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저명한 사회사상가의 대표 저서가 출간되어서, 소개해 드립니다.

세계사회포럼의 주요 이론가이기도 하고, 이매뉴얼 월러스틴,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도 학문적/사상적 교유가 있는 포르투갈 출신의 사상가,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의 대표 저서이죠.

그는, "북반구(서구중심주의)의 인식론이란 오직 5-6개 국가에서 발전된 반면에,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변혁을 가져온 좌파의 실천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단언합니다.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형태의 세계시민주의, 서발턴적 반란적 세계시민주의를 주창하는 그의 사상은, 공존과 연대 그리고 생명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추구합니다.

책의 대부분은 글로벌 사우스(북반구)에 의해 자행된 "인식론 살해(epistemicide)"에 대한 비판과 그에 맞서는 정의를 위한 사회학, 사회적 실천 등이 담겨 있습니다.

제도화된 해로운 거짓, 인식론 살해, 부재의 사회학, 출현의 사회학, 인지적 부정의, 서발턴적 대항헤게모니 등등, 이러한 개념과 이론들이 등장하는데, 대가답게 명쾌하고 빈틈없는 전개가 돋보입니다.

읽으면서, 글로벌 사우스(남)에 있다가 이제 글로벌 노스(북)에 편입된 한국에게 이 책이 어떤 시사를 줄지 곰곰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국내에는 이 저자의 책 중에는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이란 책이 나온 바 있는데, 다소 "볼리비아의 복수국민국가" 건설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저자의 대표 저서라면, <남의 인식론: 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정의> 이 책과, 후속작인 <인지적 제국의 종말: 남의 인식론 시대의 도래>가 있습니다.

저자의 서문(들머리)와 옮긴이의 후기(날머리)를 통해서, 책의 면모를 살펴보시죠!






서문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이 책에는 세 가지 기본적 생각이 전제돼 있다. 첫째, 세계에 대한 이해는 서구가 세계를 이해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둘째, 전 지구적 인지적 정의 없이는 전 지구적 사회적 정의도 있을 수 없다. 셋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해방적 변화들은 서구중심적 비판이론이 발전시킨 문법과는 다른 문법과 각본을 따를 수 있으며, 그 같은 다양성은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한다.

비판이론은 더 나은 세계를 예견하는 것보다 세계를 더 잘 이해할 방법은 없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그러한 예견은 사회적 부정의를 지탱하고 정당화하는 제도화된 해로운 거짓말들을 폭로하기 위한 지적 도구와 거기에 대항하여 투쟁하도록 하는 정치적 추동력 모두를 제공한다. 따라서 비판이론은, 설령 결국에 궁극적인 진리 또는 확정적인 치유책이 없다 하더라도, 진리와 치유를 찾는 과정이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는 가장 공고히 자리 잡은 사회적 거짓들조차도 그 범위와 지속 기간에 있어 늘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그것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지배적인 동안은 마치 그것들이야말로 진리와 치유의 원천인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말이다.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글로벌 자본주의와 식민주의, 가부장제의 역사적 기록은 제도화된 해로운 거짓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사회적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사회적 규제,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전용, 평화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 생명의 신성함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생명의 파괴,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인권 침해,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사회적 파시즘, 법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불법적 약탈,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동화(assimilation),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초래된 개인적 취약성, 인류애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하위인간성(subhumanities)의 제도화,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신념에 가격표 달기,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상품화,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표준화,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대량화,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인종주의, 헌법적 권리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헌법적 불의, 임마누엘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Was ist die Aufklärung)』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열등성의 존재론, 법 앞의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법 이후의 불평등,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강박적 소비, 그리고 가장 흉측한 방식으로 올바른 삶(recta vita)을 부정하면서 이를 은폐하기 위해 원칙(성 토마스의 원칙의 습성(habitus principiorum))을 선언하는 위선의 기록이다.

우리 현대 세계를 관통하는, 제도화된 해로운 거짓들이 만연해 있는 독특한 방식과 강도를 고려할 때, 부정의에 대한 적절한 인식과 억압의 극복 가능성은 오직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인식론적 단절에 대한 초점이 이 책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는 이론을 서구중심 비판 전통과 가장 잘 구분 짓는 지점이다. 서구중심 비판은―그중 가장 뛰어난 예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인데―우리 시대의 해방적 투쟁들을 설명해 내는 데 실패했다. 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자신들이 비판하는 부르주아적 사고와 사회적 부정의의 인지적 차원을 억누르는 동일한 인식론적 토대를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세계에 대한 서구적 이해와 변혁 전망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서구중심적 비판 전통은 스스로를 대상을 함께 알아가고 이해하고 촉진하고 공유하고 나란히 걷는 것보다는, 대상에 대해 알고 설명하고 인도하는 데 있어 탁월한 전위 이론으로 여긴다.

이 책은 이러한 유럽중심적 비판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책은 빈곤의 이론(teoria povera), 즉 부당하게 강요된 주변화와 열등성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광범위한 소수자들과 다수자들의 경험에 바탕을 둔 후위 이론을 제안하며, 이는 그들의 저항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 책에서 개진되는 비판적 이론 세우기 작업은 비유럽중심적이기를 추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이 해방 또는 자유에 대한 비유럽중심적 개념들을 가치 있게 여기는 동시에 인권, 법치, 민주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유럽중심적 개념들에 대한 대항헤게모니적 이해와 사용을 제안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지만, 나의 다른 책 『인지적 제국의 종말: 남의 인식론 시대의 도래(The end of the cognitive empire: the coming of age of epistemologies of the South)』(2018)와 연계해서 읽으면 더욱 유익할 것이다. 이 후자의 책이 걸고 있는 내기는 이 책에서 제안된 인식론적 작업이 일단 완수되면 ‘해방과 자유’의 방대한 정치적 지형들이 출현하리라는 것이다.

이 책은 대위법(counterpoint) 방식으로 제시된 서문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대위란 좋은 삶/부엔 비비르(buen vivir)를 향한 상상된 매니페스토(manifesto)와, 모더니즘적 선언문들에 깔려 있는 장대한 목적에 도전하고자 명명된 미니페스토(minifesto) 사이의 대위를 말한다. 매니페스토는 내가 수년간 함께 활동해 온 다양한 사회 운동의 상상된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리고 미니페스토는 나 자신의 응답을 제시하는데, 이 책이 보여주려는 바와 같이 급진주의가 불가능한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의 한계를 강조한다. 대위법적 구조를 가장 잘 시각화하기 위해 매니페스토는 짝수 페이지에, 미니페스토는 홀수 페이지에 인쇄되어 있다.

서론에서 나는 서구중심적 정치적 상상력과 비판이론에 대해 거리를 둘 필요성을 주장한다. 나는 서구중심적 비판 전통이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하여)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발전해 온 투쟁의 형태들, 사회적 행위자들, 그리고 자유의 문법들을 설명하는 데 실패하는 이유들을 보여준다. 지난 십여 년간, 세계사회포럼은 이러한 실패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서 나는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 견고하고 설득력이 있으려면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패러다임의 복잡성과 내부적 다양성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통 서구 근대성이라고 불리는 것은 지배적 관점과 서발턴적 관점이 공존하면서 서로 경쟁 관계를 이루는 근대성들을 구성하는 매우 복잡한 현상들의 집합이다. 주류를 이루는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만큼 그 같은 비판들은 환원주의에 빠질 위험, 자기들이 비판하는 바로 그 근대성의 개념들이 되어버릴, 즉 단순한 희화화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1장에서는 19세기 쿠바의 지식인-행동가인 호세 마르티의 유명한 에세이에 기대어 아메리카와 서구 근대성에 대한 몇 가지 칼리반적(calibanesque) 관점을 규명한다. 2장에서는 근대적 정체성들(또는 그보다는, 근대적 동일시 과정들)의 근저에 있는 기본적 은유 중의 하나, 즉 뿌리와 선택이라는 이중 은유를 현재 뒤흔들고 있는 격동을 분석하기 위해 발터 벤야민의 “앙겔루스 노부스(Angelus Novus)”에 의지한다. 3장에서 나는 비옥시덴탈리즘적 서구가 가능한지를 묻는다. 이를 위해 두 명의 근대 초기 철학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holas of Cusa)와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관점을 활용하며, 서구 근대성에 대한 대안적 이해들이 자본주의적·식민주의적 기획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떻게 제쳐져 왔는지를 보여준다.

