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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78)

지난번에 미처 다루지 못한 책들을 마저 다루기로 한다. 어느새 '가정의 달'도 다 지나가버렸는데, 지난 토요일에는 아이의 유치원에서 준비한 '가족의 날' 행사가 우천으로 취소되는 바람에(우리 가족은 아침, 점심을 김밥으로 때웠다) 본의 아니게(!) 번듯하게 아이에게 뭐 하나 해준 것 없이 보내게 되어 새삼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걸 좀 만회하기 위해서 제일 처음 고른 책은 아동 정신분석에 관한 것이다(이게 아이가 좋아할 만한 책인가?). 

 

 

 

 

프랑스의 저명한 정신분석가 프랑수아즈 돌토의 <도미니크 이야기>(동문선, 2006)이 그것인데, 그녀에 관한 전기 <프랑수아즈 돌토>(도서출판 숲, 2003)는 이전에 한번 소개한 바 있다(돌토에 관한 보다 간랸한 설명은 <위대한 7인의 정신분석가>(백의, 1999)를 참조할 수 있다). 그리고 알고보니 그 사이에 돌토의 책이 몇 권 더 출간되었다. 한데, 기독교에 관한 책 두 권을 빼면, <어린이는 어떻게 어른이 되는가>(도서출판 숲, 2004)가 <도미니크 이야기>와 함께 아동 정신분석에 관한 책으로 분류될 수 있겠다(그 책에 주목하지 못했던 것은 내가 '부재중'에 출간된 탓이다).

해서, 이 세 권 정도를 좀 읽어주는 계획도 세워봄 직하다. 아이가 당장 정신이상 증세를 보이지는 않는다손 치더라도 아이에게 무관심했던 부모라면 한번쯤 읽어보면서 자기반성의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더불어, 아이들을 좀더 섬세하게 관찰하고 이해할 수 있는 '습관'을 기르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두번째 책은 스티븐 컨의 <사랑의 문화사>(말글빛냄, 2006)이다. 원제는 'The Culture of Love'(1992)인데, '빅토리아 시대부터 현대까지'란 부제를 달고 있기에 '사랑의 문화'가 됐다.  일단 책이 눈에 띄는 건 (번역서라 좀 부풀려졌다 하더라도) 768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 그리고 저자가 이미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1880~1918>, <문학과 예술의 문화사 1840~1900> 등 인상깊은 문화사 서적을 써낸" 전력을 갖고 있기에 신뢰할 만하다는 것. 문화사 방면으론 '서양 문화사 500년'이라는 큼직한 부제를 달고 있는 자크 버전의 <새벽에서 황혼까지 1500-2000)도 눈에 띄는 신간이다. 두 권 합해서 1,500쪽이 넘는다. 하긴 500년의 문화사를 정리한다고 하니까 그만한 분량은 필요했을 법하다. 스티븐 컨의 책들과 함께 '교양 문화사 사전' 정도의 쓰임을 가질 수 있다. 

책은 "빅토리아 시대부터 현대까지 여러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에 나타나는 사랑의 역사를 추적해 본다. 정확히는 <제인 에어>가 출간된 1847년부터 <채털리 부인의 연인>의 1934년까지 87년간의 시기를 무대로 삼고 있다. 기다림을 시작으로 만남, 사랑의 언어, 입맞춤, 질투, 결혼식을 거쳐 종말에 이르기까지 사랑을 하면서 마주치는 기본 요소들을 키워드로 삼고, 이러한 특정한 상황이 문학/예술 작품에서 어떻게 표현되고 있는지 살펴보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당장은 특별히 사랑할 사람이 없는 이들도 애완견 돌보는 시간을 쪼개서 한번쯤 읽어볼 만하겠다.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1500년 서양사를 네 가지 혁명으로 구분한다. 종교혁명과 군주혁명, 자유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이 그것. 책은 각 부마다 각 혁명이 일으킨 인간관의 변화가 문화사를 이끌어온 원동력임을 보여준다. 이와 함께 르네상스·바로크 미술·낭만주의·사실주의·모더니즘 등의 예술 사조와 마키아벨리와 스위프트·바흐와 모차르트 등의 세기를 주름잡은 인물들이 다채롭게 묘사된다. 지은이는 500년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인간의 욕망, 즉 인간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의 문제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욕망의 요소로 해방, 개인주의, 원시주의, 추상, 분석, 세속주의, 과학만능주의 등의 키워드를 든다. 그래서 이 책이 풀어내는 서양 문화사는 이들 요소의 다양한 비율에 따른 배합 결과이다." 그러니까 단순한 '통사'는 아니고 그걸 저자 나름대로 꿰는 틀을 갖고 있다는 얘기이다.

