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는 서문이 있고, 프롤로그가 있는가 하면, 서론이 있습니다. 후기가 있는가 하면, 에필로그도 있습니다. 책을 여닫으며 저자는 독자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보냅니다. 저자가 어떤 의도로 책을 쓰려 했고, 그 의도에 따라 책을 완성했던 이야기를, [서문과 후기] 즉 [들머리와 날머리]로 담았습니다.
<식물의 사유: 식물 존재에 관한 두 철학자의 대화>
페미니즘 철학자와 식물성의 철학자의 만남, 두 저자는 32편의 편지를 주고받으며,식물 세계를 통한 사유를 주고받는다. 2020년 출간 도서
서문
우리가 이 책을 함께 쓰게 된 이유는 현재 자연과 생명이 처한 상황에 대한 우려 때문입니다. 애초에 우리는 이 책이 각 장의 주제에 해당하는 대화로부터 발전하리라고 상상했지만, 우리는 이 계획이 너무 야심 차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은 적절치 않다는 점을 곧바로 알아차렸습니다. 해당 문제에 접근하는 우리 두 사람의 입장은 상당히 달랐고, 우리가 공통의 목표를 다루면서 서로의 입장을 이론적, 윤리적, 정치적 차원에서 구별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거의 알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 산다는 점을 고려하면 특히 그랬습니다. 우리가 당면한 딜레마는 이 프로젝트를 포기하거나, 이 책이 미래의 대화로 발전해 나가도록 제안하는 다른 구성 방식을 창안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제안한 것은 루스가 쓴 텍스트와 마이클이 쓴 텍스트가 아래위가 뒤집힌 포맷으로 구성된 책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구성을 취하면 책의 중간 지점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지요. 불행히도 이 도발적인 해결책은 우리 두 사람 모두 각자의 관점에 충실하면서 대화가 가능한 방식을 찾는 데 영감을 주긴 했지만, 특히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출판사와 합의를 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우리의 기여를 이끌어내는 가장 풍요로운 방식을 찾는 작업은 독자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다시 말해, 식물 존재에 관한 주요 메시지와 우리 두 사람이 식물 존재를 다루는 상이한 방식을 함께 파악하는 일은 독자들의 몫입니다.
우리가 각각의 주제에 구체적으로 접근할 때 앞으로 나타나게 될 것에 관해 자세히 언급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서로의 입장을 구별해 주는 몇 가지 특성을 강조할 수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 두 사람은 식물 세계가 우리 삶에 가져다주었고 지금도 계속해서 가져다주고 있는 도움에 고마워합니다. 우리의 분석과 제안이 달라지는 대목은 어떻게 식물 세계를 보살필 것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됩니다. 마이클은 식물 세계 그 자체를 사유하면서 식물 세계가 우리의 전통적 저자들에게 나타나는 궤적을 추적합니다. 이는 우리 전통에 대해 새로운 이해와 충격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그는 식물을 사유의 장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인간 사유의 토대를 재구축하려고 노력합니다. 루스는 특히 전체 생명 세계와 관련하여 새로운 존재 방식과 실존 방식을 낳으려면 주체성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마이클이 대체로 그 중요성이 무시되어 온 식물 존재를 사유하면서 우리의 과거 철학을 해석하는 작업을 수행한다면, 루스는 주체성의 규정, 특히 성차화된 규정(sexuate determination)에서 출발하여 우리 문화와 주체성의 토대를 급진적으로 다시 세울 것을 요구합니다. 이런 재정초화 작업은 생명과 생명의 발달에 대한 존중을 용인합니다. 마이클이 그리스 시대의 ‘퓌시스(phusis, 자연)’로 돌아가는 것이 식물의 성장에 내재해 있고 그것에 근접해 있는 인간의 성장―이 성장은 성차의 수준에서 일어나는 성장을 포함합니다―을 낳기를 바란다면, 루스는 이 ‘퓌시스’로의 복귀에 인간 주체성을 키우는 작업이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단절, 공백, 해소 불가능한 부정성을 취하고 자연환경 및 소속과 관련하여 초월성과 다른 관계를 맺지 않는다면, 인간 주체성을 키우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마이클이 우리의 현존 경제가 생태계에 일으킨 피해와 위험 주위를 맴돈다면, 루스는 우리가 깊이 성찰하고 발전시켜야 할 생태적 경제에 유효한 요소로 일부 동양 전통의 가르침과 안티고네가 옹호한 법을 상기시킵니다.
이런 점들은 우리 각각의 입장이 지닌 특징을 보여주는 여러 측면들 중 극히 일부입니다. 성급하게 대충 의견의 일치를 도모하는 대화를 통해 각자의 특성을 모호하게 흐린다면, 이는 우리 사유를 지각하지 못하게 해치고, 독자들이 새로운 존재 방식과 행동 방식으로 나아가기 위한 길을 열지 못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우리의 환경, 일체의 생명 존재, 그리고 우리 인간의 생성이 현재 처한 상태는 새로운 존재 방식과 행동 방식을 긴급히 요구합니다.
책의 구성과 관련하여 우리가 처음에 제안했던 안은 책을 출판할 때 제1저자와 제2저자로 표기하는 것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그런 구성 없이 루스는 첫 번째 기고자로, 마이클은 두 번째 기고자로 등장할 것입니다. 이 책을 소개하는 편지와 뒤이어 나오는 많은 장들이 보여주듯이, 이런 방식은 우리의 성을 알파벳 순으로 배열한다는 사실을 넘어 이 책의 글쓰기가 가장 빈번하게 일어난 방식에 상응하는 것입니다.
