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저명한 사회사상가의 대표 저서가 출간되어서, 소개해 드립니다.

세계사회포럼의 주요 이론가이기도 하고, 이매뉴얼 월러스틴,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도 학문적/사상적 교유가 있는 포르투갈 출신의 사상가,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의 대표 저서이죠.

그는, "북반구(서구중심주의)의 인식론이란 오직 5-6개 국가에서 발전된 반면에,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변혁을 가져온 좌파의 실천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고 단언합니다.

아래로부터의 새로운 형태의 세계시민주의, 서발턴적 반란적 세계시민주의를 주창하는 그의 사상은, 공존과 연대 그리고 생명이 중심이 되는 세상을 추구합니다.

책의 대부분은 글로벌 사우스(북반구)에 의해 자행된 "인식론 살해(epistemicide)"에 대한 비판과 그에 맞서는 정의를 위한 사회학, 사회적 실천 등이 담겨 있습니다.

제도화된 해로운 거짓, 인식론 살해, 부재의 사회학, 출현의 사회학, 인지적 부정의, 서발턴적 대항헤게모니 등등, 이러한 개념과 이론들이 등장하는데, 대가답게 명쾌하고 빈틈없는 전개가 돋보입니다.

읽으면서, 글로벌 사우스(남)에 있다가 이제 글로벌 노스(북)에 편입된 한국에게 이 책이 어떤 시사를 줄지 곰곰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국내에는 이 저자의 책 중에는 <사회해방과 국가의 재발명>이란 책이 나온 바 있는데, 다소 "볼리비아의 복수국민국가" 건설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며,

저자의 대표 저서라면, <남의 인식론: 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정의> 이 책과, 후속작인 <인지적 제국의 종말: 남의 인식론 시대의 도래>가 있습니다.

저자의 서문(들머리)와 옮긴이의 후기(날머리)를 통해서, 책의 면모를 살펴보시죠!






서문

보아벤투라 드 소우자 산투스

이 책에는 세 가지 기본적 생각이 전제돼 있다. 첫째, 세계에 대한 이해는 서구가 세계를 이해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둘째, 전 지구적 인지적 정의 없이는 전 지구적 사회적 정의도 있을 수 없다. 셋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해방적 변화들은 서구중심적 비판이론이 발전시킨 문법과는 다른 문법과 각본을 따를 수 있으며, 그 같은 다양성은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한다.

비판이론은 더 나은 세계를 예견하는 것보다 세계를 더 잘 이해할 방법은 없다는 생각을 전제로 한다. 그러한 예견은 사회적 부정의를 지탱하고 정당화하는 제도화된 해로운 거짓말들을 폭로하기 위한 지적 도구와 거기에 대항하여 투쟁하도록 하는 정치적 추동력 모두를 제공한다. 따라서 비판이론은, 설령 결국에 궁극적인 진리 또는 확정적인 치유책이 없다 하더라도, 진리와 치유를 찾는 과정이 없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역사는 가장 공고히 자리 잡은 사회적 거짓들조차도 그 범위와 지속 기간에 있어 늘 제한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그것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지배적인 동안은 마치 그것들이야말로 진리와 치유의 원천인 것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말이다.

소외되고 차별받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볼 때, 글로벌 자본주의와 식민주의, 가부장제의 역사적 기록은 제도화된 해로운 거짓들로 가득 차 있다. 그것은 사회적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사회적 규제,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전용, 평화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폭력, 생명의 신성함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생명의 파괴,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인권 침해, 정치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사회적 파시즘, 법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불법적 약탈,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동화(assimilation),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초래된 개인적 취약성, 인류애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하위인간성(subhumanities)의 제도화, 값을 매길 수 없는 가치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신념에 가격표 달기,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상품화, 선택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표준화, 자유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대량화,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인종주의, 헌법적 권리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헌법적 불의, 임마누엘 칸트의 『계몽이란 무엇인가?(Was ist die Aufklärung)』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열등성의 존재론, 법 앞의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법 이후의 불평등,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강박적 소비, 그리고 가장 흉측한 방식으로 올바른 삶(recta vita)을 부정하면서 이를 은폐하기 위해 원칙(성 토마스의 원칙의 습성(habitus principiorum))을 선언하는 위선의 기록이다.

