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유희에 더라여, 책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유희 활동도 제공할 수 없는 독보적인 유희가 있다. 그것은 추상적인 관념을 다루는 즐거움이다. 오로지 언어만이 관념을 규정하고 설명하며 전달한다. 인간이 언어를 사용한 때부터 폭발적으로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도 이런 특성 때문이다. 물론다른 여러 가지 유희 활동은 다양한 감정을 체험하게 해주지만,
그 감정을 규정하고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주는 도구는 언어뿐이다. 직접 체험되는 감정은 언어로 그 형태를 갖출 때만 사유의계기가 된다. 언어만이 다룰 수 있는 고도의 추상성은, 도달하기어려운 만큼 그에 값하는 큰 재미를 선사해준다.
- P53

다만 한 시간에 책 한권을 독파하겠다거나 올해 500권의 책을 읽겠다거나 하는 목표보다는, 매일 읽겠다‘는 목표가 여러분을 더욱 충실한 독자로만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 P68

책에 인생의 진리 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다. 대신 책은 사유를 확장시키고, 자신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여러 의견들을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준다. - P68

테드 창의 책에서 짜릿함을 느끼는 이유는 그의 뛰어난 상상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소설 전반에 흐르고 있는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통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외계인이 아무 예고 없이지구에 왔을 때 그들과 의사소통하는 인간의 능력을 믿고, 믿음을 잃은 이에게는 믿음의 상실 자체가 최고의 저주일 수도 있음을 말하고, 초월을 항해가는 인간은 결국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음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메시지들은 결코 소설의 주제로 먼저 주어지지 않고, 서사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그리고 이 서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테드 창이 깔아놓은 톱니바퀴와도 같은 설정들이다. - P80

 지적인 상상력, 정교한 설정, 깊은 통찰, 그리고 서술 방식까지 온전하게 완결된 작품을 만나볼 수 있는 것은현시대를 살아가는 독자의 복이다. 
* 테드 창 소설에 대하여 - P81

베리트, 비비 보켄, 마리오 브레자니와 함께 지하실에 있는동안 나는 기적을 체험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책이 어떤건지 이해하게 된 것이다. 한 권의 책이란, 죽은 자를 깨워다시 삶으로 불러내고 산 자에게는 영원한 삶을 선사하는작은 기호들로 가득찬 마법의 세계다.
요슈타인 가아더, 《마법의 도서관》中 - P211

곧장 소설의 본문으로 직행해도 될 것 같은데 굳이 가상의 인물이 쓴 서문을 넣어 앞으로의 내용은 내가 읽은 책의 내용을옮긴 것이다.‘ 라고 말하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현실과 가상의 봉제선을 정교하게 감추기 위해서다(파묵은 1986년에 쓴 작가 후기에서 이 방법을 스탕달의 이탈리아 이야기》에서 배웠으며, 나중에 쓸 역사소설에서도 파룩을 계속 이용하기 위해, 그리고 독자들을 난데없이 역사 속으로 들여보낼 때의 당혹감을 줄이기 위해 썼다고 밝히고 있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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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바다를 볼 때 이제 우리 눈에는 바다 외에 다른 것도 담길 것이다. 가만히 있어라는 말 속엔 영원히 그늘이 질 거다. 특정 단어를 쓸 때마다 그 말 아래 깔리는 어둠을 의식하게 될 거다. 어떤 이는 노트에 세월이란 단어를 쓰려다 말고 시간이나 인생이란 낱말로 바꿀 것이다. 4월 16일 이후 어떤 이에게는 ‘바다와 여행이,
나라와 의무가 전혀 다른 뜻으로 변할 것이다. 당분간 침몰과 ‘익사는 은유나 상징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본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본 것이 이제 우리의 시각을 대신할 거다. 세월호 참사는 상像으로 맺혔다 사라지는 게 아니라 콘택트렌즈마냥 그대로 두 눈에 들러붙어 세상을 보는 시각, 눈 자제로 변할 것이다. 그러니 바다가 그냥 바다가 되고 선장이 그냥 선장이 될 때까지, ‘믿으라는 말이 믿을 만한 말로, 옳은 말이 맞는말로 바로 설 때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걸까. 지금으로서는 감도 오지 않는다.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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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후로 몇 달 동안양타기 시합에 나가는 꿈을 꾸었다. 1초만 더 버텨, 릴리는 양의 등에 탄 자신에게 말했다. 그냥 버티는 거야. 그 28초 동안 릴리는 글자 연습장을 쓰고 심부름을 하고 어른들 명령을 따르면서 하루를다 보내는 조그만 여자애가 아니었다. 그 28초 동안 릴리의 삶에는명확한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성취할 명확한 방법도 있었다.
만약 나이가 더 많았다면 릴리는 그 기분을 해방감이라고 묘사했을 것이다.
- P143

