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하늘연못 > 책 읽는 것이 삶인 사람들의 이야기
책만 보는 바보 진경문고 6
안소영 지음 / 보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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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간서치', 즉 책만 보는 바보라고 불린 이덕무와 그의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덕무는 서자인 탓에 조선 후기 사회에서 딱히 할일도 없었던 불우한 지식인 입니다. 그런데 '책만 읽는 바보'라니 발을 잘라놓고 절름발이라고 놀리는 거 같아 안스러운 생각이 듭니다.

이 책은 우선 '옛글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다가옵니다. 인상적이게도 이덕무라는 낯선 조선사람은 '나'라는 1인칭으로 등장합니다. '책읽기의 정도가 무엇이냐?'라는 것은 해답이 없을 테지만 나의 변화, 삶의 드높임--이런 것과 관계가 깊다면, 책의 내용이 내가 되는 독서의 과정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책은 이덕무를 읽고 그 시대를 읽고 그것을 나로 다시 변용시키는 과정을 아름다운 글로 보여주고 그 덕택에 우린 인간 이덕무에 한결 더 가깝게 다가서게 됩니다.

책을 펼치면, 책읽기의 이로움을 이덕무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첫째, 굶주린 때에 책을 읽으면,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서 글귀가 잘 다가오고 배고픔도 느끼지 못한다.   

둘째, 날씨가 추울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의 기운이 스며들어 떨리는 몸이 진정되고 추위를 잊을 수 있다.

셋째, 근심 걱정으로 마음이 괴로울 때 책을 읽으면, 눈과 마음이 책에 집중하면서 천만가지 근심이 모두 사라진다.    

넷째, 기침병을 앓을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목구멍의 걸림돌을 시원하게 뚫어 괴로운 기침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

출세의 길이 막힌 궁한 처지의 인간 이덕무에게 닥친 굶주림, 추위, 근심 걱정, 괴로운 기침병!- 도대체 이 속에서 가망없는 글읽기를 계속 해야만하는 절박함이 무엇인지 우선 궁금합니다. 한편 이런 고통이 오히려 책읽기의 계기가 되고있다는 점에서 숙연해 지기까지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글의 저자 안소영 선생님도 특이한 이력이 있는 분입니다. 안소영 선생님의 아버지 안재구 교수님은 79년 남민전 사건으로 무기형 선고를 받아 복역하다 10년만인 88년 9월에 가석방 되시는데 이때 따님 안소영과 나눈 편지가 [우리가 함께 부르는 노래]라는 책입니다. 남민전 사건이란 무엇인가요? 76년 조직되어 반유신투쟁을 전개하고 민청학련 등 학생운동의 배후였던 비밀단체로 79년 84명의 조직원이 구속되었던 유신말기의 최대 공안사건이었습니다.

남민전 사건은 우리가 잘아는 홍세화 선생이 프랑스에 망명할 수 밖에 없게 만든 사건입니다.그동안 '남민전 -> 주사파-> 전교조 또는 한총련'이라는 구도로 악의 축으로 지명되었던 사건입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져서, 2006년 3월 관련자 29명이 민주화 운동관련자로 인정되었고, 홍세화선생은 돌아와서 열심히 활동하고 계시며, 심지어는 남민전 사건으로 5년동안 복역한 이재오선생은 한나라당 대표입니다.세월이 그렇게 하염없이 흐른 것입니다.

어쩌면 이덕무 선생의 인생에는 안소영 선생님의 아버지, 안재구 선생님이 투영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10년의 징역과 20년의 자격정지는 안소영 선생님도 함께 겪으셨을 터이기에 이덕무라는 출세가 거세된 불우한 지식인을 더욱 절절히 표현할 수 있었던 거 아닐까 생각합니다.이덕무가  한서를 이불삼고, 논어를 병풍삼으며, 맹자에게 밥을 얻고 좌씨에게 술을 얻는 장면은 세상살이의 혹독함과 더불어 결코 무릎꿇지 않는 지식인의 오기, 그럼에도 자식과 친구에게는 한없이 약해지는 인간에 대해 말해주고 있으며, 이런 장면을 지켜보는 우리는, 어느새 마음이 그윽해져서 눈가에 촉촉히 눈물이 고이게 됩니다. 그런데 그런 이덕무의 인생 뒤에 안소영 선생님 가족의 실루엣도 어른거리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이야기들의 무게가 그림자로 어리긴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마음이 무거워진다기 보다는 편안해집니다. 워낙 글을 유려하게 쓰셔서 문학책을 읽는 듯 하기도 하고, 강남미 선생님의 그림이 여유를 주기 때문입니다. 전혀 힘들이지 않고 어린 아이의 심정에서 죽죽 긋는 듯한 그림에서 우리는 소박함이야말로 정말 여유로운거고, 무언가 앞으로 앞으로만 내닫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이 일어납니다.

