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발견]
《서울리뷰오브북스》 봄호 편집마감이 코앞에 다가왔습니다. 다음 특집 주제는 ‘시의성 있게’ ‘헌법의 순간’으로 정했습니다. 출간 주기가 3개월인 계간지가 매번 시사/이슈에 대응하기는 쉽지 않은 일인데, 지난 겨울호는 시의에 맞지 않아도, 너무 맞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책이 나오자마자 비상 계엄 사태, 그리고 그로 인한 탄핵 정국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죠.
그렇지 않았다면, “만화라는 소우주”에 스며들어 보는 것은 한번쯤 권할 일이 아니었나 쉽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준비했지만, 빅이슈에 파묻혀 그다지 주목하지 않게 된 “만화-책-큐레이션”을 다시 소개해 드립니다!
《서울리뷰오브북스》 16호(2024년 겨울호)의 특집 주제는 ‘만화라는 소우주’이다. “허구한 날 책은 안 읽고 만화나 본다”며 한소리 들었던 어린 시절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보통의 책’에 비해 만화를 낮추어 보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일이다. 그러나 그런 고정관념은 철 지난 것이 된 지 오래다. 책의 세계가 우주라면 만화는 그 자체로 소우주를 이루었다. 《서울리뷰오브북스》는 만화라는 광활한 소우주를 유영하며, 네 편의 만화를 만나 본다. 만화가 선우훈은 최근 드라마화되며 더욱 화제를 모았던 서이레·나몬의 『정년이』를, 출판 및 시각예술 기획자 한윤아는 최성민의 첫 장편만화 『좁은 방』을, 편집자 김미래는 아마존 베스트셀러 그래픽노블 작가 앨리슨 벡델의 『초인적 힘의 비밀』을, 소설가 김화진은 2023년 일본 만화대상 2위를 차지한 『아카네 이야기』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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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
“읽으라는 책은 안 읽고 만화나 본다”며 엄마한테 등짝을 맞았던 어린 시절 추억 하나쯤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보통의 책에 비해 만화를 낮추어 보는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일이다. (……) 책의 세계가 우주라면 만화는 그 자체로 소우주를 이루었다. 글자가 아닌 그림이라는 수단을 사용한다고 해서 혹은 종이책이 아니라 인터넷에 올라온다는 형식을 이유로 책의 우주에서 제외할 수는 없다. (……) 《서울리뷰오브북스》는 16호 특집 리뷰로 ‘만화라는 소우주’를 준비했다.
―유정훈 「편집실에서」, 2-3쪽
『정년이』는 최근 여성 서사로 분류되는 작품들 중에서도 다양한 면에서 여성 서사의 본질을 충실히 담아낸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여성들의 관점, 관계, 성취뿐 아니라 ‘여성국극’이라는 실제로 존재했던 여성들의 역사를 소재로 삼고 있다.
(……) 여성국극이라는 소재를 다룬 『정년이』는 극 중 인물들의 여성 서사일 뿐 아니라, 여성들이 한때 향유했던 문화적 장을 세밀하게 그려 내고, 스스로 다시금 그러한 장을 창출하는 데까지 성공한다.
―선우훈 「재밌지 않니? 세상은 거대한 여성국극 무대 같아」, 16-18쪽
결론적으로, 다예의 환상 서사 전략은 실패한다. 이 실패의 서사는 도처에 널려 있다. (……) 다예의 서사는 순정만화의 ‘남주’를 통해 그리는 판타지, 아이돌 가수를 향한 사랑과 비슷한 면이 있다. 만약 그것이 현실의 성적 상징계를 전도시키고 위반하는 환상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었다면, 판타지를 통해 소유하고자 했던 꽃미남 오빠들의 좁은 방을 열어젖히는 순간, 다예는 환상을 불능으로 만드는 진짜 가부장적 실체를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다예에게 유예의 시간이 실패의 문턱으로 재확인되는 순간인 것인지, 이야기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한윤아 「‘좁은 방’에 침잠하는 시간」, 45쪽
『초인적 힘의 비밀』은 보디빌딩부터 피트니스, 아웃도어 스포츠, 주짓수와 같은 아시아 무술, 요가와 같은 치유성 수련의 대중적인 유행을 연대순으로 훑으며, 자신이 거친 시대와 시대에 맞게 형성해 나간 자기의 몸을 보고하는 책이다. (……) 흥미롭게도, 사실은 더한층 만화답게도, 이 책은 유행하는 스포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진화하는 스포츠웨어에 깊이 감사하며, 시대별 스포츠에 푹 몸을 담그며 살아온 덕에, 몸의 변화, 즉 노화와 질병, 에이징커브를 맞으며 정신과 신체의 관계를 재정립해 나가는 아마추어 스포츠인의 그야말로 끝 모르는 열정을 보여 준다. 평생에 걸친 신체적 건강에 관한 열정, 영혼 담는 바구니의 단련이라는 열정을.
