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치은 장편소설, <마루가 꺼진 은신처> 발문
발문
매력적인 악몽의 세계
강영규(출판편집인)
한 번쯤 그런 적이 있지 않나. 분명 악몽인데 꿈속 이야기가 흥미로워 깨어나고 싶지 않았던 적이. 혹은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가도 중단된 이야기가 궁금해 다시 잠을 청했던 적이. 이치은의 소설을 내 식대로 말하자면 이런 매력적인 악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제로 그는 꿈을 테마로 삼거나 주요 소재나 장치로 활용하는 작품을 여럿 쓰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악몽이고 무엇이 매력적인가? 그것에 답하려면 우선 꿈 이야기에서 시작해야 하겠다.
꿈이란 그 자체로 독특한 생리 현상이자 정신 활동이다. 이성과 합리의 일과를 마치고 몸과 머리가 완전히 휴식에 들어가면 비로소 시작되는 꿈에서는 그 몸과 마음의 주인이 평소의 의식 상태라면 떠올리지 못했을 이야기가 풀려져 나온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는 누구인가? 오랫동안 몸과 마음의 밖에 있는 초월적 존재를 상정했던 우리는 20세기가 되어서야 이 질문에 무의식이라는 답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꿈을 통해서 현실에서 억압된 여러 욕구가 가상적으로나마 해소되어 우리를 다시 정상의 삶으로 돌려보낸다는 설명도 듣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답은 우리의 궁금증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어쩌면 인류에게 픽션(fiction)이란 일회성의 꿈을 보존하여 의식 상태에서도 경험하기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일지도 모른다. 물론 꿈꾸기와 소설 읽기는 사뭇 다른 행위다. 전자가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몸과 마음이 수동적인 상태에서 경험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두뇌가 각성된 상태에서 여러 인식 기능이 결합되어 벌어지는 능동적인 의식 활동이다. 이치은 소설의 매력은 두 극단의 차원을 효과적으로 연결하는 데 있다. 진짜와 가짜, 참과 거짓, 실제와 허구가 뒤섞이는 그의 이야기는 편집자에게 ‘리얼 판타지’라는 명칭을 만들어 붙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판타지가 현실에서는 도저히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을 있음직하게 그려내는 것이라면, 그 효능은 우리의 상상력을 강화하고 개연성의 굴레에서 풀려나게 함으로써 이성과 합리의 규칙을 의심케 하고 현실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해 주는 것이다. 니체의 말처럼 확신이야말로 거짓보다 더 위험한 ‘진실의 적’이니까. 하지만 판타지가 그저 허황된 몽상에 불과하다면 혹은 말초적인 재미를 좇는 데 그친다면 이는 실패한 판타지가 된다. 대체로 외양상으로 기발한 설정과 묘한 인물을 내세우지만 그 이야기의 내부는 현실 세계의 고정관념을 답보하는 경우가 그렇다.
『마루가 꺼진 은신처』는 일급 킬러 ‘나’가 암살 의뢰를 수행하는 사흘간의 행적을 뼈대로, 그 수행 과정에 연루된 인물들의 짧은 사연을 모자이크식으로 엮은 이야기다. 이 인물들의 사연 속에서 또 다른 인물들이 꼬리를 물며 등장해 충돌하고 굴절하며 점점 이야기의 그물코가 촘촘해진다. 우리는 서사의 결말에서 매끈하게 짜인 그물의 완성을 보고 싶게 마련이고 그것이 미스터리 장르의 관습적 규칙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세 번의 변주와 다성음악적 구성을 통해 그물의 완성을 계속 늦춤으로써 독자의 기대를 배반한다.
주인공 킬러를 포함해 수많은 조역들은 모두 비슷한 딜레마를 갖고 있다. 1) 누군가로부터 수수께끼 같은 일을 제안받는다, 2) 그 대가는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요긴한 물질적 보상이다, 3) 그 일을 수행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사태는 뜻하지 않게 흘러간다. 여기서 실제의 우리 삶이 이 같은 우연과 필연, 선택과 강제, 의심과 맹목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음을 연상하는 것이 아주 엉뚱하지는 않겠다. 이 소설이 이야기의 완성을 ‘목격’하려 달려나가는 우리의 욕망을 잡아끌어 다른 방향으로 ‘사유’하게 만드는 예술적 힘이 여기에 있다.
그 힘은 많은 부분 정교한 구성에서 연유한 것 같다. 앞서 다성음악이라는 비유를 썼지만 주제의 제시와 전개(‘소멸’), 이어지는 변주(‘시도’)와 종결(‘은신처’)은 소나타나 카논이라는 악곡 형식을 떠올리게 한다. 내친 김에 이 소설의 제목이 어어부프로젝트 사운드 2집 『개, 럭키스타』의 열다섯 번째 트랙에서 왔음을 기억해 보자. 지금 다시 꺼내 들어도 감탄할 만한 실험성으로 무장한 이 앨범의 발매와 이치은의 데뷔 연도가 겹치는 것도 독자/청자로서는 재미난 우연이다.
그 20년간 작가의 주된 관심이 꿈과 기억, 언어의 영역을 오가며 경계를 넓혀갔지만 ‘이치은 시그내처’라고 할 만한 독특한 문체가 일관되었음도 언급할 필요가 있겠다. 대체로 서사의 전개에 필수적인 진술 외에 부가적인 감정 표현을 자제하는 그의 문장은 묘한 리듬감과 군데군데 삽입한 잠언 투로 마치 산문시와 같은 느낌을 준다. 이는 기본적으로 추리소설의 질감을 유지하는 동시에 어느 순간 이야기가 현실의 맥락을 떠나 환상의 차원으로 이동하는 데 기여하기도 한다.
그 결과 네덜란드 화가 에셔(M.C. Escher)의 회화처럼 현실과 환상이 공존하는 장면을 보는 듯한 체험을 제공한다. 잘 알려진 ‘그리는 손’이나 ‘상승과 하강’ ‘위와 아래’ 같은 에셔의 그림은 언뜻 보면 정상적인 이미지가 곰곰이 뜯어보면 상식에 위배되는 것임을 드러낸다. 이는 상식에 기반한 우리의 관념이 얼마나 위태로운지 반어적으로 드러내기도 하고, 나아가 상식/비상식, 정상/비정상이 대립 관계가 아닌 상보 관계일 수 있음을 증명한다.
『마루가 꺼진 은신처』에서도 각각의 인물이 처한 기묘한 상황은 현실 맥락에서 그들의 절박한 사연과 더불어 환상 차원에서 전개되는 고투와 절망적 결말이 이어지면서 개연성을 뛰어넘는 한층 깊은 이해와 공감으로 다가간다. 물론 이때의 이해와 공감은 지금까지 우리가 체험했던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다. 이치은 소설에서 환상이라는 장치가 그저 이야기의 재미를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는 또 다른 예술적 힘을 가지는 이유다.
1998년 장편소설 『권태로운 자들, 소파 씨의 아파트에 모이다』로 혜성같이 등장한 이래(이 작품은 스물여덟 살의 작가에게 ‘오늘의 작가상’을 안겼다) 세간에 좀처럼 모습이 비치지 않았던 그는 지금까지 총 다섯 권의 장편소설과 한 권의 소설집을 냈다. 여기에 신작과 미공개 장편까지 묶여 데뷔 20주년 기념 ‘이치은 컬렉션’으로 우리 앞에 그 전모를 드러낸다고 한다. 그렇게 20년 전 우리를 찾아온 혜성은 거대한 타원형 궤도를 따라 조용히 그러나 맹렬히 전진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