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 살해에 맞서는 대항헤게모니,
남의 인식론을 재조명하다
본문 중에서
이 책에는 세 가지 기본적 생각이 전제돼 있다. 첫째, 세계에 대한 이해는 서구가 세계를 이해하는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 둘째, 전 지구적 인지적 정의 없이는 전 지구적 사회적 정의도 있을 수 없다. 셋째,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해방적 변화들은 서구중심적 비판이론이 발전시킨 문법과는 다른 문법과 각본을 따를 수 있으며, 그 같은 다양성은 가치 있게 여겨져야 한다.(4쪽, 서문 중에서)
지금은 인간과 어머니 대지를 포함하는 전 지구적 차원의 판가름의 시대이다. 아직까지는 어떤 규칙도 없는 판가름의 시대이다. 한편에는 자본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 그리고 그에 딸린 모든 위성적 억압들이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글로벌 노스라고 부르는 것으로, 이는 지리적 위치가 아닌 정치적 위치이며 고통의 초국가화(transnationalization)에 점점 더 특화되어 가고 있는 곳이다. 공장이 이전되면서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들, 메가프로젝트와 기업농, 광산업으로 인해 수탈당한 인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농민들, 인종 학살에서 겨우 살아남은 아메리카와 호주의 원주민들, 시우다드 후아레스(Ciudad Juárez)에서 살해당한 여성들, 우간다와 말라위의 게이와 레즈비언들, 너무나 가난하지만 또한 너무나 부유한 다르푸르의 사람들, 살해당하고 콜롬비아 태평양 연안의 끝으로 쫓겨난 아프리카계 후손들, 생명의 순환에 타격을 입은 어머니 대지, 테러리스트로 몰려 세계 곳곳의 비밀감옥에서 고문당하는 사람들, 강제 송환의 위기에 처한 서류 미비 이민자들, 계속되는 폭격 속에서 살아가고 일하고 삶의 순간들을 기념하는 팔레스타인인들, 이라크인들, 아프간인들, 파키스탄인들, 자본주의와 식민주의가 세계의 다른 모든 민족들을 대했던 것과 정확히 같은 경멸과 독단으로 자신들을 대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빈곤한 북미인들, 금융 해적들이 휘두르는 약탈 법칙의 먹잇감이 된 은퇴자들, 실업자들, 그리고 고용 불가능한 사람들.(36, 38쪽)
독자들은 내가 급진주의의 불가능성이라는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 여전히, 비록 희망이 없거나 희망 없을 정도로 정직할지라도, 기성 권력이 방심하거나 경계를 느슨히 한 틈을 타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급진주의를 되찾으려는 하나의 시도라는 것을 틀림없이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바로 덧붙이자면, 나는 내가 성공했는지 알 방법이 없다. 따라서 나는 내가 유능한 반란자인지 알지 못한다. 나는 내가 쓰는 것을 쓰고자 하는 절박한 충동을 느끼지 못하는데, 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침묵되어야 할 것을 침묵시키고자 하는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윤리학』 마지막 문장은 전율스럽다. “모든 고귀한 것은 어려운 만큼이나 드물다(Sed omnia praeclara tam difficilia quam rara).”
이것이 바로 이 책이 상당 부분 미완성으로 남을 이유이다.(49, 51쪽)
유럽중심적 비판이론과 좌파 정치가 역사적으로 주로 글로벌 노스에서, 특히 북반구의 오직 5-6개 국가(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그리고 어느 정도 미국)에서 발전된 반면에, 최근 수십 년 동안 가장 혁신적이고 효과적인 변혁을 가져온 좌파의 실천은 글로벌 사우스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서구 비판 전통은 전 세계의 억압받는 계층이 아닌, 유럽에 속한 억압받는 계층의 요구와 열망을 반영하여 발전해 왔다. 문화적 관점과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이 전통이 구현하고 프랑크푸르트학파가 찬양한 ‘유럽적 보편주의’는 사실상 특정한 현실에 국한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한 예로, 유럽적 보편주의는 세계 인구의 대다수가 식민주의의 지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주의를 억압 체제로서 포함하지 않는다.(91쪽)
이 장에서 나는 적어도 두 개의 20세기가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하나는 유럽적 아메리카의 20세기이고 다른 하나는 누에스트라 아메리카의 20세기이다. 물론 아프리카, 아시아를 비롯해 유럽 내부에도 다른 20세기가 존재함을 알고 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앞의 두 가지, 특히 후자에 집중하고자 한다. 내가 주장하는 바는, 민주주의와 복지에 대한 수많은 약속을 지니고 있었고, 유럽 안팎에서 파괴적인 전쟁을 겪은 유럽적 아메리카의 20세기는, 결국 내가 사회적 파시즘이라고 명칭한 불길한 현상의 부상과 함께 막을 내렸다는 것이다. 사회적 파시즘은 종종 헤게모니적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위장되었다. 이 세기의 가장자리에서 또 다른 세기가 발전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누에스트라 아메리카 세기이다.(105-106쪽)
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개념이 절대적으로 주장되거나 부정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주어진 역사적 시기에 매우 심오한 것으로 경험된 변혁들을 설명하기 위한 방식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설령 나중에 가서 결국 그러한 변혁들이 의도했던 만큼 현상을 바꾸지 못했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그 변화가 패러다임적일 것이냐 혹은 하위 패러다임적일 것이냐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어떤 조건들하에서 경험되는가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가장 의미 있는 변화 중 하나가, 수세기 동안 유럽 식민주의와 북미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왔고 그간 글로벌 노스에 의해 일방적으로 규정되어 온 전 지구적 의제들의 조건과 우선순위에 대해 처음으로 권리를 주장하게 된 국가들, 민족들, 그리고 지역들이 글로벌 정치 무대에 부상하게 된 것과 관련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 글로벌 사우스가 결국에는 새로운 형태와 다른 종류의 담론들로, 수세기 동안 글로벌 노스에 의해 구현되어 온 동일한 사회적 과정을 재생산하게 될 수도 있다.(459쪽)
남의 인식론들의 유토피아는 곧 그 자신의 소멸이다.(46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