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울어지기는 했지만 그나마 운동장은 등장했다. 이 기울어진운동장 위에서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하게 경기를 하면서도 강렬한 피치로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들이 있다. 이 여인들의 움직임을보면 마치 장애물 경기를 보는 듯하다. 격투기 선수 같기도 하다.
아니, 세상에 전쟁을 거는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의 전투를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라 사회로 확장시킨다. 세상을 향해서 의미있는 짱돌을 던진다. 자신이 돌을 맞는 한이 있더라도,
그래서 이들은 어쩐지 우리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들의용기를 흠모하면서도 우리 속의 비겁함과 두려움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 P285

오리아나 팔라치는 그가 목격했던 그 잔혹한 전쟁들, 그가 공격했던 그 간인한 권력자들, 아버지를 린치로 공격한 어둠의 폭력,
자신이 거의 죽을 편한 멕시코 반정부 시위에서의 폭력, 그가 절통하게 사랑한 이의 죽음 속에서도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아갔다. - P293

오리아나 팔라치가 자신이 했던 인터뷰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한 적이 있다. "나는 수천 가지 분노를 가지고 인터뷰에 임했다.
그 수천 가지 분노는 수천 개의 질문이 되어 내가 상대에게 공격을 퍼붓기 전에 먼저 나를 공격했다." 얼마나 크나큰 분노였을까?
권력자의 비인간성과 잔인무도함에 대한 분노, 폭력을 일상화시켰다는 분노, 그 폭력에 희생당한 수많은 생명들에 대한 연민, 그자신의 아버지와 사랑하는 남자 그리고 자기 자신이 당했던 폭력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을까? ‘분노는 나의 힘‘ 이라고 할 만하다.
- P293

이른라 미국의 양심 이라 불리는 늘 춤스키가 있다면, 수전 손작은 가히 ‘기정의 양심‘으로 불릴 만하다. 어떤 권력에도 특히 부한 권력, 무능한 권력에 대하서 굴하지 않는 양실이다. 9.11 누욕 테러 사건이 난 후 손택은 오리아나 팔라치와 완전히 다른 태도를 취한다. 미국 부시 정부가 그들의 무능을 숨기고 오히려 테러의 위험과 리생의 고통을 이용해서 ‘대국법 등을 제정하고 안건을 빌미로 컨트롤을 강화하자 손택은 이런 제목의 글을 쓴다.
"다 같이 슬퍼하가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슬픔에 깊이 파길 줄 알면서도 바보가 되지 않는 것은 참으로어려운 일이다. 수건 손택은 본인 자신의 고통 유방암과 자궁암, 가까이 다가온 죽음의 존재)을 이기고 난 후 ‘타인의 고통에 인간이 어디까기 공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인간의 인간됨을 묻는다.
- P301

일제강점기 하였으나 나혜석은 유복하게 자랐고, 신교육을 받았고, 일본 유학까지 다녀왔다. 3·1 만세운동에 참여했고 미술교사로 일했고 그 시대로서는 드물게 연애도 했다. 폐결핵으로 죽은 첫 애인의 무덤에 남편으로 하여금 비석을 세우도록 했다는 기행도 알려져 있다. 가문 좋고 신교육도 받고 오랜 동안 구애했던변호사 남편 김우영과 유럽 여행을 하기도 했고 그 여행기를 글로쓰는가 하면 유럽의 여러 곳에서 그린 그림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아이를 낳은 여성 특유의 체험을 쓴 모(母)된 감상기‘라는 글 안에서 "아이란 어미의 살점을 뜯는 존재"라는 그때 기준으로는 지나치게 솔직한 표현을 쓰기도 했고 "남편의 아내가 되기 전에, 내 자식의 어미이기 전에, 첫째로 나는 하나의 인간인 것이오"라는 발언도 했다. 여기까지 보면 나혜석은 자유와 독립을 꿈꾸는 진취적인 신여성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혜석의 삶은 180도 바뀐다. 파리에서 유학하던 시절에 나혜석은 혼외 연애에 빠졌던 모양이다. 상대 이름도 알려져있다. 나중에 친일 활동을 했던 천도교 도령 최린이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던 남편 김우영은 관계를 수습하나 그 소문이 뒤늦게 경성에 퍼지자 나혜석을 못마땅히 여기던 시가의 종용에 의해 결국이혼한다. 나혜석은 시가에서 파문당하고 네 아이를 보지도 못한다. 여기까지는 혼외정사의 발생과 그에 따른 이혼으로 보인다.
그다음의 전개가 엄청나다. 사적 삶이 공적 세계로 나오는 것이다. 그것도 여자가 스스로 걸어나온다. - P304

