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남의 인식론』(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의 서문 격인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한 매니페스토>와 나란히 배치돼 있는 <지식인-행동가들을 위한 미니페스토>라는 글을 소개하려 합니다. 기존의 급진적 사유와 실천이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그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를 성찰하는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급진주의의 불가능성과 새로운 가능성
이 글은 한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 시대에 진정한 급진주의는 가능한가?” 저자는 오늘날 글로벌 노스(선진국 사회)에서 급진적 사상이 급진적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현실을 지적하며, 기존의 혁명적 담론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오히려 급진주의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훈련 해제와 새로운 사유 방식
기존의 사유 방식과 실천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새로운 사고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저자는 이를 ‘훈련 해제(Untraining)’와 ‘자기 재발명(Reinvention)’이라고 부릅니다. 특히 지식인들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보다 실천적인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학문적 이론이 현실과 단절되지 않고 실천과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결한 이들과 후위 이론
글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개념 중 하나는 ‘좋은 삶(Buen Vivir)을 위해 집결한 이들’입니다. 이는 기존의 정치적 혁명가나 지식인들이 아니라, 실제로 현장에서 변화를 만들어가는 사람들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실천을 뒷받침하는 새로운 이론적 기반을 ‘후위 이론(Subaltern Theories)’이라고 부릅니다. 즉, 기존의 전위적 이론이 아니라, 실천 속에서 태어나는 이론을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식인-행동가들을 위한 미니페스토>는 오늘날 우리가 변화와 혁신을 꿈꿀 때, 어떤 자세로 사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기존의 도그마와 정통성을 넘어서, 우리가 어떻게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담고 있죠.
지난번 글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한 매니페스토>와 함께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https://blog.aladin.co.kr/alephbook/16295520

지식인-행동가들을 위한 미니페스토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지음, 안태환·양은미·박경은 옮김, 『남의 인식론』, 알렙, 2025)
이 책은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하는 모든 이들의 성공에 기여할 수 있는 자신의 능력이 제한적임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이 책이 선의 이쪽에서 쓰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의 사유는 선의 저쪽에 있지만 책으로서의 삶은 이쪽에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책은 이 책을 가장 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 의해 읽힐 것이다. 내 판단으로는, 이 책으로부터 혜택을 받을 수도 있는 사람들은 아마 이 책을 읽을 수 없을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읽을 수 있다고 해도 아마 읽는 것에 아무런 관심이 없을 것이고, 설사 관심을 갖는다 하더라도 십중팔구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잘해야 마지못한 동맹자일 뿐이다. 비록 이 책이 표현하는 연대는 결코 마지못한 것이 아니지만 말이다. 어떤 경우든, 동맹자는 기껏해야 상대적인 존재일 뿐이다.
이 책의 기여가 미미할 것이라고 하는 두 번째 이유는, 다른 시대들, 예를 들어 유럽의 탁월했던 17-18세기와는 달리, 우리 시대의 글로벌 노스에서는 급진적 사상들이 곧 급진적 실천으로 번역되지 않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즉, 급진적 실천은 현존하는 급진적 사상들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이중적 불투명성은 이 책에서 분석될 몇 가지 이유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오늘날 기성 권력이 현 상태의 유전적 코드와 부합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사상과 실천의 만남을 저지할 효율적인 수단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제 급진주의는 반(反)자연, 존재의 일탈(aberratio entis)이 되었다. 1677년, 유럽 열강들이 스피노자가 임종 직전에 자신의 ‘범신론적 무신론’을 포기하고 기독교로 개종했는지 알아내려고 애썼던 (예컨대 첩자들을 고용하는 방법을 통해) 그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신을 믿는 존재라는 ‘증거’ 앞에서의 스피노자의 항복이 몰고 올 파장을 그들은 간절히 기다렸다.
