciudad Juárez)에서 살해당한 여성들, 우간다와 말라위의 게이와 레즈비언들, 너무나 가난하지만 또한 너무나 부유한 다르푸르의 사람들, 살해당하고 콜롬비아 태평양 연안의 끝으로 쫓겨난 아프리카계 후손들, 생명의 순환에 타격을 입은 어머니 대지, 테러리스트로 몰려 세계 곳곳의 비밀감옥에서 고문당하는 사람들, 강제 송환의 위기에 처한 서류 미비 이민자들, 계속되는 폭격 속에서 살아가고 일하고 삶의 순간들을 기념하는 팔레스타인인들, 이라크인들, 아프간인들, 파키스탄인들, 자본주의와 식민주의가 세계의 다른 모든 민족들을 대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경멸과 독단으로 자신들을 대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빈곤한 북미인들, 금융 해적들이 휘두르는 약탈 법칙의 먹잇감이 된 은퇴자들, 실업자들, 그리고 고용 불가능한 사람들.

다른 한편, 우리의 시대는 모욕당하고 천대받은 자들의 귀환의 시대다. 이것이 우리가 글로벌 사우스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희생자가 아니다. 우리는 희생당하는 자들이지만 저항으로 맞선다. 우리는 다수이며 우리의 새로운 배움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한다. 우리의 의견이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우리 안에 배신자들이 있다고 의심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들을 폭로하는 데 전문가다.

다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적들과 공통된 문제를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운명은 어딘가 통하는 바가 있다. 그들이 우리에게 가하는, 그리고 최근에 더욱 증가시킨 고통은 종국에는 그들 자신에게 되돌아갈 것이다. 그들 중 가장 분별 있는 자들은 이미 그러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현자 볼테르가 말하곤 했듯이, 모든 전쟁의 원인은 도둑질이다. 집 밖에서 훔치는 법을 배운 자들이 이제 집 안의 사람들로부터 훔치고 있다. 만일 고통, 살인, 모욕, 파괴가 계속해서 증가한다면 지구의 생존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우리의 적들은 이미 폐쇄형 주거 단지가 필요 없는 다른 행성을 식민지화할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우리의 투쟁 중 첫 번째가 우리 자신을 상대로 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현자 마르크스는 철학자들이 세계를 해석하는 일을 다 하고 난 뒤에는 세계가 변화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기 변화 없이는 어떤 변화도 없다. 존엄한 삶 또는 잘 사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비존엄성에 순응하고, 우리에게 강요된 것과 우리가 염원하는 것 간의 차이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작다는 것을 부인하는 한 말이다.

우리는 어떤 확실성을 가지고 있는가? 모든 인간과 비인간 동물처럼, 우리는 가능성들, ‘더 이상 아님’과 ‘아직 아님’ 사이의 통로들에 특화되어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확실성은 가능성과 내기(wager)에 관한 것이다. 그 외의 다른 모든 확실성은 우리를 마비시킬 뿐이다. 우리는 우리를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조건들에 대해 부분적 지식만을 가지고 있으며, 그러한 조건들 자체도 부분적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현자 파농을 따른다. 그에 의하면, 각 세대는 상대적인 불투명함 속에서 자신의 사명을 찾아내고 그런 다음 그 사명을 완수하거나 배반해야 한다. 우리의 가능성은 무한한 것과는 거리가 멀며, 오직 우리가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서만 확정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달리면서 성찰한다. 우리의 길은 반쯤 보이지 않고 반쯤 눈이 멀어 있다. 우리가 벗어나기를 소망하는 족쇄들과 관련한 바로 그 확실성조차도 기만적이다. 시간이 가면서 족쇄들이 편안하게 느껴지고 장식으로 변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그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포함하여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족쇄를 채우게 할지도 모른다.

어떤 종류의 지식이 우리에게 가능한가? 우리의 지식은 직관적이다. 그것은 곧장 긴급하고 필수적인 것을 향해 간다. 그것은 말과 행동이 담긴 침묵(words and silences-with-actions), 감정이 담긴 이성(reasons-with-emotions)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삶과 사유를 구별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우리의 모든 일상성(everydayness)은 매일 세세하게 사유된다. 우리는 우리의 내일을 마치 오늘인 것처럼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중요한 질문들이 없다. 오직 생산적인 질문들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의 지식은 몸에 붙어 있기에 저공비행을 한다. 우리는 느끼며-생각하고(feelthink) 느끼며-행동(feelact)한다. 열정 없이 생각하는 것은 생각을 위한 관을 짜는 것이고, 열정 없이 행동하는 것은 그 관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관심 있어 하는 다양한 지식을 얻는 데 갈급하다. 자신을 열렬히 알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찾고 있는 많은 지식들이 있다. 우리는 잘 살기 위한 우리의 투쟁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지식도 낭비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식들을 섞고 그것들에 국한되지 않는 논리들에 따라 그 지식들을 결합한다. 우리는 저자의 저작권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그것들의 저자가 되기를 원한다.

우리 방식의 지식은 실존적이고 경험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회복력이 있고 유연하며,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카카니아에서 일어나는 것과는 달리, 여기 우리 사이에서는 생각이 곧 사람이다. 그것은 무게를 지니며, 초과 중량의 경우에는 벌금을 낸다. 그것은 옷을 입으며 점잖지 못한 노출로 감옥에 갇힐 수도 있다. 그것은 그 일로 항소를 제기할 수도 있고 그로 인해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우리는 어떻게 교육받는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자격증을 가장 적게 가진 교육자들이다. 우리의 몸과 우리의 삶은 이 세상의 낭비된 지식이며, 우리 자신에게는 객관적이고 우리의 적들에게는 주관적인 지식이다. 그들에 대해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그들의 것이자 우리의 것이고, 그들이 우리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그저 그들의 것일 뿐이다. 대학들은 학과, 책, 경력, 컴퓨터, 종이 뭉치들, 유니폼, 특권, 박식한 담론, 총장, 관리자 등 모든 목록을 완비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교육은 전혀 하지 않는다. 그들의 임무는 우리를 무지한 자로 만들어, 양심의 가책 없이 우리를 무지한 자로 대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기껏해야, 그들은 우리에게 두 가지 악 중에서 선택하는 법을 가르친다. 우리는 그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는 법을 배움으로써 우리 자신을 교육한다. 언젠가 우리가 대학에 들어가게 될 때, 다시 말해 우리가 대학을 점거하고 탈식민화하게 될 때, 우리는 단순히 강의실 문을 열고 벽을 새롭게 장식하는 데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들어갈 수 있도록 문과 벽 모두를 파괴할 것이다.

