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그 후로 몇 달 동안양타기 시합에 나가는 꿈을 꾸었다. 1초만 더 버텨, 릴리는 양의 등에 탄 자신에게 말했다. 그냥 버티는 거야. 그 28초 동안 릴리는 글자 연습장을 쓰고 심부름을 하고 어른들 명령을 따르면서 하루를다 보내는 조그만 여자애가 아니었다. 그 28초 동안 릴리의 삶에는명확한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성취할 명확한 방법도 있었다.
만약 나이가 더 많았다면 릴리는 그 기분을 해방감이라고 묘사했을 것이다.
- P143

릴리를 등에 태운 물소는아늑하고 안정감 있게 나아갔다. 릴리가 조그마한 아이였을 때 목말을 태우고 다니던 아빠처럼.
릴리는 주뼛거리다가 씩 웃었다. 그러고는 사과하는 뜻에서 물소의 목덜미를 살짝 다독여 주었다.
힘을 빼고 편하게 앉아서, 길은 물소가 알아서 찾아가도록 맡긴채로, 릴리는 논에 줄지어 늘어선 벼가 옆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P144

"서예, 나는 아이들에게 붓으로 한자를 쓰는 법을 가르치네. 그래야 아이들이 괴발개발 쓴 글씨로 온 세상을 공포에 빠뜨리지 않을테니까. 조상의 영령과 떠도는 귀신들까지 포함해서."
- P148

"나는 파자점(破字占)술사야."
"뭐, 뭐라고요?"
"우리 할아버지는 사람 이름의 한자랑 그 사람이 고르는가지고 운세를 점쳐 줘." 테디가 설명했다.
- P148

"중국인은 점술의 일환으로 문자를 발명했어. 그래서 모든 한자는 그 속 깊숙한 곳에 마법이 깃들어 있지. 나는 한자를 토대로 사람의 고민을 읽어 내고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다네. 자, 어떻게 하는 건지 보여 줌세. 낱말을 하나 떠올려 보게. 아무 낱말이나."
- P148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국에 깃든 진짜 마법을 몰라. 자네는 그 말이 어디서 왔는지아나?"
"아니요."
"미군이 처음 한국에 도착했을 때, 미군 병사들은 한국군 병사가미국이라고 말하는 걸 자주 들었다. 그들은 한국군이 영어로 ‘미(me), 국(gook)‘이라고 하는 줄 알았지. 하지만 한국군은 사실 미국 사람 이야기를 하는 거였어. 미국은 ‘아메리카‘를 뜻하는 말이거든. 국은 한국어로 ‘나라‘라는 뜻이고, 그래서 미군 병사들은 아시아인을국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어. 어떤 의미로는 사실상 자기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지."
- P152

"릴리 양." 간 선생은 일어서서 엄숙하게 릴리와 악수했다. "중국에서는 나이 차가 크게 나는 친구 사이를 가리켜 ‘망년지교(忘年之交)‘라고 하네. 나이를 잊은 우정이라는 뜻이지. 우리가 만난 것은운명이야. 아무쪼록 나와 테디를 언제나 친구로 여겨 주면 좋겠네."
- P153

"마법이 깃든 말은 오해받는 경우가 많지. 그 아이들과 자네가 다같이 ‘국‘을 마법의 말로 여겼을 때, 그 말에는 일종의 힘이 깃들었어. 허나 그 힘은 무지에 기반한 헛된 마법이었네. 마법과 힘이 깃든말은 그것 말고도 많지만, 그런 말을 쓰려면 먼저 사색과 사유가 필 - P164

내가 다른 종류의 마법을 깨닫기 시작한 게 바로 그 무렵이었네.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어. ‘일본은 위대하고 중국은 약해 빠졌다. 일본은 동아시아 전체가 번영하기를 바라므로 중국은 일본의 뜻을 받아들여 항복해야 한다.‘ 그런데 그런 말이 다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일본‘이 무언가 원하는 게 가능할까? ‘일본‘이나 ‘중국‘ 같은 것은존재하지 않아. 그건 그저 낱말일 뿐, 지어낸 것일세. 일본 사람 한개인이 위대할 수는 있겠지. 중국 사람 한 개인이 뭔가 바랄 수도있을 테고, 하지만 ‘일본‘이나 ‘중국‘이 무언가 바라고, 믿고, 받아들인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나? 나라 이름 같은 건 다 공허한 낱말일세, 신화일 뿐이야. 그런데 그 신화에는 강력한 마법이 깃들어 있어서 희생을 강요하지, 사람을 양처럼 살육하라고 강요하는 거야.
- P171


"이건 ‘의‘라는 한자일세. 전에는 옳음‘을 뜻하는 글자였는데, 지금은 무슨 무슨 ‘주의‘를 뜻하는 낱말에도 쓰이지. 공산주의, 민족주의, 제국주의, 자본주의, 자유주의 같은, 이 한자는 자네도 아는 위쪽의 ‘양‘과 아래쪽에 있는 ‘자신‘을 뜻하는 한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졌네. 사람이 제물로 바칠 양을 들고 있는 모습이지. 이 한자 속의사람은 진실과 정의가 자신에게 있다고, 따라서 세상을 구할 마법이 자신에게 있다고 믿고 있어. 우습지, 안 그런가?
- P172