2부에서는 다양한 접근을 통해 지배적인 인식론들(북반구의 인식론들(Northern epistemologies))에 대한 나의 비판을 자세히 설명하고, 나 자신의 인식론적 제안을 제시한다. 이는 내가 줄곧 남의 인식론들(epistemologies of the South)이라고 불러온 것으로, 투쟁 속에서 태어난 지식, 즉 자본주의와 식민주의, 가부장제가 초래한 체계적 부정의와 억압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여러 사회 집단이 발전시켜 온 다양한 앎의 방식의 구성과 그 타당성 검증에 대한 일련의 탐구이다. 4장은 나의 포스트식민적 또는 탈식민적 접근에 있어 핵심적인 장으로, 여기서 나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심연적 사고(abyssal thinking)가 그어 놓은 심연적 선들(abyssal lines)을 분석한다. 이 (경계)선들을 통해 그 선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인간과 비인간의 현실들은 비가시화되거나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비존재로 생산된다. 이는 가장 급진적 형태의 사회적 배제를 초래한다. 5장에서는 내가 맹목(盲目)의 인식론(epistemologies of blindness)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각도에서 비가시성(invisibility)에 접근한다. 나는 근대 경제학의 인식론적 토대를 극단적 사례로 들며, 엄청나게 많은 양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생성되는 다양한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6장에서는 내가 부재의 사회학(sociology of absences)과 출현의 사회학(sociology of emergences)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관점에서, 지배적인 근대적 이성 형태들의 나태함이 해방적 가능성(emancipatory possibilities)을 식별하는 데 유용할 수 있는 막대한 사회적 경험을 어떻게 소외시켜 왔는지를 보여준다. 7장에서 나는 지식들의 생태학에 집중한다. 부재의 사회학과 출현의 사회학이 어떻게 지식의 생태학과 상호문화적 번역 둘 다를 위한 가능성을 열어 주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남의 인식론의 윤곽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8장에서는 상호문화적 번역을 다루는데, 이는 서구중심적 일반이론들의 토대를 이루는 추상적 보편주의와 문화들 간의 통약불가능성이라는 관념 모두에 대한 대안으로서 내가 구상하는 것이다.

이 책은 급진적 비관주의도 급진적 희망도 아닌, 비극적 낙관주의에 흠뻑 적셔져 있다. 어떤 것도 비억압적 대안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제거할 만큼 억압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중 어떤 대안도 어떻게든 그 자신이 억압과 혼동되거나 뒤섞일 위험을 피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하거나 설득력 있지는 못하다. 만약 인간의 조건이 곧 노예 상태라면 굳이 노예라는 제도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인간의 조건이 곧 자유라면 헌법과 인권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조건은 역사의 무거운 짐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그 짐을 더 지기 쉽게 만들 방법을 반쯤 맹목적으로 선택하는 인간들의 조건이다.

나는 이 책을 위해 여러 해 동안 작업해 왔다. 그 과정에서 많은 동료들과 협력자들로부터 귀중한 도움을 받았다. 어쩌면 그들 모두를 일일이 언급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이 책은 마리아 이레니 하말류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나눴던 생각을 자극하는 수많은 대화와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드는 도전이 되는 교류, 그리고 내가 문학 이론으로 나아가는 데 그녀가 준 영감에 빚지고 있다. 그녀는 또한 때때로 나의 몇 가지 아이디어를 영어로 옮기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여러 해 동안 헌신해 준 나의 연구조교 마르가리다 고므스는 이번에도 역량과 전문성을 발휘하여 내 연구를 지원하고 원고를 출판할 수 있게 준비해 주었다. 수년간 나의 영어 저작들은 탁월한 편집자인 마크 스트리터의 값진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나의 헌신적인 비서 라살레트 시몽이스의 보이지 않는 손길은 지난 20년 동안 내가 써 온 모든 것 속에 직간접적으로 녹아들어 있다. 나의 동료인 주어웅 아히스카두 누네스와 마리아 파울라 메네지스는 내 연구의 결정적 순간마다 소중한 협력자였다. 수년간, 코잉브라대학교, 위스콘신대학교, 워릭대학교, 런던대학교의 나의 박사과정생들과 박사후연구원들은 내가 새로운 주제와 관점으로 나아가게 하는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내 연구의 각기 다른 순간에, 나는 항상 다음과 같은 협력자, 동료, 친구들의 변함없는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아우구스틴 그리할바, 앨리슨 핍스, 앨런 헌터, 아나 크리스티나 산투스, 안토니우 카지미루 페헤이라, 안토니우 소우자 히베이루, 아르만두 무이레마, 빌 휘트포드, 카를루스 레마, 세자르 발디, 세자르 로드리게스-가라비투, 클레어 커틀러, 콘세이서웅 고메스, 크리스티아노 지아노야, 다비드 라라스, 데이비드 슈나이더맨, 디아네 솔레스, 에푸아 프라, 엘리다 라우리스, 에밀리오스 크리스토도울리디스, 에릭 O. 라이트, 개빈 앤더슨, 하인츠 클러그, 이매뉴얼 월러스틴, 이반 누네스, 제임스 털리, 하비에르 코우소, 제레미 웨버, 주어웅 페드로주, 호아킨 에레라 플로레스, 존 해링턴, 호세 루이스 엑세니, 주제 마누엘 멘드스, 조셉 톰, 후안 카를로스 모네데로, 후안 호세 타마요, 렌 케플런, 릴리아나 오브레곤, 루이스 카를로스 아레나스, 마크 갤런터, 마르가리다 칼라파트 히베이루, 마리아 호세 까넬로, 마리오 멜로, 메리 라윤, 마이클 부라보이, 마이클 월, 닐 코메사, 라울 야삭, 라자 사이드, 레베카 존슨, 사라 아라우주, 시우비아 페헤이라, 티아구 히베이루, 우펜드라 박시. 이들 모두에게 나의 진심 어린 감사를 보낸다. 나는 오직 이 책의 결과물이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 하지만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 감사의 말을 패러다임 출판사의 딘 비르켄캠프에게 전한다. 그는 이 책을 신속히 완성하고 제때에 잘 출판할 수 있도록 나에게 각별한 격려를 보내 주었다.



옮긴이 후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혼란스러운 패러다임의 과도기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지배적 패러다임(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은 가고 없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패러다임은 출현하지 않고 있는 ‘아직 아님’의 ‘인테르레그눔(interregnum, 공위 기간)’의 시대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존의 서구에서 생산된 이론이 실천을 특히 비서구권의 실천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럽중심적 비판이론과 좌파 정치가 역사적으로 주로 글로벌 노스에서, 특히 북반구의 오직 5-6개 국가(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어느 정도 미국)에서 발전된 반면에,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변혁을 가져온 좌파의 실천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이루어지고 있기”(이 책, 91쪽) 때문이다. “지금은 인간과 어머니 대지를 포함하는 전 지구적 차원의 판가름의 시대이다. 아직까지는 어떤 규칙도 없는 판가름의 시대이다”(매니페스토, 36쪽). 현재로서는 다만 막연히 다양성이 인정되는 단계에 있다.