우리의 무기는 무엇인가? 생명의 모든 무기들이며, 죽음의 무기는 하나도 없다. 사실, 오직 우리 언어로 된 고유한 이름을 가진 무기들만이 우리에게 속한다. 그 외의 다른 무기는 모두 우리의 적들로부터 전리품, 또는 의도치 않은 유산으로서 가져온 것들이다. 민주주의, 인권, 과학, 철학, 신학, 법, 대학, 국가, 시민사회, 입헌주의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무기들을 자율적으로 사용할 때 그것들이 적을 두렵게 한다는 것을 우리는 배운다. 하지만 빌린 무기들은 오직 우리 자신의 무기들과 함께 사용될 때만 효과가 있다. 우리는 유능한 반란자들이다. 우리는 현자 마르코스 반란군 부사령관을 따른다. 그에 따르면, 최고위급 정치인들은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한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본질적인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시간이 끝났다는 것을.

기쁨과 환희는 피해자들이 더 이상 피해자이기를 멈출 때, 그들의 고통이 저항과 투쟁으로 바뀔 때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삶 속에 육화된 예술가들이며, 우리의 예술은 솟구쳐 오른다. 유일하게 추하고 슬픈 진실은 우리에게 강요된 것들이다. 우리가 저항하며 드러내는 진실들은 아름답고 기쁘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동맹자들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가? 우리가 광범한 다수라고 할지라도 사실 우리는 매우 적다. 다른 이들이 우리와 함께하려 하기 전에 우리끼리 먼저 뭉쳐야 한다. 우리는 도움을 요청하지만, 오직 그 도움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만 그것을 사용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도움으로부터 자유롭게 할 때, 우리는 도움 그 자체를 자유롭게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민주주의에 도움을 요청한다. 민주주의는 우리에 대한 두려움에서 발명되었고, 우리는 도리어 항상 민주주의를 두려워해 왔다. 오늘날 우리는 두렵지 않지만 그렇다고 환상도 없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장악하게 될 때 우리의 적들은 그들의 오래된 발명품들, 즉 독재, 폭력, 갈취, 그리고 합법성과 불법성의 자의적 조작으로 돌아갈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적들에 의해 기만으로 변질된 현실에서 스스로를 해방할 때까지 민주주의의 민주화를 위해 싸울 것이다. 우리는 인권이 더 이상 필요 없어지도록 인권의 도움을 요청할 것이다. 적들은 우리를 인권 담론의 전 지구적 객체 집단으로 만들어버렸다. 우리 모두가 인권의 주체가 될 때, 누가 인권이라는 개념을 기억하겠는가? 인간이 비인간을 담아낼 수 있을까? 우리는 신학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키기 위해 해방신학의 도움을 요청한다.

우리의 동맹자들은 우리와 연대하고 있으면서도 선의 우리 쪽에 있지 않기에 목소리를 가진 모든 이들이다. 우리는 ‘연대’가 함정이 되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누구와 어떻게 연대할지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과만 연대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우리는 연대에 조건을 붙인다. 우리와의 동맹은 까다롭다. 우리의 동맹자들은 세 종류의 적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적들, 그들의 적들, 그리고 이 두 종류의 적들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는 상식적인 견해이다. 구체적인 적들은 다음과 같다. 같은 무관심-생산 공장에서 인증받은 편안함과 불편함, 나태함과 그보다 손위 자매 격인 행동을 명령하는 자의 나태함, 일시적인 무감각과 그에 못지않은 일시적 열정, 단지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는 역설, 행동과 무행동 모두를 정당화하기 위한 논거의 부족과 논거의 과잉, 육체 또는 열정 없는 추상적 사고, 실제로 살기보다는 읽기 위한 원칙들의 목록, 통계적 동질성을 겨냥하여 설계된 이해와 재현, 아이러니와 풍자 또는 희극이 없는 비판, 전체로 여겨지면서도 오직 개인으로만 행동하는 것이 정상이라는 믿음, 다른 모든 이들을 경멸하면서 우리를 경멸하는 이들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욕망, 정물에 대한 선호와 살아 있는 자연에 대한 공포, 고객이 되고자 하는 또는 고객을 가지고자 하는 이중의 강박, 부를 잃을까 또는 가난을 잃을까 하는 이중의 두려움, 최악은 이미 지나간 것인지 아니면 이제 곧 닥칠 것인지에 대한 이중의 불확실성, 강박에 대한 강박, 불확실성에 대한 불확실성,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 우리의 적들, 우리가 함께 맞서 반란을 일으켜야 할 자들은 오직 그 다음에야 온다.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동맹자들이 맞서 싸워야 할 적은 그들 자신이다. 즉, 그들이 어떻게 지금의 자신이 되었는지, 그들이 우리의 정직한 동맹자가 되고 싶다면 어떻게 지금의 자신이기를 멈춰야 하는지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의 동지 아밀카르 카브랄(Amílcar Cabral)이 한때 말했듯이, 그들은 계급으로서 자살을 감행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결코 쉬울 리 없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동맹을 구축하는가? 세계는 인간과 자연에게 지나치게 크다. 억압적인 세계는 피억압자에게 지나치게 크다. 억압받는 자들이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항상 소수일 것이며, 그들이 단결하지 않는다면 더욱 소수가 될 것이다. 단결은 힘을 만들어내지만, 가장 훌륭한 힘은 단결을 만들어내는 힘이다. 우리에게는 지도자도 없고 추종자도 없다. 우리는 스스로를 조직하고, 스스로를 동원하며, 성찰하고, 행동한다. 우리는 다중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양한 조직과 운동들의 다중이 되기를 열망한다. 우리는 현자 스피노자를 따른다. 그러나 오직 그가 현자 간디와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과 모순되지 않는 한에서만 그렇다. 자발성(spontaneity)은 그 자신이 새로운 현 상태가 되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조직하는 한에서만 현 상태를 해체한다.

