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혼란스러운 패러다임의 과도기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지배적 패러다임(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은 가고 없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패러다임은 출현하지 않고 있는 ‘아직 아님’의 ‘인테르레그눔(interregnum, 공위 기간)’의 시대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존의 서구에서 생산된 이론이 실천을 특히 비서구권의 실천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럽중심적 비판이론과 좌파 정치가 역사적으로 주로 글로벌 노스에서, 특히 북반구의 오직 5-6개 국가(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어느 정도 미국)에서 발전된 반면에,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변혁을 가져온 좌파의 실천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이루어지고 있기”(이 책, 91쪽) 때문이다. “지금은 인간과 어머니 대지를 포함하는 전 지구적 차원의 판가름의 시대이다. 아직까지는 어떤 규칙도 없는 판가름의 시대이다”(매니페스토, 36쪽). 현재로서는 다만 막연히 다양성이 인정되는 단계에 있다.
책 전반에 걸친 핵심 논의의 중요한 전제로, 산투스는 지리적 위치가 아닌 정치적 위치로서의 글로벌 노스와 글로벌 사우스 사이에 눈에 안 보이는 아득한 심연이 존재함을 상정한다. 아득한 심연을 만든 근거는 바로 근대적 이성과 과학이다. 특히 산투스는 환유적 이성과 예견적 이성이 심연을 만든 주범임을 폭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는 산투스의 표현대로 “모욕당하고 천대받은 자들의 귀환의 시대”(매니페스토, 38쪽)이며, 그는 이것을 글로벌 사우스라 칭한다. 전자가 후자를 “무지하고 열등하고 지역적이고 특수하며 후진적이고 비생산적이거나 게으르다고”(매니페스토, 28쪽) 경멸하고 무시하는 전통은 매우 뿌리 깊은 것이다. 이런 인식론적 위계와 차별을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은 1990년대 초반부터 ‘식민성’이라 불러왔으며, 이로부터의 전환과 단절을 통해 새로운 지식 체계와 해방적 실천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산투스의 이 책도 마찬가지다. 유럽인들은 이러한 식민성을 기반으로 인식론적 살해를 저지르면서도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문명적 사명감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이제는 글로벌 노스가 글로벌 사우스로부터 배워야 할 때다. 산투스가 바라보듯, 글로벌 사우스가 단순히 억압받는 공간이 아니라, 대안적 인식론과 사회적 실천이 생성되고 조직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글로벌 사우스에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서구 근대성 비판 담론들(예를 들어, 프랑크푸르트학파 이론 등)이 명백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산투스는 우리 시대에 진정한 급진주의가 글로벌 노스에서 더 이상 실현되기 어려워졌다고 판단한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서구에서 급진주의가 대학이라는 제도 안에 갖힌 현실을 지적한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급진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현실을 다루기 위해 보호모와 장갑을 필요로 하는 대학과 같은 기관에서 일한다. 서구 근대성이 지식인들에게 부리는 속임수 중 하나는 그들이 오직 반동적 제도들 안에서만 혁명적 사상을 생산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급진적으로 행동하는 이들은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미니페스토, 23쪽).
산투스는 대학이라는 제도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서구의 세계 이해보다 훨씬 더 넓고 다양하다고 본다(매니페스토, 44쪽). 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와 서구는 죽은 자들에 대한 태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죽은 자들이 단순히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살아 있으며, 중요한 결정 과정에서 산 자들이 자문을 구하는 대상으로 여겨진다(산투스 2022, 280). 이에 비해 서구에서는 죽은 자들과의 이 관계 맺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서구의 관점에서는 라틴아메리카의 이러한 태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산투스는 과학을 내세우며 보편성을 주장해 온 서구 근대성이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한다. 서구는 자신들의 세계 이해와 맞지 않는 것들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어 왔다.