우리 시대에, 진정한 급진주의는 글로벌 노스에서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듯하다. 자신을 급진적 사상가라고 공언하는 이들은 자신을 속이고 있거나 다른 누군가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실천은 그들의 이론과 모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 대부분은 현실을 다루기 위해 보호모와 장갑을 필요로 하는 대학과 같은 기관에서 일한다. 서구 근대성이 지식인들에게 부리는 속임수 중 하나는 그들이 오직 반동적 제도들 안에서만 혁명적 사상을 생산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급진적으로 행동하는 이들은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남들이 이해할 수 있게 말할 만한 것이 없거나, 말한다 해도 그들의 행동반경 밖에서는 아무도 그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할 수 있고, 아니면 심지어 감옥에 갇히거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사회적 해방에 대해 어떻게 글을 써야 할 것인가? 누군가를 오도하거나 역으로 오도당하는 것을 피하려면, 급진적으로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러한 인정에서 출발하여 글을 쓰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서구 근대성의 급진주의로부터 남은 것이라고는 바로 그러한 불가능성에 대한 급진적 인정이 전부다. 그러나 남겨진 것은 결코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이를 향수 어린 시선으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반대로, 그것은 새로운 것을 상상하는 유일한 길이다. 우리 앞에는 잘 정의된 계획보다는 폐허가 더 많다. 그러나 폐허 또한 창조적일 수 있다.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은 재생산과 반복을 조장하는 적대적 조건들 속에서도 창조성과 단절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핵심은 새로운 이론들, 새로운 실천들, 그리고 그것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들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다. 핵심은 주로, 이론화하고 변혁적 집단행동을 생성하는 새로운 방식들을 상상하는 것이다. 급진주의가 지닌 구성된 불가능성(constituted impossibilities)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인정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구성적 가능성들(constituent possibilities)을 상상할 준비를 더 잘하게 될 것이다.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두 가지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여 그 둘 사이에서 글을 계속 써 내려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두 가지 불가능성이란 말할 수 없는 것을 소통하는 것의 불가능성(impossibility of communicating the unsayable)과 집단적 저자성의 불가능성(impossibility of collective authorship)을 가리킨다.
말할 수 없는 것을 소통하는 것의 불가능성. 지난 200년 동안 앎과 행함 사이의 관계는 그것이 지닌 일반적 성격을 상실하고 단지 근대 과학에 의해 타당성이 입증된 지식과 합리적인 사회공학 사이의 관계로 축소되어 왔다(Santos 2007b). 그 결과, 이러한 고도로 지성화되고 합리화된 영역의 바깥에 있는 것으로 자의적으로 간주한 모든 것은 무시되거나 낙인찍혔다. 바깥에는 열정, 직관, 느낌, 정서, 감정, 신념, 믿음, 가치, 신화들로 이루어진 어두운 세계, 키르케고르가 말하듯이 간접적인 방식 외에는 소통될 수 없는 것들의 세계가 있었다. 여러 종류의 실증주의는 배제된 것들이 존재하지 않거나(그저 환상이거나), 혹은 중요하지 않거나 위험하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한 환원주의는 이론과 실천 사이의 기하학적 상응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이론과 실천 모두가 자신들의 말할 수 없는 ‘반쪽’으로부터 분리되면서, 둘 사이의 관계가 지닌 복잡성과 우연성을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이론과 실천 모두 거울에 비치는 것처럼 상상되면서 이 둘은 서로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 눈먼 사람이 눈먼 사람의 인도를 받는다고 해서 두 배로 눈이 먼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더 잘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론가들과 지식인들은 기쁨이나 슬픔에 대해서도,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말하는 애도나 축하를 위해서도 준비되어 있지 않다. 전자는 이러한 감정들의 이름을 지을 줄은 알지만, 이를테면 스피노자가 이를 정동이라 부른 것처럼, 그것들을 실제로 살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그들은 이러한 감정들의 부재를 사유나 이성의 문제로 만들 능력도 없다. 그들은 사유가 분리해 놓은 것, 즉 삶 그 자체를 통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만일 삶이 구별을 할 수 있다면 많은 구별을 하겠지만, 확실히 감정과 이성 사이의 이런 구별만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삶은 삶으로서의 자기를 부정하게 될 테니 말이다. 이는 특히 변혁적 행동의 삶에서 더욱 그러한데, 거기서 현실이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으로 이루어지며, 그것은 오직 이성적 감정들과 감정적 이성들에 의해서만 일어날 수 있다. 지식인들의 관심사는 사유의 삶이며, 그것은 삶의 삶과는 거의 관계가 없다. 살아진 삶(lived life)은 스피노자의 산출된 자연(natura naturata)처럼 사유보다 덜한 것으로 여겨지지만, 살아 내는 삶(living life)과 산출하는 자연(natura naturans)은 분명 사유를 초월한다.