책 전반에 걸친 핵심 논의의 중요한 전제로, 산투스는 지리적 위치가 아닌 정치적 위치로서의 글로벌 노스와 글로벌 사우스 사이에 눈에 안 보이는 아득한 심연이 존재함을 상정한다. 아득한 심연을 만든 근거는 바로 근대적 이성과 과학이다. 특히 산투스는 환유적 이성과 예견적 이성이 심연을 만든 주범임을 폭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는 산투스의 표현대로 “모욕당하고 천대받은 자들의 귀환의 시대”(매니페스토, 38쪽)이며, 그는 이것을 글로벌 사우스라 칭한다. 전자가 후자를 “무지하고 열등하고 지역적이고 특수하며 후진적이고 비생산적이거나 게으르다고”(매니페스토, 28쪽) 경멸하고 무시하는 전통은 매우 뿌리 깊은 것이다. 이런 인식론적 위계와 차별을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은 1990년대 초반부터 ‘식민성’이라 불러왔으며, 이로부터의 전환과 단절을 통해 새로운 지식 체계와 해방적 실천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산투스의 이 책도 마찬가지다. 유럽인들은 이러한 식민성을 기반으로 인식론적 살해를 저지르면서도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문명적 사명감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이제는 글로벌 노스가 글로벌 사우스로부터 배워야 할 때다. 산투스가 바라보듯, 글로벌 사우스가 단순히 억압받는 공간이 아니라, 대안적 인식론과 사회적 실천이 생성되고 조직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글로벌 사우스에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서구 근대성 비판 담론들(예를 들어, 프랑크푸르트학파 이론 등)이 명백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산투스는 우리 시대에 진정한 급진주의가 글로벌 노스에서 더 이상 실현되기 어려워졌다고 판단한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서구에서 급진주의가 대학이라는 제도 안에 갖힌 현실을 지적한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급진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현실을 다루기 위해 보호모와 장갑을 필요로 하는 대학과 같은 기관에서 일한다. 서구 근대성이 지식인들에게 부리는 속임수 중 하나는 그들이 오직 반동적 제도들 안에서만 혁명적 사상을 생산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급진적으로 행동하는 이들은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미니페스토, 23쪽).

산투스는 대학이라는 제도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서구의 세계 이해보다 훨씬 더 넓고 다양하다고 본다(매니페스토, 44쪽). 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와 서구는 죽은 자들에 대한 태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죽은 자들이 단순히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살아 있으며, 중요한 결정 과정에서 산 자들이 자문을 구하는 대상으로 여겨진다(산투스 2022, 280). 이에 비해 서구에서는 죽은 자들과의 이 관계 맺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서구의 관점에서는 라틴아메리카의 이러한 태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산투스는 과학을 내세우며 보편성을 주장해 온 서구 근대성이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한다. 서구는 자신들의 세계 이해와 맞지 않는 것들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어 왔다.

산투스는 이러한 문제를 비판하며 부재의 사회학과 출현의 사회학, 그리고 지식의 생태학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부재의 사회학은 서구 근대성이 지식과 실천을 분류하고 관련성의 정도에 따라 위계를 매기면서, 비서구의 가치관과 문화를 억압하여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든 과정을 분석한다. 반면, 출현의 사회학은 이미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대안적 가능성을 인식하고 강화하는 과정이다. 즉, 서구 근대성이 지나치게 미래를 강조하며 현재의 다양한 가능성을 배제해 온 것에 반대하며, 현재를 확장하고 미래를 수축하여 현재에 보다 가깝게 만듦으로써 보다 현실적인 전망 속에서 미래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지식의 생태학을 제안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이는 단일하고 위계적인 지식 체계가 아니라, 다양한 지식이 상호번역될 수 있는 다원적이고 상호연결적인 방식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억압된 지식과 실천들을 재발견하고, 탈식민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서구의 일직선적 진보의 관점에 대한 비판이며, 그에 대한 비서구적 대안의 제시다. 바로 이것이 산투스가 글로벌 노스보다 글로벌 사우스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현재 우리는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매우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기후위기를 비롯한 전 지구적 생태적 위기, 그리고 그것과 얽혀 있는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위기가 맞물려, 문명적 전환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고 미룰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산투스는 기존의 급진적 사상과 실천이 단절된 현실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우리 시대의 글로벌 노스에서는 급진적 사상들이 곧 급진적 실천으로 번역되지 않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미니페스토, 21쪽). 즉, 급진적 실천이 현존하는 급진적 사상들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중적 불투명성이 존재하며, 이는 단순한 이론적 문제를 넘어 기성 권력이 의도적으로 이러한 단절을 유지하는 구조적 메커니즘과도 연결된다. 즉, 이러한 단절을 극복하고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가 된다. 산투스는 이에 대해 오늘날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은 ‘도그마 게임의 종말, 좋은 삶을 위해 집결한 이들이 지식인들에게 맡긴 후위 이론의 임무, 세계의 고갈되지 않는 다양성이라는 관점’이라는 세 가지 요인으로 인해 과거보다 더 희망적이라고 전망한다(미니페스토, 31쪽). 다시 말해, 기존의 급진적 담론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조건들이 우리 시대에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산투스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글로벌 사우스와 관련하여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이해하려면, 바로 다음의 인용이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가장 의미 있는 변화 중 하나가, 수세기 동안 유럽 식민주의와 북미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왔고 그간 글로벌 노스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어 온 전 지구적 의제들의 조건과 우선순위에 대해 처음으로 권리를 주장하게 된 국가들, 민족들, 그리고 지역들이 글로벌 정치 무대에 부상하게 된 것과 관련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결론, 459쪽).

그러므로 반식민주의적 저항과 투쟁의 대안적 사회 운동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대안적 사회 운동이 지향하는 바는, 그동안 가난과 억압, 배제에 시달려 온 사람들 역시 존엄한 삶을 영위할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논리를 구축해 왔다. 따라서 같은 시기 라틴아메리카에서 가난한 대중이 대안적 사회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더 나아가, 1990년 에콰도르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에서 원주민 운동이 본격화되고 탈식민성 담론이 출현한 것 역시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산투스는 글로벌 사우스의 관점에서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 WSF)에 실천적으로 참여해 온 지식인이다. 세계사회포럼은 2000년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리에서 시작되었으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적 담론과 실천을 모색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산투스는 최근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이 제시하고 있는 좋은 삶/부엔 비비르 철학을 중요한 개념으로 다룬다. 부엔 비비르 철학은 2008년 에콰도르, 2009년 볼리비아에서 각각 개헌을 통해 ‘복수국민국가(Estado Plurinacioinal)’의 개념 안에 포함되었다. 이 개념은 매우 단순한 것으로, 근대성과 원주민 철학 사이에 위계적 서열을 두지 말고 수평적 대화를 가능하게 하자는 유토피아적 전망을 담은 개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부엔 비비르 역시 특정 개념적 틀, 즉 획일적 이데올로기나 고정된 이론적 틀에 갖히지 않는 것이다.