우리는 목적과 행동으로부터 출발한다. 우리의 문제들은 실천적이고 우리의 질문들은 생산적이다. 우리는 두 개의 전제를 공유한다. 그것은 우리의 고통은 ‘고통’이라는 단어로 환원되지 않으며, 우리는 부당한 고통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신 우리가 마땅히 누릴 자격이 있는 더 나은 무언가를 위해 싸운다는 것이다. 모호함은 우리를 마비시키지 않는다. 우리가 꼭 일치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는 수렴해야 한다. 우리가 꼭 통일될 필요는 없다. 다만 우리는 일반화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를 상호적으로 번역하며, 어떤 이들이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이 번역에 관여하지 않도록 매우 조심한다.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동의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하는 행동들에 대해 합의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한 합의에는 많은 감정들과 감각들이 기여한다. 그것들은 아무 말 없이 주장하고 비판한다. 번역은 우리가 집단행동의 한계와 가능성을 정의하도록 도와준다. 우리는 미소와 정서들을 통해, 손과 팔의 온기를 통해, 그리고 춤을 통해 직접적으로 그리고 간접적으로 소통하며, 그러다 마침내 공동 행동의 문턱에 도달한다. 결정은 언제나 자율적이다. 각기 다른 이유들이 수렴된 결정들로 이어질 수도 있다. 우리가 감수하는 위험들을 제외하고는, 되돌릴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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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저명한 사회사상가의 대표 저서가 출간되어서, 소개해 드립니다.

세계사회포럼의 주요 이론가이기도 하고, 이매뉴얼 월러스틴,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도 학문적/사상적 교유가 있는 포르투갈 출신의 사상가,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의 대표 저서이죠.

그는, "북반구(서구중심주의)의 인식론이란 오직 5-6개 국가에서 발전된 반면에,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변혁을 가져온 좌파의 실천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단언합니다.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형태의 세계시민주의, 서발턴적 반란적 세계시민주의를 주창하는 그의 사상은, 공존과 연대 그리고 생명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추구합니다.

책의 대부분은 글로벌 사우스(북반구)에 의해 자행된 "인식론 살해(epistemicide)"에 대한 비판과 그에 맞서는 정의를 위한 사회학, 사회적 실천 등이 담겨 있습니다.

제도화된 해로운 거짓, 인식론 살해, 부재의 사회학, 출현의 사회학, 인지적 부정의, 서발턴적 대항헤게모니 등등, 이러한 개념과 이론들이 등장하는데, 대가답게 명쾌하고 빈틈없는 전개가 돋보입니다.

읽으면서, 글로벌 사우스(남)에 있다가 이제 글로벌 노스(북)에 편입된 한국에게 이 책이 어떤 시사를 줄지 곰곰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국내에는 이 저자의 책 중에는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이란 책이 나온 바 있는데, 다소 "볼리비아의 복수국민국가" 건설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저자의 대표 저서라면, <남의 인식론: 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정의> 이 책과, 후속작인 <인지적 제국의 종말: 남의 인식론 시대의 도래>가 있습니다.

저자의 서문(들머리)와 옮긴이의 후기(날머리)를 통해서, 책의 면모를 살펴보시죠!






서문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이 책에는 세 가지 기본적 생각이 전제돼 있다. 첫째, 세계에 대한 이해는 서구가 세계를 이해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둘째, 전 지구적 인지적 정의 없이는 전 지구적 사회적 정의도 있을 수 없다. 셋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해방적 변화들은 서구중심적 비판이론이 발전시킨 문법과는 다른 문법과 각본을 따를 수 있으며, 그 같은 다양성은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한다.

비판이론은 더 나은 세계를 예견하는 것보다 세계를 더 잘 이해할 방법은 없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그러한 예견은 사회적 부정의를 지탱하고 정당화하는 제도화된 해로운 거짓말들을 폭로하기 위한 지적 도구와 거기에 대항하여 투쟁하도록 하는 정치적 추동력 모두를 제공한다. 따라서 비판이론은, 설령 결국에 궁극적인 진리 또는 확정적인 치유책이 없다 하더라도, 진리와 치유를 찾는 과정이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는 가장 공고히 자리 잡은 사회적 거짓들조차도 그 범위와 지속 기간에 있어 늘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그것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지배적인 동안은 마치 그것들이야말로 진리와 치유의 원천인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말이다.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글로벌 자본주의와 식민주의, 가부장제의 역사적 기록은 제도화된 해로운 거짓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사회적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사회적 규제,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전용, 평화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 생명의 신성함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생명의 파괴,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인권 침해,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사회적 파시즘, 법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불법적 약탈,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동화(assimilation),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초래된 개인적 취약성, 인류애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하위인간성(subhumanities)의 제도화,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신념에 가격표 달기,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상품화,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표준화,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대량화,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인종주의, 헌법적 권리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헌법적 불의, 임마누엘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Was ist die Aufklärung)』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열등성의 존재론, 법 앞의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법 이후의 불평등,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강박적 소비, 그리고 가장 흉측한 방식으로 올바른 삶(recta vita)을 부정하면서 이를 은폐하기 위해 원칙(성 토마스의 원칙의 습성(habitus principiorum))을 선언하는 위선의 기록이다.

우리 현대 세계를 관통하는, 제도화된 해로운 거짓들이 만연해 있는 독특한 방식과 강도를 고려할 때, 부정의에 대한 적절한 인식과 억압의 극복 가능성은 오직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인식론적 단절에 대한 초점이 이 책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는 이론을 서구중심 비판 전통과 가장 잘 구분 짓는 지점이다. 서구중심 비판은―그중 가장 뛰어난 예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인데―우리 시대의 해방적 투쟁들을 설명해 내는 데 실패했다. 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자신들이 비판하는 부르주아적 사고와 사회적 부정의의 인지적 차원을 억누르는 동일한 인식론적 토대를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세계에 대한 서구적 이해와 변혁 전망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서구중심적 비판 전통은 스스로를 대상을 함께 알아가고 이해하고 촉진하고 공유하고 나란히 걷는 것보다는, 대상에 대해 알고 설명하고 인도하는 데 있어 탁월한 전위 이론으로 여긴다.