나는 나 자신을 지식인-행동가라고 부름으로써 말할 수 없는 것을 소통하는 불가능성을 생산적으로 살아 내는, 그리하여 새로운 가능성들을 창출해 내는 하나의 가능한 방식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 책은 간접적 소통에 자주 의존한다. 이 책 자체가 많은 간접적 소통을 바탕으로 사유되었다.
집단적 저자성의 불가능성. 저자성에 관한 한, 이 책은 경계가 흐릿하다. 최근 몇 년간 나는 세계사회포럼에서 행동가로 참여하며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투쟁에 깊이 관여해 왔다. 나는 나의 사유가 어느 정도까지 이름도 없고 분명한 윤곽도 없는 집단적 사유의 일부인지 판단할 수 없다. 이 책에서 나 자신의 것은 단지 개인적으로, 그리고 이중의 부재를 완전히 자각하면서 표현된 것뿐이다. 첫 번째 부재는 합리적 형식화가 가능하다 하더라도 오직 집단적으로만 형식화될 수 있는 것의 부재이고, 두 번째 부재는 개인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합리적으로 형식화될 수 없는 것의 부재이다. 따라서 이 책의 절반은 영원히 쓰이지 않은 채로 남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내가 쓸 수 있는 것을 쓴다. 나는 글을 쓰기 위해 내가 어떻게 나 자신을 집단으로부터 분리하는지를 자각함으로써 집단의 일부가 된다.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은 오늘날 세 가지 요인으로 인해 이전보다 더 희망적이다. 첫 번째 요인은 도그마 게임의 종말, 두 번째는 좋은 삶을 위해 집결한 이들이 지식인들에게 맡긴 후위 이론의 임무, 세 번째는 세계의 고갈되지 않는 다양성과 그것이 보여주는 것, 또는 말로 표현될 가능성과 무관하게 그것이 스스로 드러나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도그마 게임의 종말. 지난 200년 동안 낡은 도그마에 대항한 사회적 투쟁들은 거의 항상 새로운 도그마들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그 결과 사회적 해방은 새로운 사회적 규제가 되었고, 낡은 정통성은 새로운 정통성으로 대체되었다. 수단이었던 것이 목적이 되었고, 반란이었던 것은 순응이 되었다. 이제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하는 사회 운동들은 새로운 도그마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고서도 낡은 도그마에 맞서 싸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한 운동들에 따르면, 사회적 해방은 사회적 규제를 전제한다. 즉 규제되지 않은 해방된 사회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해방을 규제하는 것과 규제를 해방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해방을 규제하는 것은 이제는 극복된 옛 조건들을 주도했던 같은 규제의 논리를 (반드시 같은 종류의 규제는 아닐지라도) 새로운 조건에 적용하는 것이다. 반면, 규제를 해방한다는 것은 규제하고자 하는 대상의 조건 그 자체를 새로운 형태의 규제로 확립하는 것이다. 사회적 해방의 목적이 끝-없는-민주주의(democracy-without-end)를 구축하는 것이라면, 규제를 해방한다는 것은 변혁적 실천의 결과로 생겨나는 필요에 맞춰 민주적 해결 방안들을 심화하고 다양화하는 것을 포함한다. 오직 이것만이 수단이 목적이 되는 것을, 새로운 우상들이 옛 우상들을 대체하고 시민들에게 이전과 같은 종류의 복종을 요구하는 것을, 새로운 규칙들이 옛 규칙들이 그랬듯 삶의 필수적인 요소로 자연화되는 것을, 대안의 제거에 맞선 투쟁이 대안 없는 사회로 이어지는 것을, 기술적 해결책에 맞서 정치를 회복하기 위해 채택된 정치적 행동들이 오히려 정치 기술의 해결책이 되어버리는 것을, 행동의 자유와 창의성에 대한 제한이 정확히 이전의 제한과 같은 것이 되어버리는 것을, 변화를 가능하게 했던 비순응이 변화를 방해하는 순응으로 변질되는 것을, 그리고 사회 변혁에 투입되었던 감정과 환상과 열망이 이후에는 정작 그 자체로 단죄되는 것을, 옛 기능들과 단절했던 새로운 기능들이 오히려 새로운 기능들을 가로막는 구조가 되는 것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간주하던 것의 역사화가 다시 새로운 비역사적 진리가 되어버리는 것을, 그리고 위험을 수반하는 변화에 참여한 모든 자들이 지닌 필연적으로 상대적인 무의식이 도리어 그 변화로부터 이익을 얻는 자들의 최대로 가능한 의식이 되어버리는 것을 막을 것이다. 