 
 
 
 
 
 
 

세번째 책은 히틀러를 사랑한 여인, 혹은 히틀러가 사랑했던 여인, 어느쪽이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20세기 최고의 다큐멘터리 감독이란 평과 나치의 핀업걸이라는 혹평이 교차하는 걸출한 여성 감독 겸 사진작가 레니 리펜슈탈(1902-2003)의 전기,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마티, 2006)이다. 650쪽 정도 되니까 이 또한 전기로서 듬직하다.

사실은 나도 수잔 손택의 <우울한 열정>을 통해서 리펜슈탈을 알게 됐을 만큼 별로 주목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만들었나는 기록영화의 목록들은 '아!'라는 감탄사를 자연스레 유도한다(그녀의 영화는 <죽기전에 꼭 봐야 할 영화 1001>에 포함돼 있으며, '미디어미학'의 중요한 탐구 대상이다). 알라딘에 전기에 관한 소개가 생략돼 있기에, 간단히 사전적인 인물 소개를 옮겨온다.

-나치 운동을 힘차고 화려하게 극화한 1930년대 기록영화로 유명하다. 베를린에서 그림과 발레를 배웠고 1923~26년 유럽순회 무용공연을 가졌다. 자연, 특히 산악의 경관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독일영화의 한 형태인 '산악영화'에 출연하면서 영화와 관련을 맺기 시작했고 마침내 이 방면의 영화감독이 되었다. 1931년 레니리펜슈탈영화사를 만들었고, 1932년 <푸른 불빛 Das blaue Licht>의 각본을 쓰고 감독·제작·주연을 맡았다.

-나치당의 지원을 받아 신체의 아름다움과 아리안족의 우월성을 찬양하는 영화들을 감독했다. <신념의 승리 Sieg des Glaubens>(1933)는 아돌프 히틀러가 주문해 제작한 단편 영화이며 <의지의 승리 Triumph des Willens>는 1934년 뉘른베르크에서 열린 나치 전당대회를 주의깊게 관찰한 중요한 기록영화로서 나치당의 결속을 강조하고 독일민족에게 당의 지도자들을 소개했으며 나치의 힘을 세계에 과시했다. 그리고 <올림픽 경기 Olympische Spiele>(1938)는 1936년에 열린 올림픽 경기를 <민족의 축제 Fest der Völker>와 <아름다움의 축제 Fast der Schönheit>라는 2부로 편성해 영화화한 것으로 스튜디오에서 만든 감명깊은 음악과 음향효과를 만들어 찬사를 받았다.
 
-리펜슈탈의 영화는 풍부한 음향 효과, 뛰어난 편집, 새벽의 아름다운 정경이나 산악지대, 독일의 전원생활 등을 영화에 아름답게 담아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녀가 만든 영화가 나치를 돕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뒤 블랙리스트에 올랐지만 나치와의 전쟁공범죄가 공식적으로 씻겨진 뒤인 1952년 다시 영화에 복귀하여 일찍이 전쟁 때문에 제작을 중단했던 영화 <저지대 Tiefland>를 완성했다. 1973년 그녀의 아프리카 사진집 <누바족의 최후 Die Nuba>가 출간되었다.(*손택의 리페슈탈론은 이 사진집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책에 대한 동아일보(06. 05. 27) 이기우 기자의 리뷰.

-그녀는 언제나 흰옷을 입고 있었다. 어디에 있든 바로 눈에 띄었다. 정열적이었고 자신감에 넘쳤다. 도도함과 오만함은 그녀의 성격이었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을 원했고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사랑했다. 화려한 외모로 거장들을 ‘손에 넣었다’. 요제프 괴벨스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그녀의 작업에는 수상한 냄새가 난다….”

-당시 독일 여자들은 나치의 규율에 따라 비스마르크가 격찬한 3K, 아이(Kinder) 교회(Kirche) 부엌(K¨uche)에 만족해야 했으나 그녀만은 예외였다. 사전 약속 없이도 히틀러를 둘러싼 두꺼운 호위망을 마음대로 넘나드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녀와 히틀러는 둘 다 몽상가였다. 신화를 사랑했다. 둘은 의기투합했다. 그리고 마침내 전쟁이 끝났을 때, 히틀러를 지지하던 그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을 때 그녀만은 법정에서 이렇게 외친다. “나는 히틀러를 믿었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날 죽여요!”