이 책은 이러한 유럽중심적 비판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책은 빈곤의 이론(teoria povera), 즉 부당하게 강요된 주변화와 열등성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광범위한 소수자들과 다수자들의 경험에 바탕을 둔 후위 이론을 제안하며, 이는 그들의 저항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 책에서 개진되는 비판적 이론 세우기 작업은 비유럽중심적이기를 추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이 해방 또는 자유에 대한 비유럽중심적 개념들을 가치 있게 여기는 동시에 인권, 법치, 민주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유럽중심적 개념들에 대한 대항헤게모니적 이해와 사용을 제안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지만, 나의 다른 책 『인지적 제국의 종말: 남의 인식론 시대의 도래(The end of the cognitive empire: the coming of age of epistemologies of the South)』(2018)와 연계해서 읽으면 더욱 유익할 것이다. 이 후자의 책이 걸고 있는 내기는 이 책에서 제안된 인식론적 작업이 일단 완수되면 ‘해방과 자유’의 방대한 정치적 지형들이 출현하리라는 것이다.

이 책은 대위법(counterpoint) 방식으로 제시된 서문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대위란 좋은 삶/부엔 비비르(buen vivir)를 향한 상상된 매니페스토(manifesto)와, 모더니즘적 선언문들에 깔려 있는 장대한 목적에 도전하고자 명명된 미니페스토(minifesto) 사이의 대위를 말한다. 매니페스토는 내가 수년간 함께 활동해 온 다양한 사회 운동의 상상된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리고 미니페스토는 나 자신의 응답을 제시하는데, 이 책이 보여주려는 바와 같이 급진주의가 불가능한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의 한계를 강조한다. 대위법적 구조를 가장 잘 시각화하기 위해 매니페스토는 짝수 페이지에, 미니페스토는 홀수 페이지에 인쇄되어 있다.

서론에서 나는 서구중심적 정치적 상상력과 비판이론에 대해 거리를 둘 필요성을 주장한다. 나는 서구중심적 비판 전통이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하여)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발전해 온 투쟁의 형태들, 사회적 행위자들, 그리고 자유의 문법들을 설명하는 데 실패하는 이유들을 보여준다. 지난 십여 년간, 세계사회포럼은 이러한 실패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서 나는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 견고하고 설득력이 있으려면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패러다임의 복잡성과 내부적 다양성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통 서구 근대성이라고 불리는 것은 지배적 관점과 서발턴적 관점이 공존하면서 서로 경쟁 관계를 이루는 근대성들을 구성하는 매우 복잡한 현상들의 집합이다. 주류를 이루는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만큼 그 같은 비판들은 환원주의에 빠질 위험, 자기들이 비판하는 바로 그 근대성의 개념들이 되어버릴, 즉 단순한 희화화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1장에서는 19세기 쿠바의 지식인-행동가인 호세 마르티의 유명한 에세이에 기대어 아메리카와 서구 근대성에 대한 몇 가지 칼리반적(calibanesque) 관점을 규명한다. 2장에서는 근대적 정체성들(또는 그보다는, 근대적 동일시 과정들)의 근저에 있는 기본적 은유 중의 하나, 즉 뿌리와 선택이라는 이중 은유를 현재 뒤흔들고 있는 격동을 분석하기 위해 발터 벤야민의 “앙겔루스 노부스(Angelus Novus)”에 의지한다. 3장에서 나는 비옥시덴탈리즘적 서구가 가능한지를 묻는다. 이를 위해 두 명의 근대 초기 철학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holas of Cusa)와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관점을 활용하며, 서구 근대성에 대한 대안적 이해들이 자본주의적·식민주의적 기획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떻게 제쳐져 왔는지를 보여준다.

2부에서는 다양한 접근을 통해 지배적인 인식론들(북반구의 인식론들(Northern epistemologies))에 대한 나의 비판을 자세히 설명하고, 나 자신의 인식론적 제안을 제시한다. 이는 내가 줄곧 남의 인식론들(epistemologies of the South)이라고 불러온 것으로, 투쟁 속에서 태어난 지식, 즉 자본주의와 식민주의, 가부장제가 초래한 체계적 부정의와 억압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여러 사회 집단이 발전시켜 온 다양한 앎의 방식의 구성과 그 타당성 검증에 대한 일련의 탐구이다. 4장은 나의 포스트식민적 또는 탈식민적 접근에 있어 핵심적인 장으로, 여기서 나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심연적 사고(abyssal thinking)가 그어 놓은 심연적 선들(abyssal lines)을 분석한다. 이 (경계)선들을 통해 그 선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인간과 비인간의 현실들은 비가시화되거나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비존재로 생산된다. 이는 가장 급진적 형태의 사회적 배제를 초래한다. 5장에서는 내가 맹목(盲目)의 인식론(epistemologies of blindness)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각도에서 비가시성(invisibility)에 접근한다. 나는 근대 경제학의 인식론적 토대를 극단적 사례로 들며, 엄청나게 많은 양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생성되는 다양한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6장에서는 내가 부재의 사회학(sociology of absences)과 출현의 사회학(sociology of emergences)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관점에서, 지배적인 근대적 이성 형태들의 나태함이 해방적 가능성(emancipatory possibilities)을 식별하는 데 유용할 수 있는 막대한 사회적 경험을 어떻게 소외시켜 왔는지를 보여준다. 7장에서 나는 지식들의 생태학에 집중한다. 부재의 사회학과 출현의 사회학이 어떻게 지식의 생태학과 상호문화적 번역 둘 다를 위한 가능성을 열어 주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남의 인식론의 윤곽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8장에서는 상호문화적 번역을 다루는데, 이는 서구중심적 일반이론들의 토대를 이루는 추상적 보편주의와 문화들 간의 통약불가능성이라는 관념 모두에 대한 대안으로서 내가 구상하는 것이다.

이 책은 급진적 비관주의도 급진적 희망도 아닌, 비극적 낙관주의에 흠뻑 적셔져 있다. 어떤 것도 비억압적 대안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제거할 만큼 억압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중 어떤 대안도 어떻게든 그 자신이 억압과 혼동되거나 뒤섞일 위험을 피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하거나 설득력 있지는 못하다. 만약 인간의 조건이 곧 노예 상태라면 굳이 노예라는 제도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인간의 조건이 곧 자유라면 헌법과 인권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조건은 역사의 무거운 짐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그 짐을 더 지기 쉽게 만들 방법을 반쯤 맹목적으로 선택하는 인간들의 조건이다.

