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셈블리』, 어떤 책인가?

오늘날 가장 창의적인 (좌파) 사상가들인 마이클 하트와 안토니오 네그리의 『어셈블리』(2017)는 2000년부터 3-5년 주기로 출간된 『제국』(2000[한국어판 2001]), 『다중』(2004[2008]), 『공통체』(2009[2014])의 작업을 반복·계승하면서도 그것을 새로운 현실에 맞게 진화시킨다. ‘아랍의 봄’과 ‘월가 점거’라는 급박한 정세에 맞게 소책자로 발표한 『선언』(2012[2012])을 포함하는 5부작 혹은 4+1부의 전체(하지만 완료되지 않는) 저작은 공통의 기획에서 발간되어 왔다.

『어셈블리』는 영미권(assembly), 독일어(assembly), 스페인어(Asamblea), 이탈리아어(Assemblea) 등으로 번역되고, 미국/프랑스/독일/스페인/이탈리아/중국/일본/캐나다 등 전 세계 여러 나라에서 출간되었다. 한국에서는 지금까지 20여 종이 넘는 그들의 이전 저서들이 출판되어 있다. 독일어로 번역된 『assembly』에는 “새로운 민주주의 질서”라는 부제가 달려 있으며, 이탈리아어로 번역된 『assemblea』에 달린 설명은 “현재와 미래의 풀뿌리운동을 위한 정치 및 경제 조직에 대한 기본 가이드”이다.

이 저작들에 대해서 ‘아래로부터 본 제국의 역사’, ‘21세기 절대민주주의의 구성 기획’, ‘탈근대 코뮤니스트 선언’ 같은 이름을 부여할 수도 있는데, 이는 5편의 저작 모두 근대의 별종들인 마키아벨리, 스피노자,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그 개념들을 밑바탕으로 공유하기 때문이다.(옮긴이 해제 참조) 4+1부작은 각각 독립된 주제를 다루지만, 자세히 보면 바로 이전 저작에서 제기한 문제를 새로운 정세 속에서 반복, 변형, 추가시킴을 알 수 있다.

이 공통주의(commonism)의 옹호자들은 이 책에서 다시 한번 사회 발전에 있어서 가장 문제적인 지점들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제공한다. 중심 이슈는, 그토록 많은 이들의 요구와 욕망을 표현하는 사회운동들이 어째서 새롭고 진정으로 민주적이며 정의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실패해 왔는가이다. 저자들이 제시하는 많은 명제와 개념들이 그렇듯이, 문제제기의 노선 자체가 이미 논쟁적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우리는 리더십과 제도의 문제를 대면해야 하며, 과감히 다중의 기업가 정신(the entrepreneurship of the multitude)을 상상하고, 낡은 말들을 전유해서 그 의미를 역전시켜야 한다.

한국의 독자들을 위해 네그리와 하트는 <한국어판 서문>을 추가하여 써주었다.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이해와 함께 그에 맞는 조언도 부가하였다. 다음은 책에 수록된 <한국어판 서문>이다.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

한국어판 저자 서문

미완의 사업

『어셈블리』는 2011년에 모습을 드러낸 새로운 투쟁들의 순환에서 영감을 받았다. 주자들이 전속력으로 달리고는 기진맥진하며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기는 올림픽 육상 계주처럼, 투쟁들은 전 지구를 가로질러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이어졌다. 권위주의 체제에 맞서 싸운 튀니지와 이집트의 투쟁들에서 시작해, 북아프리카와 중동, 스페인, 그리스로, 그리고 미국의 월가 점거로 뻗어나갔다. 그에 뒤이은 시기에는 투쟁들이 전 세계의 여러 나라들, 브라질, 터키, 홍콩 등으로, 그리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블랙라이브스매터로 출현했다. 2016-2017년 박근혜 정부에 맞서 일어난 한국의 촛불투쟁 역시 이 순환에 중요하면서도 강력한 기여를 했다. 그리고 순환은 지금도 계속된다.

물론 이 투쟁들 각각은 독특하며, 국지적이거나 일국적인 상황과 연관된 특수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적어도 두 가지 결정적인 속성을 공유한다. 첫째, 이 투쟁들은 모두 (공공연하든 암묵적이든) 우리가 새로운 민주주의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시위로는 충분하지 않다. 트럼프의 미국, 에르도안의 터키, 푸틴의 러시아, 보우소나루의 브라질 등과 같은 반동적인 정부와 마주할 때, 물론 저항이 본질적이고 필수적이지만, 또한 우리는 해방으로 향하는 대안적인 길을 기획하고 창출해야 한다. 이 대안의 한쪽 면에 민주주의에의 요구가 있다.

우리가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다고 오랫동안 얘기 들었지만, 그것이 진실이 아님을 아주 잘 알고 있다. 2011년 스페인의 인디그나도스들은 “진짜 민주주의는 이제부터!”라고 요구함으로써 이러한 거짓을 돌파하고자 했다. 그들의 슬로건은 적어도 현재 우리의 민주주의가 진짜가 아님을 지시한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이것은 과거의 어떤 민주주의를 되찾는 문제가 아니며, 대신 우리는 오늘날의 시대에 맞는 민주주의 사회를 발명해야 한다. 사실 우리의 기존의 정치적 어휘들인 민주주의, 자유, 평등과 같은 개념들 대부분이 부패했기 때문에, 새로운 개념들을 창출할 필요가 있다. 지난 세기의 사회적 투쟁들은 이러한 방향에서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새로운 민주주의를 요구한 것만으로도, 그것이 무엇이 될지 우리가 아직 정확하게 표명할 수 없을 때조차, 이미 위대한 한걸음을 내디딘 것이다.