산투스의 비판은 매우 예리하다. 스피노자의 항복, 즉 1677년, 당시 유럽의 권력 계급이 스피노자가 말년에 ‘범신론적 무신론’을 포기하고 기독교 신앙으로 전향했다고 주장했던 사건(미니페스토, 23쪽) 이후, 유럽 비판이론의 전통이 왜곡되기 시작했다는 그의 분석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사실 그가 인용, 분석하는 지식인들의 논의는 그냥 따라가기만 해도 벅찰 정도로 방대하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측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글로벌 노스 내부에서도 이미 근대성과 서구중심주의의 불편한 진실을 직시했던 지식인들(예를 들어 사모사타의 루키아노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블레즈 파스칼 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상이 소외되거나 배제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산투스가 이러한 전통을 고려하면서도 엘리트보다는 대중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그는 엘리트보다는 대중에게서 끊임없이 배우려는 태도를 가진다. 여기서 산투스의 독특한 창의성이 드러난다. 그 예들 중 하나로 후위 이론을 들 수 있다. 후위 이론은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운동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한 개념이다. 서구 근대성의 핵심적 특징 중 하나는, 아무리 과격한 비판이론이라 할지라도 결국 엘리트 지식인이 대중을 이끈다는 전제를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후위 이론은 이와 정반대다. 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궤적을 훑어 보면, 그 문화적 의식은 사회적 연대성과 사회적 주체성을 재구성하게 만들고 있고 이에 따라 대항헤게모니 세계화의 도전을 감당할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정치적 문화의 힘은 대중의 경험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 같은 새로운 싹의 출현은 새로운 “자연법”―기층 대중을 포용하는 복합문화적, 탈식민적 맥락을 가진 ‘세계시민주의적(cosmopolitan) 법’―의 출현을 향하고 있다(산투스 2008, 34).

라틴아메리카 대중이 그런 연대의 능력을 가지게 된 이유는, 이들이 원주민 철학에 연원한 관계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성은 위계적 구조를 거부하고 상호연결성을 강조하는 특징을 갖는다. 한편, 산투스의 사상이 독특한 이유는 그것이 이분법적 사고에 갇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성장, 발전, 그리고 품위 있게 잘살려는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부정하지 않으며, 동시에 고통을 끌어안고 그저 아름다움만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의 이러한 특징은 그가 글로벌 사우스의 대중이 맞서 싸우는 억압의 구조를 해석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인간들 사이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상품물신주의, 지식의 단일문화, 진보의 선형적 시간관, 자연화된 불평등, 지배적인 척도, 경제 성장과 자본주의적 발전의 생산주의”(매니페스토, 26쪽)를 여러 장애물 중 일부로 지적하면서, 그것들이 서로 ‘가족적 유사성’을 지니고,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해 억압의 구조를 형성한다고 본다.

글로벌 노스 안에서도 모든 사람이 존엄 있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가능성을 포착했기에, 산투스가, 결코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낙관적 전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 한국 사회 또한 산투스의 주장과 통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몇 년 전에 UN에 의해 글로벌 사우스에서 글로벌 노스로 편입한 유일한 국가로 인정받았지만, 이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변화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가 익숙한 민족주의의 틀을 벗어나 반란적 서발턴 세계시민주의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란적 세계시민주의는 기존의 주류적, 자유주의 비판이론이 주장하는 칸트식의 세계시민주의가 아닌, 서로 다른 보편성, 즉 단일 보편성에 반대하는 복수 보편성(미뇰로 2010, 7)을 주장하는 비주류적 접근과 상응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이 제안하는 대안적 실천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전개된다. 다시 한번 산투스의 말을 그대로 소환하자면,

이러한 활동들의 스케일은 매우 다양하다. 글로벌 사우스와 글로벌 노스 모두에서 소외된 사회 집단들이 자신의 삶과 공동체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제를 얻기 위해 실행하는 미시적 활동이 있는가 하면, 양질의 일자리와 환경 보호의 기본적인 기준을 보장하기 위해 국제적 차원에서 법적・경제적 조정을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 글로벌 금융 자본을 통제하기 위한 시도부터 협력과 연대의 원칙에 기반한 지역 경제를 구축하려는 노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와 형태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대안적 생산과 생산성에 대한 개념과 실천들은 두 가지 주요 특징을 공유한다. 첫째, 이들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대안이 되는 체계적 경제 시스템을 구현하기보다는, 주로 지역 사회와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생산적 공간을 창출하려는 지역적인 노력이라는 점이다. (……) 두 번째 특징은 이러한 활동들이 민주적 참여, 환경적 지속가능성, 사회적·성적·인종적·민족적·문화적 형평성, 그리고 초국적 연대와 같은 목표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경제’ 개념을 공유한다는 점이다(6장, 354-355쪽).

마지막으로, 산투스가 아무리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낙관적 의지와 비전을 버리지 않는 태도가 사뭇 인상적이다. 그가 인용한 스피노자의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운 만큼이나 드물다(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라는 말처럼, 진정한 변화와 그것을 위한 실천은 필연적으로 어렵고 희귀하다(미니페스토, 51쪽). 아울러, 우리의 특별한 적, 즉 우리가 맞서야 할 가장 강력한 적이 우리 안에 자리한 나태함과 무기력이라는 그의 지적이 주는 울림 또한 어느 때보다도 크게 다가온다.

옮긴이를 대표하여

안태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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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대항헤게모니,

남의 인식론을 재조명하다

본문 중에서

이 책에는 세 가지 기본적 생각이 전제돼 있다. 첫째, 세계에 대한 이해는 서구가 세계를 이해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둘째, 전 지구적 인지적 정의 없이는 전 지구적 사회적 정의도 있을 수 없다. 셋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해방적 변화들은 서구중심적 비판이론이 발전시킨 문법과는 다른 문법과 각본을 따를 수 있으며, 그 같은 다양성은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한다.(4쪽, 서문 중에서)

지금은 인간과 어머니 대지를 포함하는 전 지구적 차원의 판가름의 시대이다. 아직까지는 어떤 규칙도 없는 판가름의 시대이다. 한편에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그에 딸린 모든 위성적 억압들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글로벌 노스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는 지리적 위치가 아닌 정치적 위치이며 고통의 초국가화(transnationalization)에 점점 더 특화되어 가고 있는 곳이다. 공장이 이전되면서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들, 메가프로젝트와 기업농, 광산업으로 인해 수탈당한 인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농민들, 인종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은 아메리카와 호주의 원주민들, 시우다드 후아레스(Ciudad Juárez)에서 살해당한 여성들, 우간다와 말라위의 게이와 레즈비언들, 너무나 가난하지만 또한 너무나 부유한 다르푸르의 사람들, 살해당하고 콜롬비아 태평양 연안의 끝으로 쫓겨난 아프리카계 후손들, 생명의 순환에 타격을 입은 어머니 대지, 테러리스트로 몰려 세계 곳곳의 비밀감옥에서 고문당하는 사람들, 강제 송환의 위기에 처한 서류 미비 이민자들, 계속되는 폭격 속에서 살아가고 일하고 삶의 순간들을 기념하는 팔레스타인인들, 이라크인들, 아프간인들, 파키스탄인들, 자본주의와 식민주의가 세계의 다른 모든 민족들을 대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경멸과 독단으로 자신들을 대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빈곤한 북미인들, 금융 해적들이 휘두르는 약탈 법칙의 먹잇감이 된 은퇴자들, 실업자들, 그리고 고용 불가능한 사람들.(36, 38쪽)

독자들은 내가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 여전히, 비록 희망이 없거나 희망 없을 정도로 정직할지라도, 기성 권력이 방심하거나 경계를 느슨히 한 틈을 타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급진주의를 되찾으려는 하나의 시도라는 것을 틀림없이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덧붙이자면, 나는 내가 성공했는지 알 방법이 없다. 따라서 나는 내가 유능한 반란자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내가 쓰는 것을 쓰고자 하는 절박한 충동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침묵되어야 할 것을 침묵시키고자 하는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 마지막 문장은 전율스럽다.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운 만큼이나 드물다(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상당 부분 미완성으로 남을 이유이다.(49, 51쪽)