산투스는 이러한 문제를 비판하며 부재의 사회학과 출현의 사회학, 그리고 지식의 생태학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부재의 사회학은 서구 근대성이 지식과 실천을 분류하고 관련성의 정도에 따라 위계를 매기면서, 비서구의 가치관과 문화를 억압하여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든 과정을 분석한다. 반면, 출현의 사회학은 이미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대안적 가능성을 인식하고 강화하는 과정이다. 즉, 서구 근대성이 지나치게 미래를 강조하며 현재의 다양한 가능성을 배제해 온 것에 반대하며, 현재를 확장하고 미래를 수축하여 현재에 보다 가깝게 만듦으로써 보다 현실적인 전망 속에서 미래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지식의 생태학을 제안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이는 단일하고 위계적인 지식 체계가 아니라, 다양한 지식이 상호번역될 수 있는 다원적이고 상호연결적인 방식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억압된 지식과 실천들을 재발견하고, 탈식민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서구의 일직선적 진보의 관점에 대한 비판이며, 그에 대한 비서구적 대안의 제시다. 바로 이것이 산투스가 글로벌 노스보다 글로벌 사우스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현재 우리는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매우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기후위기를 비롯한 전 지구적 생태적 위기, 그리고 그것과 얽혀 있는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위기가 맞물려, 문명적 전환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고 미룰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산투스는 기존의 급진적 사상과 실천이 단절된 현실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우리 시대의 글로벌 노스에서는 급진적 사상들이 곧 급진적 실천으로 번역되지 않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미니페스토, 21쪽). 즉, 급진적 실천이 현존하는 급진적 사상들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중적 불투명성이 존재하며, 이는 단순한 이론적 문제를 넘어 기성 권력이 의도적으로 이러한 단절을 유지하는 구조적 메커니즘과도 연결된다. 즉, 이러한 단절을 극복하고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가 된다. 산투스는 이에 대해 오늘날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은 ‘도그마 게임의 종말, 좋은 삶을 위해 집결한 이들이 지식인들에게 맡긴 후위 이론의 임무, 세계의 고갈되지 않는 다양성이라는 관점’이라는 세 가지 요인으로 인해 과거보다 더 희망적이라고 전망한다(미니페스토, 31쪽). 다시 말해, 기존의 급진적 담론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조건들이 우리 시대에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산투스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글로벌 사우스와 관련하여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이해하려면, 바로 다음의 인용이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가장 의미 있는 변화 중 하나가, 수세기 동안 유럽 식민주의와 북미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왔고 그간 글로벌 노스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어 온 전 지구적 의제들의 조건과 우선순위에 대해 처음으로 권리를 주장하게 된 국가들, 민족들, 그리고 지역들이 글로벌 정치 무대에 부상하게 된 것과 관련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결론, 459쪽).
그러므로 반식민주의적 저항과 투쟁의 대안적 사회 운동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대안적 사회 운동이 지향하는 바는, 그동안 가난과 억압, 배제에 시달려 온 사람들 역시 존엄한 삶을 영위할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논리를 구축해 왔다. 따라서 같은 시기 라틴아메리카에서 가난한 대중이 대안적 사회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더 나아가, 1990년 에콰도르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에서 원주민 운동이 본격화되고 탈식민성 담론이 출현한 것 역시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산투스는 글로벌 사우스의 관점에서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 WSF)에 실천적으로 참여해 온 지식인이다. 세계사회포럼은 2000년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리에서 시작되었으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적 담론과 실천을 모색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산투스는 최근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이 제시하고 있는 좋은 삶/부엔 비비르 철학을 중요한 개념으로 다룬다. 부엔 비비르 철학은 2008년 에콰도르, 2009년 볼리비아에서 각각 개헌을 통해 ‘복수국민국가(Estado Plurinacioinal)’의 개념 안에 포함되었다. 이 개념은 매우 단순한 것으로, 근대성과 원주민 철학 사이에 위계적 서열을 두지 말고 수평적 대화를 가능하게 하자는 유토피아적 전망을 담은 개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부엔 비비르 역시 특정 개념적 틀, 즉 획일적 이데올로기나 고정된 이론적 틀에 갖히지 않는 것이다.
산투스의 비판은 매우 예리하다. 스피노자의 항복, 즉 1677년, 당시 유럽의 권력 계급이 스피노자가 말년에 ‘범신론적 무신론’을 포기하고 기독교 신앙으로 전향했다고 주장했던 사건(미니페스토, 23쪽) 이후, 유럽 비판이론의 전통이 왜곡되기 시작했다는 그의 분석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사실 그가 인용, 분석하는 지식인들의 논의는 그냥 따라가기만 해도 벅찰 정도로 방대하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측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글로벌 노스 내부에서도 이미 근대성과 서구중심주의의 불편한 진실을 직시했던 지식인들(예를 들어 사모사타의 루키아노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블레즈 파스칼 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상이 소외되거나 배제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산투스가 이러한 전통을 고려하면서도 엘리트보다는 대중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그는 엘리트보다는 대중에게서 끊임없이 배우려는 태도를 가진다. 여기서 산투스의 독특한 창의성이 드러난다. 그 예들 중 하나로 후위 이론을 들 수 있다. 후위 이론은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운동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한 개념이다. 서구 근대성의 핵심적 특징 중 하나는, 아무리 과격한 비판이론이라 할지라도 결국 엘리트 지식인이 대중을 이끈다는 전제를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후위 이론은 이와 정반대다. 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궤적을 훑어 보면, 그 문화적 의식은 사회적 연대성과 사회적 주체성을 재구성하게 만들고 있고 이에 따라 대항헤게모니 세계화의 도전을 감당할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정치적 문화의 힘은 대중의 경험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 같은 새로운 싹의 출현은 새로운 “자연법”―기층 대중을 포용하는 복합문화적, 탈식민적 맥락을 가진 ‘세계시민주의적(cosmopolitan) 법’―의 출현을 향하고 있다(산투스 2008, 34).
