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한국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일본의 풍부한 1차 자료를 바탕으로, 제국 일본의 스포츠 정책과 식민지 조선인의 갈등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단순한 전기적 서술이 아닌, 제국과 민족, 영광과 고통, 스포츠와 정치 사이의 틈에서 손기정이 짊어졌던 무게를 조명한다. 따라서 이 책은 오늘날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손기정의 모습과는 다소 다른 각도에서 그의 삶을 조명한다. 일본 쪽의 여러 자료들은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다소 모호하게 알려진 사실까지 검증하며 손기정의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 1936년 8월 9일 마라톤 금메달의 영광

1936년 8월 25일 일장기 말소 사건의 고통

『손기정 평전』은 ‘영웅’의 두 얼굴을 그린다. 손기정은 제국 일본의 ‘대표 선수’와 식민지 조선의 ‘민족적 자부심’ 사이에서 갈등을 겪어야 했다. 이 갈등은 8월 25일에 일어난 ‘동아일보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극대화된다. 《동아일보》의 이길용 기자가 사진을 조작했고, 그 파장은 《동아일보》가 정간되는 사태로 이어졌다.

당시 손기정은 베를린에서 일본으로 오는 배에 승선하고 있었다. 일본에 도착한 후 손기정은 정치적 감시와 고난을 겪어야 했다. 단적으로,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 이후 마라톤(운동)을 포기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는 조건이, 다시는 마라톤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마라톤을 제패한 스포츠 영웅이었지만, ‘일본 제국의 조선인 금메달리스트’라는 시대적 모순에서 온 내적 갈등으로 인해, 단 한 번의 영광과 이후 이어지는 고난의 나날을 겪어야 했다.

해방 이후 손기정은 민족의 ‘영웅’으로서의 삶을 보내며, 보스턴 마라톤 등에 코치로 참가하는 등 한국 체육계를 이끄는 인물로 활약했다. 이후로도 친일 발언, 국적 회복 사건,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 활동 등을 통해, 스포츠의 정치화의 현장 한복판에 선다.

이 책을 관통하는 것은 젊은 시절 손기정의 삶을 옥죄었던 스포츠의 정치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이는 손기정이 한국전쟁 직전에 열린 보스톤 마라톤에 다녀와서 내뱉은 “선수들을 정치 도구화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옮긴이의 말)



영웅으로서 손기정의 삶은 제국 일본 지배하의 조선 민족의 금메달리스트였다는 사실과 일장기 말소 사건이 늘 교차하면서 빛과 그림자를 드리운다.

손기정은 지금 국립대전현충원에 영면해 있다. 금메달리스트라고는 하지만 그는 어떤 이유로 국가를 위해 순국한 이들과 함께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는 것일까.

이 책은 손기정의 생애사(life-history)를 통해 제국 일본에서 스포츠 영웅의 의미를 묻고, 이를 통해서 일본과 조선반도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근현대사를 그리려 한다.

⏤들어가며: 11쪽

이 책을 관통하는 것은 젊은 시절 손기정의 삶을 옥죄었던 스포츠의 정치화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다. 이는 손기정이 한국전쟁 직전에 열린 보스턴 마라톤에 다녀와서 내뱉은 “선수들을 정치 도구화 말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말에서 단적으로 확인된다.

⏤<옮긴이의 말>, 239쪽

올림픽 경기장의 시상대에 선 손기정. 게양대에 일본 국기가 가장 높이 올라가고 ‘기미가요’가 흘러나온다. 그때 손기정의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의 의미는 오직 그 자신만이 알고 있었으리라. 감격의 눈물인지, 고충의 눈물인지, 아니면 미움과 울분에 사로잡힌 눈물인지. 큰 환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마라톤 우승자를 맞이하는 경기장 관중들에게 그 모습은 어떻게 비쳤던 것일까. 히틀러는 손기정의 우승을 축하했다. 그는 위대한 운동선수이자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빛나는 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축하를 받은 손기정의 히틀러에 대한 인상 역시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서장 제국 일본과 조선 민족의 영웅, 19쪽

8월 25일 자 《동아일보》 석간에 실린 손기정의 사진은 가슴팍에 달린 국기가 가공, 수정됨으로써 히노마루가 보이지 않도록 지워져 있었다. 운동부 기자 이길용을 중심으로 한 여러 명(8명이 구속되었다)의 《동아일보》 관계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는데, 이는 영웅 손기정의 우승을 제국 일본으로부터 조선 민족에게 되돌리려 한 것이었다. 이 행위는 식민 지배에 대한 저항을 표현함으로써 제국 일본의 ‘영웅’을 조선 민족의 ‘영웅’으로 되찾아 나가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당시 손기정에게 힘든 상황을 가져왔다.