릴리를 등에 태운 물소는아늑하고 안정감 있게 나아갔다. 릴리가 조그마한 아이였을 때 목말을 태우고 다니던 아빠처럼.
릴리는 주뼛거리다가 씩 웃었다. 그러고는 사과하는 뜻에서 물소의 목덜미를 살짝 다독여 주었다.
힘을 빼고 편하게 앉아서, 길은 물소가 알아서 찾아가도록 맡긴채로, 릴리는 논에 줄지어 늘어선 벼가 옆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P144

"서예, 나는 아이들에게 붓으로 한자를 쓰는 법을 가르치네. 그래야 아이들이 괴발개발 쓴 글씨로 온 세상을 공포에 빠뜨리지 않을테니까. 조상의 영령과 떠도는 귀신들까지 포함해서."
- P148

"나는 파자점(破字占)술사야."
"뭐, 뭐라고요?"
"우리 할아버지는 사람 이름의 한자랑 그 사람이 고르는가지고 운세를 점쳐 줘." 테디가 설명했다.
- P148

"중국인은 점술의 일환으로 문자를 발명했어. 그래서 모든 한자는 그 속 깊숙한 곳에 마법이 깃들어 있지. 나는 한자를 토대로 사람의 고민을 읽어 내고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다네. 자, 어떻게 하는 건지 보여 줌세. 낱말을 하나 떠올려 보게. 아무 낱말이나."
- P148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국에 깃든 진짜 마법을 몰라. 자네는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아나?"
"아니요."
"미군이 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때, 미군 병사들은 한국군 병사가미국이라고 말하는 걸 자주 들었다. 그들은 한국군이 영어로 ‘미(me), 국(gook)‘이라고 하는 줄 알았지. 하지만 한국군은 사실 미국 사람 이야기를 하는 거였어. 미국은 ‘아메리카‘를 뜻하는 말이거든. 국은 한국어로 ‘나라‘라는 뜻이고, 그래서 미군 병사들은 아시아인을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어떤 의미로는 사실상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 P152

"릴리 양." 간 선생은 일어서서 엄숙하게 릴리와 악수했다. "중국에서는 나이 차가 크게 나는 친구 사이를 가리켜 ‘망년지교(忘年之交)‘라고 하네. 나이를 잊은 우정이라는 뜻이지. 우리가 만난 것은운명이야. 아무쪼록 나와 테디를 언제나 친구로 여겨 주면 좋겠네."
- P153

"마법이 깃든 말은 오해받는 경우가 많지. 그 아이들과 자네가 다같이 ‘국‘을 마법의 말로 여겼을 때, 그 말에는 일종의 힘이 깃들었어. 허나 그 힘은 무지에 기반한 헛된 마법이었네. 마법과 힘이 깃든말은 그것 말고도 많지만, 그런 말을 쓰려면 먼저 사색과 사유가 필 - P164