타이완인은 대부분 몇 세기 전 중국의 푸젠(福建] 지방에서 건너온 이민자의 후손이라네. 1885년 일본이 중국에게서 타이완섬을넘겨받은 후, 일본인들은 오키나와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 섬을 일본화하려고 했어. 그래서 타이완 현지 출신인 번성런[本省人]을 일본 천황의 충성스러운 신민으로 만들려고 한 거야. 수많은 타이완인이 전쟁 중에 일본 군복을 입고 싸웠네. 일본이 전쟁에서 패한 후에 타이완은 중화민국으로 반환됐지, 이때 공산당에 패한 국민당군대가 타이완섬으로 건너오면서 새로운 이민자들이 물결처럼 밀려왔네. 그들이 바로 와이성런[外省人]이야. 번성런은 좋은 일자리를 독차지한 국민당계 와이성런을 미워했고, 국민당계 와이성런은전쟁 중에 동족을 배신하고 일본을 위해 싸운 번성런을 증오했네.
어느 날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 길거리에 군중이 모여들더군, 타이완 방언인 민난[]어로 소리 지르는 걸 보니 번성런들이었어. 그들은 지나가는 사람을 일일이 멈춰 세워 말을 걸고는 표준중국어로 대답하는 사람은 와이성런으로 몰아 두들겨 됐네, 이유는따지지도 않고, 막무가내로, 그들이 원하는 건 피였어, 나는 무서워서 계산대 밑으로 숨었네."
- P174


"무리‘를 뜻하는 군‘이라는 한자는 왼쪽에 귀한 사람‘이라는 뜻의 글자가 있고, 오른쪽에는 ‘양‘이 있네, 군중이란 바로 그런 걸세.
자신들이 고귀한 대의를 수행한다고 믿고 늑대 무리로 변신한 양떼인 거야.
- P175

그 학살의 와중에 새로운 마법이 태어났네. 이제 아무도 2·28 학살‘이라는 말을 입에 올릴 수가 없게 된 거야. 228이라는 숫자는 금기가 되고 말았네.
- P175

마법의 글자 몇 개 때문에 그토록 많은사람이 목숨을 잃었건만, 그래도 우리는 글자의 힘이 선한 일을 행할 수 있다는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거야.
- P176

‘중국‘은 영어로 쓰면 간단한 낱말인지 몰라도 중국어로 쓰기는 까다롭거든. 중국과 중국인을 자처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은 많다네. 대개는 고대 왕조의 이름을 따서 지은 말들인데, 현대에 와서는 진짜 마법의 힘을 잃고 껍데기만남았어. 중화인민공화국이란 뭘까? 중화민국은 또 뭐고? 그런 건참된 말이 아니야. 그저 희생양을 바칠 또 다른 제단일 뿐이지."
- P176


"이건 화‘라는 글자일세. 중국과 중국인을 가리키는 말 중에 어떤 황제하고도, 어떤 왕조하고도, 살육과 희생을 요구하는 어떤 것하고도 무관한 한자는 오로지 이것뿐이야.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 양쪽 다 ‘화‘를 자기네 이름에 넣었지만, ‘화‘는 그들보다 훨씬더 오랜 역사를 지닌 글자이므로 둘 중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니라네.
원래 ‘화‘는 꽃다운‘ 또는 화려한‘이라는 뜻으로, 땅거죽을 뚫고 올라온 들꽃 한 다발의 모양을 하고 있지. 알아보겠나?
고대 중국의 이웃나라 사람들은 중국인을 가리켜 ‘화런[華人]‘이라고 했네. 비단과 하늘거리는 사라(紗羅)로 지은 그들의 옷이 화려해 보였기 때문이지. 허나 나는 단지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라 생각하네, 중국인은 들꽃 같은 사람들이라서, 어디를 가도 살아남아 즐거움을 누릴 줄 안다네. 들불이 일어나 초원에 살아 있는 것을 모조리 태워 버린다 해도 비가 내리면 들꽃은 다시 마법처럼 피어나지. 겨울이 닥쳐와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서리와 눈으로 멸한다.
해도, 봄이 오면 들꽃은 다시 피어나는 법일세. 화려하게.
어쩌면 지금은 혁명의 붉은 불길이 중국 대륙을 불태우고, 백색테러의 하얀 서리가 이 타이완섬을 뒤덮고 있을지도 모르네. 하지만 나는 알아. 언젠가는 미 해군 제7함대라는 철벽이 녹아내리는날이 올 테고, 그날이 오면 번성런과 와이성런과 내 고향의 화런 모두가 다 함께 피어날 걸세. 화려하게..
"
- P177

‘freeze(얼어붙다)‘라는 단어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 릴리는 눈을 감고 머릿속에 그 단어를 적어 보았다. 간 선생이 했을 법한 방법으로,
단어를 꼼꼼히 뜯어보았다. 알파벳들이 흔들리며 서로를 쿡쿡 찔러댔다. Z‘는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남자의 모습으로 변했고, e는 태아처럼 옹송그린 죽은 아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러다가 이내z 와 ‘e‘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free(자유롭다)‘만이 남았다.
괜찮아, 릴리 양. 테디와 나는 이제 자유롭다네. 릴리는 정신을 집중했다. 머릿속에서 점점 희미해져 가는 간 선생의 미소와 따뜻한목소리를 붙잡으려고, 자네는 정말로 영리한 아가씨야. 자네 또한파자검술사가 될 운명이라네. 미국에서.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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