그 결과 손기정은 제국 일본 내에서 조선총독부를 중심으로 하는 식민 권력의 경계 대상이 되어, 특고(特高) 경찰에 의해 늘 감시당하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서장 제국 일본과 조선 민족의 영웅, 27-28쪽

손기정은 결승선을 통과한 후 20미터 정도를 그대로의 기세로 달려가 담요에 싸인 채로 엉덩방아를 찧듯이 넘어졌다. 곧바로 일어나 가볍게 달리기 시작하자 손기정보다 2분 정도 뒤처져서 달리고 있던 영국의 하퍼가 도착했고, 그 70-80미터 뒤에는 남승룡이 보였다. 남승룡은 후반부에 차례로 순위를 끌어올리며 경기장에서 마지막 스퍼트를 내고 있었다. 남승룡은 2위와는 19초 차이로 3위로 골인했다.

손기정은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했다. 제국 일본의 올림픽 마라톤 우승은 가나쿠리 시소가 처음으로 마라톤에 도전한 1912년 스톡홀름 올림픽 이후 일본 육상계의 염원이었다. 24년의 세월이 흐른 뒤 조선 출신의 한 청년이 그 꿈을 실현한 것이다.

손기정이 결승 테이프를 끊었을 때 그것은 손기정은 물론, 제국 일본에게도, 또 조선 민족에게도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음이 틀림없다.

⏤제2장 베를린 올림픽의 영광: 1932-1936년, 102쪽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에서 우승한 1936년 8월 9일부터 보름 정도 지난 25일, 《동아일보》 석간에는 시상대에 선 손기정의 사진이 실린다. 그런데 가슴에 있어야 할 일장기의 히노마루가 흐릿해 일장기임을 알아볼 수 없도록 게재되었다. 사진에 찍힌 일장기가 지워져 있었던 것이다. 같은 날 조간에도 손기정, 남승룡, 하퍼 세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사진이 실렸는데, 거기에는 손기정과 남승룡의 가슴에 일장기의 히노마루가 선명하게 드러났었다. 석간의 사진에서 일장기가 지워진 것은 의도적인 것임이 분명했다.

이 일장기 말소를 주도한 사람은 이길용으로, 당시 동아일보의 스포츠 기자였다.

⏤제3장 일장기 말소 사건의 충격: 1936년 8월, 120-121쪽

해외에서 생활하는 동포들의 모습, 그들이 소중히 여기는 태극기, 이러한 것들과의 만남과 경험은 손기정에게 영향을 끼쳤다.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따기 전까지는 해외에서 인지도가 그리 높지 않았던 손기정도 마라톤 우승 후 각종 환영회 등에서 사인을 요청받으면 거기에 한글로 ‘손기정’이라고 쓰고 출신 국명은 영어로 ‘KOREA’라고 적었다.

⏤제3장 일장기 말소 사건의 충격: 1936년 8월, 136쪽

손기정은 어딜 가든지 경찰 등으로부터 감시를 받고 있었다. 나가사키부터 시작해서 고베에서 기차를 타고 이동한 도쿄에 이르기까지 올림픽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선수들을 환영하는 사람들로 넘쳐났지만, 손기정의 기분은 우울했다.

이때의 일을 손기정은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 무서워졌다. 어떻게든 빨리 도망가고 싶을 뿐이었다”고 말한다. 손기정은 이러한 감시의 스트레스에 극도로 지쳐 있었다. 올림픽 선수단은 도쿄에 체류하게 되었다. 손기정이 도쿄의 마루노우치 호텔에 머무는 동안 양정고보의 담임 황욱이 마중을 나와 주었다. 마침 남승룡의 은인이기도 한 스즈키 다케시가 축하 인사를 전하기 위해 손기정을 만나러 와 있었다. 손기정의 심정을 들은 스즈키는 주변에 있던 경찰을 꾸짖고서는 쫓아냈다고 한다.