정말 좋은 글과 좋은 그림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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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 아이 블루?
마리온 데인 바우어 외 12인 지음, 조응주 옮김 / 낭기열라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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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여러분 주위 친구나 지인 중에 동성애자가 한 명도 없는 분? 어디 한 번 손 들어보세요. 아, 거기 몇 분 손 드셨네요? 네네, 지금 손드신 분들은 성격이 아~주 안 좋은 분들입니다. 반성하세요."

이는 '동성애 바로알기' 강의에 흔히 등장하는 농담 아닌 농담인데요, 아직까지 사태 파악을 못 하신 분들을 위해 잠깐 말씀드리죠. 세상 도처엔 동성애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눈에 '보이는' 동성애자들은 아주 적죠. 그들은 스스로도 동성애자임을 부정하거나, 극소수의 믿을 만한 사람들에게만 커밍아웃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당신에게 커밍아웃하지 않았다면, 당신은 동성애자에게 별로 신뢰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죠. 그러니 성격이 나쁘달 밖에요, 하하. 그렇다고 좌절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 농담은 어디까지나 세상에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동성애자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일 뿐이니까요. 그러니까, 당신 성격이 좋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만나는 사람마다에게 '당신 동성애자인가요?' 물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매우 무례한 데다, 때로 위험하기까지 한 일이니까요. 다만, 내 주위에 동성애자는 절대 없어! 라는 얼토당토않은 생각만은 말아주세요. 이 책의 표제작 '앰 아이 블루?'에도 나오는 것처럼 세상은 넓고 파란빛의 '이반'은 많답니다.

'앰 아이 블루?' 얘길 좀 해볼까요. 이 소설은 빈센트가 친구(?)한테 얻어터지고 요정 대부를 만나 세 가지 소원을 비는 이야기지요.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살해당한 사람이 요정 대부로 등장하지만, 어두운 작품은 아니에요. 다른 분들이 말씀하시듯 오히려 밝고 유쾌한 얘기지요. 하지만 처음부터 제 눈길을 끈 건 빈센트도 아니요, 요정 대부도 아닌 부치 캐리건이었습니다. '호모 새끼'라며 빈센트를 두들겨 팼던 그 아이 말예요. 새파란 하늘빛을 가진 것으로 판명 난 그 아이는, 자기도 무서웠을 겁니다. 아마 무서워서 빈센트를 더 괴롭혔을 거예요(물론 그렇다고 폭력이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닙니다만). 왜 무섭냐고요? 어렸을 때부터 '이성애'만을 세뇌 받고 자라게 되는 이 살벌한 이성애중심주의 사회에서 자신을 동성애자로 명명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스스로도 의식/무의식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겠지요. 그리고 그걸 가장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방식이 다른 동성애자 친구를 학대하는 것이었을 겁니다. 실제로 많은 동성애자들 스스로도 동성애공포증/혐오증을 갖고 있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슬픈 일이 있을까요?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무서워하고 혐오하는 일보다 더 슬픈 일이요? 전 모르겠습니다. 있다 하더라도, 내가 스스로에게 부정당하는 마당에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랍니까? '나'가 없는데.

이 책의 몇몇 작품과 옮긴이가 주장하는 바는, 동성애는 취향이나 선택이 아니라는 겁니다. 당신이 그저 이성애자인 것처럼 그들은 그저 동성애자인 것일 뿐이라고요. 하지만 사실 전 묻고 싶습니다. 선택이나 취향이면 왜 안 되지요? 문제는 '이성애'라는 한 가지 취향이나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지, 그들이 '원래' 그렇게 태어난 것인지 '주변 환경(무슨 환경? -_-)'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 어쩐지는 하등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동성애를 일종의 (선천적) 정신병으로 분류하거나 동성애자가 되도록 하는 DNA 인자를 규명하는 작업 따위에 제가 별 관심 없는 까닭입니다. 게다가, 자고로, 세상 많은 차별은 그러한 '분류'에서 시작되지 않았던가요?