나혜석은 정말 자신의 말대로 선각자 였을까? 그는 이렇게 썼다. "내 몸이 불꽃으로 타올라 한 줌 재가 될지언정 언젠가 먼 훗날 나의 피와 외침이 이 땅에 뿌려져 우리 후손 여성들은 좀 더 인간다운 삶을 살면서 내 이름을 기억할 것이라." 인습과 편견에 맞서는 용기를 보여줬던 나혜석은 예언자‘ 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의 이름을 소환하고 또 소환할 것이다.
- P308

어린 시절 아시아의 식민지 나라에서 무너져 내린 집안의 가난한 소녀로 자라면서 얻었던 삶의 딜레마 때문이었을까, 철학과 법학을 공부했던 의문 때문이었을까, 미테랑 대통령과 함께 동료로서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면서 의문을 키웠던 때문일까? 뒤라스는 그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그의 사랑 문법을 썼고 그의 사랑인생을 살아냈다. 사랑은 언제나 옳다.
- P313

다여신이 나타났다!‘ 같은 말로 여자의 특정한 특질을 조명하는시대이니 말이다. 영화, 드라마,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뛰어난 미모나 목소리를 뽐내는 여성들을 보고 ‘여신이 나타났다‘ ‘여신급이다‘ 하는 말을 들으면 나는 좀 언짢아진다. 그 여성들의 특정한 부분만 띄워주는 게 언짢고, 그렇지 못한 수많은 여성들을 자극하니또 언짢다. ‘여신이 나타났다‘라는 말은 찬사 같지만 실은 여자가가장 경계해야 할 말일지도 모른다.
- P358

‘할매‘가 된다는 것은 여성으로서의 참된 자유를 상징하는 건지도 모른다. 더 이상 이성으로서의 여성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 사랑을 받는 대상 이상으로 우리는 사랑을 주는 주체다. 산전수전의 경험이  풍성한 유머를 자아낸다. 놀라지도 않고 호들갑을 떨지도않으면서 세상을 즐길 줄 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의 모든 아가들에게 대한 사랑이 넘친다. 세상을 껴안는 여신이 될 수 있다. 수호여신으로서의 기량이 커진다.
- P358

‘여성성과 남성성은 절대적으로 한 인간 속에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한 인간 속에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잘 발휘하며사는 삶이 좋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아님을 발견할 때마다 너무도 반갑다. 예컨대,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나와 같은 생각을 『자기만의 방』에서 훨씬 더 근사한 말로표현했다. "양성적 마음이란 타인의 마음에 열려 있고 공명하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감정을 전달할 수 있고, 본래 창조적이고 빛을 발하며 분열되지 않은 것이란 뜻"이라니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이른바 나는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의 이론을 발견했을 때 뛸듯이 기뻐했다. 남성 속에도 여성성이 있고 여성 속에도 남성성이 있고, 남성 속의 여성성, 여성 속의 남성성의 조화야 말로 가장 바람직한 자아의 발현이라는 정신분석힉자 칼융의 이론에서 내가 얼마나 용기를 얻었겠는가. - P364

