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왜 교회를 떠났을까?
정숙희 지음 / 홍성사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오랜 전부터 정숙희 기자의 칼럼들을 읽어 왔었는데, 이렇게 책으로 만나게 되니 무척이나 기쁘다. 칼럼을 읽을 때마다  항상 느낀 점은 예리하면서도 정곡을 찌러는 날카로움을 느낄 수 있었는데, 책에서도 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해 어떤 것도 타협하지 않으려는 고독하면서도 완고한 의지를 찾을 수가 있다. 어떻게 보면, 진리를 위해서라면 이와 같이 비록 자신에게 불이익과 어려움이 닥친다하더라도 거기에 굴하지 않고 이 세상의 교회를 향하여 개혁의 소리를 외쳐야한다고 생각되어 진다.

예수님께서도 공생애 중에서 예루살렘 성전이 대 제상장들과 종교지도자들에 의해 더렵혀지고, 시장 바닥으로 전락되었을 때 혈혈단신으로 그들에게 진리를 선포하심으로 외로운 싸움을 하셨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490여 년 전에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해에도 거대한 로마가톨릭에 대항하여 혈혈단신으로 외로운 싸움을 했던 마틴 루터 또한 주님의 마음으로 진리를 위하여 자신의 전 생애를 받쳤다. 이처럼 교회가 교회답지 못하였을 때 주님처럼 혈혈단신으로 교회를 대상으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정숙희 기자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한다.

성경에서 교회의 본질적인 근거를 두고 있는 곳이 있다면 사도행전 2장 43절~47절까지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오는 말씀을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면,

교회 공동체는 1)예배 공동체이다. 그리스도인의 본분은 우리를 불러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와 찬양으로 구성된 거룩함과 경건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교회에서 예배는 예배가 흔들리면 교회의 본질이 흔들릴 만큼 초석이 된다. 그런데 요즈음에 와서는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기 보다는 "보고", "느끼고"라는 인간 중심의 감정에 따라 다양한 예배가 창출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교회 공동체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는 듯하다.

2)교제의 공동체이다. 교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예배 만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교제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외에까지 그 확장성을 띠고 있는데, 지금의 교제의 모습을 본다면, 끼리끼리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만 머무는 우를 범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 안에서만의 사랑을 논하고 있는 실정이다.

3)봉사와 선교 공동체이다. 교회는 지역 사회에 대한 복음의 통로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지역과 주변을 섬길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까지 확장되는 복음의 통로이다. 그런데 봉사와 선교는 사라지고, 교회 건축을 "성전건축(?)"이라는 명목하에 교회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변질시키고 있다. 심지어는 교회 건축의 이름 하에 예수님을 세상의 빚쟁이(?)로 만들고 있는 실정이니 어떻게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나님 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제대로 된 성전이 없어서 한탄하셨는가? 우리가 성경을 오해하고 있는 것은 교회가 곧 건물로 착각하고 있다. 진정한 성전되신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 있음으로 우리가 참된 성전인데, 왜 건물에만 집착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성경에서 말하고자하는 교회의 의미를 제대로 알았다면, 우리는 이러한 오류를 행하지 않았을텐데.....

이렇게 크게 3부분으로 성경에서 말하고자 하는 교회가 어떠한지를 생각해 보았다. 이 책에서도 이러한 교회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 말하고 있는 듯하다. 이 책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느낀 것은 교회가 교회답지 못할 때 세상을 개혁해야 할 교회가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해 버리는 상황에 처해 있지 않나? 생각해 본다. 마이클 그리피스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교회"라는 책을 통해서도 교회의 본질을 잊어버려 잠자고 있는 교회를 향하여 외쳤던 것처럼 이 세상에서도 잠자고 기억상실증에 걸린 교회를 다시 깨우는 세례 요한의 외치는 소리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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