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을 도서관에서 어렵게 빌려 읽었다. 절판된 책이라 구할 수도 없고, 도서관에서도 대기 순서를 기다려야 했다. 이런 책은 아무리 코엘료의 소설이라지만 지나치게 종교색이 짙은 터라 일반 출판사가 꺼릴 수 있겠다. 하지만 나 같은 사람, 일종의 신앙간증 비슷한 이야기에는 별로 관심없고 지나치게 은혜로운 내용에도 살짝 거부감 생기는 사람이라면, 이런 소설이 오히려 훌륭한 신앙서적이 된다.

 

소위 엘리야의 피로, 라는 말이 있다. 내 한 몸, 혹은 가족을 위해 잘 살자고 몸 부서지게 일하는 사람이 아닌, 공동의 이익이나 진실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에게 한순간 후폭풍처럼 밀어닥치는 고통이다. 그걸 피로라고 표현했다. 

 

탈진 증후군, 혹은 Burn-out syndrome. 

 

나 좋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헌신을 한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그들은 사회적으로 이해받지 못한다. 심각한 고립 속에서 자기 한계에 대한 절망 같은 것이 버무려져서 탈진된다고 한다. 엘리야가 이스라엘의 이방인 왕비 이제벨의 탄압에 쫓겨 다니며 느꼈다 해서, 명명된 것이다.

 

소설에는 그렇게 이스라엘에서 쫓겨나 한 과부의 도움으로 살아나는 데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과부는 집에 있는 밀가루 한줌과 기름 조금으로 빵을 만들어 엘리야의 목숨을 구했는데, 성경에는 그 빵의 재료가 다름아닌, 과부가 아들과 그걸 먹고 죽으려던 남아있는 식재료였다. 먹고 죽으려던 걸 탈탈 털어서 엘리야에서 주고, 그들은 빈 속으로 죽을 셈이었을까. 성경을 보면서도 그게 어떤 마음에서였을까, 궁금했다. 성경에서는 그 과부의 희생으로 그 후 단지에 밀가루와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걸로 기억하는데, 여기선 그런 기적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이루시는 하느님의 기적을 이야기한다.

 

나는 기적을 바라는 사람은 아니었으나, 응답은 늘 구했다. 하지만 그 응답이라는 게 늘 속시원하지도 않고 제깍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왜 신앙을 가지는 건가 싶을 만큼 침묵을 견뎌야 한다는 걸, 살면서 터득했다. 그러니 남는 건 늘 하나다.

 

왜 신앙을 가지는 것인가.

 

엘리야는 사랑하는 여자를 잃는다. 죽지 않은 게 의아한 고난을 겪는다. 말도 안 되는 선택을 요구받는다. 내게 뭘 원하는 겁니까, 물어보고 싶은 상황들이 엘리야를 고독하게 한다. 차라리 죽음 앞에서는 차분해지며 다 내려놓았다가도, 이제 살 수 있는 건가 싶은 대목부터는 살 떨리게 두려워지는 게 삶이라는 걸, 엘리야는 깨닫게 된다. 아니 그건 내 몫.

 

나는 요즘 예레미야를 읽고 있다. 이 예언자가 얼마나 내 가슴 속에서 고독을 일러주는지 모른다. 가끔 나는 운전을 처음 배워 코스시험을 보던 때를 기억하는데, 창문 꼭 닫아놓고 나 혼자 운전대 앞에 앉은 느낌이 바로 그거라고 생각한다. 내 삶을 내가 끌고 가야 하는데, 일러주는 소리 하나 없이, 연습과는 달리 너무나도 허술하게 대충 만들어진 코스를 끌고가야 하는 두려움. 하느님의 소리라는 것만 들리지, 나를 응원해주는 소리라는 건 아무리 귀씻고 찾아봐도 들리지 않는 상황에서 예레미야는 차라리 하느님과의 끈을 끊고, 그와 같은 존재인 사람의 위로를 받고 싶은 때가 없었을까...

 

엘리야가 어떻게 하느님의 뜻과 일치하게 되었는지, 소설은 엘리야의 처절한 고독과 절망을 통해 이야기한다. 그 고독과 절망은 웬만해선 피하고 싶은 것이나,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게 있다. 또 피할 수 없어서 그대로 받아들여 그걸 다 지나고 나면, 피하든 피하지 않든 나는 겪어야 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응답을 구한다면서 내내 나 혼자 떠들 때가 있다. 고요히, 기다리는 것. 

 

내일 우연히도 부활대축일이다. 고요히, 기다리는 건, 오늘의 몫이라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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