유럽중심적 비판이론과 좌파 정치가 역사적으로 주로 글로벌 노스에서, 특히 북반구의 오직 5-6개 국가(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어느 정도 미국)에서 발전된 반면에,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변혁을 가져온 좌파의 실천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서구 비판 전통은 전 세계의 억압받는 계층이 아닌, 유럽에 속한 억압받는 계층의 요구와 열망을 반영하여 발전해 왔다. 문화적 관점과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전통이 구현하고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찬양한 ‘유럽적 보편주의’는 사실상 특정한 현실에 국한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한 예로, 유럽적 보편주의는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식민주의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를 억압 체제로서 포함하지 않는다.(91쪽)

이 장에서 나는 적어도 두 개의 20세기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유럽적 아메리카의 20세기이고 다른 하나는 누에스트라 아메리카의 20세기이다. 물론 아프리카, 아시아를 비롯해 유럽 내부에도 다른 20세기가 존재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앞의 두 가지, 특히 후자에 집중하고자 한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민주주의와 복지에 대한 수많은 약속을 지니고 있었고, 유럽 안팎에서 파괴적인 전쟁을 겪은 유럽적 아메리카의 20세기는, 결국 내가 사회적 파시즘이라고 명칭한 불길한 현상의 부상과 함께 막을 내렸다는 것이다. 사회적 파시즘은 종종 헤게모니적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위장되었다. 이 세기의 가장자리에서 또 다른 세기가 발전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누에스트라 아메리카 세기이다.(105-106쪽)

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개념이 절대적으로 주장되거나 부정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주어진 역사적 시기에 매우 심오한 것으로 경험된 변혁들을 설명하기 위한 방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설령 나중에 가서 결국 그러한 변혁들이 의도했던 만큼 현상을 바꾸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 변화가 패러다임적일 것이냐 혹은 하위 패러다임적일 것이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어떤 조건들하에서 경험되는가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가장 의미 있는 변화 중 하나가, 수세기 동안 유럽 식민주의와 북미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왔고 그간 글로벌 노스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어 온 전 지구적 의제들의 조건과 우선순위에 대해 처음으로 권리를 주장하게 된 국가들, 민족들, 그리고 지역들이 글로벌 정치 무대에 부상하게 된 것과 관련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글로벌 사우스가 결국에는 새로운 형태와 다른 종류의 담론들로, 수세기 동안 글로벌 노스에 의해 구현되어 온 동일한 사회적 과정을 재생산하게 될 수도 있다.(459쪽)

남의 인식론들의 유토피아는 곧 그 자신의 소멸이다.(4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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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인식론: 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정의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세계사회포럼의 주요 이론가, 세계적인 학자

우리 시대의 가장 독창적인 세계 사회사상가 중 한 명,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유럽중심적 비판이론과 좌파 정치가 역사적으로 주로 글로벌 노스에서, 특히 북반구의 오직 5-6개 국가(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어느 정도 미국)에서 발전된 반면에,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변혁을 가져온 좌파의 실천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책에는 세 가지 핵심 전제가 있다.

첫째, 세계에 대한 이해는 서구가 세계를 이해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둘째, 전 지구적 인지적 정의 없이는 전 지구적 사회적 정의도 있을 수 없다. 셋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해방적 변화들은 서구중심적 비판이론이 발전시킨 문법과는 다른 문법과 각본을 따를 수 있으며, 그 같은 다양성은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한다.




산투스는 기존 서구중심적 지식 체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재의 사회학과 출현의 사회학, 그리고 지식의 생태학, 상호문화적 번역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는 단일한 보편적 지식이 아니라, 다양한 지식 체계가 공존하고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이다.

이 책에서 그는 남의 인식론의 윤곽을 제심함으로써, 북반구에 의한 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정의를 구상한다.




“이 책은 충격적이면서도 신중한 블록버스터급 작품이다. 산투스는 우리가 가장 깊이 자리 잡은 편견들을 ‘다시 생각하지 않도록’ 요청한다. 그는 우리가 세계를 아래로부터 바라보고, ‘보편성’을 북반구가 아닌 남반구의 시각에서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그는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구상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 이매뉴얼 월러스틴(미국 사회학자)




“북반구는 여전히 서구인가? 그리고 과거의 서구는 여전히 단순한 ‘북’일 뿐인가? 이것은 단순한 지정학적 문제가 아니라 인식론적 질문이며, 실천, 학문, 경험, 정동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인류와 새로운 환경이 형성될 것이다. 이 책은 독창적이며 시의적절한 비판을 담고 있다. 산토스의 연구 분야를 넘나드는 통찰력은 실로 인상적이다.”

― 에티엔 발리바르(프랑스 철학자)



“우리 시대의 가장 독창적인 세계 사회사상가 중 한 명인 산토스는 라틴아메리카 지역을 거대한 지적 도전의 장으로 바라본다. 그는 호세 마르티의 사상을 따라, 이 시대가 ‘누에스트라 아메리카(Nuestra América)의 세기’이며, 이곳이 가장 강력한 ‘반란적, 대항헤게모니적 잠재력’을 지닌 공간이라고 본다.”

― 라켈 소사 엘리사가(사회학자, 역사학자, 활동가)



지식인-행동가를 위한 비극적 낙관주의

산투스는 ‘비극적 낙관주의’를 제시한다. 억압적 체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체제가 완전히 승리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조건은 역사적 무게를 짊어지면서도, 더 나은 선택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있다. 이러한 관점은 기존 급진적 비판이론이 가진 지나친 낙관주의와 지나친 비관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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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충격적이면서도 신중한 블록버스터급 작품이다. 산투스는 우리가 가장 깊이 자리 잡은 편견들을 ‘다시 생각하지 않도록’ 요청한다. 그는 우리가 세계를 아래로부터 바라보고, ‘보편성’을 북반구가 아닌 남반구의 시각에서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그는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구상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 이매뉴얼 월러스틴(미국 사회학자)

남의 인식론

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정의

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지음

안태환 · 양은미 · 박경은 옮김|536쪽|25,000원|신국판(152*225)

출간일 2025년 2월 25일|ISBN 979-11-89333-90-4 [93300]

사회과학 > 사회학 > 사회학 일반

사회과학 > 정치학/외교학/행정학 > 정치사상사

인문학 > 서양철학 > 서양철학 일반



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대항헤게모니,

남의 인식론을 재조명하다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의 대표 저서인 『남의 인식론: 인식론 살해에 맞선 정의』가 번역·출판되었다. 이 책은 서구중심주의가 지배하는 현대 지식 체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남반구의 다양한 인식론을 복원하고자 한다. 또한, 사회적 부정의와 인식론적 억압의 문제를 깊이 탐구하며, 실천적 대안을 모색한다. 저자 산투스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사회학자, 법학자, 비판이론가이다. 그는 서구 근대성이 유일한 보편적 진리를 제공한다는 믿음을 해체하며, 다양한 지역과 문화에서 축적된 지식을 재평가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는 ‘인식론 살해(epistemicide)’라는 개념을 통해 서구 지식 체계가 식민주의와 제국주의의 역사 속에서 비서구적 지식과 문화를 배제하고 억압해 온 과정을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대안적 인식론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책 전반에 걸친 핵심 논의의 중요한 전제로, 산투스는 글로벌 노스와 글로벌 사우스 사이에 눈에 안 보이는 아득한 심연이 존재함을 상정한다. 아득한 심연을 만든 근거는 바로 근대적 이성과 과학이다. 특히 산투스는 환유적 이성과 예견적 이성이 심연을 만든 주범임을 폭로하고 있다. 이 책은 ‘인지적 부정의(cognitive injustice)’라는 개념을 탐구한다. 이는 전 세계인이 삶을 영위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다양한 인식 방식을 인정하지 않는 현상을 의미한다. 전 지구적 사회적 부정의는 전 지구적 인지적 부정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전 지구적 사회적 정의를 위한 투쟁은 전 지구적 인지적 정의를 위한 투쟁이기도 해야 한다.