-이 책은 극단의 세기였던 20세기를 ‘금지된 열정’으로 살았던 레니 리펜슈탈의 일대기다. 유망한 무용가이자 매혹적인 영화배우였고 20세기 최고의 천재감독이었던 여인, 그러나 ‘악마(히틀러)의 감독’이자 ‘나치 핀업걸’로 기억되는 한 여인의 처연한 삶의 초상이다. 리펜슈탈이 히틀러의 요청으로 만든 베를린 올림픽 다큐멘터리 영화는 20세기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낭만적인 동시에 서사적이고, 신비로우면서도 현실감 넘치는 이 영화는 당시의 카메라 기술로 촬영했다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다.

-영화비평가들은 신음하듯 뱉었다. “서정의 적(敵)으로부터 나온 이 서정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리펜슈탈은 영화를 통해서 정말 히틀러의 사악한 제국을 선전했는가? 그녀의 예술적 삶을 ‘우울한 열정’이라고 표현했던 수전 손택은 그녀의 다큐멘터리가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저항할 수 없는 지도자에 대한 숭배를 통해 육체와 공동체의 재탄생을 찬양하고 있다며 ‘파시스트 미학’이라고 규정했다(*손택은 <올림픽 경기>와 <누마족> 사이의 '연속성'을 지적한다). 리펜슈탈은 전쟁이 끝난 뒤 법정에서 “처벌할 수 있는 범죄가 없다”는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고독하게 버려진다. 그녀는 비공식적인 블랙리스트에 올려졌고 다시는 영화를 만들 수 없었다.



-물론 그녀의 책임도 있었다. 리펜슈탈은 존재 자체가 너무나 현란해서 그녀의 등장은 마치 파시스트의 악령이 되살아온 것과 같았다. 자신을 비난하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지는 와중에 열린 재판정에 그녀는 몸에 착 달라붙는 관능적인 승마복에 굽이 15cm가 넘는 샌들을 신고 요염하게 걸어 들어서기 일쑤였다. 그녀에 대해서는 애초부터 온건한 견해가 불가능했다. 끔찍하거나 위대하거나! 천재이거나 악마이거나!

-그녀는 정치적으로 순진했다. 아니, 백치였다. 그녀의 삶을 좇으며 시종 그녀에 대해, 인간의 나약함에 대해 진한 연민을 드러내온 저자는 독백하듯 읊조린다. “그 광란의 파시즘 시대에 정치적 무지야말로 가장 큰 범죄는 아니었을까….”

해서 파시즘 미학을 이해하기 위한 자료로서도 그녀의 전기는 일독의 가치를 충분히 갖는다(파시즘의 '우울한 열정'은 '원시적 열정'이기도 하다는 그녀는 생생하게 보여주는 게 아닐까? 그녀가 갖고 있었던 건 '정치적 무지'가 아니라 그러한 '정치적 무의식'으로서의 '정치적 예지'가 아니었을까?). 

 
 
 
 
 
 

 

네번째 책은 '세계화 시대 라틴 아메리카 영화'를 다룬 임호준의 <시네마, 슬픈 대륙을 품다>(현실문화연구, 2006)이다. 영화의 변방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활기차고 진보적인 영화운동의 산지, 라틴 아메리카의 영화에 대해서 이만한 규모로 다룬 책이 더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도 일단 주목에 값하는 책. 소개에 따르면, "세계영화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1950년대 중반 신영화운동 이후, 독창적인 미학으로 치열하게 현실을 담아내 온 라틴아메리카 영화에 대한 안내서. 현대라틴아메리카영화의 화제작들을 총망라하여 그 속에 담긴 사회적 무의식을 추적했다."



조금 부연하면, "브라질, 멕시코, 쿠바, 아르헨티나, 칠레,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등 라틴아메리카 영화 60여 편에 대한 소개와 130여 장의 사진이 함께 실려 있다. <루시아>, <오피셜 스토리>, <달콤쌉싸름한 초콜릿>, <이 투 마마>, <모터사이클 다이어리> 등 각각의 영화들이 나오게 된 라틴아메리카의 역사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상황을 입체적으로 보여준다." 책의 표지로 사용되고 있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의 이미지처럼, 영화를 타고 가는 라틴 아메리카 대륙 일주기 정도로 생각하면 좋겠다. 가는 김에 라틴 아메리카에 관한 책 몇 권도 같이 끼고 가면 더 좋을 듯.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아이리스 장의 난징대학살에 관한 기록 <역사는 힘 있는 자가 쓰는가>(미다스북스, 2006)이다. 이전에 <난징대학살>(이끌리오, 1999)로 한번 출간된 적이 있는데,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던 듯하다. 아무튼 새로이 출간된 이 끔찍한 기록을 나는 바로 주문해서 입수했지만 두 달이 지난 지금도 펼쳐보지 못하고 있다(이 거리낌은 이 페이퍼가 늦춰지는 데도 한몫했다). 해서 일단은 동아일보 김희경 기자의 리뷰를 옮겨놓는다.