―김미래 「비밀 누설하기」, 53쪽
나는 아카네 모르게 아카네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속삭인다. 나도. 나도 수많은 이야기를 배울 거야. 이야기를 친구라고 믿는 아카네를 친구로 믿으며 나는 힘을 낸다. 어떤 시기를 그만두고 어떤 시기를 시작하는 사람으로서. 그럴 때 어떤 이야기는 계속되어 가는 와중이라는 사실까지 포함하여 좋다. 아카네에게 라쿠고인 것이 나에게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좋다.
―김화진 「그만두는 일, 시작하는 일, 소설가의 일」, 74쪽
결국 이들은 스스로 신체적 존엄성을 내던지는 바로 그 행위를 통해 역설적으로 자신 또한 동료 시민에게 기존의 권리 체계가 정당한지 논의해 보자고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지닌 자율적 존재라는 사실을, 인간이자 같은 정치 공동체에 소속된 시민으로서 지닌 존엄성을 증명해 보인다. 기어가는 몸짓에 권리 주장이 체현된 이러한 장면 앞에서 우리가 느껴야 할 것은 동정이 아니라 숭고다. (……) 이렇게 포체투지는 기어가는 행위의 의미가 단지 동정의 몸짓에만 국한되던 기존 시선을 깨트리고 정치적 주체의 숭고한 몸짓으로 이를 전용하는 전복적 행위가 된다.
―김도형 「전장연 시위라는 사건」, 101-102쪽
무위의 시간은 저자에게 일터와 도시라는 기존의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심의 장을 열어젖힌다. 따라서 무위는 어떤 완결이 아닌, 하나의 전환이자 접속이다. 그것은 비유컨대 우리의 관심과 에너지를 다른 방향으로 쏟을 수 있게 돕는 키이다. 우리는 정해진 길을 벗어나 새로운 흐름을 탈 수도 있고, 또 전혀 낯선 장소에 다다를 수도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이전에는 미처 몰랐던 참다운 나/너를 찾을지도 모른다.
―이두은 「무위의 계보학」, 124쪽
디지털 기술 시대의 인쇄술과 소량 제작 방식은 책을 훨씬 쉽고 저렴하게 만들 수 있도록 했다. 이제는 누구나 글과 그림과 사진으로 콘텐츠를 생산하는 저자가 될 수 있고 소규모 출판도 가능해졌다. 그 결과 세상에는 작고 다양한 목소리가 많아졌다. 지역의 목소리가 선명해지고 감춰져 있던 장면들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이것이야말로 책의 미래이자 끊임없는 자기 갱신의 가능성 아닐까.
―정재완 「싱가포르에서 가져온 책 세 종」, 137쪽
50대의 마스다 미리는 『누구나의 일생』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리텔링’한다. 일이 주는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두렵지만 꿈꿔 볼 만한 미래에 대해 말하던 ‘30대의 마스다 미리 자신’을 저성장과 코로나로 점철된 ‘2020년대’에 데려다 놓는다. 그것이 만화 작가의 일이라는 듯. 시대와 호흡하는 게 작가의 일이라는 듯. 나는 독자이자 편집자로서 마스다 미리의 『누구나의 일생』을 그렇게 읽었고, 이 작품은 데즈카 오사무 문화상 만화 대상에서 단편상을 수상했다. 나는 예술과 만화 그 어디쯤에 다시 선 기분이 든다.