우리 현대 세계를 관통하는, 제도화된 해로운 거짓들이 만연해 있는 독특한 방식과 강도를 고려할 때, 부정의에 대한 적절한 인식과 억압의 극복 가능성은 오직 인식론적 단절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인식론적 단절에 대한 초점이 이 책에서 상세히 다루고 있는 이론을 서구중심 비판 전통과 가장 잘 구분 짓는 지점이다. 서구중심 비판은―그중 가장 뛰어난 예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인데―우리 시대의 해방적 투쟁들을 설명해 내는 데 실패했다. 이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자신들이 비판하는 부르주아적 사고와 사회적 부정의의 인지적 차원을 억누르는 동일한 인식론적 토대를 공유하고, 그럼으로써 세계에 대한 서구적 이해와 변혁 전망을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서구중심적 비판 전통은 스스로를 대상을 함께 알아가고 이해하고 촉진하고 공유하고 나란히 걷는 것보다는, 대상에 대해 알고 설명하고 인도하는 데 있어 탁월한 전위 이론으로 여긴다.

이 책은 이러한 유럽중심적 비판 전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책은 빈곤의 이론(teoria povera), 즉 부당하게 강요된 주변화와 열등성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광범위한 소수자들과 다수자들의 경험에 바탕을 둔 후위 이론을 제안하며, 이는 그들의 저항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 책에서 개진되는 비판적 이론 세우기 작업은 비유럽중심적이기를 추구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이 해방 또는 자유에 대한 비유럽중심적 개념들을 가치 있게 여기는 동시에 인권, 법치, 민주주의, 사회주의와 같은 유럽중심적 개념들에 대한 대항헤게모니적 이해와 사용을 제안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해 주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자체로 독립적이지만, 나의 다른 책 『인지적 제국의 종말: 남의 인식론 시대의 도래(The end of the cognitive empire: the coming of age of epistemologies of the South)』(2018)와 연계해서 읽으면 더욱 유익할 것이다. 이 후자의 책이 걸고 있는 내기는 이 책에서 제안된 인식론적 작업이 일단 완수되면 ‘해방과 자유’의 방대한 정치적 지형들이 출현하리라는 것이다.

이 책은 대위법(counterpoint) 방식으로 제시된 서문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대위란 좋은 삶/부엔 비비르(buen vivir)를 향한 상상된 매니페스토(manifesto)와, 모더니즘적 선언문들에 깔려 있는 장대한 목적에 도전하고자 명명된 미니페스토(minifesto) 사이의 대위를 말한다. 매니페스토는 내가 수년간 함께 활동해 온 다양한 사회 운동의 상상된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리고 미니페스토는 나 자신의 응답을 제시하는데, 이 책이 보여주려는 바와 같이 급진주의가 불가능한 시대에 글을 쓴다는 것의 한계를 강조한다. 대위법적 구조를 가장 잘 시각화하기 위해 매니페스토는 짝수 페이지에, 미니페스토는 홀수 페이지에 인쇄되어 있다.

서론에서 나는 서구중심적 정치적 상상력과 비판이론에 대해 거리를 둘 필요성을 주장한다. 나는 서구중심적 비판 전통이 (마르크스주의를 포함하여) 지난 이십여 년 동안 발전해 온 투쟁의 형태들, 사회적 행위자들, 그리고 자유의 문법들을 설명하는 데 실패하는 이유들을 보여준다. 지난 십여 년간, 세계사회포럼은 이러한 실패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이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에서 나는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이 견고하고 설득력이 있으려면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패러다임의 복잡성과 내부적 다양성을 고려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보통 서구 근대성이라고 불리는 것은 지배적 관점과 서발턴적 관점이 공존하면서 서로 경쟁 관계를 이루는 근대성들을 구성하는 매우 복잡한 현상들의 집합이다. 주류를 이루는 서구 근대성에 대한 비판들은 이 사실을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만큼 그 같은 비판들은 환원주의에 빠질 위험, 자기들이 비판하는 바로 그 근대성의 개념들이 되어버릴, 즉 단순한 희화화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1장에서는 19세기 쿠바의 지식인-행동가인 호세 마르티의 유명한 에세이에 기대어 아메리카와 서구 근대성에 대한 몇 가지 칼리반적(calibanesque) 관점을 규명한다. 2장에서는 근대적 정체성들(또는 그보다는, 근대적 동일시 과정들)의 근저에 있는 기본적 은유 중의 하나, 즉 뿌리와 선택이라는 이중 은유를 현재 뒤흔들고 있는 격동을 분석하기 위해 발터 벤야민의 “앙겔루스 노부스(Angelus Novus)”에 의지한다. 3장에서 나는 비옥시덴탈리즘적 서구가 가능한지를 묻는다. 이를 위해 두 명의 근대 초기 철학자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holas of Cusa)와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의 관점을 활용하며, 서구 근대성에 대한 대안적 이해들이 자본주의적·식민주의적 기획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어떻게 제쳐져 왔는지를 보여준다.