라틴아메리카 대중이 그런 연대의 능력을 가지게 된 이유는, 이들이 원주민 철학에 연원한 관계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성은 위계적 구조를 거부하고 상호연결성을 강조하는 특징을 갖는다. 한편, 산투스의 사상이 독특한 이유는 그것이 이분법적 사고에 갇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성장, 발전, 그리고 품위 있게 잘살려는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부정하지 않으며, 동시에 고통을 끌어안고 그저 아름다움만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의 이러한 특징은 그가 글로벌 사우스의 대중이 맞서 싸우는 억압의 구조를 해석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인간들 사이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상품물신주의, 지식의 단일문화, 진보의 선형적 시간관, 자연화된 불평등, 지배적인 척도, 경제 성장과 자본주의적 발전의 생산주의”(매니페스토, 26쪽)를 여러 장애물 중 일부로 지적하면서, 그것들이 서로 ‘가족적 유사성’을 지니고,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해 억압의 구조를 형성한다고 본다.
글로벌 노스 안에서도 모든 사람이 존엄 있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가능성을 포착했기에, 산투스가, 결코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낙관적 전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 한국 사회 또한 산투스의 주장과 통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몇 년 전에 UN에 의해 글로벌 사우스에서 글로벌 노스로 편입한 유일한 국가로 인정받았지만, 이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변화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가 익숙한 민족주의의 틀을 벗어나 반란적 서발턴 세계시민주의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란적 세계시민주의는 기존의 주류적, 자유주의 비판이론이 주장하는 칸트식의 세계시민주의가 아닌, 서로 다른 보편성, 즉 단일 보편성에 반대하는 복수 보편성(미뇰로 2010, 7)을 주장하는 비주류적 접근과 상응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이 제안하는 대안적 실천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전개된다. 다시 한번 산투스의 말을 그대로 소환하자면,
이러한 활동들의 스케일은 매우 다양하다. 글로벌 사우스와 글로벌 노스 모두에서 소외된 사회 집단들이 자신의 삶과 공동체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제를 얻기 위해 실행하는 미시적 활동이 있는가 하면, 양질의 일자리와 환경 보호의 기본적인 기준을 보장하기 위해 국제적 차원에서 법적・경제적 조정을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 글로벌 금융 자본을 통제하기 위한 시도부터 협력과 연대의 원칙에 기반한 지역 경제를 구축하려는 노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와 형태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대안적 생산과 생산성에 대한 개념과 실천들은 두 가지 주요 특징을 공유한다. 첫째, 이들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대안이 되는 체계적 경제 시스템을 구현하기보다는, 주로 지역 사회와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생산적 공간을 창출하려는 지역적인 노력이라는 점이다. (……) 두 번째 특징은 이러한 활동들이 민주적 참여, 환경적 지속가능성, 사회적·성적·인종적·민족적·문화적 형평성, 그리고 초국적 연대와 같은 목표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경제’ 개념을 공유한다는 점이다(6장, 354-355쪽).
마지막으로, 산투스가 아무리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낙관적 의지와 비전을 버리지 않는 태도가 사뭇 인상적이다. 그가 인용한 스피노자의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운 만큼이나 드물다(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라는 말처럼, 진정한 변화와 그것을 위한 실천은 필연적으로 어렵고 희귀하다(미니페스토, 51쪽). 아울러, 우리의 특별한 적, 즉 우리가 맞서야 할 가장 강력한 적이 우리 안에 자리한 나태함과 무기력이라는 그의 지적이 주는 울림 또한 어느 때보다도 크게 다가온다.
옮긴이를 대표하여
안태환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