올란도(Orlando)라는 이름은 ‘or‘ 와 ‘and‘를 합성한 이름이다.
‘또는‘과 그리고‘를 합한 것이다. 여자 또는 남자, 여자 그리고 남자‘라는 뜻이다. 사백 년을 뛰어넘어 양성을 오가는 인간의 이름으로는 아주 제격이다. 환생과 비슷한 면이 있지만 지난날을 온전히 기억한다는 점에서 환생과는 다르다. 남성으로서의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다. 세상을 다 가진 것 같다가, 자신의 욕망을 마음껏추구했다가, 사랑에 실패해서 좌절했다가, 공직을 맡아서 위선적인 상황에서 어찌할 것인지 선택을 고민했다. 그리고 깨어나서 갑자기 여성의 몸에 갇힌 자신뿐 아니라 사회가 가하는 구속을 이해하게 됐고, 그 구속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하며 지식인tattil vele들과의 교류를 추구하지만 그 한계를 알게 되고 기득권층의 허위를 알게 되기도 했다. 그 모든 역사를 안고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 인간이 또는 그리고‘의 올란도인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순전한 남성 또는 순전한 여성이 되는 것은치명적입니다. 인간은 남성적 여성이거나 여성적 남성이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올란도는 어디에 속하는 것일까? 새로 태어난 인간 올란도는 그야말로 양성적 마음을 갖춘 것일까? 남성적여성으로서 여성적 남성을 고대하는 것일까?
- P376

우리 사회는 ‘여자라서, 여자여서‘뿐 아니라 ‘남자라서, 남자여서‘도 만만찮게 압력이 되는 사회다. 구분하고 규정하고 억제하고옥죄는 문화가 대세다. 왜 우리 스스로 이런 구속을 만들어서 답답해하고 힘들어하면서 살아야 하는가? 가부장사회, 남성우대사회는 곧 수많은 남자들에게도 족쇄가 되기 십상인데 말이다. 부디자유로워지자.
그렇게 나아가는 단계 중 하나가 자기 안의 여성성을 인정하는남성, 자기 안의 남성성을 인정하는 여성이 자연스러워지는 상태일 것이다. 자기 안의 여성성을 잘 발휘하고 조화시키는 남성, 자기 안의 남성성을 잘 발휘하고 조화시키는 여성이 당연해지는 상태일 것이다. 그렇게 양성적 여성, 양성적 남성으로서 가장 인간적인 인간이 된 남성과 여성이 자유롭게 인간적인 삶을 살아갈 수있는 상태일 것이다.
- P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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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이었다. 그는 고전문헌학으로 세계 전체를 짊어지고 다니는 것같았다. 문두스는 이 같은 그의 본질을 강조하는 데 가장 적절한단어였다.  - P14

그녀 뒤를 따라 나가지 않기 위해 힘겹게 참고 있어야 했다. 입술에 손가락을 댄 그녀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 몸짓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방해하고 싶지 않아요" 또는 "우리끼리의 비밀이에요"라는 의미일 수도, "갈게요. 우리 사이를 이어줄건 이제 더 이상 없어요"라는 뜻일 수도 있었다.
- P17

중요한 것은 아주 단순했다. 문법이든 표현 양식이든 고전의 외진 구석까지 모두 알고 표현 하나하나에 들어 있는 역사를 아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의 일을 잘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겸손함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에게 요구가 많은 사람이었다. 변덕이나 뒤틀린 허영심도 아니었다. 나중에 그는 가끔, 자신의 이런 태도는 잘난 척하는 세상을 향한 조용한 분노, 허풍선이들을 향한 꺾이지 않는 고집이라고 생각했다. - P21

그레고리우스는 몸을 돌려 천천히 키르헨펠트 다리 쪽으로 향했다. 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는 57년이 지난 후 처음으로 자기 인생을 이제 완전히 장악하려고 한다는, 불안과 해방감이 섞인 기묘한 기분을 느꼈다.
- P22

그가 라틴어 문장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 문장들이 과거의 모든 침묵을 자기 안에 품고 있기 때문이었고, 뭔가 대답하라고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 언어는 온갖 소란스러움에서 떨어져 있었고, 확고부동하며 아름다웠다. 그레고리우스는 라틴어를 죽은 언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경멸했다. 그들은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위인들이었다. 플로렌스가 누군가와 에스파냐어로 통화를 하면 그는 문을 닫았다. 이런 행동은 아내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하지만 그레고리우스는 그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었다.
- P25