2부에서는 다양한 접근을 통해 지배적인 인식론들(북반구의 인식론들(Northern epistemologies))에 대한 나의 비판을 자세히 설명하고, 나 자신의 인식론적 제안을 제시한다. 이는 내가 줄곧 남의 인식론들(epistemologies of the South)이라고 불러온 것으로, 투쟁 속에서 태어난 지식, 즉 자본주의와 식민주의, 가부장제가 초래한 체계적 부정의와 억압에 대한 저항의 일환으로 여러 사회 집단이 발전시켜 온 다양한 앎의 방식의 구성과 그 타당성 검증에 대한 일련의 탐구이다. 4장은 나의 포스트식민적 또는 탈식민적 접근에 있어 핵심적인 장으로, 여기서 나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심연적 사고(abyssal thinking)가 그어 놓은 심연적 선들(abyssal lines)을 분석한다. 이 (경계)선들을 통해 그 선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인간과 비인간의 현실들은 비가시화되거나 심지어는 적극적으로 비존재로 생산된다. 이는 가장 급진적 형태의 사회적 배제를 초래한다. 5장에서는 내가 맹목(盲目)의 인식론(epistemologies of blindness)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각도에서 비가시성(invisibility)에 접근한다. 나는 근대 경제학의 인식론적 토대를 극단적 사례로 들며, 엄청나게 많은 양의 보이지 않는 것들이 생성되는 다양한 메커니즘을 보여준다. 6장에서는 내가 부재의 사회학(sociology of absences)과 출현의 사회학(sociology of emergences)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관점에서, 지배적인 근대적 이성 형태들의 나태함이 해방적 가능성(emancipatory possibilities)을 식별하는 데 유용할 수 있는 막대한 사회적 경험을 어떻게 소외시켜 왔는지를 보여준다. 7장에서 나는 지식들의 생태학에 집중한다. 부재의 사회학과 출현의 사회학이 어떻게 지식의 생태학과 상호문화적 번역 둘 다를 위한 가능성을 열어 주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남의 인식론의 윤곽을 제시한다. 마지막으로 8장에서는 상호문화적 번역을 다루는데, 이는 서구중심적 일반이론들의 토대를 이루는 추상적 보편주의와 문화들 간의 통약불가능성이라는 관념 모두에 대한 대안으로서 내가 구상하는 것이다.

이 책은 급진적 비관주의도 급진적 희망도 아닌, 비극적 낙관주의에 흠뻑 적셔져 있다. 어떤 것도 비억압적 대안에 대한 감각을 완전히 제거할 만큼 억압적이지는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중 어떤 대안도 어떻게든 그 자신이 억압과 혼동되거나 뒤섞일 위험을 피하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하거나 설득력 있지는 못하다. 만약 인간의 조건이 곧 노예 상태라면 굳이 노예라는 제도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만약 인간의 조건이 곧 자유라면 헌법과 인권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조건은 역사의 무거운 짐을 어깨 위에 짊어지고 그 짐을 더 지기 쉽게 만들 방법을 반쯤 맹목적으로 선택하는 인간들의 조건이다.