나는 이 책을 위해 여러 해 동안 작업해 왔다. 그 과정에서 많은 동료들과 협력자들로부터 귀중한 도움을 받았다. 어쩌면 그들 모두를 일일이 언급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이 책은 마리아 이레니 하말류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나눴던 생각을 자극하는 수많은 대화와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드는 도전이 되는 교류, 그리고 내가 문학 이론으로 나아가는 데 그녀가 준 영감에 빚지고 있다. 그녀는 또한 때때로 나의 몇 가지 아이디어를 영어로 옮기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여러 해 동안 헌신해 준 나의 연구조교 마르가리다 고므스는 이번에도 역량과 전문성을 발휘하여 내 연구를 지원하고 원고를 출판할 수 있게 준비해 주었다. 수년간 나의 영어 저작들은 탁월한 편집자인 마크 스트리터의 값진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나의 헌신적인 비서 라살레트 시몽이스의 보이지 않는 손길은 지난 20년 동안 내가 써 온 모든 것 속에 직간접적으로 녹아들어 있다. 나의 동료인 주어웅 아히스카두 누네스와 마리아 파울라 메네지스는 내 연구의 결정적 순간마다 소중한 협력자였다. 수년간, 코잉브라대학교, 위스콘신대학교, 워릭대학교, 런던대학교의 나의 박사과정생들과 박사후연구원들은 내가 새로운 주제와 관점으로 나아가게 하는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내 연구의 각기 다른 순간에, 나는 항상 다음과 같은 협력자, 동료, 친구들의 변함없는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아우구스틴 그리할바, 앨리슨 핍스, 앨런 헌터, 아나 크리스티나 산투스, 안토니우 카지미루 페헤이라, 안토니우 소우자 히베이루, 아르만두 무이레마, 빌 휘트포드, 카를루스 레마, 세자르 발디, 세자르 로드리게스-가라비투, 클레어 커틀러, 콘세이서웅 고메스, 크리스티아노 지아노야, 다비드 라라스, 데이비드 슈나이더맨, 디아네 솔레스, 에푸아 프라, 엘리다 라우리스, 에밀리오스 크리스토도울리디스, 에릭 O. 라이트, 개빈 앤더슨, 하인츠 클러그, 이매뉴얼 월러스틴, 이반 누네스, 제임스 털리, 하비에르 코우소, 제레미 웨버, 주어웅 페드로주, 호아킨 에레라 플로레스, 존 해링턴, 호세 루이스 엑세니, 주제 마누엘 멘드스, 조셉 톰, 후안 카를로스 모네데로, 후안 호세 타마요, 렌 케플런, 릴리아나 오브레곤, 루이스 카를로스 아레나스, 마크 갤런터, 마르가리다 칼라파트 히베이루, 마리아 호세 까넬로, 마리오 멜로, 메리 라윤, 마이클 부라보이, 마이클 월, 닐 코메사, 라울 야삭, 라자 사이드, 레베카 존슨, 사라 아라우주, 시우비아 페헤이라, 티아구 히베이루, 우펜드라 박시. 이들 모두에게 나의 진심 어린 감사를 보낸다. 나는 오직 이 책의 결과물이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 하지만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 감사의 말을 패러다임 출판사의 딘 비르켄캠프에게 전한다. 그는 이 책을 신속히 완성하고 제때에 잘 출판할 수 있도록 나에게 각별한 격려를 보내 주었다.



옮긴이 후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혼란스러운 패러다임의 과도기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지배적 패러다임(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은 가고 없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패러다임은 출현하지 않고 있는 ‘아직 아님’의 ‘인테르레그눔(interregnum, 공위 기간)’의 시대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존의 서구에서 생산된 이론이 실천을 특히 비서구권의 실천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럽중심적 비판이론과 좌파 정치가 역사적으로 주로 글로벌 노스에서, 특히 북반구의 오직 5-6개 국가(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어느 정도 미국)에서 발전된 반면에,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변혁을 가져온 좌파의 실천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이루어지고 있기”(이 책, 91쪽) 때문이다. “지금은 인간과 어머니 대지를 포함하는 전 지구적 차원의 판가름의 시대이다. 아직까지는 어떤 규칙도 없는 판가름의 시대이다”(매니페스토, 36쪽). 현재로서는 다만 막연히 다양성이 인정되는 단계에 있다.

책 전반에 걸친 핵심 논의의 중요한 전제로, 산투스는 지리적 위치가 아닌 정치적 위치로서의 글로벌 노스와 글로벌 사우스 사이에 눈에 안 보이는 아득한 심연이 존재함을 상정한다. 아득한 심연을 만든 근거는 바로 근대적 이성과 과학이다. 특히 산투스는 환유적 이성과 예견적 이성이 심연을 만든 주범임을 폭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는 산투스의 표현대로 “모욕당하고 천대받은 자들의 귀환의 시대”(매니페스토, 38쪽)이며, 그는 이것을 글로벌 사우스라 칭한다. 전자가 후자를 “무지하고 열등하고 지역적이고 특수하며 후진적이고 비생산적이거나 게으르다고”(매니페스토, 28쪽) 경멸하고 무시하는 전통은 매우 뿌리 깊은 것이다. 이런 인식론적 위계와 차별을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은 1990년대 초반부터 ‘식민성’이라 불러왔으며, 이로부터의 전환과 단절을 통해 새로운 지식 체계와 해방적 실천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산투스의 이 책도 마찬가지다. 유럽인들은 이러한 식민성을 기반으로 인식론적 살해를 저지르면서도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문명적 사명감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이제는 글로벌 노스가 글로벌 사우스로부터 배워야 할 때다. 산투스가 바라보듯, 글로벌 사우스가 단순히 억압받는 공간이 아니라, 대안적 인식론과 사회적 실천이 생성되고 조직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글로벌 사우스에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서구 근대성 비판 담론들(예를 들어, 프랑크푸르트학파 이론 등)이 명백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산투스는 우리 시대에 진정한 급진주의가 글로벌 노스에서 더 이상 실현되기 어려워졌다고 판단한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서구에서 급진주의가 대학이라는 제도 안에 갖힌 현실을 지적한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급진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현실을 다루기 위해 보호모와 장갑을 필요로 하는 대학과 같은 기관에서 일한다. 서구 근대성이 지식인들에게 부리는 속임수 중 하나는 그들이 오직 반동적 제도들 안에서만 혁명적 사상을 생산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급진적으로 행동하는 이들은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미니페스토, 23쪽).

