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플레져 > 축, 탄생 - 아비의 세계를 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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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김애란의 첫 소설집은 재밌지만 쉽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김애란의 첫 소설집에 수록된 아홉편의 소설들은 익숙한 소설의 문체와 어조와 생각들과 다르며 새로움을 읽는 즐거움이 있다. 소설속의 공간은 현재, 이 세상에 펼쳐진 모든 공간을 대상으로 한다. 우주를, 중생대를, 생물의 세계를 신비한 다큐멘터리의 세계가 아닌 자신이 움직이는 곳으로 끌어들였다. 충분히 슬퍼보이는 행색의 화자는, 지지리 궁상의 화자는, 절망과 나락에 빠진 화자는 정말 행복한 사람보다 더 경쾌하게 웃고 있다. 이 독특한 소설집을 정말 안 읽어볼텐가?
몇 편을 빼고 대부분의 소설들의 도입부에는 아주 먼 시선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사건의 현장에 나가 있는 생생한 중계 카메라는 사건의 현장에 나가기 전, 카메라가 만들어지기 전, 카메라의 부품이 한 조각 완성되는 그 시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는 것이다. 프롤로그 같은 단상들과 그 사건의 기원, 그 사건의 발화점 이전 부터 이야기를 아우르기 시작한다. 곧바로 들이대기, 에서 조금 멀리 떨어져 점점 그 사건으로 좁혀 들어가는 넓은 시야. 영화에서 사용되는 아이리스 기법 (한 씬을 끝내기 위해 닫히거나 세부를 강조할 때 사용하는 둥근 형태의 움직이는'마스크'. 또는 씬을 시작하기 위해 열리거나 세부 주변의 더 많은 공간을 드러낼 때 사용) 이 연상되는 핵심 사건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 전통적 서사 기법에 연연하지 않는 신인의 도전. 육화된 몸의 언어, 즉, 이골난 감정의 언어를 작가만의 언어로 재창조. 김애란 소설집을 관통하는 매력들이다.
최근 몇 년간, 유수의 계간 문예지에 자주 이름을 올려놓았던 김애란의 소설에는 집중형 인간들이 나온다. 그들이 집중하고 있는 것들은 열거법으로 수없이 나열하고 나열한다. 그 요소요소들을 모아보면 건장한 한 사람이 그려지는데 그 사람은 아주 익숙한 얼굴을 하고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는 너,이고 나,이다. 우울함은 버뮤다 삼각지대에나 버리고 왔을 법한 이 인물들에게 동조하고 킬킬거리는 일은 잦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사물과 욕망과 버릇과 습관과 경우의 수에 쉼표를 주어 열거해 본 후, 헤쳤던 나를 하나의 마침표에 도달하게 만든다. 그것에 대한 격렬한 감정의 낭비는 없다. 비웃음도 없다. 냉소도 없다. 진지 모드가 정답인양 행세하는 세상에서 왕따 당했다고 울지도 않는 담담한 사람이 활보를 한다. 그의 활보가 이렇게 반갑다니!
비로소 좁혀진 이 세상에 들어온 화자는 편의점에서, 지하철에서, 해변에서, 대폿집에서, 옥탑방에서 어떤 이론이나 이즘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기의 방식대로 자기의 삶을 조립하고 회고하고 정리한다. 세계를 주무대로 태어난 아이는 없는 아비를 그리워하고, 있는 아비에게 반항도 하고, 없는 듯 있는 아비의 얘기를 들어주기도 한다. <달려라, 아비>의 아비는 화자에게 어딘가에서 늘 달리고 있는 아비를 상상하므로써 아비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녀가 잠 못드는 이유가 있다> 의 아비는 어느날 나를 버리고 떠났다 다시 불쑥 찾아와 줄창 텔레비전만 본다. 한 방에서 각각 이불을 펼쳐놓고 누워있지만 아비는 텔레비전을 향해 누워있고 딸은 아비를 등지고 누워있다. 그녀는 텔레비전 소음에 잠 못이뤄 결국 텔레비전 선을 끊어버리지만! 금세 후회하고 출근 전 텔레비전 위에 십만원을 놓고 나온다. 아비는 십만원과 함께 사라진다.