나는 이 책을 위해 여러 해 동안 작업해 왔다. 그 과정에서 많은 동료들과 협력자들로부터 귀중한 도움을 받았다. 어쩌면 그들 모두를 일일이 언급하지 못할까 염려된다. 이 책은 마리아 이레니 하말류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우리가 나눴던 생각을 자극하는 수많은 대화와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드는 도전이 되는 교류, 그리고 내가 문학 이론으로 나아가는 데 그녀가 준 영감에 빚지고 있다. 그녀는 또한 때때로 나의 몇 가지 아이디어를 영어로 옮기는 데도 도움을 주었다. 여러 해 동안 헌신해 준 나의 연구조교 마르가리다 고므스는 이번에도 역량과 전문성을 발휘하여 내 연구를 지원하고 원고를 출판할 수 있게 준비해 주었다. 수년간 나의 영어 저작들은 탁월한 편집자인 마크 스트리터의 값진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나의 헌신적인 비서 라살레트 시몽이스의 보이지 않는 손길은 지난 20년 동안 내가 써 온 모든 것 속에 직간접적으로 녹아들어 있다. 나의 동료인 주어웅 아히스카두 누네스와 마리아 파울라 메네지스는 내 연구의 결정적 순간마다 소중한 협력자였다. 수년간, 코잉브라대학교, 위스콘신대학교, 워릭대학교, 런던대학교의 나의 박사과정생들과 박사후연구원들은 내가 새로운 주제와 관점으로 나아가게 하는 끊임없는 영감의 원천이었다. 내 연구의 각기 다른 순간에, 나는 항상 다음과 같은 협력자, 동료, 친구들의 변함없는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아우구스틴 그리할바, 앨리슨 핍스, 앨런 헌터, 아나 크리스티나 산투스, 안토니우 카지미루 페헤이라, 안토니우 소우자 히베이루, 아르만두 무이레마, 빌 휘트포드, 카를루스 레마, 세자르 발디, 세자르 로드리게스-가라비투, 클레어 커틀러, 콘세이서웅 고메스, 크리스티아노 지아노야, 다비드 라라스, 데이비드 슈나이더맨, 디아네 솔레스, 에푸아 프라, 엘리다 라우리스, 에밀리오스 크리스토도울리디스, 에릭 O. 라이트, 개빈 앤더슨, 하인츠 클러그, 이매뉴얼 월러스틴, 이반 누네스, 제임스 털리, 하비에르 코우소, 제레미 웨버, 주어웅 페드로주, 호아킨 에레라 플로레스, 존 해링턴, 호세 루이스 엑세니, 주제 마누엘 멘드스, 조셉 톰, 후안 카를로스 모네데로, 후안 호세 타마요, 렌 케플런, 릴리아나 오브레곤, 루이스 카를로스 아레나스, 마크 갤런터, 마르가리다 칼라파트 히베이루, 마리아 호세 까넬로, 마리오 멜로, 메리 라윤, 마이클 부라보이, 마이클 월, 닐 코메사, 라울 야삭, 라자 사이드, 레베카 존슨, 사라 아라우주, 시우비아 페헤이라, 티아구 히베이루, 우펜드라 박시. 이들 모두에게 나의 진심 어린 감사를 보낸다. 나는 오직 이 책의 결과물이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마지막으로, 하지만 결코 덜 중요하지 않은 감사의 말을 패러다임 출판사의 딘 비르켄캠프에게 전한다. 그는 이 책을 신속히 완성하고 제때에 잘 출판할 수 있도록 나에게 각별한 격려를 보내 주었다.



옮긴이 후기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혼란스러운 패러다임의 과도기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지배적 패러다임(예를 들어 신자유주의)은 가고 없지만 그렇다고 새로운 패러다임은 출현하지 않고 있는 ‘아직 아님’의 ‘인테르레그눔(interregnum, 공위 기간)’의 시대이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존의 서구에서 생산된 이론이 실천을 특히 비서구권의 실천을 설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유럽중심적 비판이론과 좌파 정치가 역사적으로 주로 글로벌 노스에서, 특히 북반구의 오직 5-6개 국가(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어느 정도 미국)에서 발전된 반면에,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변혁을 가져온 좌파의 실천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이루어지고 있기”(이 책, 91쪽) 때문이다. “지금은 인간과 어머니 대지를 포함하는 전 지구적 차원의 판가름의 시대이다. 아직까지는 어떤 규칙도 없는 판가름의 시대이다”(매니페스토, 36쪽). 현재로서는 다만 막연히 다양성이 인정되는 단계에 있다.