그러나 지금은 모든 상황이 갑자기 달라졌다. 그레고리우스는CD에서 들리는 남자의 엄청난 속도와 피콜로 소리를 연상하게 하는 춤추는 듯한 여자의 맑은 음색을 흉내 내려고 했다. 자신의 뻣뻣한 발음과 미끄러지는 표준 발음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 그는 같은 문장을 계속해서 다시 들었다. - P35

르는 표현과 동사 형태를 찾아보았다. 포르투게스, 벌써 얼마나 다르게 울리는가! 지금까지 이 단어는 갈 수 없는 나라에 있는, 마법에 걸린 보물 같았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그가 문을 막 열게 된 궁전에 장식된 수많은 보석 가운데 하나였다.
- P35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온몸에서 기운이 빠졌다. 정신 나간 생각이었다. 감정이 오락가락하는 이름 없는 포르투갈 여자, 빛바랜 포르투갈 귀족의 사진, 초보자를 위한 어학 교재,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생각... 이런 것들 때문에 한겨울에 리스본으로 도망치는 사람은 없다.
- P41

"내 영혼아, 죄를 범하라. 스스로에게 죄를 범하고 폭력을 가하라. 그러나 네가 그렇게 행동한다면 나중에 너 자신을 존중하고 존경할 시간은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인생은 한 번, 단 한 번뿐이므로, 네 인생은 이제거의 끝나가는데 너는 살면서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았고, 행복할 때도 마치 다른 사람의 영혼인 듯 취급했다……. 자기 영혼의 떨림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불행할 수밖에 없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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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도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 때문에 그들이 좋다. 씩씩하면서도 유쾌하고, 냉철하면서도 뜨겁다. 강철같이 달구어진 것 같으면서도 촉촉하게 젖어 있는 느낌이 좋다. 극한으로 밀어붙이면서 자신을 단련시키는 모습이 좋다. - P197

현실이라는 것은 얼마나 끔찍한가? 자신을 낱낱이 들여다본다.
는 것은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냉철하게 들여다본다는 게 얼마나 힘든가? 비루한 나, 찌질한 나, 숨어 있는나, 또 다른 나를 직면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가? 추악하고 비열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현실을 직시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 그힘듦을 마주 대하는 이 여성 작가들을 보면 신이 난다. 그 어려운경지를 넘어가는 용기와 역량과 통찰력과 상상력과 창의성에 박수를 보내게 된다. - P197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세상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람 사는 세상의 허위와 위선에 대해 곧이곧대로 이야기해도 아무렇지가 않았다. 헛웃음이 나왔고 쓴웃음도 나왔다. 가끔은 폭소도 터져 나왔다.  - P199

박완서는 끊임없이 나의 현재를 두들긴다. 끊임없이 나의 속마음을 헤집는다. 끊임없이 허망한 욕망과 보상받지 못한다는 억울함과 깊숙이 자리 잡은 패배감과 소심한 복수심까지도 드러낸다.  - P199

박완서의 글에는 부족한 인간, 약한 인간, 비겁한 인간, 삶의 무거움 앞에서 쪼그라든 인간들이 그 모습 그대로 나온다. 그것을감추려는 것이 아니라, 이겨내려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극복해내려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정교하게 또 냉철하게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인간은 용기를 가질 수 있다. 나 자신의부족함을 유머의 소재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결벽증이나 죄책감으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나의경험을 리얼하게 느낄 줄 아는 것, 내 주변 사람들의 행동과 감정을 이해할 줄 아는 것, 그 속에 숨은 동기들을 통찰할 줄 아는 것.
이것들이 박완서의 힘이고 또한 우리가 갖출 수 있는 힘이다.
- P201

이 속물적인 세상도 나쁘지 않다. 비록 꼴찌들은 많고, 나는 쓸쓸하고 너도 쓸쓸하고, 우리는 서로의 쓸쓸함을 모르거나 모른 척하고, 우리는 비겁함을 숨기고, 작은 것에만 매달리고, 쓸데없이고집스럽고, 속물적으로 굴지언정, 그래도 좋다. 여전히 우리는 웃을 수 있다. 인간은 어차피 찌질하다. 그래서 살 만하다.
- P203

