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스!
햐쿠타 나오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3월
평점 :
절판


아이과 어른의 차이들을 주절주절 늘어놓은 글에서, 이런 구절이 있다.

아이는 얼른 어른이 되고 싶어하며, 어른은 다시 아이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사실 나는 어른이면서도 이 구절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시 아이로 돌아가서 살아온 만큼 또 살아야 하다니!

끔찍해, 혹은 귀찮아, 라고 혼자서 덧붙였다. 창피하게도 말이다.

 

한데 이 소설을 읽고 나서는 이렇게 눈부신 젊음을 가진 그들이 부러웠다.

(이 대목에서는 나도 정말 어른인가!)

내가 돌아가봐야 권투를 할 리는 없지만,

순수한 우정과 뜨거운 열정이 벅차도록 겹치고 어우러지는

그들의 시간이 눈물이 나도록 눈부셨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실패의 두려움을 모르는 이,

한 번도 남에게 주먹을 던져본 일 없으며 언제나 주먹세례나 받던 이,

권투가 사람을 처절하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걸 알아 언제나 신중하게 링에 오르는 이,

내 눈을 잃은 것보다 제자의 기억이 사라진 데서 절망을 느끼는 이,

권투 속에서 움직이는 이들이 이 책 안에 모여 있다.

그들 안에서 사람의 놀라운 투지를 건져내고,

평생 발견하지 못한 채 사라지는 재능을 끌어내고,

공포를 오히려 눈을 감지 않고 이겨내는,

그런 소설이다.

 

소설을 한참 읽다가 연필을 꺼내들었다.

그냥 죽죽 읽어갈 만큼 호흡이 빠른 소설이라 연필을 들지 않고 싶었지만

끝내 줄을 긋고 싶은 문장들이 귀찮은 손을 움직이게 했다.

 

"야생동물은 한번 몸에 밴 공포를 씻어내지 못해요.

인간이 호랑이나 사자를 조련할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호랑이도 한번 몸에 밴 공포는 극복할 수 없군요."

"뒤집어 말하면 고등동물이기 때문입니다.

악어나 독사에게 새로운 공포심을 심어줄 수는 없죠."

"그러면... 인간도 공포를 극복하는 건 무리인가요?"

"아뇨. 인간은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방금 생존본능에 따라..."

"그러니까 인간을 대단하다고 하는 거죠.

야성적인 본능을 의지력으로 극복할 수 있으니까요.

그 점이 인간과 다른 고등동물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하기야 그러려면 진짜 정신력이 강인해야겠지만요."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 건가요?"

"글쎄요, 그건 사람마다 다르겠죠."

 

글쎄, 마지막 말마따나 이 대목은 사람마다 다르겠다.

한데 요즘 급격히 두려워하는 내게는

이 말이 정말 고마웠다.

복스, 는 사각링에서만 하는 게 아니니까.

살아가며 겪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것도

나 같은 유약한 복서가 해야 하는 것.

 

제목을 쓰고 나서, 다시 덧붙인다.

이 책의 결말도 무척 흥미롭다.

링에서 맞붙어 싸우던 이들이 십 년 후 어떻게 살아냈는가, 를

확인할 수 있으니까.

링에서 마지막처럼 싸우던 이들은 각자의 길을 걸었다.

그러니 소설은 참 따듯한 위로제다.

모든 것이 다 지나간다는 걸,

가장 치열하고 뼈아팠던 순간들도 사실은 지나가고 말 뿐이라는 걸,

소설은 그 어떤 과학적인 사실들보다 에둘러, 하지만 정확히,

말해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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