산투스는 서구의 지배가 오랫동안 글로벌 사우스(남반구)의 기존 지식과 지혜를 철저히 주변화시켜 왔다고 말한다. 기존의 서구에서 생산된 이론은 비서구권의 실천을 설명하지 못했다. “유럽중심적 비판이론과 좌파 정치가 역사적으로 주로 글로벌 노스에서, 특히 북반구의 오직 5-6개 국가(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어느 정도 미국)에서 발전된 반면에,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변혁을 가져온 좌파의 실천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는 세계의 인식론적 다양성을 회복하고 존중하는 일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남의 인식론』은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형태의 세계시민주의를 제안한다. 이 서발턴적, 반란적 세계시민주의는 시장 중심적 탐욕과 개인주의의 논리를 넘어 공존, 연대, 그리고 생명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추구한다.

세계사회포럼의 주요 이론가이자 지식인-행동가, 산투스

산투스는 세계적으로 저명한 사회학자이자 법학자, 비판적 이론가이다. 특히 인지적 정의/부정의와 글로벌 사우스의 인식론에 대한 연구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산투스는 서구중심적 지식 체계의 한계를 비판하고, 남의 인식론(Epistemologies of the South) 개념을 제안한바, 프랑크푸르트학파 이후 가장 영향력 있는 비판이론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연구는 사회 운동, 탈식민주의 연구, 법과 민주주의 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산투스는 사회학, 법학, 정치철학을 아우르는 연구를 해왔다. 미국의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은 “그는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구상할 가능성을 제시한다”고 했으며, 프랑스의 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산토스의 연구 분야를 넘나드는 통찰력은 실로 인상적”이라고 했다. 그는 특히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 WSF)의 주요 이론가이자 실천가로 활동하며, 신자유주의와 서구중심적 세계 질서에 맞서는 글로벌 대안 운동을 지지했다. 세계사회포럼은 2000년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리에서 시작되었으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적 담론과 실천을 모색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산투스는 최근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이 제시하고 있는 좋은 삶/부엔 비비르 철학을 중요한 개념으로 다룬다.

현재 포르투갈 코임브라 대학교(University of Coimbra)의 명예교수이며, 미국과 브라질을 포함한 여러 국제 대학에서도 연구 및 강의를 해왔다. 그는 다수의 저서를 집필했는데, 그중에 전 세계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는 책이 『남의 인식론: 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정의』과 이 책의 후속편인 『인지적 제국의 종말(The End of the Cognitive Empire)』이다. 이 책들은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었다.

북의 인식론에 맞서는 남의 인식론

산투스는 이 책에서 세 가지 기본 전제를 제시한다. 첫째, 세계에 대한 이해는 서구가 세계를 이해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둘째, 전 지구적 인지적 정의 없이는 전 지구적 사회적 정의도 있을 수 없다. 셋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해방적 변화들은 서구중심적 비판이론이 발전시킨 문법과는 다른 문법과 각본을 따를 수 있으며, 그 같은 다양성은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한다.

첫째, 산투스는 세계에 대한 이해는 서구가 정의한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고 한다. 서구 근대성의 논리는 모든 지식을 서구적 틀 안에서 해석하려 했지만, 세계에는 다양한 방식의 사고와 해석이 존재한다. 서구중심적 인식론은 전 지구적 사고의 일부에 불과하다.

둘째, 전 지구적 인지적 정의(cognitive justice) 없이는 전 지구적 사회적 정의(social justice)도 존재할 수 없다. 지금까지 서구 식민주의, 자본주의, 가부장제가 결합하여 비서구적 지식을 체계적으로 배제해 왔으며, 이를 바로잡지 않고서는 사회적 평등과 해방이 불가능하다. 서구중심적 지식 체계는 어떤 문제점이 있을까? 이 책은 서구 근대성이 유지되어 온 방식에 대해 강력한 비판을 제기한다. 산투스는 ‘제도화된 해로운 거짓(institutionalized harmful lies)’이라는 개념을 사용하여, 서구가 민주주의, 법치, 인권 등의 개념을 내세우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불평등과 억압을 유지해 온 방식을 분석한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대량 소비를 강요하고, 법치라는 이름으로 불법적 약탈이 이루어지며,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강박적 소비를 조장하는 현실 등이다. 우리 현대 세계를 관통하는, 제도화된 해로운 거짓들이 만연해 있는 독특한 방식과 강도를 고려할 때, 부정의에 대한 적절한 인식과 억압의 극복 가능성은 오직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인식론적 단절에 대한 초점이 이 책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는 이론을 서구중심 비판 전통과 가장 잘 구분 짓는 지점이다.

셋째, 그렇다면 프랑크푸르트학파 등 서구중심 비판 전통은, 우리 시대의 해방적 투쟁들을 설명해 내는 데 성공했는가? 산투스는 서구적 해방 담론이 여전히 부르주아적 사고의 틀 안에 갇혀 있음을 강조한다. 그럼으로써, 이제 해방적 변화는 서구중심적 비판이론의 문법과 각본을 따를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데, 기존 서구중심적 비판이론(예: 프랑크푸르트학파, 마르크스주의)은 비서구적 현실을 적절히 설명하는 데 실패했다고 본다. 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자신들이 비판하는 부르주아적 사고와 사회적 부정의의 인지적 차원을 억누르는 동일한 인식론적 토대를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세계에 대한 서구적 이해와 변혁 전망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서구중심적 비판 전통은 스스로를 대상을 함께 알아가고 이해하고 촉진하고 공유하고 나란히 걷는 것보다는, 대상에 대해 알고 설명하고 인도하는 데 있어 탁월한 전위 이론으로 여긴다. 산투스에 따르면, 이제 새로운 해방의 길은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비서구적 지식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산투스는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남의 인식론’을 제안한다. 이는 단순히 서구중심적 사고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억압받아 온 다양한 지식 체계가 공존하고 소통할 수 있는 지식 생태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이다.

남의 인식론과 대안적 지식 체계:

부재의 사회학, 출현의 사회학, 상호문화적 번역

산투스가 본격적으로 ‘남의 인식론’의 윤곽을 그리기 위해, 먼저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과 함께 ‘심연적 사고(abyssal thinking)’ 개념을 제시한다. 이는 서구중심의 인식론이 세계를 특정한 경계로 나누고, 그 경계 바깥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억압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서구 사회는 법과 민주주의를 강조하지만, 서구의 식민지에서는 폭력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여 왔다. 이는 가장 급진적 형태의 사회적 배제를 초래한다.

산투스는 기존 서구중심적 지식 체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재의 사회학과 출현의 사회학, 그리고 지식의 생태학, 상호문화적 번역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는 단일한 보편적 지식이 아니라, 다양한 지식 체계가 공존하고 상호 작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법론이다.