‘침착한 분노‘라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가슴속에서는 불이 나지만 차근차근하고 담백하게 그 분노를 풀어가는 것이다. 이 책이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아마도 이런 스타일 덕분이기도할 것이다. 뜨거운 이슈를 서늘하게 풀어냄으로써 저항감을 줄일뿐 아니라 독자의 머리에 선명하게 아로새겨지는 효과도 남다르다. 이런 스타일의 책은 당장의 ‘운동‘을 견인해내는 데에는 제약이 있을지 모르나, 공감대를 넓히면서 운동이 성공할 수 있는 저변의 의식 변화에는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 P223

정희진은 어릴 적부터 넌 참 특이하다‘라는 말에 상처를 받곤했단다. 나 역시 넌 참 이상하다‘라는 말에 상처를 받았다. 결코내가 이상했던 것이 아니라고 부르짖었던 것처럼, 정희진은 자신이 특이한 것이 아니라고 부르짖는다. 진실이라면, 이러한 이상이러한 특이함을 잃고 있는 우리 사회가 이상하다. 한 사회로서의 다양한 특이점을 잃고 있는 것이리라. - P228

나는 이자크 디네센(isak Dinesen)이라는 사람이 누군지 몰랐다.
다만, 이 한 문장이 깊이 다가왔다.

"모든 슬픔은,
말로 옮겨 이야기로 만들거나그것에 관해 이야기한다면,
참을 수 있다."
- P230

그래서 골랐다. 이 일곱 명의 작가들을, 성격이 완전히 다르고완벽히 다른 맛에 끌린다. 박완서의 따뜻한 서늘함을, 정유정의끝 모를 괴력을, 길리언 플린의 엄청난 야망을, 아멜리 노통브의신비로운 마력을, 리베카 솔닛의 슬프고 예술적인 리얼리즘을, 정희진의 스스로를 지킴으로써 세상으로 향하는 힘을, 이자크 디네센의 우화 속에 던지는 의문을 하나하나 좋아한다. - P237

왜 이렇게 세상은 이상할까?‘라는 원천적 의문으로 시작해서
"내가 이상한 건가?‘라는 자기 검증적 의문으로 전개되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행동적 의문으로 발전하다가드디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라는결단적 의문으로 발전하는 성장의 과정은 소중하다.
이 소중한 과정을 거듭하며 우리는 성장한다.
- P241

『침묵의 봄』은 1962년에 출간되자마자 선풍적인 관심과 함께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케네디 대통령이 그 열망을 받아들여 1963년 환경문제자문위원회를 처음으로 구성했으며, 그 노력의 결과 1969년 국가환경정책법안이 통과되면서 강력한 환경보호청(EPA, Environmental ProtectionAgency)이 발족됐다.
- P248

레이첼 카슨의 시적이면서도 침착한 문체는 자연에 대한 사랑과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안 들리는 소리를 들을 수있는 능력, 그것은 어릴 적 뛰어놀던 자연 속의 소리에 귀 기울였던 때문이 아닐까? 거대한 세력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우리가 이겨할 대상은 자연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자신 이라고 담담하게이야기할 수 있는 담대함,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책임감이었다.
- P252