요컨대 목표는, 한때 억압받던 사람들의 무기가 새로운 억압자들의 무기로 변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나는 좋은 삶을 위해 집결하는 이들이 말하듯이, 이것이야말로 내다보이는 목적지를 향한 여정을 끝없는 여정으로 바꾸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새로운 입장은 지식인-행동가들에게 거대한 도전을 제기한다. 특히 그동안 글로벌 노스에서 지식인들의 주도성은 주로 도그마와 정통성의 게임 덕분이었다. 도그마는 공식화(정확한 말)에 있어서나 방향(행동과 태도에 대한 정확하고도 구속력 있는 지침)에 있어서나 마찬가지로 강렬하다. 도그마는 너무나 강렬하게 지시적이라서 방향의 실재를 실재의 방향과 혼동한다. 도그마는 자율적인 삶의 형태들을 형성한다. 그러한 게임 속에서, 그리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지식인들은 다른 어떤 삶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런 종류의 삶을 위해 훈련받았고, 그들의 임무는 그것을 재생산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하에서 집결한 이들이 지식인들에게 제기하는 도전은 거의 딜레마적이다. 그들은 자신이 받은 훈련을 해제하고(untrain) 자신을 재발명해야 하거나, 아니면 이미 그러하듯 앞으로도 계속해서 무의미한 존재로 남을 것이다. 지식인들은 훈련 해제를 선택하기에 앞서 이 딜레마에 대해 의아해한다. 더 강력한 다른 도그마에 의존하지 않고서 도그마에 맞서 싸우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것을 열어 두는 것은 결국 적을 풀어주는 것과 같지 않을까? 삶과 사유를 통합하려는 시도가 둘 모두를 해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반(反)도그마도 다른 종류의 도그마가 아닌가?
새천년의 시작에 희망적인 것은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전에는 예견되지 않았거나 또는 이론적으로 허용 가능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던 가능성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이 새로운 가능성들은 비이성만이 현재 이성적이라고 여겨지는 것의 유일한 대안이 아니며, 혼돈만이 질서의 유일한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진리보다 덜한 것(불확실한 결과를 위한 투쟁의 바탕을 이루는 뒤죽박죽된 이성과 감정들)에 대한 우려는 진리보다 더한 것(예전의 실패들을 설명하면서 진실성을 주장했던 반증된 거대 이론들의 아비투스)에 대한 우려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새로운 가능성들은 새로운 담론과 개념을 가진 새로운 행위자들이 실천하는 새로운 행동들로부터 출현한다. 그것들은 사실 새로운 것이 아니다. 그중 일부는 정말 매우 오래된 것으로 조상들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다. 그것들이 더욱 가시화된 것은 지적으로 인증되었던 사회적 해방의 레퍼토리가 이미 붕괴했기 때문이며, 실상은 새로운 형태에 담긴 낡은 것에 불과한 새로운 것들의 패션쇼가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도그마의 부재는 사실 묘사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부재는 맥박에서 느껴지며 보기는 쉽다. 그것은 행동, 에너지, 열망, 또는 지식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열망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대화의 변화와, 공동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합의된 ‘침묵’에서 볼 수 있다.