동아일보(06. 05. 20) 1937년 12월 중국 난징(南京)은 ‘살아 있음이 불길하게만 여겨지는 곳’이었다.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7주간 학살한 중국인은 26만∼35만 명. 눕혀 놓으면 난징에서 항저우(杭州)까지 35km나 이어질 숫자이고 위로 쌓는다면 빌딩 74층 높이다. 더 끔찍한 것은 일본군이 희생자들에게 최대한의 고통과 수치를 주면서 학살했다는 사실이다. 남성은 총검술 연습, 목 베기 시합의 대상이었고 2만 명이 넘는 여성이 강간당했다. 중국계 미국인으로 다큐멘터리 작가인 저자는 1997년 이 책을 펴낸 뒤 일본 우익세력의 끝없는 협박으로 우울증에 시달리다 2004년 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난징 대학살이 규모와 잔혹함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2차 대전 후의 냉전적 상황 때문이다. 미국은 소련에 맞서기 위해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이어갔고, 일본은 다른 패전국이 받은 조사를 피할 수 있었다. 중국과 대만은 일본과 교역 물꼬를 트려고 경쟁하느라 전쟁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일본 역시 자신의 과거와 대면하기를 거부했다.



-책에 실린 사진과 학살의 사실적 묘사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참혹하다. 그러나 이 책의 장점은 실상을 알리는 것을 뛰어넘어 처참한 사건을 통해 드러난 인간의 본성과 아이러니에 주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일본의 만행이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추적하면서 인간의 문명이 얼마나 종잇장처럼 얇은지, 권력이 얼마나 쉽게 10대 소년들의 천성을 변질시켜 살인 병기로 만들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나는 이러한 야만성이 '그들'만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과연 우리는 절대적인 무능력/불가항력에 처해 있는 타자를 학대/살해하는 대신에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반복하자면, 우리의 문명이란 얼마나 얇은 것인가!).

-드라마틱한 사람들의 인생 유전도 책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다. 난징에서 중국인을 살리기 위해 헌신했던 ‘중국의 오스카 쉰들러’ 욘 라베는 난징의 나치당 리더였다. 그는 독일에 돌아가 난징의 실상을 알리다 게슈타포에게 체포됐고 전후에는 나치 전력 조사를 받으며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비참한 말년을 보냈다.

-난징 대학살은 내년이면 70주년을 맞는다(*나는 책을 내년쯤에나 읽어야겠다). 저자가 책을 쓰는 동안 마음 깊이 새겨 두었다는 경고는 이 책의 존재 이유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과거를 되풀이한다.”

평범한 인간들의 비범한 잔악성을 상기시켜주는 책으로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나치 독일의 아우슈비츠 수용소 소장 루돌프 헤스의 회고록이 있다. 한국일보의 리뷰를 옮겨온다.

한국일보(06. 05. 20) 헤스의 고백록 "나는 악마가 아니였다"

-헝가리 40만명, 프랑스 11만명, 네덜란드 9만5,000명, 슬로바키아 9만명…. 아우슈비츠 소장 루돌프 헤스(1940~1947)가 기억하는 학살 유대인 숫자다. 그러나 “나 자신은 얼마나 많은 유대인이 죽었는지 알지 못하며 심지어 어림짐작도 할 수 없다”고 고백한 것을 보면 그가 죽인 유대인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다. 실제 1940년 5월부터 나치가 망할 때까지 살인공장 아우슈비츠에서 죽어 나간 유대인, 소련군 포로, 집시 등은 250만명을 넘는다. 그러니 아우슈비츠를 만들고 가스 살상법을 개발해 집행한 헤스를 악마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가 남긴<헤스의 고백록>을 읽으면 그는 악마 같지가 않다. 정신 이상자도, 성격 파탄자도 아니다. 어려서는 아버지로부터 누구에게라도 정중하게 대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간호사와 나눈 첫사랑은 전 생애에 걸쳐 그를 인도해준 싹이 됐다. 가정에서는 훌륭한 아버지요 착한 남편이었다. 직무에 충실했고 술, 담배를 하지 않았으며 교양 수준도 높았다. 그 때문인지 그는 수기의 끝에서 자신이 “악인은 아니었다”고 적었다.