산투스는 대학이라는 제도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서구의 세계 이해보다 훨씬 더 넓고 다양하다고 본다(매니페스토, 44쪽). 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와 서구는 죽은 자들에 대한 태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죽은 자들이 단순히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살아 있으며, 중요한 결정 과정에서 산 자들이 자문을 구하는 대상으로 여겨진다(산투스 2022, 280). 이에 비해 서구에서는 죽은 자들과의 이 관계 맺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서구의 관점에서는 라틴아메리카의 이러한 태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산투스는 과학을 내세우며 보편성을 주장해 온 서구 근대성이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한다. 서구는 자신들의 세계 이해와 맞지 않는 것들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어 왔다.

산투스는 이러한 문제를 비판하며 부재의 사회학과 출현의 사회학, 그리고 지식의 생태학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부재의 사회학은 서구 근대성이 지식과 실천을 분류하고 관련성의 정도에 따라 위계를 매기면서, 비서구의 가치관과 문화를 억압하여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든 과정을 분석한다. 반면, 출현의 사회학은 이미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대안적 가능성을 인식하고 강화하는 과정이다. 즉, 서구 근대성이 지나치게 미래를 강조하며 현재의 다양한 가능성을 배제해 온 것에 반대하며, 현재를 확장하고 미래를 수축하여 현재에 보다 가깝게 만듦으로써 보다 현실적인 전망 속에서 미래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지식의 생태학을 제안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이는 단일하고 위계적인 지식 체계가 아니라, 다양한 지식이 상호번역될 수 있는 다원적이고 상호연결적인 방식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억압된 지식과 실천들을 재발견하고, 탈식민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서구의 일직선적 진보의 관점에 대한 비판이며, 그에 대한 비서구적 대안의 제시다. 바로 이것이 산투스가 글로벌 노스보다 글로벌 사우스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현재 우리는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매우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기후위기를 비롯한 전 지구적 생태적 위기, 그리고 그것과 얽혀 있는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위기가 맞물려, 문명적 전환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고 미룰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산투스는 기존의 급진적 사상과 실천이 단절된 현실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우리 시대의 글로벌 노스에서는 급진적 사상들이 곧 급진적 실천으로 번역되지 않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미니페스토, 21쪽). 즉, 급진적 실천이 현존하는 급진적 사상들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중적 불투명성이 존재하며, 이는 단순한 이론적 문제를 넘어 기성 권력이 의도적으로 이러한 단절을 유지하는 구조적 메커니즘과도 연결된다. 즉, 이러한 단절을 극복하고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가 된다. 산투스는 이에 대해 오늘날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은 ‘도그마 게임의 종말, 좋은 삶을 위해 집결한 이들이 지식인들에게 맡긴 후위 이론의 임무, 세계의 고갈되지 않는 다양성이라는 관점’이라는 세 가지 요인으로 인해 과거보다 더 희망적이라고 전망한다(미니페스토, 31쪽). 다시 말해, 기존의 급진적 담론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조건들이 우리 시대에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산투스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글로벌 사우스와 관련하여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이해하려면, 바로 다음의 인용이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가장 의미 있는 변화 중 하나가, 수세기 동안 유럽 식민주의와 북미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왔고 그간 글로벌 노스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어 온 전 지구적 의제들의 조건과 우선순위에 대해 처음으로 권리를 주장하게 된 국가들, 민족들, 그리고 지역들이 글로벌 정치 무대에 부상하게 된 것과 관련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결론, 459쪽).

그러므로 반식민주의적 저항과 투쟁의 대안적 사회 운동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대안적 사회 운동이 지향하는 바는, 그동안 가난과 억압, 배제에 시달려 온 사람들 역시 존엄한 삶을 영위할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논리를 구축해 왔다. 따라서 같은 시기 라틴아메리카에서 가난한 대중이 대안적 사회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더 나아가, 1990년 에콰도르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에서 원주민 운동이 본격화되고 탈식민성 담론이 출현한 것 역시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산투스는 글로벌 사우스의 관점에서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 WSF)에 실천적으로 참여해 온 지식인이다. 세계사회포럼은 2000년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리에서 시작되었으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적 담론과 실천을 모색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산투스는 최근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이 제시하고 있는 좋은 삶/부엔 비비르 철학을 중요한 개념으로 다룬다. 부엔 비비르 철학은 2008년 에콰도르, 2009년 볼리비아에서 각각 개헌을 통해 ‘복수국민국가(Estado Plurinacioinal)’의 개념 안에 포함되었다. 이 개념은 매우 단순한 것으로, 근대성과 원주민 철학 사이에 위계적 서열을 두지 말고 수평적 대화를 가능하게 하자는 유토피아적 전망을 담은 개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부엔 비비르 역시 특정 개념적 틀, 즉 획일적 이데올로기나 고정된 이론적 틀에 갖히지 않는 것이다.

산투스의 비판은 매우 예리하다. 스피노자의 항복, 즉 1677년, 당시 유럽의 권력 계급이 스피노자가 말년에 ‘범신론적 무신론’을 포기하고 기독교 신앙으로 전향했다고 주장했던 사건(미니페스토, 23쪽) 이후, 유럽 비판이론의 전통이 왜곡되기 시작했다는 그의 분석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사실 그가 인용, 분석하는 지식인들의 논의는 그냥 따라가기만 해도 벅찰 정도로 방대하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측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글로벌 노스 내부에서도 이미 근대성과 서구중심주의의 불편한 진실을 직시했던 지식인들(예를 들어 사모사타의 루키아노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블레즈 파스칼 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상이 소외되거나 배제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산투스가 이러한 전통을 고려하면서도 엘리트보다는 대중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그는 엘리트보다는 대중에게서 끊임없이 배우려는 태도를 가진다. 여기서 산투스의 독특한 창의성이 드러난다. 그 예들 중 하나로 후위 이론을 들 수 있다. 후위 이론은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운동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한 개념이다. 서구 근대성의 핵심적 특징 중 하나는, 아무리 과격한 비판이론이라 할지라도 결국 엘리트 지식인이 대중을 이끈다는 전제를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후위 이론은 이와 정반대다. 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궤적을 훑어 보면, 그 문화적 의식은 사회적 연대성과 사회적 주체성을 재구성하게 만들고 있고 이에 따라 대항헤게모니 세계화의 도전을 감당할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정치적 문화의 힘은 대중의 경험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 같은 새로운 싹의 출현은 새로운 “자연법”―기층 대중을 포용하는 복합문화적, 탈식민적 맥락을 가진 ‘세계시민주의적(cosmopolitan) 법’―의 출현을 향하고 있다(산투스 2008, 34).