2015년 8월
루스 이리가레
친애하는 루스에게
다시 시작하면서, 나는 하나의 사건으로서 자연의 삶과 사유는 거의 시작되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이데거조차 그런 것을 그려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책은 이 방향으로 내딛는 최초의 발걸음 중 하나입니다. 식물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가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도와주었습니다. 그것은 성장의 사건으로서 퓌시스가 가장 확실하게 발견되는 것이 다름 아닌 식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퓌시스를 식물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퓌시스의 사건은 우리들에서, 우리들로서, 그리고 자라면서 드러나는 다른 모든 퓌시스의 참여자들과 우리들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그런 사건을 우리와 다른 존재들과의 관계 바깥에서, 언어 및 언어들에 의거하여 생각할 수 있을 따름인 관계 바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입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모든 것들을 인간의 문법으로 번역할 수 있다거나 인간만이 표현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식물들과 관계를 맺고자 한다면 식물의 언어를 망각할 수 없으며, 다른 실존 형태들의 언어를 망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의 담론과 맺는 관계 안에서도 비인간 생명 형태들과 소통할 가능성에 열린 환대의 공간이 필요합니다. 나는 우리가 함께 쓴 이 책이 적어도 그런 환대의 공간을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환대의 공간을 준비하는 형식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서신 교환은 우편을 통해 느리게 진행되었습니다. 우편을 통한 교환 방식은 생각이 자라고 성숙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주었습니다. 더욱이 우리가 나눈 생각들은 생명에서 분리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생각들은 자서전(auto-bio-graphy)이라는 의미에서 추상적 회상의 형태로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각 장들이―적어도 내가 쓴 장들의 경우―아주 서서히 씌어졌다면, 그것은 개별 장들이 기억에, 식물과 나눈 동시적 경험에, 우리 각자가 쓴 텍스트에 대한 성찰과 반응을 지속적으로 나눈 의견의 교환에 기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식물의 세계, 혹은 그 세계 안의 어떤 것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식물의 세계로의 열림을 키우는 일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또한 식물의 생명을 경험하고 재경험하는 토대 위에서, 인간관계가 더 이상 경제적이지 않고 생태적 공유에 도움이 되도록 인간관계를 리모델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새로운 인간관계가 우리의 책에서 간신히 시작되었지요.
우리가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면, 내가 이 책에서 쓴 부분을 동일한 크기로 소환했던 두 개의 원천이 보입니다. 그 두 원천은 식물들과 더불어 식물들에 대한 나의 경험에 응답하면서 당신의 경험에 응답하라는 명령이었습니다. 당신의 경험 안에는 무엇보다 식물 생명과 더불어 식물 생명에 대한 당신의 경험이 들어 있습니다. 그런 이중적 응답이 무엇을 수반하는지 이해하는 데에는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 두 응답이 그저 하나가 다른 하나를―그것이 식물이든 인간이든―반사하고자 하는 것이었다면 부족했을 것이라는 점은 금세 분명해졌습니다. 끝없는 모방 효과를 만들어낼 상호반사 역시 충분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 상호반사 속에서 형이상학적 사유 방식과 행동 방식은 훨씬 격렬하게 자신의 주장을 다시 펼쳤을 것입니다.
내가 당신이 이 책에서 이야기했던 것에 대해 즉각적 해답을 주었더라면 그것 역시 불충분한 응답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 앞에 놓인 위험은 식물의 세계를 잃어버리고 로고스라는 밀봉된 세계 속으로 가라앉는 것입니다. 흔히 대화로 불리는 로고스의 세계는 식물의 세계에 귀먼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타자에게 말할 수 없는 것을 보존하면서 이렇게 간접적으로 비스듬히 응답하는 것이 우리 앞에 놓인 도전입니다. 그런 사선적 특성(obliqueness)이야말로 언어에서, 무엇보다 식물의 언어에서 번역될 수 없는 것을 가급적 많이 보존하는 것이 아닐까요? 인쇄된 말에서 일어난 것보다 더 많은 것들이 일어나고 있는 침묵과 틈새와 간극―예를 들어 장들 사이에서―에 당신과 이 책의 독자들은 어떻게 응답할까요? 달력의 시간을 특정해서 말해 주고 있는 각장의 날짜는 무엇을 말하고 있거나 말하고 있지 못할까요? 이 날짜의 단독성은 가끔 텍스트의 ‘내용’이라 불리는 것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날짜는 식물 생명의 경험 그 자체로 숨겨진 채 남아 있을 방식으로 앞서 내가 말한 이중적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의 책이 식물의 세계, 다른 인간 존재, 다른 인간들과 관계맺을 대안적 지평을 열어주기를 희망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서로에게 나누어 주고자 했던 것이 지닌 단독적이며 사선적인 특성 때문에 우리는 이런 대안적 지평이 부서지기 쉬우며 힘들게 노력해야만 볼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의 작업이 다른 방식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명징한 처방, 이중적 구조의 부재, 직접적인 현상학적 기술을 시도했더라면 우리의 기획 전체가 처음부터 망가졌을 것입니다, 식물적 존재를 경유한 만남이(이 만남뿐 아니라) 다른 만남들을 얼마나 자라게 할 것인지는 이제 시간이 말해 줄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미래를 희망하며
마이클 마더
2014년 11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