이런 유의 발언은 아직 동성애자가 그 '존재'조차 인식되기 힘든 세상에서 좀 섣부른 것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나름의 까닭이 있어요. 저는 지금껏 저를 이성애자나 동성애자, 양성애자, 무성애자(asexual) 따위로 정의해본 적이 없거든요. 저는 이성애자일까요? 그럴지도 모르지요. 지금껏 사귄 사람들이 모두 남자였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만으로 제가 동성애자나 양성애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전 모르겠습니다. 저도 가끔 동성 친구에게, 남자친구에게서나 느낄 법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동성과 섹스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전 이성애자인가요?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서 전요, 사실 세상 사람들이 이성애자나 동성애자로 규정되는 게 싫습니다. 그냥 상대의 성이 뭐든, 자신에게 맞고, 서로를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하고 사랑하고 살면 안 되나요? 그러니까, 모두 양성애자(사실 세상에 두 가지 성만 있는 건 아니니까 삼성애자 내지 사성애자...)가 되면 어떨까 하는 거죠. 일부 사람들에게야 끔찍한 일이겠지만 글쎄, 옵션이 많아지는 건 좋은 일 아닌가요?

어쩌면 이런 말도 이성애자니까 할 수 있는 거라는 비판을 받을지 모르겠어요. 아니라고는 못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제가 하고 싶은 얘긴 분명해요. 성정체성이라는 건, 제가 여성이고 학생이고, 여성주의자이고 하는 정체성이나 마찬가지로, 나를 구성하는 하나의 정체성일 뿐이라는 거죠. '백수'라는 제 정체성이 저를 규정하는 큰 요소가 되지 않는 것처럼 성정체성 또한 제게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또 이와 마찬가지로, 동성애자는 동성애자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성애자 인권운동이 존재하는 까닭은, 굳이 그들 정체성의 일부를 침소봉대해서 그것이 그들 존재의 전부를 규정하는 양, 그리고 그것이 세상을 망치기라도 할 것인 양 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당신이 누군가의 딸이거나 아들이라고 할 때, 그 '딸'이나 '아들'로만 24시간, 혹은 평생을 살지 않는 것처럼 동성애자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당신이 이성애자라고 해서 당신의 모든 정체가 '이성애'로 구성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장담하건대, 동성애자들이 지금보다 조금 더 살기 편해진다고 해서 세상이 망하거나 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그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계셨다면 이제 그런 생각일랑 버리세요. 아님 남의 일 상관 말고 '너나 잘하세요.' 그럼 최소한 쓸데없이 그들에게 돌팔매질하는 사람 하나는 주는 셈이니까요.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무엇보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 책을 엮은이가 한 말과 같은 것입니다. 청소년 동성애자 여러분, 죽지 말아요. 10년 전 미국에서 이 책을 처음 내면서 엮은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십대 10명 중 1명이 자살을 기도하는데, 그 자살 동기가 3명에 1명꼴로 성 정체성에 관한 고민이라고 합니다. 이는 다시 말해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한 정보와 배려의 부족 때문에 위태로운 청소년이 전국 모든 교실에 한 명씩 있다는 뜻입니다(서문 중)." 옮긴이의 말을 굳이 따오지 않더라도, 청소년 동성애자들은 이중의 마이너리티입니다. 여성일 경우 삼중일 거고, 백인이 아닐 경우 사중, 장애인일 경우 오중...의 마이너리티네요. 후, 상상하는 것만으로 숨이 막힙니다. 어쨌든, 안 그래도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청소년이 자신을 동성애자로 명명할 경우, 문제는 성인의 그것보다 한층 복잡해질 겁니다. 제아무리 "저 동성애자예요!" 해도 어른들이 안 들어줄 확률이 크잖아요. 넌 아직 어려. 크면 달라질 거야 어쩌구(사실 '동성애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는 이럴 때를 위해 있는 말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는'에도 나오잖아요. '선택' 운운하는 어머니에게 딸은, 이건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고 답하지요. 이 말은 한 가지 옵션만을 강요하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유용해 보입니다. 안타깝게도 그 어머니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자신의 딸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긴 합니다만). 그러니, 안 그래도 살기 힘든 시기에 성정체성 문제까지 겹치니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저라도 하루에 열두 번 다 때려치우고 싶겠어요. 그래도, 그래도, 그래도, 죽지 말아요. 요새는 인터넷 커뮤니티도 있고요, 동성애자 인권운동 단체도 점점 늘고 있고요, 이런 책도 번역 돼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살아서 만나요.