책 전반에 걸친 핵심 논의의 중요한 전제로, 산투스는 지리적 위치가 아닌 정치적 위치로서의 글로벌 노스와 글로벌 사우스 사이에 눈에 안 보이는 아득한 심연이 존재함을 상정한다. 아득한 심연을 만든 근거는 바로 근대적 이성과 과학이다. 특히 산투스는 환유적 이성과 예견적 이성이 심연을 만든 주범임을 폭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시대는 산투스의 표현대로 “모욕당하고 천대받은 자들의 귀환의 시대”(매니페스토, 38쪽)이며, 그는 이것을 글로벌 사우스라 칭한다. 전자가 후자를 “무지하고 열등하고 지역적이고 특수하며 후진적이고 비생산적이거나 게으르다고”(매니페스토, 28쪽) 경멸하고 무시하는 전통은 매우 뿌리 깊은 것이다. 이런 인식론적 위계와 차별을 라틴아메리카 지식인들은 1990년대 초반부터 ‘식민성’이라 불러왔으며, 이로부터의 전환과 단절을 통해 새로운 지식 체계와 해방적 실천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산투스의 이 책도 마찬가지다. 유럽인들은 이러한 식민성을 기반으로 인식론적 살해를 저지르면서도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문명적 사명감으로 여기기까지 했다. 이제는 글로벌 노스가 글로벌 사우스로부터 배워야 할 때다. 산투스가 바라보듯, 글로벌 사우스가 단순히 억압받는 공간이 아니라, 대안적 인식론과 사회적 실천이 생성되고 조직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가 글로벌 사우스에 주목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서구 근대성 비판 담론들(예를 들어, 프랑크푸르트학파 이론 등)이 명백히 실패했기 때문이다. 산투스는 우리 시대에 진정한 급진주의가 글로벌 노스에서 더 이상 실현되기 어려워졌다고 판단한다. 그 이유 중 하나로, 서구에서 급진주의가 대학이라는 제도 안에 갖힌 현실을 지적한다. 그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급진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현실을 다루기 위해 보호모와 장갑을 필요로 하는 대학과 같은 기관에서 일한다. 서구 근대성이 지식인들에게 부리는 속임수 중 하나는 그들이 오직 반동적 제도들 안에서만 혁명적 사상을 생산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급진적으로 행동하는 이들은 침묵하는 것처럼 보인다(미니페스토, 23쪽).

산투스는 대학이라는 제도에 대해 근본적으로 회의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는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 서구의 세계 이해보다 훨씬 더 넓고 다양하다고 본다(매니페스토, 44쪽). 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와 서구는 죽은 자들에 대한 태도에서 큰 차이를 보인다.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죽은 자들이 단순히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라, 비록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살아 있으며, 중요한 결정 과정에서 산 자들이 자문을 구하는 대상으로 여겨진다(산투스 2022, 280). 이에 비해 서구에서는 죽은 자들과의 이 관계 맺음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서구의 관점에서는 라틴아메리카의 이러한 태도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산투스는 과학을 내세우며 보편성을 주장해 온 서구 근대성이 결코 보편적이지 않다는 점을 강하게 비판한다. 서구는 자신들의 세계 이해와 맞지 않는 것들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어 왔다.

산투스는 이러한 문제를 비판하며 부재의 사회학과 출현의 사회학, 그리고 지식의 생태학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부재의 사회학은 서구 근대성이 지식과 실천을 분류하고 관련성의 정도에 따라 위계를 매기면서, 비서구의 가치관과 문화를 억압하여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든 과정을 분석한다. 반면, 출현의 사회학은 이미 존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대안적 가능성을 인식하고 강화하는 과정이다. 즉, 서구 근대성이 지나치게 미래를 강조하며 현재의 다양한 가능성을 배제해 온 것에 반대하며, 현재를 확장하고 미래를 수축하여 현재에 보다 가깝게 만듦으로써 보다 현실적인 전망 속에서 미래를 구성하자는 것이다. 지식의 생태학을 제안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다. 이는 단일하고 위계적인 지식 체계가 아니라, 다양한 지식이 상호번역될 수 있는 다원적이고 상호연결적인 방식을 강조한다. 이를 통해 억압된 지식과 실천들을 재발견하고, 탈식민적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는 서구의 일직선적 진보의 관점에 대한 비판이며, 그에 대한 비서구적 대안의 제시다. 바로 이것이 산투스가 글로벌 노스보다 글로벌 사우스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현재 우리는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매우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다. 기후위기를 비롯한 전 지구적 생태적 위기, 그리고 그것과 얽혀 있는 사회적·경제적·정치적 위기가 맞물려, 문명적 전환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고 미룰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산투스는 기존의 급진적 사상과 실천이 단절된 현실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전환을 모색해야 한다고 본다. 그는 “우리 시대의 글로벌 노스에서는 급진적 사상들이 곧 급진적 실천으로 번역되지 않으며,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한다(미니페스토, 21쪽). 즉, 급진적 실천이 현존하는 급진적 사상들 속에서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중적 불투명성이 존재하며, 이는 단순한 이론적 문제를 넘어 기성 권력이 의도적으로 이러한 단절을 유지하는 구조적 메커니즘과도 연결된다. 즉, 이러한 단절을 극복하고 새로운 전환을 모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가 된다. 산투스는 이에 대해 오늘날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은 ‘도그마 게임의 종말, 좋은 삶을 위해 집결한 이들이 지식인들에게 맡긴 후위 이론의 임무, 세계의 고갈되지 않는 다양성이라는 관점’이라는 세 가지 요인으로 인해 과거보다 더 희망적이라고 전망한다(미니페스토, 31쪽). 다시 말해, 기존의 급진적 담론이 한계에 부딪힌 상황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 조건들이 우리 시대에 조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산투스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글로벌 사우스와 관련하여 어떻게 인식하는가를 이해하려면, 바로 다음의 인용이 중요하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가장 의미 있는 변화 중 하나가, 수세기 동안 유럽 식민주의와 북미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왔고 그간 글로벌 노스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어 온 전 지구적 의제들의 조건과 우선순위에 대해 처음으로 권리를 주장하게 된 국가들, 민족들, 그리고 지역들이 글로벌 정치 무대에 부상하게 된 것과 관련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결론, 459쪽).