집결한 이들의 참신함을 인정하는 것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그것은 단지 집결한 이들이 침묵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연대의 한 방식일 뿐이다. 분명히, 집결한 이들은 서구 근대성이 저항적 행동들을 침묵시키는 기술들에 얼마나 특화되어 있는지를 자신들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지배적 상식에 의하면, 그러한 저항적 행동들은 무지하고 열등하며 후진적이고 퇴행적이며 로컬적이고 비생산적인 사람들, 요컨대 진보와 발전의 장애물로 여겨지는 사람들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기에, 침묵당해 마땅하다. 어떻게 이 강력한 침묵시키는 기계에 맞서되, 대안적이지만 다시금 침묵시키는 기계를 만들어내지 않을 것인가. 이것이 지식인-행동가들이 직면한 더 큰 도전이다. 바로 여기가 그들의 훈련 해제와 자기 재발명이 필요한 지점이다.
후위 이론. 내가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 두 번째 이유는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지식인-행동가들에게 부여한 임무와 관련이 있다. 그것은 바로 후위의 이론들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는 것이다(이에 대해서는 이 책 전반에 걸쳐 더욱 자세히 다룰 것이다). 이 임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그것이 달성될 수 있다면, 이는 새천년의 시작에 가장 위대한 참신함이자, 특히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모든 위성적 억압들이 극복될 수 있다고 진정으로 믿는 이들에게 가장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목격한 이러한 정치적 경험들은 놀라움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그 경험들이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를 포함한 서구 근대성의 정치 이론들에 의해 예견은커녕 상상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다른 사례들 중에서도 특히 의미 있는 것은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운동들과 그것들이 몇몇 국가에서 최근 중요한 정치적 변화에 기여한 사례다. 이러한 놀라움은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모두가 원주민들을 사회적・정치적 행위자로서 무시해 왔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위대한 페루의 마르크스주의자인 호세 마리아테기는 라틴아메리카 사회의 건설에서 원주민들에게 역할을 부여했다는 이유로 ‘낭만적’이고 ‘포퓰리스트’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러한 놀라움은 이론가들과 지식인들 전반에게 새로운 질문을 제기한다. 즉, 그들이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경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쉬운 대답은 없다. 비판이론가들은 특히 이러한 어려움에 갇혀 있는데, 이는 그들이 전위적(아방가르드) 이론화를 훈련받아 왔기 때문이다. 전위 이론은 그 본성상 스스로가 놀라움에 사로잡히거나 경이로움을 느끼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전위 이론가들의 예측들이나 명제들에 부합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존재하지 않거나 무의미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자신이 놀라는 것을 허용하는 도전에 긍정적으로 응하는 것은 훈련 해제와 재발명의 과정이 진행 중이며 성공적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자신이 놀라움에 사로잡히도록 기꺼이 허용하는 지식인들은 전위 이론의 상상된 참신함이 아무리 기발하고 매혹적일지라도 더 이상 이에 놀라지 않으며, 이미 전위 이론의 시대(선형적 시간관, 단순성, 통일성, 총체성, 결정성의 시대)가 끝났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 이들이다. 일단 지식인들이 훈련 해제 과정에 들어서면, 전위 이론들이 지닌 학문 중심적이고 과도하게 지성화되었으며 정체된 성격이 점차 더 분명해진다.