요즘은 그래도 세상이 많이 바뀌어서, 자신이 게이나 레즈비언임을 즐겁게 인정하는 사람들/아이들이 늘고 있다고 하지요. 다행스런 일입니다. 하지만 아직도 어느 한편에는 여전히,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스스로 부정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해방된 성적 소수자가 많다 하더라도, 이성애중심주의 사회에서 억압 받는 성적 소수자들이 있는 한, 저는 기꺼이 이반들의 친구가 되겠다는 소박한 다짐을 해 봅니다. 이 책, "앰 아이 블루?"처럼요.


* 덧붙임 *
이 책 판매액 1%는 '청소년 동성애자 인권학교'에 기부된다고 합니다. 많이 사서 많이 읽고, 많이 선물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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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플레져 > 축, 탄생 - 아비의 세계를 던지다
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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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의 첫 소설집은 재밌지만 쉽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김애란의 첫 소설집에 수록된 아홉편의 소설들은 익숙한 소설의 문체와 어조와 생각들과 다르며 새로움을 읽는 즐거움이 있다. 소설속의 공간은 현재, 이 세상에 펼쳐진 모든 공간을 대상으로 한다. 우주를, 중생대를, 생물의 세계를 신비한 다큐멘터리의 세계가 아닌 자신이 움직이는 곳으로 끌어들였다. 충분히 슬퍼보이는 행색의 화자는, 지지리 궁상의 화자는, 절망과 나락에 빠진 화자는 정말 행복한 사람보다 더 경쾌하게 웃고 있다. 이 독특한 소설집을 정말 안 읽어볼텐가?

몇 편을 빼고 대부분의 소설들의 도입부에는 아주 먼 시선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건의 현장에 나가 있는 생생한 중계 카메라는 사건의 현장에 나가기 전, 카메라가 만들어지기 전, 카메라의 부품이 한 조각 완성되는 그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프롤로그 같은 단상들과 그 사건의 기원, 그 사건의 발화점 이전 부터 이야기를 아우르기 시작한다. 곧바로 들이대기, 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점점 그 사건으로 좁혀 들어가는 넓은 시야. 영화에서 사용되는 아이리스 기법 (한 씬을 끝내기 위해 닫히거나 세부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둥근 형태의 움직이는'마스크'. 또는 씬을 시작하기 위해 열리거나 세부 주변의 더 많은 공간을 드러낼 때 사용) 이 연상되는 핵심 사건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 전통적 서사 기법에 연연하지 않는 신인의 도전. 육화된 몸의 언어, 즉, 이골난 감정의 언어를 작가만의 언어로 재창조. 김애란 소설집을 관통하는 매력들이다.

최근 몇 년간, 유수의 계간 문예지에 자주 이름을 올려놓았던 김애란의 소설에는 집중형 인간들이 나온다. 그들이 집중하고 있는 것들은 열거법으로 수없이 나열하고 나열한다. 그 요소요소들을 모아보면 건장한 한 사람이 그려지는데 그 사람은 아주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는 너,이고 나,이다. 우울함은 버뮤다 삼각지대에나 버리고 왔을 법한 이 인물들에게 동조하고 킬킬거리는 일은 잦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사물과 욕망과 버릇과 습관과 경우의 수에 쉼표를 주어 열거해 본 후, 헤쳤던 나를 하나의 마침표에 도달하게 만든다. 그것에 대한 격렬한 감정의 낭비는 없다. 비웃음도 없다. 냉소도 없다. 진지 모드가 정답인양 행세하는 세상에서 왕따 당했다고 울지도 않는 담담한 사람이 활보를 한다. 그의 활보가 이렇게 반갑다니!

비로소 좁혀진 이 세상에 들어온 화자는 편의점에서, 지하철에서, 해변에서, 대폿집에서, 옥탑방에서 어떤 이론이나 이즘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기의 방식대로 자기의 삶을 조립하고 회고하고 정리한다. 세계를 주무대로 태어난 아이는 없는 아비를 그리워하고, 있는 아비에게 반항도 하고, 없는 듯 있는 아비의 얘기를 들어주기도 한다. <달려라, 아비>의 아비는 화자에게 어딘가에서 늘 달리고 있는 아비를 상상하므로써 아비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녀가 잠 못드는 이유가 있다> 의 아비는 어느날 나를 버리고 떠났다 다시 불쑥 찾아와 줄창 텔레비전만 본다. 한 방에서 각각 이불을 펼쳐놓고 누워있지만 아비는 텔레비전을 향해 누워있고 딸은 아비를 등지고 누워있다. 그녀는 텔레비전 소음에 잠 못이뤄 결국 텔레비전 선을 끊어버리지만!  금세 후회하고 출근 전 텔레비전 위에 십만원을 놓고 나온다. 아비는 십만원과 함께 사라진다.