그러므로 반식민주의적 저항과 투쟁의 대안적 사회 운동이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대안적 사회 운동이 지향하는 바는, 그동안 가난과 억압, 배제에 시달려 온 사람들 역시 존엄한 삶을 영위할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1980년대부터 시작된 신자유주의는 이러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논리를 구축해 왔다. 따라서 같은 시기 라틴아메리카에서 가난한 대중이 대안적 사회 운동을 조직하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더 나아가, 1990년 에콰도르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에서 원주민 운동이 본격화되고 탈식민성 담론이 출현한 것 역시 이러한 흐름과 맞닿아 있다.

산투스는 글로벌 사우스의 관점에서 세계사회포럼(World Social Forum, WSF)에 실천적으로 참여해 온 지식인이다. 세계사회포럼은 2000년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리에서 시작되었으며,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적 담론과 실천을 모색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특히 산투스는 최근 라틴아메리카 사회운동이 제시하고 있는 좋은 삶/부엔 비비르 철학을 중요한 개념으로 다룬다. 부엔 비비르 철학은 2008년 에콰도르, 2009년 볼리비아에서 각각 개헌을 통해 ‘복수국민국가(Estado Plurinacioinal)’의 개념 안에 포함되었다. 이 개념은 매우 단순한 것으로, 근대성과 원주민 철학 사이에 위계적 서열을 두지 말고 수평적 대화를 가능하게 하자는 유토피아적 전망을 담은 개념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부엔 비비르 역시 특정 개념적 틀, 즉 획일적 이데올로기나 고정된 이론적 틀에 갖히지 않는 것이다.

산투스의 비판은 매우 예리하다. 스피노자의 항복, 즉 1677년, 당시 유럽의 권력 계급이 스피노자가 말년에 ‘범신론적 무신론’을 포기하고 기독교 신앙으로 전향했다고 주장했던 사건(미니페스토, 23쪽) 이후, 유럽 비판이론의 전통이 왜곡되기 시작했다는 그의 분석은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사실 그가 인용, 분석하는 지식인들의 논의는 그냥 따라가기만 해도 벅찰 정도로 방대하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측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는 글로벌 노스 내부에서도 이미 근대성과 서구중심주의의 불편한 진실을 직시했던 지식인들(예를 들어 사모사타의 루키아노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 블레즈 파스칼 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사상이 소외되거나 배제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산투스가 이러한 전통을 고려하면서도 엘리트보다는 대중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그는 엘리트보다는 대중에게서 끊임없이 배우려는 태도를 가진다. 여기서 산투스의 독특한 창의성이 드러난다. 그 예들 중 하나로 후위 이론을 들 수 있다. 후위 이론은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 운동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한 개념이다. 서구 근대성의 핵심적 특징 중 하나는, 아무리 과격한 비판이론이라 할지라도 결국 엘리트 지식인이 대중을 이끈다는 전제를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후위 이론은 이와 정반대다. 예를 들어, 라틴아메리카의 경우,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궤적을 훑어 보면, 그 문화적 의식은 사회적 연대성과 사회적 주체성을 재구성하게 만들고 있고 이에 따라 대항헤게모니 세계화의 도전을 감당할 능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정치적 문화의 힘은 대중의 경험에 뿌리내리고 있다. 이 같은 새로운 싹의 출현은 새로운 “자연법”―기층 대중을 포용하는 복합문화적, 탈식민적 맥락을 가진 ‘세계시민주의적(cosmopolitan) 법’―의 출현을 향하고 있다(산투스 2008, 34).

