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머리와 날머리] 정길수 교주본 『남원고사: 남원의 옛 노래 김춘향전』 서문과 해설

우리가 잘 아는 「춘향전」, 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버전이 있습니다. 바로 『남원고사』입니다. 이번에 정길수(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님이 오랜 연구 끝에 완성한 『남원고사』 교주본을 소개합니다. 단순히 「춘향전」의 또 다른 버전이 아니라, 그 원형을 엿볼 수 있는 결정적인 자료이죠.

- 『남원고사』는 어떻게 발견되었을까?

『남원고사』는 원래 1860년대 서울 종로에서 필사된 책입니다. 그런데 이 귀한 책이 프랑스로 넘어가 오랫동안 잊혀졌다가, 1970년대에야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죠. 명지대학교 출판부에서 영인본이 출간되면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됐고, 작품이 소개되자마자 「춘향전」의 최고봉, 「춘향전」의 결정판으로 지목되어 왔습니다.

- 『남원고사』 속 춘향은 다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춘향은 한없이 정숙하고, 도령을 향한 사랑 하나로 모든 시련을 견디는 인물로 그려지죠. 하지만 『남원고사』의 춘향은 조금 다릅니다. 도도하고 똑 부러지며, 상황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대처하는 인물로 등장합니다. 어떤 위기가 닥쳐도 머리를 써서 해결하고, 필요하면 아양도 떨고, 때로는 과감한 행동도 서슴지 않죠. 기존의 조신한 여성상이 아니라 현실적인 지혜를 가진 춘향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습니다.

- 『남원고사』가 특별한 이유

『남원고사』는 「춘향전」 중에서도 가장 긴 이야기로, 무려 8만 5천 자에 달합니다. 다른 판본보다 훨씬 많은 내용이 담겨 있죠. 이 책은 단순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다양한 인간 군상을 담아낸 작품입니다. 이몽룡과 김춘향뿐만 아니라, 주변 인물들의 모습도 훨씬 입체적으로 그려져 있어요. 이렇게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남원고사』는 인간의 본성을 솔직하게 보여줍니다.

- 사랑의 계약 문서, 훼손된 사랑일까?

『남원고사』에서 가장 독특한 설정 중 하나는 바로 '불망기(不忘記)'입니다. 쉽게 말해, 춘향이 이도령에게 사랑을 약속하는 계약서를 써 달라고 요구하는 장면이죠. 사랑이라는 게 보통 순수한 감정으로만 그려지는 것이 일반적인데, 『남원고사』에서는 사랑도 일종의 약속이고, 그 약속을 증명할 문서가 필요하다고 보는 거죠. 이 설정은 현대적 관점에서도 흥미롭습니다. 사랑이란 감정뿐만 아니라 신뢰와 책임이 있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니까요.

- 『남원고사』의 인간관: 밤 잔 원수 없다

이 작품에서 특히 흥미로운 점은 '절대적인 선악'이 없다는 것입니다. 흔히 악역으로 등장하는 변학도조차 단순한 악인이 아니라, 다소 우스꽝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 역시 단순히 착하거나 나쁜 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변하는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이는 『남원고사』가 단순한 권선징악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모습을 솔직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걸 뜻합니다.

- 『남원고사』를 읽어야 하는 이유

이번 정길수 교수님의 교주본은 단순히 『남원고사』의 원문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2,371개의 주석과 200여 개의 교정을 추가하여 『남원고사』의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습니다. 『춘향전』을 단순한 사랑 이야기로만 알고 있던 분들에게, 『남원고사』는 색다른 시각을 제공할 것입니다.

춘향의 이야기가 단순한 전설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랑과 인간 군상의 이야기로 다가오는 순간, 『남원고사』의 진정한 매력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매력의 『남원고사』를 읽고 나면, 올해도 5월에 찾아올 남원 춘향제를 가보고 싶어지지 않을까요?

정길수 교주본 『남원고사: 남원의 옛 노래 김춘향전』의 들머리(서문)와 날머리(해설)를 통해 먼저 접해 보시죠. 들머리는 텍스트로, 날머리는 이미지 파일로 올립니다.