나는 후위 이론들이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의 투쟁을 성공으로 이끄는 데 기여함으로써 출현할 수 있는 정서적-지적 지평의 창출을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썼다. 후위 이론은 오직 그것이 일구어낸 실천적 결과들을 통해서만, 그리고 그 이론의 모든 주역들이 이루어낸 변화들에 대한 평가를 통해서만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 주역들 중 지식인-행동가는 언제나 부차적인 인물일 뿐이다. 다시 말해, 후위 이론들은, 쇼펜하우어의 말을 빌리자면 소품(parerga)과 부록(paralipomena), 즉 비이론적 삶의 형태들의 작은 부분들이다. 그것들은 삶의 형태들 속에 엮인 이론적 개입의 행위들이다. 그것들은 본디오 빌라도처럼 손을 씻지도 않고,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도 아니다. 그것들은 뼈대, 밑그림, 기록, 봉투, 우편 주소를 전문으로 다룬다. 중요하지만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은 것들을.
세계의 무궁무진한 경험과 간접적 소통. 내가 지금 이 순간이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기에 희망적이라고 생각하는 세 번째 이유는 세상의 문화적, 인지적, 사회적, 민족적-인종적, 생산적, 정치적, 종교적 다양성이 방대하다는 인식이 오늘날 더욱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단순히 묘사되고 재현될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서서, 이제 눈에 보이고 드러나며 느껴지고 시적으로 표현될 수 있게 되었다. 많은 요인들이 이를 설명해 주고 있고 그중 일부는 이 책에서 분석될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최근 얻게 된 가시성과 그들이 드러내고 축하하는 내부적 다양성이다. 이것이야말로 채널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 방식 또는 생태-민족-문화 관광의 단일문화적 다양성을 전면적으로 전복시키는 종류의 다양성이다. 이는 다양성에 대한 자신만의 기준을 가진 다양성으로, 단일문화적 다양성과 달리 무기력한 동시성을 복잡한 동시대성으로 변모시킨다. 또한 비동시대적 사람들 사이에서 동시성의 행위를 만들어내는 관광객의 시선이나 오락적 시선과는 달리,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의 다양성은 서로 다른 동시대성들 간의, 다시 말해, 동시대적으로 되는 서로 다른 형식들 간의 만남을 만들어낸다. 그것은 세계의 다색성(polychromy)과 다성성(polyphony)을 드러내되 그것들을 불연속적이고 통약불가능한 급진적 이질성으로 만들지는 않는다.
통일성은 어떤 본질에도 있지 않다. 그것은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건설해 나가는 과제 속에 있다. 여기에 참신함과 정치적 당위가 자리한다. 즉 동시대성을 확장한다는 것은 평등의 원칙과 차이의 인정이라는 원칙 사이의 상호성의 영역을 확대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사회적 정의를 위한 투쟁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확장된다. 사회적 정의의 통상적 개념에 근거한 부의 분배와 관련된 부정의에, 다양한 시간적 지속을 가지며 따라서 각기 다른 모델의 동시대성을 지니는 다른 많은 차원의 부정의들이 더해진다. 식민주의와 노예제라는 역사적 부정의, 가부장제, 여성 혐오, 동성애 혐오라는 성적 부정의, 젊은이들에 대한 증오와 지속 가능한 발전 모델들에 대한 증오라는 세대 간 부정의, 인종주의와 외국인 혐오라는 민족적-인종적 부정의, 그리고 과학의 독점과 과학이 승인한 기술들을 명분으로 세계의 지혜에 대해 저질러진 인지적 부정의가 그것이다.
구조적(기능적이 아닌) 다양성은 매혹적인 만큼이나 위협적이다. 구조적 다양성은 그 안에서 도그마의 종말과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하고 창조할 기회를 보는 이들에게 매혹적이다. 만약 세계의 다양성이 무궁무진하다면, 유토피아는 가능하다. 모든 가능성은 유한하지만, 그 수는 무한하다. 구성된 경험은 구성하는 경험의 잠정적이고 지역적인 구체화일 뿐이다. 현존하는 현실이 이상들과 그토록 멀리 떨어져 있다는 사실은 이상의 불가능성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현재의 현실이 이상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다양성은 위협적이기도 하다. 특히 글로벌 노스에서 그러한데, 이는 그것이 서구의 고립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세계의 다양성을 긍정하는 것은 서구 예외주의의 전환점을 나타낸다. 한때 본원적(원형, archetypus)이고 상승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나머지’에게 앞으로 나아갈 길을 보여주던 것이, 이제는 파생적(모사, ectypus)이고 하강하는 것이 되어, 지속 불가능한 것으로 입증되고 있는 세계 인식이자 사회와 자연을 경험하는 양식이 되었다.