⏤제4장 제국 일본에 휘둘리다: 1936~1945년, 146-147쪽

손기정은 정말 달리기를 그만둔 것일까? 메이지 대학에 진학한 뒤 일단 달리기를 그만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5월에 발행된 《조광》에는 「다음 세계 올림픽 제패를 기(期)하는 마라톤왕 손기정 군의 심경」이라는 인터뷰 기사가 실려 있다. 그 기사에서 손기정은 “한동안 운동을 안 하고 보니 도리어 인간적으로 점점 보잘것이 없는 것 같아서 다시 운동을 시작했습니다”라면서 다시 달리기를 시작했다고 말한다. 또한 “소화 15년에 동경서 열리는 제12회 세계 올림픽 대회에 다시 출장하시겠습니까?”라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마음에 별 변화가 없는 한 출장하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손기정은 다음 올림픽도 겨낭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불안도 있었다. 손기정은 메이지 대학에 진학한 후 다시 학비와 생활비 문제로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것이 도쿄 올림픽을 준비하는 데 족쇄가 되었다. 이 무렵 손기정은 경성 적선동에 있는 성재육영회로부터 매달 45원의 장학금을 받았지만, 그 금액으로는 대학 수업료만 가까스로 납부할 수 있을 정도여서 생활은 궁핍했다고 한다.

⏤제4장 제국 일본에 휘둘리다: 1936~1945년, 156-157쪽

이제 손기정은 조선의 스포츠계 전체를 바라보게 된 것이다. 권태하, 정상희 등의 선배들을 이어 조선 스포츠계를 이끄는 입장에서 경기에 관한 코멘트를 요구받았던 것이다. 경기를 떠난 지 오래되면서 그의 역할도 달라지고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손기정은 유복하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도시화된 경성의 은행에서 근무하며 많은 지식인 및 저명인사와 친분을 맺고 조선 스포츠계에서 지도적 입지를 다지고 있었다.

⏤제4장 제국 일본에 휘둘리다: 1936~1945년, 168쪽

또한 김구는 두 선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오늘까지 세계를 제패한 손기정 때문에 세 번 울었다. 10년 전 베를린에서 망국민의 한 청년으로서 세계 열강의 젊은이들과 사투를 벌여 우승했으나, 조선 사람이면서도 조선 사람 행세를 못해 신문지상에서 그대들의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보면서 나는 울었고, 태평양전쟁이 일어났을 때 중국의 중경에서는 조선 청년 손기정이 일본군에 자원, 필리핀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불쌍해서 울었다. 그리고 오늘 죽었다던 손 군을 광복한 조국 땅에서 다시 보니 감격해서 또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김구의 이 기념사는 ‘세 번의 눈물’로 불리며 손기정에게 보낸 말로 잘 알려져 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두 번째 눈물은 민족의 영웅이 제국 일본의 병사로 지원해 전사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다른 데에서는 들을 수 없으므로 충칭(重慶)에서 퍼진 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제5장 해방 후의 세계에서: 과거의 영광과 굴욕, 190-191쪽

1981년 9월 바덴바덴에서의 감동은 지금도 누를 길 없다. 내 평생에 그렇게 즐거운 날은 없었던 것 같다. (『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 손기정 자서전』)

손기정은 한국의 위상을 건 올림픽 유치 활동에 참여했고, 유치가 결정되는 순간을 지켜보았다. 올림픽 개최 결정의 환희, 그리고 모국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올림픽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손기정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제5장 해방 후의 세계에서: 과거의 영광과 굴욕, 215쪽

1988년 9월 17일, 한국을 상징하는 서울 올림픽이 개막했다.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열리는 올림픽이었다. 개회식에서 올림픽 성화가 잠실 올림픽 경기장 성화대로 옮겨졌다. 팡파르와 함께 성화를 든 주자가 경기장으로 들어왔다.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바로 손기정이라는 노년의 주자였다.

베를린 올림픽의 영웅은 기쁨에 찬 모습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트랙을 달렸다. 10초 남짓의 달리기였다. 세계인 앞에서 제국 일본·조선 민족의 영웅은 시간이 흘러 열린 서울 올림픽 개회식에서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서 한국의 차세대 젊은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성화를 이어주었다.

⏤제5장 해방 후의 세계에서: 과거의 영광과 굴욕, 22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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