라틴아메리카 대중이 그런 연대의 능력을 가지게 된 이유는, 이들이 원주민 철학에 연원한 관계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성은 위계적 구조를 거부하고 상호연결성을 강조하는 특징을 갖는다. 한편, 산투스의 사상이 독특한 이유는 그것이 이분법적 사고에 갇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성장, 발전, 그리고 품위 있게 잘살려는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부정하지 않으며, 동시에 고통을 끌어안고 그저 아름다움만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의 이러한 특징은 그가 글로벌 사우스의 대중이 맞서 싸우는 억압의 구조를 해석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인간들 사이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상품물신주의, 지식의 단일문화, 진보의 선형적 시간관, 자연화된 불평등, 지배적인 척도, 경제 성장과 자본주의적 발전의 생산주의”(매니페스토, 26쪽)를 여러 장애물 중 일부로 지적하면서, 그것들이 서로 ‘가족적 유사성’을 지니고,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해 억압의 구조를 형성한다고 본다.

글로벌 노스 안에서도 모든 사람이 존엄 있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가능성을 포착했기에, 산투스가, 결코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낙관적 전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 한국 사회 또한 산투스의 주장과 통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몇 년 전에 UN에 의해 글로벌 사우스에서 글로벌 노스로 편입한 유일한 국가로 인정받았지만, 이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변화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가 익숙한 민족주의의 틀을 벗어나 반란적 서발턴 세계시민주의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란적 세계시민주의는 기존의 주류적, 자유주의 비판이론이 주장하는 칸트식의 세계시민주의가 아닌, 서로 다른 보편성, 즉 단일 보편성에 반대하는 복수 보편성(미뇰로 2010, 7)을 주장하는 비주류적 접근과 상응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이 제안하는 대안적 실천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전개된다. 다시 한번 산투스의 말을 그대로 소환하자면,

이러한 활동들의 스케일은 매우 다양하다. 글로벌 사우스와 글로벌 노스 모두에서 소외된 사회 집단들이 자신의 삶과 공동체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제를 얻기 위해 실행하는 미시적 활동이 있는가 하면, 양질의 일자리와 환경 보호의 기본적인 기준을 보장하기 위해 국제적 차원에서 법적・경제적 조정을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 글로벌 금융 자본을 통제하기 위한 시도부터 협력과 연대의 원칙에 기반한 지역 경제를 구축하려는 노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와 형태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대안적 생산과 생산성에 대한 개념과 실천들은 두 가지 주요 특징을 공유한다. 첫째, 이들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대안이 되는 체계적 경제 시스템을 구현하기보다는, 주로 지역 사회와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생산적 공간을 창출하려는 지역적인 노력이라는 점이다. (……) 두 번째 특징은 이러한 활동들이 민주적 참여, 환경적 지속가능성, 사회적·성적·인종적·민족적·문화적 형평성, 그리고 초국적 연대와 같은 목표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경제’ 개념을 공유한다는 점이다(6장, 354-355쪽).

마지막으로, 산투스가 아무리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낙관적 의지와 비전을 버리지 않는 태도가 사뭇 인상적이다. 그가 인용한 스피노자의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운 만큼이나 드물다(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라는 말처럼, 진정한 변화와 그것을 위한 실천은 필연적으로 어렵고 희귀하다(미니페스토, 51쪽). 아울러, 우리의 특별한 적, 즉 우리가 맞서야 할 가장 강력한 적이 우리 안에 자리한 나태함과 무기력이라는 그의 지적이 주는 울림 또한 어느 때보다도 크게 다가온다.

옮긴이를 대표하여

안태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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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대항헤게모니,

남의 인식론을 재조명하다

본문 중에서

이 책에는 세 가지 기본적 생각이 전제돼 있다. 첫째, 세계에 대한 이해는 서구가 세계를 이해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둘째, 전 지구적 인지적 정의 없이는 전 지구적 사회적 정의도 있을 수 없다. 셋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해방적 변화들은 서구중심적 비판이론이 발전시킨 문법과는 다른 문법과 각본을 따를 수 있으며, 그 같은 다양성은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한다.(4쪽, 서문 중에서)

지금은 인간과 어머니 대지를 포함하는 전 지구적 차원의 판가름의 시대이다. 아직까지는 어떤 규칙도 없는 판가름의 시대이다. 한편에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그에 딸린 모든 위성적 억압들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글로벌 노스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는 지리적 위치가 아닌 정치적 위치이며 고통의 초국가화(transnationalization)에 점점 더 특화되어 가고 있는 곳이다. 공장이 이전되면서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들, 메가프로젝트와 기업농, 광산업으로 인해 수탈당한 인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농민들, 인종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은 아메리카와 호주의 원주민들, 시우다드 후아레스(Ciudad Juárez)에서 살해당한 여성들, 우간다와 말라위의 게이와 레즈비언들, 너무나 가난하지만 또한 너무나 부유한 다르푸르의 사람들, 살해당하고 콜롬비아 태평양 연안의 끝으로 쫓겨난 아프리카계 후손들, 생명의 순환에 타격을 입은 어머니 대지, 테러리스트로 몰려 세계 곳곳의 비밀감옥에서 고문당하는 사람들, 강제 송환의 위기에 처한 서류 미비 이민자들, 계속되는 폭격 속에서 살아가고 일하고 삶의 순간들을 기념하는 팔레스타인인들, 이라크인들, 아프간인들, 파키스탄인들, 자본주의와 식민주의가 세계의 다른 모든 민족들을 대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경멸과 독단으로 자신들을 대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빈곤한 북미인들, 금융 해적들이 휘두르는 약탈 법칙의 먹잇감이 된 은퇴자들, 실업자들, 그리고 고용 불가능한 사람들.(36, 38쪽)