-그래서 놀랍다. 광인이나 정신 착란자였다면 특이한 예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인간이 그 같은 대량 학살을 해치웠다는 점이 더 무섭다. 나치 독일이 단지 폭력적 강제 만이 아니라 헤스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자발적 참가와 행동에 의해 존재했다면, 나치 독일에서 행해진 그 끔찍한 일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지 않을까.

이건, 아렌트의 표현을 빌면, '악의 평범성' 혹은 '악의 진부성' 문제이다. 인간이 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까, 란 경악은 이 문제를 숙고하는 데 더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그럴 수가 있다는 가정하에 다시 생각해야 한다. 더불어 우리가 정말 인간일까? 라고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다. 넌 네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니?

한겨레(06. 05. 19) ‘그래, 넌 네가 인간이라고 생각하니?’(So You Think You’re Human?) 원제는 이처럼 다소 도발적이다. 도발적이지 않다면, 당혹스럽다. <우리가 정말 인간일까?>(아카넷 펴냄)라는 번역본의 제목은 원제를 상당히 점잖게 누그러뜨린 셈이다. 인간답지 않은 인간, 그러니까 사람 같지 않은 사람을 향해 질책하듯 던지는 말은 아니다(아니, 사실은 그런 질책의 뜻을 담은 질문인 것일까).

-런던대 지리학 교수인 역사가 펠리페 페르난데스-아르메스토가 쓴 이 책은 ‘인간’이라는 개념의 정의와 범주, 그 정합성과 타당성을 따져 묻고자 한다. ‘인간’의 실체에 접근하는 방식은 다종다기하겠지만, 역사학자인 지은이가 동원하는 방법론은 역시 역사적 접근법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정의되어 왔는지를 돌이켜 보면서 그 타당성과 설득력 여부를 점검하는 것이다.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을 의심하거나, 자기가 혹시라도 인간 아닌 다른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고 짐작해 본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인간이다’라는 것은, 인간들 사이에서는, 너무도 자명하여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의 진술일 터이다. 그런데도 지은이는 왜 새삼스럽게 인간의 정의를 문제 삼고 나섰는가. 자명한 것 속에 함정이 있으며, 자명한 것이 왜 자명한지를 따져 묻는 것이야말로 진정 학문적 태도임을 그가 믿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을 바탕에 깔고 그는 인간에 관한 역사적 정의의 타당성을 점검한다.

-인간을 동물과 구분짓는 전통적인 요소 중 대표적인 것으로 도구와 언어, 문화 등이 있다. 그러나 영장류 동물학의 최근 연구 성과들은 이런 특징들이 인간만의 몫이 아님을 속속 밝혀 내고 있다. 침팬지가 나뭇가지를 개미집에 집어 넣어 거기에 달라 붙은 개미를 떼어 먹는 유명한 사례는 제인 구달의 선구적 연구 덕택에 보편적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단단한 나무 열매를 쪼개기 위해 두 개의 돌을 이용하는 원숭이는 물론, 조개 껍질을 깨기 위해 돌을 이용하는 수달을 보더라도 도구 사용에 관한 인간의 독점권은 인정하기 어렵다.

-언어 역시 인간만의 몫으로 주장하기 어렵다. 벌·개미와 돌고래, 박쥐 등의 고유한 의사전달체계는 인간과 다른 방식의 ‘언어’로 볼 수 있으며, 영장류들을 훈련시켜 얻은 결과는 그들이 인간의 언어를 습득할 능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말을 알아듣는 개와 앵무새의 사례 역시 참조할 만하다.

-언어와 도구가 아닌 ‘문화’라는 고급스러운 현상으로써 인간의 고유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매력적인 생각이다. 그러나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려 할 때 수컷 침팬지들이 모여 똑같은 방식으로 몸을 흔들고 발을 구르는 ‘비 춤’의 사례 보고라든가, 죽은 토끼나 바퀴벌레를 종일 머리에 얹어 두고 만족스러워하는 암컷 보노보들의 행위는 영장류들에게도 나름의 문화가 있다는 강력한 반증이 된다.

-일본 코시마 섬의 짧은꼬리원숭이 집단에서 목격된 행동의 혁신과 보편화 과정은 특히 놀랍다. 관찰자들이 ‘이모’라는 이름을 붙인 천재 암컷 원숭이가 농부에게서 얻은 고구마를 개울물에 헹구어 흙을 씻어 내고 먹기 시작하자 그 방법은 이내 다른 동료 원숭이들에게 확산되었다. 이모는 또 인간들이 해변에 뿌려 주는 밀에 모래가 묻어 먹기에 힘들자 밀과 모래를 함께 물에 뿌리고는 물 위에 떠오르는 밀만을 건져 먹는 방법을 개발해서 역시 무리들에게 전파시켰다.