서문

한국 고전소설사를 공부해 보겠다고 마음 먹은 것이 어언 30년 전 일이다. 그 뒤로 이 한 가지 일을 꾸준히 해 왔지만 아직 못 읽어 본 작품이 많고 소설사의 흐름은 여전히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더 부끄러운 일이 있다. 불과 2년 전 『남원고사』를 정독하기 전까지 나는 ‘고전 중의 고전’이라는 「춘향전」의 가치를 잘 알지 못했다. 「열녀춘향수절가」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완판 84장본’과 신재효가 정리한 판소리 「춘향가」 정도로만 알고 있던 「춘향전」의 세계와 전혀 다른 『남원고사』의 면모, 인간을 보는 독특한 서술자의 시선을 읽고서야 이 작품의 진가를 얼마간 이해하게 되었다.

「춘향전」은 19세기 이후 지금까지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아 온 고전소설 작품이다. 그런데 「춘향전」이라고 해서 다 같은 「춘향전」이 아니다. 춘향과 이몽룡의 사랑 이야기인 점은 모두 같지만 적어도 수십 종의 버전에서 인물 설정, 에피소드 출입, 서사 전개에 영향을 주는 디테일의 차이가 확인된다. 대중의 끊임없는 사랑과 함께 기존의 「춘향전」에 대한 불만이 이어지면서 적극적인 독자의 개작이 수행된 결과 이렇게 미세한 차이를 지닌 다수의 「춘향전」 이본(異本)이 탄생했다. 미세한 설정 변화가 작품의 전체적인 색깔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경우가 있어 「춘향전」이 어떤 작품이라고 하려면 내가 본 「춘향전」이 어떤 버전인지부터 밝히고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춘향과 「춘향전」에 대한 해석의 혼란은 대개 이본 문제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남원고사』는 초기 버전에 가까운 면모를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춘향전」의 대표 버전이다. 1860년대 서울 종로에서 필사된 책이 프랑스 파리로 옮겨 가 있다가 1970년대에 뒤늦게 그 소재가 알려지면서 즉시 ‘「춘향전」의 최고봉’, ‘「춘향전」의 결정판’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나는 가장 생기발랄한 ‘야성’(野性)을 지닌 ‘김춘향’의 형상, 풍성한 디테일, 우리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이웃들, 곧 절대 선인도 절대 악인도 아닌 인간 군상을 그 모습 그대로 인정하는 서술자의 시선이 좋아 『남원고사』를 「춘향전」의 최고봉이라고 생각한다. 『남원고사』 이후에도 「춘향전」은 수많은 변개를 거치며 유동했거니와 다른 시각에서 보자면 「춘향전」의 최고봉은 얼마든 다른 버전의 「춘향전」으로 바뀔 수 있다. ‘내가 본 「춘향전」’이 저마다 다르고 독자마다 취향에 맞는 「춘향전」을 고를 수 있다는 것 또한 「춘향전」의 매력이다. 연구자는 물론 고전에 큰 관심을 가진 독자들이 「춘향전」, 그중에서도 『남원고사』의 진가를 이해하는 데 기초 자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자세한 학술 주석을 붙여 굳이 또 한 권의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 책을 내는 데에도 많은 분들의 배려와 도움이 있었다. 김동욱·김태준·설성경 세 분 선생과 이윤석 선생의 『남원고사』 주석 연구를 길잡이로 삼아 기존의 성과를 보완하는 교주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2023년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수업에서 작품 일부를 강독하면서, 혼자 읽었다면 미처 살피지 못했을 여러 문제를 우리 뛰어난 학생들 덕분에 차분히 검토할 수 있었다. 곽보미 군과 이은채 군이 출판 과정에서 원고의 오류를 여럿 바로잡아 주었다. 선생님과 선배 동학들, 흔쾌히 출판을 맡아 주시고 최선의 지원을 해 주신 알렙 여러분, 사랑하는 가족, 오늘도 여전히 혼자 연구실에 앉아 이런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주신 모든 분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2024년 6월

정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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