사센 교수는 『축출 자본주의를 통해 세계 자본주의의 거대한메커니즘 하에서 인간이 사는 장소로서의 도시가 무너져 내리는현실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그것을 축출‘ 이라는 개념으로 정의한다. 재개발과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고소득층의 주택과 고급가게들이 도심으로 다시 들어오는 현상)으로 저소득층은 살던 동네에서 쫓겨나고, 프랜차이즈 상점들에 의해 골목의 작은 가게들이 쫓겨난다. 부동산 금융의 조작이 계속되면서 부동산 대출이 늘어나고 결국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서 겨우 마련한 자기 집에서도 쫓겨난다.
제조업들이 더 싼 노동력을 찾아 세계 곳곳으로 빠져나가는 와중에 중산층이 무너지고, 장소를 기반으로 하는 상권이 무너진다.
부자 나라와 부자 기업은 가난한 나라의 토지를 사들여 고수익 작물을 재배하며 그 나라 사람들의 먹을 터전을 빼앗고 환경을 황폐화시킨다.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내전이나 전쟁 상황만이 아니라먹고살 길이 없어서 국제 미아가 될 각오로 고향을 떠난다. 이른바 부자 나라에서도 중산층이 근근이 살아가며 계층 하락을 겪을뿐 아니라 사회에서 축출되어 급기야 사람들이 감옥에 수용되는 사태로 치닫는다. - P265

책 읽는 여자는 섹시하다, 책 읽는 남자는 섹시하다‘ 라고 앞에서 ‘나의 책 습관의 키워드‘에 썼다. 왜 섹시할까? ‘섹시하다‘의 의미가 무엇일까? 책을 읽는다는 행위의 의미는 ‘완벽히 홀로가 된다, 주체적이다, 자기 세계가 있다, 이야기가 있다‘라는 것 아닐까? 그래서 ‘유혹적이다, 그 세계에서 불러들이고 싶다, 나랑 무엇을 나눌 수 있을지 궁금하다!‘가 떠오르고 그래서 섹시한 것이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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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다양한 정보를 담은 세계 석학들의 신간이 쏟아져나오고 있다고 하여함부로 이를 인용하는 것은 이 바쁜 세상에 타인들에게 뭘 공부해야 한다는 부담을 주는 일이니 삼가야 한다. 죽은 글쓰기에서 인용을 통하여 전달하려는 것은 당신이 그 인용구를 알고 있다는 사실 자체뿐임을 명심하자.
- P75

열 권 스무 권짜리 책을 잔뜩 쌓아놓고 마루를 뒹굴거리며매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책을 읽던, 해가 영원히 지지 않을 것만 같던 8월 여름방학의 나날들이 그립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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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 비를 내립니다. 존재 자체만으로자기가 속한 세상을 더 좋게 만드는 거지요."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유명한 동화 때문인지 나무는 모든 것을 내주기만 하는 존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나무가 하는 모든 행위는 자신을 위한 것이다. 미얀마의 사막에서 비구름을 불러 모으는 나무도, 산 중턱에서 비를 내리는 침엽수도 실은 자신의 생존에필요한 수분을 얻기 위해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하지만매 순간 치열하게 살아온 흔적이 나무 자신뿐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을 이롭게 한다. 주어진 자리가 아무리 척박하더라도 최선을 다해 꿋꿋하게 살아간 결과가 나무 자신을 살리고, 다른 모든 생명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 P112

잘려 나간 나무들을 보며 가슴 아파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관점에서 느끼는 사사로운 감정이다. 자연 상태에서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나무가 성목이 되기 전에 목숨을 잃는다. 1미터는커녕 한별도 안 되는 빽빽한 공간에서 발버둥치다가 사라지는 그들의 역할은 일종의 ‘페이스메이커‘다. 
- P117

노자는 《도덕경에서 ‘천지불인天地不仁‘, 즉 하늘과 땅은 어질지않다고 말했다. 하늘과 땅은 그 안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을 그저 내버려 둘 뿐 보살피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연을 자애로운 어머니의품에 비유하는 것은 인간의 착각일 뿐 통계만 보더라도 노자의 말은 틀리지 않다. 모든 나무는 통계학상 평생을 통틀어 한두 그루의자손만 남긴다. 사람보다 훨씬 오래 사는 나무가 1년에 수천 개의씨앗을 맺는다고 가정했을 때 실로 어이없는 숫자다. 나머지는 대부분 싹이 트지도 못한 채 썩거나, 어렵게 싹을 틔워도 경쟁에 뒤처져 도태되고 만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엄청난 수의 씨앗과 나무가 줄지어 생명을 다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잘잘못을 따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저 자연의 이치일 뿐이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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