-이런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지은이는 네안데르탈인에 대한 일종의 ‘복권’을 주창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현생 인류의 조상과 상당 기간 동안 공존하다가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수준의 물질문명을 이루었으며 죽은 이를 매장하고 그 위에 꽃을 뿌리는 식의 문화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도 일부 학자들은 네안데르탈인이 현생인류의 조상에 비해 여러 모로 열등했다는 주장을 하며 그에 어울리는 증거를 찾기에 열을 올린다.

-지은이는 이런 태도에서 흑인을 ‘인간과 원숭이의 중간적 존재’로 보고자 했던 19세기 인종주의의 그림자를 본다. “과거에 인간과 사실상 구분되지 않는 인간 아닌 종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인간’이라는 것이 고정된 불변의 실체가 아니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게다가 생명공학과 로봇공학의 눈부신 발전은 인간에 대한 기존 관념의 불가피한 수정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변화는 그야말로 ‘인간적 가치라는 신화’를 보존하고 확산하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것이 지은이의 간곡한 제언이다. 그야말로 사람다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우리가 애써서 기왕의 인간 개념의 타당성 여부를 따지는 것은 인간적 겸손와 위엄을 잃지 않으면서 ‘이웃 동물’들의 권리와 행복 역시 침해하지 않는 평화적 공존의 지혜를 얻기 위해서다. 가령 동물들 역시 자기 영역에서 쫓겨나지 않을 권리, 잡히거나 괴롭힘을 당하거나 고통을 당하거나 무언가를 빼앗기는 실험을 당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 권리를 지닌다는 동물 권리운동가들의 주장에도 새겨 들을 바가 있다는 것이 지은이의 생각이다. 인간은 모든 생명체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것이며 다른 모든 생명을 자기 목적에 맞게 이용하거나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식의 인간 중심주의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오늘날 인간 개념의 경계는 분명하지도 보편적이지도 않다(…) 그 개념은 아직도 놀랄 만큼 확장될 여지가 있다”는 지은이의 결론은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 사이의 평화로운 공존에 대한 이같은 염원을 바탕에 깔고 있다.(최재봉 기자)

So You Think You're Human?

 

 

 

 

 

 

 

 

 

 

 

06. 05. 28 - 0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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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최근에 나온 책들(74)

 

 

 

 

최근에 나온 책들 가운데, 가장 강조할 만한 책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뉴욕 지성계의 여왕, 대중 문화의 퍼스트레이디, 새로운 감수성의 사제"로 불렸던 수잔 손택의 <강조해야 할 것>(시울, 2006)이다. "2004년 작고한 20세기의 대표적 예술평론가이자 작가인 수전 손택의 에세이 41편을 모"은 책으로 "고전이 된 첫 에세이집 <해석에 반대한다> 출간 이후 40여년만에 발간된" 것이며, "그녀의 마지막 에세이집"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서, 책은 <해석에 반대한다>(이후, 2002),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현대미학사, 2004), <우울한 열정>(시울, 2005)에 이어지는 것이다. 지난번에 이 연재에서 다루었던 <우울한 열정>을 미처 다 읽기도 전에 <강조해야 할 것>이 도착했으니 대략 난감이다. 덥석 집어물 형편도 아니면서 무시할 수도 없으니 말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미국 지성계의 여왕'이란 별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만한 여성 지성인이 많지는 않다는 것. 그리고, <강조해야 할 것> 이후에 (그녀의 소설들이 남아있지만) 더 나올 만한 책도 없다는 것.  

친절한 소개나 리뷰를 미리 참조하고서 책을 손에 잡는 게 유익할 듯싶은데, "총 3부 구성으로, 해박한 교양 지식과 다독으로 유명한 지은이답게 수많은 예술 작품에 대한 글들, 그리고 '행동하는 지성인'으로서 지은이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글들로 채워져 있다. 1부 '내가 본 것들'은 영화와 회화, 오페라, 연극, 사진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2부 '내가 읽은 것들'에서는 그녀 스스로 정전으로 생각하는 작가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돈키호테, 롤랑 바르트 이외에도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을 상당수 다루고 있어, 독자들에게는 예술에 대한 안목을 한층 더 넓힐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고. '안목을 한층 더 넓힐 수 있는 기회'도 되겠지만, 맥락을 알 수 없기에 헤맬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되겠다.