아비는 아이를 버리기도 하는데 <사랑의 인사>의 화자는자기가 버려졌다는 걸 인식하기 전에 아비가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아이는 미아보호소에 들어가 아비를 찾는 방송을 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아비는 언제나 <달려라, 아비> 처럼 어디선가 달리고 있다는 것만으로 존재감을 느끼거나 <사랑의 인사> 에서 처럼 미스테리로 남는다. 아비 부재에 대한 비판은 아비를 비현실적인 상상의 공간으로 데려다 놓으므로써 아비에 대한 그리움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또한 아비를 발견하거나 만나게 되더라도 아비와는 소통하지 못한다. <달려라, 아비>에서는 편지로, <사랑의 인사> 에서는 수족관 너머 유리막을 사이에 두고 만나지만 아비는 자식을 알아보지 못한다. 자식은 조금 슬퍼하나, 아비를 원망하는 시츄에이션은 없다.

아비가 자식을 탄생시키는 것 역시 김애란의 '번역' 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비에게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느냐고 묻는 화자에게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의 아비는 거대한 모래 성기에서 불꽃놀이가 터질 때 태어났다고 말한다. 아이의 이해 여부는 상관없는 회고에 잠기는 것이다.  집 나간 자식을 기다리고, 그러다 고장난 가로등을 고치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지만 결국  손이 시려워 관두는 <스카이 콩콩>의 게으른 아비도 있다. 그러나 그 아비들은 몰염치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리움으로 점철된 영겁의 세계에 아비가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화자가 아비를 그리워하는 것은 부재하는 우주를, 곁에 없는 여기를 제외한 전 세계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 아비라는 중간 편의점을 통해 우주에서 떨어져 나온 나는 끊임없이 떠나온 곳을 갈망하게 되는데 우주로 대변되는 아비는 곧잘 나를 버리고 내친다. 그러나 나는 우주를 원망하지 않고 오직 그리움으로 가엾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기원이며 나의 기원을 부정하지 않는 긍정의 세계이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자신이 타인에게 요약되는 방식이 싫다. 같은 말이라도 '귓불'이 예뻤던 여자로 남고 싶지 '귀부랄'이 예뻤던 여자로는 편집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이 A를 그냥 A라고 말하지 왜 C라고 말한 뒤 상대방이 A라고 들어주길 바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번역, 그것은 그녀가 세상을 불신하기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배운 옹알이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잠 못드는 이유가 있다>

나는 내 사타구니 아래로 '북태평양'이 지나가는 것 같아 괜히 똥구멍이 시큰했다. 나는 그렇게 계속 쭈그리고 앉아 아버지와의 점심을 생각하고 있었다.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반면 어미는, 아비와 자식의 사이에 낀 어미는 아비에게 호령하고, 명령하고, 달리기를 시킨다. 어미는 자식에게 세상의 잣대가 가리키는 바른 교육을 시키려 애쓰지 않고 의식하여 에티켓을 가르치지 않는다. 남편과 분리된 아내로서의 어미도 조금 눈물을 흘리긴 하지만 김애란 소설속에서는 가장 쿨한 인물군이다. 독립적이고 강한 의지의 어미. 그 어미와 타협할 수 있는 아비란 없다. 곧 어미를 통해 또 한번 아비를 도드라지게 만든다.

아비와 아비를 기다리는 자식의 이야기의 반대편에는 결코 <노크하지 않는 집> 에서 처럼 이 도시에서 이름을 갖는 한 떨기 꽃의 존재보다는 익명으로 살아가는 걸 바라는 인물들도 있다. 단골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 몇 번 들렀을 때 내게 알은척을 하면 그 다음부터는 그곳에 다시 가지 않는 <나는 편의점에 간다> , 지하철에서 동창을 만났지만 서로의 이야기 보다는 다른 동창의 이야기만 나눈다. 기껏 이야기를 나눴는데 한 사람이 지하철에서 내리고 나서야 생판 남이었다는 <영원한 화자>, 창작, 소설에 대한 고민의 성벽 <종이 물고기>. 김애란 소설을 종일 읽으며 나는 재밌어 죽겠는 표정만 지었다. 아, 이렇게도 세상을 볼 수 있고 인간을 이야기할 수 있구나 싶어 감탄만 했다. 이 즐거운 소설이 제시한 골목길을 휘파람 불며 지난다. 다시 걷고 싶은 길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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