이 책에서 그가 제시하는, 남의 인식론의 윤곽은 다음과 같다. 먼저, ‘부재의 사회학(Sociology of Absences)’은, 서구 근대성이 지식과 실천을 분류하고 관련성의 정도에 따라 위계를 매기면서, 비서구의 가치관과 문화를 억압하여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든 과정을 분석한다. 반면, ‘출현의 사회학(Sociology of Emergences)’은 이미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대안적 가능성을 인식하고 강화하는 과정이다. 즉, 서구 근대성이 지나치게 미래를 강조하며 현재의 다양한 가능성을 배제해 온 것에 반대하며, 현재를 확장하고 미래를 수축하여 현재에 보다 가깝게 만듦으로써 보다 현실적인 전망 속에서 미래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그는 부재의 사회학과 출현의 사회학이 어떻게 지식의 생태학상호문화적 번역 둘 다를 위한 가능성을 열어주는지 탐색한다. 그는 지식의 생태학을 먼저 제안하는데, 이는 단일하고 위계적인 지식 체계가 아니라, 다양한 지식이 상호번역될 수 있는 다원적이고 상호연결적인 방식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억압된 지식과 실천들을 재발견하고, 탈식민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서구의 일직선적 진보의 관점에 대한 비판이며, 그에 대한 비서구적 대안의 제시다. 바로 이것이 산투스가 글로벌 노스보다 글로벌 사우스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산투스는 결론에 다가가면서 상호문화적 번역을 다루는데, 이는 서구중심적 일반이론들의 토대를 이루는 추상적 보편주의와 문화들 간의 통약불가능성이라는 관념 모두에 대한 대안으로서 구상하는 것이다.

지식인-행동가를 위한 비극적 낙관주의

이 책의 마지막에서 산투스는 ‘비극적 낙관주의’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억압적 체제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체제가 완전히 승리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조건은 역사적 무게를 짊어지면서도, 더 나은 선택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 있다. 이러한 관점은 기존 급진적 비판이론이 가진 지나친 낙관주의와 지나친 비관주의 사이에서 균형을 찾으려는 시도이다. 산투스는 단순한 혁명적 사고를 넘어, 지속적이고 점진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며 중요하다고 본다.

“이 책은 급진적 비관주의도 급진적 희망도 아닌, 비극적 낙관주의에 흠뻑 적셔져 있다. 어떤 것도 비억압적 대안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제거할 만큼 억압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중 어떤 대안도 어떻게든 그 자신이 억압과 혼동되거나 뒤섞일 위험을 피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하거나 설득력 있지는 못하다. 만약 인간의 조건이 곧 노예 상태라면 굳이 노예라는 제도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인간의 조건이 곧 자유라면 헌법과 인권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조건은 역사의 무거운 짐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그 짐을 더 지기 쉽게 만들 방법을 반쯤 맹목적으로 선택하는 인간들의 조건이다.”(산투스, 서문 중에서)

산투스가 아무리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낙관적 의지와 비전을 버리지 않는 태도는 사뭇 인상적이다. 그가 인용한 스피노자의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운 만큼이나 드물다(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라는 말처럼, 진정한 변화와 그것을 위한 실천은 필연적으로 어렵고 희귀하다(미니페스토, 51쪽). 아울러, 우리의 특별한 적, 즉 우리가 맞서야 할 가장 강력한 적이 우리 안에 자리한 나태함과 무기력이라는 그의 지적이 주는 울림 또한 어느 때보다도 크게 다가온다.

이 책은 서구중심적 사고를 넘어 다양한 지식 체계를 탐색하고 싶은 연구자, 비서구적 지식과 문화를 기반으로 새로운 사회적 변화를 모색하는 행동가, 그리고 인식론 살해와 인지적 부정의에 대해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감을 줄 것이다. 산투스는 그들을 지식인-행동가로 불렀다. 그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넘어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책에서 산투스는 인식론적 살해, 심연적 선, 부재의 사회학, 출현의 사회학, 상호문화적 번역 등 남의 인식론의 윤곽을 그리는 다양한 방법론과 개념들을 제안한다.

책 형식의 파괴도 눈에 띈다. 이 책은 대위법 방식으로 제시된 서문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대위란 좋은 삶/부엔 비비르(buen vivir)를 향한 상상된 매니페스토(manifesto)와, 모더니즘적 선언문들에 깔려 있는 장대한 목적에 도전하고자 명명된 미니페스토(minifesto) 사이의 대위를 말한다. 매니페스토는 산투스가 수년간 함께 활동해 온 다양한 사회 운동의 상상된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리고 미니페스토는 저자 자신의 응답을 제시한다. 바로, 급진주의가 불가능한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의 한계를 강조한다. 이 대위법적 구조를 가장 잘 시각화하기 위해 매니페스토는 짝수 페이지에, 미니페스토는 홀수 페이지에 인쇄되어 있다.

추천의 글

“이 책은 충격적이면서도 신중한 블록버스터급 작품이다. 산투스는 우리가 가장 깊이 자리 잡은 편견들을 ‘다시 생각하지 않도록’ 요청한다. 그는 우리가 세계를 아래로부터 바라보고, ‘보편성’을 북반구가 아닌 남반구의 시각에서 재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그는 완전히 새로운 미래를 구상할 가능성을 제시한다.”

― 이매뉴얼 월러스틴(미국 사회학자)

“북반구는 여전히 서구인가? 그리고 과거의 서구는 여전히 단순한 ‘북’일 뿐인가? 이것은 단순한 지정학적 문제가 아니라 인식론적 질문이며, 실천, 학문, 경험, 정동의 차원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인류와 새로운 환경이 형성될 것이다. 이 책은 독창적이며 시의적절한 비판을 담고 있다. 산토스의 연구 분야를 넘나드는 통찰력은 실로 인상적이다.”

― 에티엔 발리바르(프랑스 철학자)

“『남반구의 인식론』은 오늘날 우리의 상호문화적, 초문화적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긴장에 대한 빛나는 증언이다.”

― 발렌틴 Y. 무딤베(듀크대학교 문학 교수)

“우리 시대의 가장 독창적인 세계 사회사상가 중 한 명인 산토스는 라틴아메리카 지역을 거대한 지적 도전의 장으로 바라본다. 그는 호세 마르티의 사상을 따라, 이 시대가 ‘누에스트라 아메리카(Nuestra América)의 세기’이며, 이곳이 가장 강력한 ‘반란적, 대항헤게모니적 잠재력’을 지닌 공간이라고 본다.”

― 라켈 소사 엘리사가(사회학자, 역사학자, 활동가)

“이 책은 세계사회포럼을 ‘지식의 세계포럼’으로 확장한 것과 같다. 급진적 민주주의적 열정과 철학, 과학, 예술, 정치에 대한 방대한 학식을 바탕으로 논증된 저작이다.”

― 괴란 테르보른(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지은이 및 옮긴이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코임브라대학교(포르투갈)의 사회학과 명예교수이자 위스콘신대학교 매디슨캠퍼스의 저명한 법학자이다. 또한 코임브라대학교의 사회연구센터 소장이며 세계화, 법사회학과 국가사회학, 인식론, 사회 운동, 세계사회포럼과 같은 주제에 관해 광범위한 집필 및 출판 활동을 해왔다. 지금까지 여러 상을 수상했으며, 가장 최근에는 멕시코 과학기술상(2010), 법과사회학회의 칼벤 주니어 상(2011)을 받았다. 영어로 출간된 그의 수많은 저서들 중에는 The Rise of the Global Left: the World Social Forum and Beyond(Zed Books, 2006)와 Law and Globalization from below: Towards a Cosmopolitan Legality(공동 편자: 케임브리지대학교 출판부, 2005)가 있다.

옮긴이

안태환 2022년 11월에 갈무리 출판사에서 포르투갈의 사회학자인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의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Pensar el estado y la sociedad: desafios actuales)』을 번역했다. 이 책은 볼리비아의 급진적 변혁의 중요성을 원주민 운동의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의 일반 공동 연구에 참여했고 페미니즘 운동단체인 《일다》, 《프레시안》, 《레디앙》 등에 기고했다. 라틴아메리카의 사회 운동에서 여성의 역할에 대해 관심이 많다.