그리고, "3부 '그곳과 이곳'에서는 수전 손택의 사적인 이야기가 그녀의 사유와 얽혀들어간다. 첫 출간 30년 후 <해석에 반대한다>의 현재적 효용성은 어떠한가에 대한 논의, 전쟁중인 사라예보에서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한 에피소드와 번역의 문제 등에 대한 이야기를 펼치고, 그 가운데 지식인의 의미와 그에 따르는 책임을 날카롭게 설파한다." 나라면 3부부터 읽기 시작하겠다.

 

 

 

 

두번째 책은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삼인, 2006). 주말에 각 언론에서 생각보다 많이/크게 다루어서 의외라고 생각한 책이기도 하다. 지난 2004년에 출간된 <도덕의 정치>(백성, 2004)에 대해서는 비교적 잠잠했었기 때문이다(<도덕의 정치>는 당시 러시아로 떠나기 전에 내가 마지막으로 산 책으로 기억된다. 한편 알라딘에는 이 책의 저자가 '조지레이 코프'로 잘못 기입돼 있다). 레이코프는 자주 공동작업을 하는 마크 존슨과 함께 현대 인지언어학계를 이끌고 있는 대표적인 언어학자이다(그러니까 포스트-촘스키의 선두주자쯤 된다). 별로 읽을 짬은 내지는 못했지만, 그가 출간한 모든 책을 나는 챙겨둔다(물론 번역서들이다). 참고로 말하면, 러시아에서도 몇년 전부터의 그의 책들이 하나둘 소개되고 있다.

언어학자의 정치론이 그다지 낯설지 않은 것은 물론 촘스키 때문이다. 하지만, 그래도 변형생성문법의 창시자와 인지언어학의 거목은 관점이 약간 다를 수도 있지 않을까? 나의 일차적인 호기심은 그것이다. 물론 공통점도 있을 텐데, 그건 당연히 '언어(말)'에 대한 관심일 터(우연찮게도 같이 나온 촘스키의 최신간의 제목은 <여론조작>(에코리브르, 2006)이다). 

소개의 말을 잠깐 따라가본다: ""문제는 말[언어]이다." 노엄 촘스키와 함께 세계적인 언어학자로 꼽히는 지은이가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미국 정치를 바라보며 내놓은 결론이다. 왜 말일까? 그건 말이 유권자들이 세계를 보는 프레임[생각의 틀]을 결정짓고, 이는 곧 정치적 입장과 투표 성향을 드러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언어의 문제에 주목하여 미국 민주당의 선거 승리전략에 대해 실제적인 지침들을 조언으로 제공하고 있다. 미국에서는 2004년 출간 이후 민주당원들의 입소문을 타고 20만 부가 넘게 판매되었고, 정치와 언론에서 '프레임' 개념이 새로을 각광받게 만든 책이기도 하다." 어쩌면 정치언어학 도서로 분류될 수도 있지 않을까?



계속 따라가보면, "지은이의 전작 <도덕의 정치>를 기반으로 책이 내놓는 주장은 진보 진영이 보수 진영을 바라보는 관점을 새로이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수 진영의 실패와 거짓말을 공격하고 진실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유권자들이 진보 진영에 투표해 줄거란 환상은 버려야 한다는 것. 유권자들은 자기 이익이 아닌 정체성에 맞추어 투표하며, 그들의 프레임에 맞지 않는 진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평범한 서민들이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겉으로 보기엔 이해 불가능한 현상을 명쾌하게 증명해낸 것." 우리의 경우엔, 언론학자 강준만이 언어학자였다면 썼을 만한 책처럼 보인다. 더불어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언어학자의 사회적 책임'이다.

"터미네이터를 연기한 배우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주지사 선거에서 승리한 배경에 대한 분석을 비롯하여 각종 미국 정치 담론에 말과 프레임의 힘이 어떻게 관여하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쉬운 내용 구성 안에서 언어학과 정치학이 흥미로운 결합하여 한국 정치 환경을 해석하는 데에도 강력한 시사점을 던져준다"고 하니까 선거의 계절을 맞이하여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그런데, 내 <도덕의 정치>는 어디에 처박혀 있는 것일까?

 

 

 

 

세번째 책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 <소년의 눈물>, <디아스포라 기행>으로 잘 알려진" 저자 서경식의 <난민과 국민 사이>(돌베개, 2006). "지은이가 90년대 중반부터 발표한 시론·시평들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고 하니까 분량에 비해서는 부담감 없이 읽을 수 있겠다 싶지만, 그건 글의 형식상의 문제이고 내용상으로는 책의 제목 만큼이나 무겁고 갑갑할 것이니 미리 각오하고 읽는 편이 낫겠다. "'"난민'도 '국민'도 될 수 없는 추방자(디아스포라)의 감수성을 지닌 재일조선인인 지은이의 주변을 둘러싼 일본과 한국 사회의 정치와 역사에 대한 사유를 담았다"는 책.