라틴아메리카 대중이 그런 연대의 능력을 가지게 된 이유는, 이들이 원주민 철학에 연원한 관계성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이 관계성은 위계적 구조를 거부하고 상호연결성을 강조하는 특징을 갖는다. 한편, 산투스의 사상이 독특한 이유는 그것이 이분법적 사고에 갇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성장, 발전, 그리고 품위 있게 잘살려는 인간의 보편적 욕망을 부정하지 않으며, 동시에 고통을 끌어안고 그저 아름다움만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그의 이러한 특징은 그가 글로벌 사우스의 대중이 맞서 싸우는 억압의 구조를 해석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인간들 사이뿐만 아니라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상품물신주의, 지식의 단일문화, 진보의 선형적 시간관, 자연화된 불평등, 지배적인 척도, 경제 성장과 자본주의적 발전의 생산주의”(매니페스토, 26쪽)를 여러 장애물 중 일부로 지적하면서, 그것들이 서로 ‘가족적 유사성’을 지니고, 이러한 요소들이 결합해 억압의 구조를 형성한다고 본다.

글로벌 노스 안에서도 모든 사람이 존엄 있게 살아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러한 가능성을 포착했기에, 산투스가, 결코 녹록지 않은 현실 속에서도 낙관적 전망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기에 우리 한국 사회 또한 산투스의 주장과 통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국은 몇 년 전에 UN에 의해 글로벌 사우스에서 글로벌 노스로 편입한 유일한 국가로 인정받았지만, 이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결코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변화를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한국 사회가 익숙한 민족주의의 틀을 벗어나 반란적 서발턴 세계시민주의를 수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반란적 세계시민주의는 기존의 주류적, 자유주의 비판이론이 주장하는 칸트식의 세계시민주의가 아닌, 서로 다른 보편성, 즉 단일 보편성에 반대하는 복수 보편성(미뇰로 2010, 7)을 주장하는 비주류적 접근과 상응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책이 제안하는 대안적 실천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전개된다. 다시 한번 산투스의 말을 그대로 소환하자면,

이러한 활동들의 스케일은 매우 다양하다. 글로벌 사우스와 글로벌 노스 모두에서 소외된 사회 집단들이 자신의 삶과 공동체에 대한 어느 정도의 통제를 얻기 위해 실행하는 미시적 활동이 있는가 하면, 양질의 일자리와 환경 보호의 기본적인 기준을 보장하기 위해 국제적 차원에서 법적・경제적 조정을 제안하는 경우도 있다. 글로벌 금융 자본을 통제하기 위한 시도부터 협력과 연대의 원칙에 기반한 지역 경제를 구축하려는 노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규모와 형태의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대안적 생산과 생산성에 대한 개념과 실천들은 두 가지 주요 특징을 공유한다. 첫째, 이들은 글로벌 자본주의의 대안이 되는 체계적 경제 시스템을 구현하기보다는, 주로 지역 사회와 노동자들이 연대하여 생산적 공간을 창출하려는 지역적인 노력이라는 점이다. (……) 두 번째 특징은 이러한 활동들이 민주적 참여, 환경적 지속가능성, 사회적·성적·인종적·민족적·문화적 형평성, 그리고 초국적 연대와 같은 목표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경제’ 개념을 공유한다는 점이다(6장, 354-355쪽).

마지막으로, 산투스가 아무리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낙관적 의지와 비전을 버리지 않는 태도가 사뭇 인상적이다. 그가 인용한 스피노자의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운 만큼이나 드물다(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라는 말처럼, 진정한 변화와 그것을 위한 실천은 필연적으로 어렵고 희귀하다(미니페스토, 51쪽). 아울러, 우리의 특별한 적, 즉 우리가 맞서야 할 가장 강력한 적이 우리 안에 자리한 나태함과 무기력이라는 그의 지적이 주는 울림 또한 어느 때보다도 크게 다가온다.

옮긴이를 대표하여

안태환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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