내가 다른 종류의 마법을 깨닫기 시작한 게 바로 그 무렵이었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어. ‘일본은 위대하고 중국은 약해 빠졌다. 일본은 동아시아 전체가 번영하기를 바라므로 중국은 일본의 뜻을 받아들여 항복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말이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본‘이 무언가 원하는 게 가능할까? ‘일본‘이나 ‘중국‘ 같은 것은존재하지 않아. 그건 그저 낱말일 뿐, 지어낸 것일세. 일본 사람 한개인이 위대할 수는 있겠지. 중국 사람 한 개인이 뭔가 바랄 수도있을 테고, 하지만 ‘일본‘이나 ‘중국‘이 무언가 바라고, 믿고, 받아들인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나? 나라 이름 같은 건 다 공허한 낱말일세, 신화일 뿐이야. 그런데 그 신화에는 강력한 마법이 깃들어 있어서 희생을 강요하지, 사람을 양처럼 살육하라고 강요하는 거야.
- P171


"이건 ‘의‘라는 한자일세. 전에는 옳음‘을 뜻하는 글자였는데, 지금은 무슨 무슨 ‘주의‘를 뜻하는 낱말에도 쓰이지. 공산주의, 민족주의, 제국주의, 자본주의, 자유주의 같은, 이 한자는 자네도 아는 위쪽의 ‘양‘과 아래쪽에 있는 ‘자신‘을 뜻하는 한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졌네. 사람이 제물로 바칠 양을 들고 있는 모습이지. 이 한자 속의사람은 진실과 정의가 자신에게 있다고, 따라서 세상을 구할 마법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있어. 우습지, 안 그런가?
- P172

타이완인은 대부분 몇 세기 전 중국의 푸젠(福建] 지방에서 건너온 이민자의 후손이라네. 1885년 일본이 중국에게서 타이완섬을넘겨받은 후, 일본인들은 오키나와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섬을 일본화하려고 했어. 그래서 타이완 현지 출신인 번성런[本省人]을 일본 천황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만들려고 한 거야. 수많은 타이완인이 전쟁 중에 일본 군복을 입고 싸웠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후에 타이완은 중화민국으로 반환됐지, 이때 공산당에 패한 국민당군대가 타이완섬으로 건너오면서 새로운 이민자들이 물결처럼 밀려왔네. 그들이 바로 와이성런[外省人]이야. 번성런은 좋은 일자리를 독차지한 국민당계 와이성런을 미워했고, 국민당계 와이성런은전쟁 중에 동족을 배신하고 일본을 위해 싸운 번성런을 증오했네.
어느 날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길거리에 군중이 모여들더군, 타이완 방언인 민난[]어로 소리 지르는 걸 보니 번성런들이었어.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을 일일이 멈춰 세워 말을 걸고는 표준중국어로 대답하는 사람은 와이성런으로 몰아 두들겨 됐네, 이유는따지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그들이 원하는 건 피였어, 나는 무서워서 계산대 밑으로 숨었네."
- P174


"무리‘를 뜻하는 군‘이라는 한자는 왼쪽에 귀한 사람‘이라는 뜻의 글자가 있고, 오른쪽에는 ‘양‘이 있네, 군중이란 바로 그런 걸세.
자신들이 고귀한 대의를 수행한다고 믿고 늑대 무리로 변신한 양떼인 거야.
- P175

그 학살의 와중에 새로운 마법이 태어났네. 이제 아무도 2·28 학살‘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없게 된 거야. 228이라는 숫자는 금기가 되고 말았네.
- P175

마법의 글자 몇 개 때문에 그토록 많은사람이 목숨을 잃었건만, 그래도 우리는 글자의 힘이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거야.
- P176

‘중국‘은 영어로 쓰면 간단한 낱말인지 몰라도 중국어로 쓰기는 까다롭거든. 중국과 중국인을 자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많다네. 대개는 고대 왕조의 이름을 따서 지은 말들인데, 현대에 와서는 진짜 마법의 힘을 잃고 껍데기만남았어. 중화인민공화국이란 뭘까? 중화민국은 또 뭐고? 그런 건참된 말이 아니야. 그저 희생양을 바칠 또 다른 제단일 뿐이지."
- P176