―고미영 「20세기 말 순정만화 잡지 독자가 지금을 호흡하는 이야기」, 149쪽
K-의료는 이미 ‘값싼 의료’가 아니다. (……) 이 점에서 우리는 이미 남들만큼 쓰고 남들만큼의 성과만 내는 단계에 와 있다. 의료비 지출이 매우 빠르게 늘었기 때문이다. 의료비 지출 총액을 계속 늘릴 수는 없으니 덜 필요한 의료에서 더 필요한 의료로 돈을 옮겨 와야 한다. ‘뒤틀린’ K-의료의 전체적인 재조정, 근본적 개혁이 필요하다.
―이동진 「기자의 눈으로 본 K-의료의 정치경제학」, 159쪽
폭염은 자연 현상이지만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공공성이 무너진 곳에서 재난으로 드러난다. 즉, 폭염은 자연 재난인 동시에 사회적 재난이기도 하다. (……) 인간이 일으키는 폭염은 결국 인간의 손길만이 해결할 수 있다. 폭염 대응은 우리가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대해 얼마나 감수성이 있는가의 척도이기도 하다. 즉 폭염이 우리 수준을 드러낼 것이다.
―조천호 「불타는 폭염에서 불타는 야망으로」, 172-174쪽
현실에 없는 ‘중간의 아이’를 기준으로 가르치는 교실에서 학습 격차가 커질수록 교육의 효율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올해 봄 교실에서 내가 느꼈던 막막함이 바로 거기에 있다. 학습 격차는 한 사람의 교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그렇다고 교사를 갑자기 대규모로 훈련해서 학교에 배치할 수도 없다. 이때 교사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는 도구가 맞춤형 학습을 도와주는 소프트웨어다.
―정은진 「모두가 다르게 배우는 하나의 교실을 위해」, 182-183쪽
이름만 ‘횡행’한다는 표현을 굳이 쓴 것은 현재 그의 학술적 위상에 비해서는 스펜서의 이름이 매우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회진화론이라는 사상 자체를 광범위하게 보급시킨 데에 그의 영향은 매우 컸다. 앞에 언급한 대로 스펜서에 가장 열광했던 미국과 일본의 경우는 사회진화론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근대 사회를 구축한 대표적 사례로 꼽을 수 있는데, 특히 일본의 사회진화론 수용은 일본 국내에 그치지 않고 이후 동아시아 지역 전체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우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김도형 「이상적인 사회로의 진화, 아니 진보에 대한 지적 탐색」, 199쪽
책 한 권을 끝내고 나면 홀가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래 사귄 연인과 헤어진 것처럼 허전하고 마음이 한 번 몸살을 앓는다. 하루에도 몇 시간씩 오로지 텍스트에 빠져 저자의 의중을 헤아리려고 집중한 노력으로 연애를 했다면, 아마 그 어떤 연애도 성공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마감 과정의 치열함에 진이 빠져 “아휴, 이제 번역 그만해야지”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출판사에서 “이 책 재미있을 것 같지 않나요? 같이 작업하실래요?”라는 메일이 오면 매번 넘어간다. 이 세계와 저 세계를 연결하는 즐거움. 그 중독적인 매력. 그래서 나는 오늘 밤도 노트북 앞에 앉아, 영어사전을 띄운다.
―박누리 「옮기는 이의 말」, 229쪽
작가는 일생 동안 단 한 권의 책을 쓴다고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나는 어쩌면 독자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고 이따금 생각한다. 아닌 척해도, 우리는 책을 읽을 때 우리의 내면의 눈으로 읽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을 떠서 텍스트를 읽는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은 대부분 눈을 감아야 보이는 암흑 속 빛에 기대어 일생 동안 오독한다. 그렇다면 수없이 많은 책을 읽지만, 우리가 일평생 읽는 것은 결국 단 한 권의 책일지도 모르리라. 단 한 권의 책. 내가 쓰기 원하고, 또 읽기 원하는.
―백수린 「단 한 권의 책」, 23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