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나는 아기를 가졌어요..
오늘 새벽에는 초승달을 보며 아기가 죽어버리기를 빌고 빌었어요.. 변소에 가려고 마당에 나왔다가요. 초승달에 낀 흰 달무리가 몽글몽글 떠오르는 순두부 같아 나도 모르게 입을 벙긋 벌렸어요. 그것을 먹으려고요..
어머니, 나는 아기가 죽어버리기를 빌어요.. 눈동자가 생기기 전에.….... 심장이 생기기 전에………. - P7
낫처럼 휘어진 강물이 어디서 흘러오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어디로 흘러가는지, 얼마나 멀리까지 흘러가는지도 모르면서 내 고향마을까지 흘러갈 거라고 생각한다. 어머니가 고향 마을을 에둘러흐르는 강물에 나물을 씻다, 혹은 저고리나 버선을 헹구다 내 편지를 받을 거라고. - P12
매번 그렇듯 나는 기껏 싼 보따리를 도로 푼다. 놋대야 속에 차곡차곡 쟁여 넣은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내 제자리에 놓는다. 마지막으로 나 자신도.
나는 두 손을 배 밑으로 떨어뜨리고 눈을 감는다. 송장놀이를 할 시간이다. - P23
내 아래를 후비는 게 군인의 몸에 달린 살덩어리가 아니라 밤송이같다. 독 오른 가시들이 아래를 마구 찌르는 것같이 따갑고 쓰리다. 군인들이 못 들어오게 아래를 틀어막고 싶다. 돌멩이로라도 감자로라도, 죽은 개구리로라도, 죽은 쥐로라도, - P29
밤마다 송장놀이를 해서일까. 내 몸에서 살 썩는 냄새가 난다. 피가, 내장이 썩는 역한 냄새가. 강물에 몸을 씻으면 냄새가 가시려나. 몸을 담그기에 강물은 차다. - P34
이곳은 열세 살짜리 여자애가 있을 만한 데가 아니다. 열다섯 살짜리여자애가 있을 만한 데도 아니라는 걸 오지상과 군인들만 모른다. 열다섯 살인 나도 아는 걸. - P42
중국에 와서야 나는 어떠니가 내게 가르쳐주지 않은 말들이 있다는 걸 알았다. 퍼(定, 여자 성기 라는 말도 그중 하나였다. 나는 까막는인 어더니에게 말을 배웠다. 고향의 하늘과 땅은 어머니의 말과 함께 있었다. 어머니가 돌나물을 뜯다 말고 고개를 들고는 굶주림에 찌든 입으로 ‘하늘이 흐려지네 라고 중얼거리던 필과 함께 하늘이 있었다. 어머니는 고향에 나는 거의 모든 나물과이름을, 새 이름을 알고 있었다. 달래, 쑥, 냉이, 척, 칡, 산딸기, 오다. 미나리, 자두, 앵두, 부추, 복수초, 개나리, 제비꽃, 산수유, 까치, 제비, 뻐꾸기, 뜸부기, 찌르레기...... - P56
세계위안소 주인 여자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조선 여자애들에게자신을 오카상(어머니)이라고 부르게 했다. 나는 오카상이 후유코처럼 일본 여자 이름인 줄 알았다. 그곳에서 지낸 지 반년쯤 지나서야 나는 어머니를 일본 말로 오카상이라고 부른다는 걸알았다. 들개 떼에게 고깃덩이를 던져주듯 내 몸을 군인들에게 던져주던여자를 어머니라고 불렀다. 내 몸이 찢어지고 터져 피를 흘려도 차가운 눈길로 쳐다보던 여자를, 오카상의 뜻을 모르고. - P58
군인들 대개는 내 몸을 원하지만 간혹 그것으로는 부족해 영혼까지 원하는 군인이 있다. 나는 영혼마저 군인들에게 내주고 싶지 않다. 몸은 강물에 씻을 수 있지만, 영혼은 씻을 수 없다. 영혼에는 비누질도 할 수 없다. 군인들은 몸에 다녀가는 값은 치르면서 영혼값은 치르시 않는다. 영혼에는 값이 없기 때문일까. 영혼은 값으로 매길 수 있는 게 아니라시, 소 돼지를 사고팔 때 영혼값도 쳐준다는 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다. 소 돼지의 영혼은 근으로 잴 수 없으니까, 먹을 수 없으니까값을 쳐주시 않는 것이다. 돼지 피는 먹을 수 있지만 영혼은 먹을수 없으니까. 영혼을 내주지 않으려 나는 일본 말을 하지 않는다. 일본 군인들이 일본 말로 물으면 나는 조선말로 대답한다. 일본 말로 대답하면영혼을 내주는 것 같아서다. - P62
죄를 짓는 것 같았어요. 아기가 죽기를 바라면서, 군인이 살아서 돌아오라고 빌어주려니까…….
내 몸속 아기는 죽기를 바라고 바라면서.....