"이건 화‘라는 글자일세. 중국과 중국인을 가리키는 말 중에 어떤 황제하고도, 어떤 왕조하고도, 살육과 희생을 요구하는 어떤 것하고도 무관한 한자는 오로지 이것뿐이야.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양쪽 다 ‘화‘를 자기네 이름에 넣었지만, ‘화‘는 그들보다 훨씬더 오랜 역사를 지닌 글자이므로 둘 중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니라네.
원래 ‘화‘는 꽃다운‘ 또는 화려한‘이라는 뜻으로, 땅거죽을 뚫고 올라온 들꽃 한 다발의 모양을 하고 있지. 알아보겠나?
고대 중국의 이웃나라 사람들은 중국인을 가리켜 ‘화런[華人]‘이라고 했네. 비단과 하늘거리는 사라(紗羅)로 지은 그들의 옷이 화려해 보였기 때문이지. 허나 나는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하네, 중국인은 들꽃 같은 사람들이라서, 어디를 가도 살아남아 즐거움을 누릴 줄 안다네. 들불이 일어나 초원에 살아 있는 것을 모조리 태워 버린다 해도 비가 내리면 들꽃은 다시 마법처럼 피어나지. 겨울이 닥쳐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서리와 눈으로 멸한다.
해도, 봄이 오면 들꽃은 다시 피어나는 법일세. 화려하게.
어쩌면 지금은 혁명의 붉은 불길이 중국 대륙을 불태우고, 백색테러의 하얀 서리가 이 타이완섬을 뒤덮고 있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나는 알아. 언젠가는 미 해군 제7함대라는 철벽이 녹아내리는날이 올 테고, 그날이 오면 번성런과 와이성런과 내 고향의 화런 모두가 다 함께 피어날 걸세. 화려하게..
"
- P177

‘freeze(얼어붙다)‘라는 단어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 릴리는 눈을 감고 머릿속에 그 단어를 적어 보았다. 간 선생이 했을 법한 방법으로,
단어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알파벳들이 흔들리며 서로를 쿡쿡 찔러댔다. Z‘는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남자의 모습으로 변했고, e는 태아처럼 옹송그린 죽은 아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이내z 와 ‘e‘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free(자유롭다)‘만이 남았다.
괜찮아, 릴리 양. 테디와 나는 이제 자유롭다네. 릴리는 정신을 집중했다. 머릿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간 선생의 미소와 따뜻한목소리를 붙잡으려고, 자네는 정말로 영리한 아가씨야. 자네 또한파자검술사가 될 운명이라네. 미국에서.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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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이 놀라운 역량은 그 우아한 몸가짐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으며, 다만 거기에는 어린아이의 몸짓과 같은 경쾌함이 거인적인 강대함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거기에는 여러 가지 운동의 눈부신 아름다움이 나타나 있다.
참다운 힘은 결코 아름다움과 조화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그 원천이 되는 것이며, 모든 장대한 아름다움에 있어서힘이야말로 그 마법의 비밀이 된다.

-향유고래 꼬리의 아름다움 묘사 -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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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애는 그렇게 자기 영혼에 불을 붙일 때 최고로 아름다워.  - P115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는 자기 영혼인양초의 양끝을 함께l 태우기로 마음먹었고, 그리하여 눈부시게 빛나는 삶을 살았다.  - P117

소금을 넣으면 평범한 것도 특별해졌다. 단순한 것이 아름답게 바뀌었다. 지미의 영혼은 소금이었다.
그리고 소금이 들어가면 얼리기가 힘들었다. - P132

리나는 그것을 다시 얼려서 이날의 기억을 품고 남은 생을 꾸역꾸역 살아갈 작정이었다. 자신이 진짜로 살아 있었던 이날 하루의 기억을. - P133

하지만 여기까지 오기 전에 난 먼저 내 담배를 다 피워 버려야 했어.
나한테 일어난 일은 ‘상태 변화‘였어. 내 영혼이 담배 한 갑에서 담뱃갑으로 바뀌었을 때, 난 성장한 거야.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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