아비는 아이를 버리기도 하는데 <사랑의 인사>의 화자는자기가 버려졌다는 걸 인식하기 전에 아비가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아이는 미아보호소에 들어가 아비를 찾는 방송을 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사라져버린 아비는 언제나 <달려라, 아비> 처럼 어디선가 달리고 있다는 것만으로 존재감을 느끼거나 <사랑의 인사> 에서 처럼 미스테리로 남는다. 아비 부재에 대한 비판은 아비를 비현실적인 상상의 공간으로 데려다 놓으므로써 아비에 대한 그리움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또한 아비를 발견하거나 만나게 되더라도 아비와는 소통하지 못한다. <달려라, 아비>에서는 편지로, <사랑의 인사> 에서는 수족관 너머 유리막을 사이에 두고 만나지만 아비는 자식을 알아보지 못한다. 자식은 조금 슬퍼하나, 아비를 원망하는 시츄에이션은 없다.
아비가 자식을 탄생시키는 것 역시 김애란의 '번역' 으로 그려내고 있다. 아비에게 자신이 어떻게 태어났느냐고 묻는 화자에게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의 아비는 거대한 모래 성기에서 불꽃놀이가 터질 때 태어났다고 말한다. 아이의 이해 여부는 상관없는 회고에 잠기는 것이다. 집 나간 자식을 기다리고, 그러다 고장난 가로등을 고치려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지만 결국 손이 시려워 관두는 <스카이 콩콩>의 게으른 아비도 있다. 그러나 그 아비들은 몰염치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리움으로 점철된 영겁의 세계에 아비가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화자가 아비를 그리워하는 것은 부재하는 우주를, 곁에 없는 여기를 제외한 전 세계를 그리워하는 것과 같다. 아비라는 중간 편의점을 통해 우주에서 떨어져 나온 나는 끊임없이 떠나온 곳을 갈망하게 되는데 우주로 대변되는 아비는 곧잘 나를 버리고 내친다. 그러나 나는 우주를 원망하지 않고 오직 그리움으로 가엾음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기원이며 나의 기원을 부정하지 않는 긍정의 세계이다.
그녀는 그런 식으로 자신이 타인에게 요약되는 방식이 싫다. 같은 말이라도 '귓불'이 예뻤던 여자로 남고 싶지 '귀부랄'이 예뻤던 여자로는 편집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사람들이 A를 그냥 A라고 말하지 왜 C라고 말한 뒤 상대방이 A라고 들어주길 바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번역, 그것은 그녀가 세상을 불신하기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배운 옹알이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녀가 잠 못드는 이유가 있다>
나는 내 사타구니 아래로 '북태평양'이 지나가는 것 같아 괜히 똥구멍이 시큰했다. 나는 그렇게 계속 쭈그리고 앉아 아버지와의 점심을 생각하고 있었다.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반면 어미는, 아비와 자식의 사이에 낀 어미는 아비에게 호령하고, 명령하고, 달리기를 시킨다. 어미는 자식에게 세상의 잣대가 가리키는 바른 교육을 시키려 애쓰지 않고 의식하여 에티켓을 가르치지 않는다. 남편과 분리된 아내로서의 어미도 조금 눈물을 흘리긴 하지만 김애란 소설속에서는 가장 쿨한 인물군이다. 독립적이고 강한 의지의 어미. 그 어미와 타협할 수 있는 아비란 없다. 곧 어미를 통해 또 한번 아비를 도드라지게 만든다.
아비와 아비를 기다리는 자식의 이야기의 반대편에는 결코 <노크하지 않는 집> 에서 처럼 이 도시에서 이름을 갖는 한 떨기 꽃의 존재보다는 익명으로 살아가는 걸 바라는 인물들도 있다. 단골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 몇 번 들렀을 때 내게 알은척을 하면 그 다음부터는 그곳에 다시 가지 않는 <나는 편의점에 간다> , 지하철에서 동창을 만났지만 서로의 이야기 보다는 다른 동창의 이야기만 나눈다. 기껏 이야기를 나눴는데 한 사람이 지하철에서 내리고 나서야 생판 남이었다는 <영원한 화자>, 창작, 소설에 대한 고민의 성벽 <종이 물고기>. 김애란 소설을 종일 읽으며 나는 재밌어 죽겠는 표정만 지었다. 아, 이렇게도 세상을 볼 수 있고 인간을 이야기할 수 있구나 싶어 감탄만 했다. 이 즐거운 소설이 제시한 골목길을 휘파람 불며 지난다. 다시 걷고 싶은 길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