그래서 소리 내지 않고 몰래 빌었어요.. 죽어가는 잉어처럼 입만 벙긋벙긋 벌려 빌었어요.. 아기가 들을까봐서요. - P64
"후유코는 순진하고 착해." 착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나 자신이 부끄럽고 싫어진다. 내가 얼마나 나쁜 애인지 연순 언니는 모른다.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걸까. 나는 그녀가 우리 중 누굴 나쁘게 말하는 걸 들은적이 없다. 나는 착하지 않다. 나는 군인들이 어쩌다 던져주고 가는 건빵을아무하고도 나누어 먹지 않는다. 혼자 먹는다. 대나무 바구니 속에꽁보리주먹밥이 여남은 덩어리 담겨 있을 때 나는 조금이라도 커보이는 꽁보리주먹밥을 차지하려고 눈동자를 기민하게 굴린다. 나는 평소에 행동이 굼뜬 편이지만 꽁보리주먹밥을 집어 들 때만큼은쥐처럼 약빠르다. 낙원위안소에서 ‘착하다‘는 말은 ‘어수룩하다‘는 말과 그 뜻이 같다. - P78
나는 조센삐인 걸 잊어버리려 애쓴다. 그리고 그때마다 내가 잊어버리는 것은 나 자신이다. 결국 조센삐만 남고, 나는 어디로 가버리고 없다. - P80
끝순은 땅에 쓰는 편지에 ‘아버지‘가 아니라 ‘오토상 아버지)‘이라고 쓴다. 어머니‘가 아니라 ‘오카상‘이라고, 끝순은 자신이 오토상, 오카상이라고 썼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계속 편지를 쓴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쌀은 고메가 되고, 군인은 군진이, 하늘은 덴이, 땅은 도치가, 얼굴은 가오가 된다. 그리고 낙원은 라쿠엔이 된다. - P84
나는 일본 말로 말을 하는 꿈을 꾼다. 꿈에 나는 해금보다 일본 말을 잘했다. 일본 여자인 오카상보다도, 고향 집을 떠날 때 나는 일본 말을 할 줄 몰랐다. 그런데 나는꿈에서도 일본 말을 한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일본 말이었다는 것만 기억난다. 나는 어머니를 그리며 ‘어머니가 아니라 ‘오카상‘ 이라고 중얼거릴까봐 겁이 난다. 강물에 쓰는 편지에 오카상 아이타이데스(어머니 보고 싶어요)라고 쓸까봐. 오카상은 어머니가 아니라 세계위안소 주인 여자다. 오지상이 할아버지가 아니라 낙원위안소 주인이듯. - P87
입으로 삼킨 것은 토할 수 있는데, 눈으로 삼킨 것은 토할 수 없다. 눈도 입처럼 토할 수 있다면, 나는 내 몸에 다녀간 군인들의 얼굴을 토하고 싶다. - P101
몸이 내 것이 아닌데 나는 어째서 몸을 떠나지 못하는 걸까. 새장속 새처럼 몸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 걸까. 몸이 죽어야 몸에서 놓여날 수 있으려나, 심장이 멎고 숨이 끊어져야. 하지만 몸이 죽으면나는 있을 데가 없다. 숨을 데가 없다. 군인들이 들끓는 낙원위안소에서 내가 숨을 데라고는 몸뿐이다. 몸이 내 것이 아니면 누구 걸까. 일본 군인들 것일까. 피 한 방울안 섞인 오지상의 것일까. 아래가 찢어져 피가 날 때 입을 악물고 견디는 건 나인데 왜 내몸은 내 것이 아닌 걸까. 몸이 피를 흘릴 때 그 피를 닦아주는 건 나인데.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내 몸이 떨고 있을 때 담요를 끌어당겨 덮어주는 건 나인데, 군인들이 돌아간 깊은 밤, 심장이 멎었나 싶어 가슴에 손을 대보는 건 나인데. - P125
아이시테루요. 나는 그 말이 욕인 줄 알았다. 욕이 아니라는 걸알고 나서는 더 욕 같다. - P208
다 고통받았던 사람이 간절하게 청자를 원하기 때문이다. 아우슈비츠의 수용자들은 모종의 악몽을 공통적으로 꾸었다고 한다. 집으로돌아가 소중한 사람에게 자신이 겪은 고통을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상대방은 믿어주지도 들어주지도 않으며, 심지어 몸을 돌리고 침묵 속으로 가버린다. 이 꿈은 극단적 고통을 겪는 사람의 간절한 소망과 불가피한 절망을 동시에 암시한다. 상상을 초월한 고통을 겪는 사람은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기를 진실로 소망하지만, 동시에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며 절망한다. 고통이 상상을 초월한 것이기에 이해받기를 쉽사리 낙관할 수 없는것이다. 평균치 이상의 고통 속에 놓인 사람은 몰이해의 예견 때문에 이중으로 괴롭고, 그들의 예견은 어느 정도 사실이기에, 절망은 더욱 참혹하다. 이 절망을 조금이라도 희석해야 할 의무가 우리에게는 있다. - P293
삶은 삶이기에 삶의 이유와 당위를 제공한다. - P306
형언불능하게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지고의 미덕은 결국 살아남아야 한다는 당위이며 살아남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생존은 충분히 경이로운 선善이다. - 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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