아마도 이 자율적이고 가능성을 부여하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이 책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진 바와 같이, 훈련 해제 과정의 핵심적 특징일 것이다. 내가 남의 인식론을 제안하는 것은 바로 이런 관점에서다. 이러한 인정은 과학적 지식만이 유일하게 타당한 종류의 지식이고 그 너머에는 오직 무지만이 있다는 확신을 잃을 때 빠지게 되는 심연들에 대한 안전망으로 작동한다. 그것은 단일언어(monolanguage)와 단일문화(monoculture)에 완전히 사로잡힌 비트겐슈타인식 침묵시키기에 대한 가장 효과적인 해독제이다. 한 언어 또는 문화에서는 말할 수 없거나 명확히 말할 수 없는 것이 다른 언어나 문화에서는 말해질 수 있고, 그것도 명확히 말해질 수 있다. 다른 종류의 대화를 위한 다른 종류의 지식과 다른 대화 상대들을 인정하는 것은 헤아릴 수 없는 코드화와 수평성을 지닌 무한한 담론적·비담론적 교환의 장을 여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의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 유리한 세 가지 이유는, 좋은 삶/부엔 비비르를 위해 집결한 이들이 부르는 대로 지식인-행동가 또는 후위 지식인들의 출현을 간접적으로 촉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한편, 집결한 이들 중 일부는 어쩌다 이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심지어 그 읽기에 흥미를 느끼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로서는, 이 책에 쓰인 채로 남은 것은 하나의 사유-행동 실험이며, 나 자신이 후위 지식인, 따라서 유능한 반란자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일종의 사유의 체육관이다. 어쩌면 집결한 이들이 나로부터 배울 수도 있는 것은 내가 계속해서 그들로부터 배우고 있는 것의 충실한 거울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이 책이 (좋은 삶을 위해) 집결한 이들 외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도 읽히기를 희망한다. 집결한 이들은 아마도 이 책을 살 수 없거나, 어쨌든 이 책에 충분한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이 책은 비록 선의 이쪽에서 쓰였지만, 그 내용은 선의 저쪽에서 생성되었다. 이 책은 오직 내가 이어지는 장들에서 쓰게 될 심연적 선의 종말을 상상할 수 있는 이들에게만 이해 가능하고 희망적일 것이다.
후위 이론들의 출현에 기여하고자 하는 시도는 진행 중인 훈련 해제와 재발명에 대한 반복적인 자기성찰의 연습을 요구한다. 이 맥락은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그의 『고백록(Confessions)』을 쓰면서 했던 웅변적 발언 “나는 나 자신에게 문제가 되었다(Quaestio mihi factus sum)”와 비슷하다. 차이는, 그 문제가 더 이상 과거의 오류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오류가 다시 반복되지 않으리라는 확신 없이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미래의 건설에 참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독자들은 내가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 여전히, 비록 희망이 없거나 희망 없을 정도로 정직할지라도, 기성 권력이 방심하거나 경계를 느슨히 한 틈을 타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급진주의를 되찾으려는 하나의 시도라는 것을 틀림없이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덧붙이자면, 나는 내가 성공했는지 알 방법이 없다. 따라서 나는 내가 유능한 반란자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내가 쓰는 것을 쓰고자 하는 절박한 충동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침묵되어야 할 것을 침묵시키고자 하는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 마지막 문장은 전율스럽다.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운 만큼이나 드물다(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상당 부분 미완성으로 남을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