이 운동들이 전 지구에 걸쳐 공유하는 두 번째 결정적인 속성은 그것들 모두가 다중의 투쟁이라는 점이다. 실제로 다중의 투쟁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와 강하게 중첩되어 있다. 이 운동들은 중앙집중화된 리더십을 가지지 않으며, 그 안에는 다양한 요구를 제기하는 광범위한 사회적 주체들이 포함되어 있다. 추상적인 언어로 말하자면, 이 운동들은 오늘날 유일한 정치적 지평은 다양성이라고 선언한다. 실천적인 의미에서 운동들은 새로운 민주주의 형태들을 실험함으로써 조직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모두가 모이는 총회總會, general assembly야말로 이 새로운 민주주의 형태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다.

하지만 운동들의 다양성은 보다 심오한 사회적 분석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계급투쟁 개념이 다양성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어떻게 새로이 해석되어야 하는지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운동들의 다양성을 계급투쟁의 재발명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노동계급은 획일화된 통일체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어떤 이상적인 노동자 유형으로 대표되어서도 안 된다. 대신 노동계급은 공장 노동자, 무급 가사노동자, 불안정 노동자, 그리고 불법적인 노동 착취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에 이르는 엄청나게 다양한 노동의 형상들로 채워져야 한다.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 투쟁과 반자본주의 투쟁은 페미니즘, 반인종차별, 탈식민주의, 퀴어, 장애인 차별 반대 등 다른 지배의 축에 맞서는 투쟁과 같은 기반 위에서 함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다중의 개념과 실천은 미국의 흑인 페미니즘의 이론적 실천에서 연원하는 교차성 분석 및 실천과 밀접하게 연결되며, 실제로 그에 힘입은 바가 크다. 이런 식으로 다양성의 정치를 구축하고 실행하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지만, 바로 그것이 지난 세기들의 사회운동들, 다중의 투쟁들이 시도하고자 했던 것이다.

『어셈블리』에서 우리는 운동들의 정치적 발전과 민주적 협치 구조를 향한 잠재력을 분석하고, 이에 더해 경제적·사회적 조건들이 민주주의적 미래의 씨앗을 배태하는 방식을 탐구한다. 가령 분석 중 일부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공통적인 것의 확장을 탐구하고, 그래서 그것이 사적 소유의 지배(그리고 모든 것을 사유화하려는 신자유주의적 광기)를 무너뜨리고 전복시킬 잠재력을 갖는 방식에 대한 탐구를 포함한다. 이러한 분석에서 한 가지 중요한 목적은 민주적 의사결정을 진정으로 해낼 수 있는 사회적 주체들이 오늘날 출현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회적으로 가장 중요한 의제를 함께 결정할 수 있는 사회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 있다. 물론 우리의 분석의 다른 목적에는 그러한 민주적 해방 과정의 길에 놓여 있는 모든 장애물들을 인식하는 것도 있다. 이를 위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자유주의의 구조들과 오늘날의 자본주의적 지배, 특히 자본이 다양한 추출 형태 및 금융 메커니즘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고 착취하는 방식을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이 형태를 바꿀수록 우리의 반자본주의 투쟁 또한 변화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난 세기에 일었던 다양한 다중의 투쟁들을 존중하지만, 다양성 자체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인식한다. 이것은 우리가 전통적인 정치적 형태인 통일성이나 중앙집중화로 회귀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들이 조직화되어 효과적이면서 오래 지속되는 정치 세력이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때로 이것은 연대, 연합, 수렴의 형태를 취한다. 가령 반자본주의 투쟁들은 페미니즘 투쟁들 및 반인종주의 투쟁들과의 공감sympathy을 표현해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의 목적이 실제로 수렴한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즉 가부장제나 백인 우월주의 그리고 다른 지배의 축들 또한 공격하지 않는다면 자본은 결코 도전받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지배 형태들은 실제로 서로 맞물려 있고, 서로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직된 다중들은 현재 우리의 다양한 정치적 욕망을 고려하여 대항권력이나 이중권력과 같은 공산주의 전통에서 쓰던 핵심 개념들 중 몇 가지를 재발명해야 할 것이다. 오늘날 해방으로의 길이 경유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조직화 과정이다.

근래에 있었던 다중의 투쟁들에 공감한 목격자들, 그리고 심지어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조차 투쟁의 결과를 두고는 낙담하곤 한다. 운동들이 많은 경우에서 극劇적인 정치적 변화(심지어 독재자 타도와 같은)를 만들어냈지만, 그것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몇 년 뒤에는 다시 억압 장치가 돌아와 있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을 실패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무엇보다도 실패라기보다 차라리 패배라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진단이다. 그러한 투쟁들 모두와 맞서는 억압 세력들이 경찰 폭력, 비밀정보 작전, 정치적 탄압 등을 가하면서 반대편 극단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러한 극적인 역사적 과정의 끝이 아니라 중간 지점에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중의 투쟁들은 좌절되고, 한동안 지연될지언정 중단되지 않을 과정과 욕망을 가동시키고, 촉발시켰기 때문이다. 운동들은 미완의 사업unfinished business이며, 머지않아 세계 전역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시작했던 것을 완성하려고 거리에 설 것이다. 우리는 한국의 활동가들이 이 과정에 앞장서길 진심으로 바란다!

2020년

마이클 하트, 안토니오 네그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