양은미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연구소의 HK연구교수이다. 저서로는 『아마존의 길』(공저), 『파울루 프레이리, 삶을 바꿔야 진짜 교육이야』(단독) 등이 있고, 역서로는 História de Dokdo: Uma Leitura Ecologista(공역)(원서: 『생태로 읽는 독도 이야기』, 국립생태원)가 있다.

박경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중남미연구소의 HK 연구교수이다. 역서로는 스페인어로 번역한 Hotel de gérmenes (『여기는 세균호텔』)이 있으며, 저서로는 『라틴아메리카 생태 위기와 부엔비비르』(공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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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머리와 날머리] 정길수 교주본 『남원고사: 남원의 옛 노래 김춘향전』 서문과 해설

우리가 잘 아는 「춘향전」,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버전이 있습니다. 바로 『남원고사』입니다. 이번에 정길수(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님이 오랜 연구 끝에 완성한 『남원고사』 교주본을 소개합니다. 단순히 「춘향전」의 또 다른 버전이 아니라, 그 원형을 엿볼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이죠.

- 『남원고사』는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남원고사』는 원래 1860년대 서울 종로에서 필사된 책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책이 프랑스로 넘어가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970년대에야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죠. 명지대학교 출판부에서 영인본이 출간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고, 작품이 소개되자마자 「춘향전」의 최고봉, 「춘향전」의 결정판으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 『남원고사』 속 춘향은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은 한없이 정숙하고, 도령을 향한 사랑 하나로 모든 시련을 견디는 인물로 그려지죠. 하지만 『남원고사』의 춘향은 조금 다릅니다. 도도하고 똑 부러지며, 상황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대처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어떤 위기가 닥쳐도 머리를 써서 해결하고, 필요하면 아양도 떨고, 때로는 과감한 행동도 서슴지 않죠. 기존의 조신한 여성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지혜를 가진 춘향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습니다.

- 『남원고사』가 특별한 이유

『남원고사』는 「춘향전」 중에서도 가장 긴 이야기로, 무려 8만 5천 자에 달합니다. 다른 판본보다 훨씬 많은 내용이 담겨 있죠. 이 책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이몽룡과 김춘향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모습도 훨씬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어요. 이렇게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남원고사』는 인간의 본성을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 사랑의 계약 문서, 훼손된 사랑일까?

『남원고사』에서 가장 독특한 설정 중 하나는 바로 '불망기(不忘記)'입니다. 쉽게 말해, 춘향이 이도령에게 사랑을 약속하는 계약서를 써 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이죠. 사랑이라는 게 보통 순수한 감정으로만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남원고사』에서는 사랑도 일종의 약속이고, 그 약속을 증명할 문서가 필요하다고 보는 거죠. 이 설정은 현대적 관점에서도 흥미롭습니다. 사랑이란 감정뿐만 아니라 신뢰와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니까요.

- 『남원고사』의 인간관: 밤 잔 원수 없다

이 작품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절대적인 선악'이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악역으로 등장하는 변학도조차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다소 우스꽝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 역시 단순히 착하거나 나쁜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하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는 『남원고사』가 단순한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걸 뜻합니다.

- 『남원고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이번 정길수 교수님의 교주본은 단순히 『남원고사』의 원문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2,371개의 주석과 200여 개의 교정을 추가하여 『남원고사』의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습니다. 『춘향전』을 단순한 사랑 이야기로만 알고 있던 분들에게, 『남원고사』는 색다른 시각을 제공할 것입니다.

춘향의 이야기가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랑과 인간 군상의 이야기로 다가오는 순간, 『남원고사』의 진정한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매력의 『남원고사』를 읽고 나면, 올해도 5월에 찾아올 남원 춘향제를 가보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정길수 교주본 『남원고사: 남원의 옛 노래 김춘향전』의 들머리(서문)와 날머리(해설)를 통해 먼저 접해 보시죠. 들머리는 텍스트로, 날머리는 이미지 파일로 올립니다.

서문

한국 고전소설사를 공부해 보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어언 30년 전 일이다. 그 뒤로 이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해 왔지만 아직 못 읽어 본 작품이 많고 소설사의 흐름은 여전히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더 부끄러운 일이 있다. 불과 2년 전 『남원고사』를 정독하기 전까지 나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춘향전」의 가치를 잘 알지 못했다. 「열녀춘향수절가」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완판 84장본’과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춘향가」 정도로만 알고 있던 「춘향전」의 세계와 전혀 다른 『남원고사』의 면모, 인간을 보는 독특한 서술자의 시선을 읽고서야 이 작품의 진가를 얼마간 이해하게 되었다.

「춘향전」은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 온 고전소설 작품이다. 그런데 「춘향전」이라고 해서 다 같은 「춘향전」이 아니다.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 이야기인 점은 모두 같지만 적어도 수십 종의 버전에서 인물 설정, 에피소드 출입, 서사 전개에 영향을 주는 디테일의 차이가 확인된다. 대중의 끊임없는 사랑과 함께 기존의 「춘향전」에 대한 불만이 이어지면서 적극적인 독자의 개작이 수행된 결과 이렇게 미세한 차이를 지닌 다수의 「춘향전」 이본(異本)이 탄생했다. 미세한 설정 변화가 작품의 전체적인 색깔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있어 「춘향전」이 어떤 작품이라고 하려면 내가 본 「춘향전」이 어떤 버전인지부터 밝히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춘향과 「춘향전」에 대한 해석의 혼란은 대개 이본 문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남원고사』는 초기 버전에 가까운 면모를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춘향전」의 대표 버전이다. 1860년대 서울 종로에서 필사된 책이 프랑스 파리로 옮겨 가 있다가 1970년대에 뒤늦게 그 소재가 알려지면서 즉시 ‘「춘향전」의 최고봉’, ‘「춘향전」의 결정판’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나는 가장 생기발랄한 ‘야성’(野性)을 지닌 ‘김춘향’의 형상, 풍성한 디테일,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웃들, 곧 절대 선인도 절대 악인도 아닌 인간 군상을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서술자의 시선이 좋아 『남원고사』를 「춘향전」의 최고봉이라고 생각한다. 『남원고사』 이후에도 「춘향전」은 수많은 변개를 거치며 유동했거니와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춘향전」의 최고봉은 얼마든 다른 버전의 「춘향전」으로 바뀔 수 있다. ‘내가 본 「춘향전」’이 저마다 다르고 독자마다 취향에 맞는 「춘향전」을 고를 수 있다는 것 또한 「춘향전」의 매력이다. 연구자는 물론 고전에 큰 관심을 가진 독자들이 「춘향전」, 그중에서도 『남원고사』의 진가를 이해하는 데 기초 자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자세한 학술 주석을 붙여 굳이 또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 책을 내는 데에도 많은 분들의 배려와 도움이 있었다. 김동욱·김태준·설성경 세 분 선생과 이윤석 선생의 『남원고사』 주석 연구를 길잡이로 삼아 기존의 성과를 보완하는 교주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2023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수업에서 작품 일부를 강독하면서, 혼자 읽었다면 미처 살피지 못했을 여러 문제를 우리 뛰어난 학생들 덕분에 차분히 검토할 수 있었다. 곽보미 군과 이은채 군이 출판 과정에서 원고의 오류를 여럿 바로잡아 주었다. 선생님과 선배 동학들, 흔쾌히 출판을 맡아 주시고 최선의 지원을 해 주신 알렙 여러분, 사랑하는 가족, 오늘도 여전히 혼자 연구실에 앉아 이런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2024년 6월

정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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