독자들은 내가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 여전히, 비록 희망이 없거나 희망 없을 정도로 정직할지라도, 기성 권력이 방심하거나 경계를 느슨히 한 틈을 타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급진주의를 되찾으려는 하나의 시도라는 것을 틀림없이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덧붙이자면, 나는 내가 성공했는지 알 방법이 없다. 따라서 나는 내가 유능한 반란자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내가 쓰는 것을 쓰고자 하는 절박한 충동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침묵되어야 할 것을 침묵시키고자 하는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 마지막 문장은 전율스럽다.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운 만큼이나 드물다(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상당 부분 미완성으로 남을 이유이다.(49, 51쪽)

유럽중심적 비판이론과 좌파 정치가 역사적으로 주로 글로벌 노스에서, 특히 북반구의 오직 5-6개 국가(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어느 정도 미국)에서 발전된 반면에,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변혁을 가져온 좌파의 실천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서구 비판 전통은 전 세계의 억압받는 계층이 아닌, 유럽에 속한 억압받는 계층의 요구와 열망을 반영하여 발전해 왔다. 문화적 관점과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전통이 구현하고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찬양한 ‘유럽적 보편주의’는 사실상 특정한 현실에 국한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한 예로, 유럽적 보편주의는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식민주의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를 억압 체제로서 포함하지 않는다.(91쪽)

이 장에서 나는 적어도 두 개의 20세기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유럽적 아메리카의 20세기이고 다른 하나는 누에스트라 아메리카의 20세기이다. 물론 아프리카, 아시아를 비롯해 유럽 내부에도 다른 20세기가 존재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앞의 두 가지, 특히 후자에 집중하고자 한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민주주의와 복지에 대한 수많은 약속을 지니고 있었고, 유럽 안팎에서 파괴적인 전쟁을 겪은 유럽적 아메리카의 20세기는, 결국 내가 사회적 파시즘이라고 명칭한 불길한 현상의 부상과 함께 막을 내렸다는 것이다. 사회적 파시즘은 종종 헤게모니적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위장되었다. 이 세기의 가장자리에서 또 다른 세기가 발전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누에스트라 아메리카 세기이다.(105-106쪽)

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개념이 절대적으로 주장되거나 부정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주어진 역사적 시기에 매우 심오한 것으로 경험된 변혁들을 설명하기 위한 방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설령 나중에 가서 결국 그러한 변혁들이 의도했던 만큼 현상을 바꾸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 변화가 패러다임적일 것이냐 혹은 하위 패러다임적일 것이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어떤 조건들하에서 경험되는가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가장 의미 있는 변화 중 하나가, 수세기 동안 유럽 식민주의와 북미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왔고 그간 글로벌 노스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어 온 전 지구적 의제들의 조건과 우선순위에 대해 처음으로 권리를 주장하게 된 국가들, 민족들, 그리고 지역들이 글로벌 정치 무대에 부상하게 된 것과 관련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글로벌 사우스가 결국에는 새로운 형태와 다른 종류의 담론들로, 수세기 동안 글로벌 노스에 의해 구현되어 온 동일한 사회적 과정을 재생산하게 될 수도 있다.(459쪽)

남의 인식론들의 유토피아는 곧 그 자신의 소멸이다.(4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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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인식론: 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정의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세계사회포럼의 주요 이론가, 세계적인 학자

우리 시대의 가장 독창적인 세계 사회사상가 중 한 명,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유럽중심적 비판이론과 좌파 정치가 역사적으로 주로 글로벌 노스에서, 특히 북반구의 오직 5-6개 국가(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어느 정도 미국)에서 발전된 반면에,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변혁을 가져온 좌파의 실천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책에는 세 가지 핵심 전제가 있다.

첫째, 세계에 대한 이해는 서구가 세계를 이해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둘째, 전 지구적 인지적 정의 없이는 전 지구적 사회적 정의도 있을 수 없다. 셋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해방적 변화들은 서구중심적 비판이론이 발전시킨 문법과는 다른 문법과 각본을 따를 수 있으며, 그 같은 다양성은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한다.




산투스는 기존 서구중심적 지식 체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재의 사회학과 출현의 사회학, 그리고 지식의 생태학, 상호문화적 번역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는 단일한 보편적 지식이 아니라, 다양한 지식 체계가 공존하고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이다.

이 책에서 그는 남의 인식론의 윤곽을 제심함으로써, 북반구에 의한 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정의를 구상한다.




“이 책은 충격적이면서도 신중한 블록버스터급 작품이다. 산투스는 우리가 가장 깊이 자리 잡은 편견들을 ‘다시 생각하지 않도록’ 요청한다. 그는 우리가 세계를 아래로부터 바라보고, ‘보편성’을 북반구가 아닌 남반구의 시각에서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그는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구상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 이매뉴얼 월러스틴(미국 사회학자)




“북반구는 여전히 서구인가? 그리고 과거의 서구는 여전히 단순한 ‘북’일 뿐인가? 이것은 단순한 지정학적 문제가 아니라 인식론적 질문이며, 실천, 학문, 경험, 정동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인류와 새로운 환경이 형성될 것이다. 이 책은 독창적이며 시의적절한 비판을 담고 있다. 산토스의 연구 분야를 넘나드는 통찰력은 실로 인상적이다.”

― 에티엔 발리바르(프랑스 철학자)



“우리 시대의 가장 독창적인 세계 사회사상가 중 한 명인 산토스는 라틴아메리카 지역을 거대한 지적 도전의 장으로 바라본다. 그는 호세 마르티의 사상을 따라, 이 시대가 ‘누에스트라 아메리카(Nuestra América)의 세기’이며, 이곳이 가장 강력한 ‘반란적, 대항헤게모니적 잠재력’을 지닌 공간이라고 본다.”

― 라켈 소사 엘리사가(사회학자, 역사학자, 활동가)



지식인-행동가를 위한 비극적 낙관주의

산투스는 ‘비극적 낙관주의’를 제시한다. 억압적 체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체제가 완전히 승리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조건은 역사적 무게를 짊어지면서도, 더 나은 선택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있다. 이러한 관점은 기존 급진적 비판이론이 가진 지나친 낙관주의와 지나친 비관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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