난민 얘기가 나오니까 떠오르는 건 작년 봄에 <씨네21>(2005. 05. 13) '유토피/디스토피아'란에 실렸던 이진경 교수의 칼럼이다. '난민이 필요한 나라'라는 제목. 이 참에 한번 더 읽어본다.

-난민, 어느 한 나라에서 정부에 항거하거나 지배체제를 전복하려던 꿈을 꾸다 체포를 피해 도망쳐야 했던 사람들이다. 망명, 여전히 전복의 꿈을 버리지 못해서, 혹은 전복을 꿈꾸던 삶을 등질 수 없어서 자신의 나라를 뒤로 한 채 이국 땅을 떠도는 행위다. 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자리, 자국 정부가 자신에게 할당한 지위에서 벗어나 떠도는 이탈자들이고, 새로운 체제나 삶의 방식을 만들어내고자 꿈꾸는 탈주자들이다. 그들은 최소한 자국 정부와 혹은 자신의 국가와 맞서는 위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정부와 맞먹는 지위를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나라 외부에서 살기에, 한 사회의 내부에선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안에서는 들리지 않는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그 내부에선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만들 수 없는 것을 만들어낸다. 물론 그들의 시계가 망명하던 시간에 멈추어버린, 그래서 그렇게 할 능력을 잃어버린 경우도 적지 않지만 말이다. 또한 그들은 자신이 사는 나라의 외부자고 망명자, 난민이기에, 그 나라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들리지 않는 것을 듣는다. 이런 점에서 그들은 어디서도 외부자다. 내부에, 그 친숙함에 안주하려는 것을 방해하고, 익숙함의 관성에 따라가는 것을 막는다.

-이렇게 그들은 자신의 나라, 혹은 자신이 사는 나라에 긴장을 만들어내고 그 안에 없는 것을 밀어넣는다. 그래서 무언가 다른 것이 만들어지게 한다. 그들은 언제나 저주받은 삶, 피곤하고 힘든 삶을 강요받지만, 그것을 좀더 나은 삶으로 되돌려준다. 비록 그것이 의도된 것은 아니라 해도 말이다. 망명자나 난민의 이러한 역할은 그들이 꿈꾸는 것을 실현하는가 여부에 따르기보다는 차라리 어디서든 외부자라는 그들의 존재 자체에 기인하는 것이다. 따라서 망명자나 난민이 아예 없는 세상보다는 차라리 원하는 누구나 쉽게 그런 외부자가 될 수 있는 세상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 망명이 자유로운 사회. 그리고 되돌아오는 귀국도 자유로운 사회.(*'망명이 자유로운 사회'에서도 '망명자'는 여전히 '망명자'인가?)

-이런 점에서 보자면, 망명이 꼭 정치적 핍박과 목숨을 위협하는 억압에 의해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국적을 던져버리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 한번 안 해본 사람이 어디 있을까? 일전에 내가 아는 한 선배는 붕괴한 소련으로 늦은 유학을 떠나면서 자신의 소련행을 “문화적 이유에 의한 망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는 귀국할 수 없게 하는 위협이 없다고는 해도, 이런 망명이 결국에는 우리가 사는 사회에 무언가 다른 것을 만들어낼 것은 분명하다.(*그런 소련행을 환영할 '러시아인'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요즘 러시아에는 스킨헤드 경계령이 다시 떨어졌다.) 

-이른바 ‘임시정부’를 자처한 망명자들에 의해 수립된 나라, 가장 저명한 정치지도자가 오랜 망명생활을 한 끝에 대통령이 된 과거를 가진 나라, 그러나 난민협정에 가입하기 전에는 물론, 뒤늦게 가입한 뒤에도 10년이 넘도록 단 한명의 난민도 받아들이지 않았던 나라, 그리고 미얀마의 망명자들처럼 정치적으로 곤혹스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난민보다는 불법체류자 다루듯 처리하는 나라, 목숨이 걸린 문제를 서류에 동그라미 치는 ‘서면회의’로 처리하는 나라, 난민된 사정이나 현재의 처지에 귀기울이기보다는 그가 돌아가도 결국 죽지는 않을 거라는(사람은 정말 얼마나 죽기 어려운 것인지!) 생각으로 안심하고 추방명령을 내리는 나라, 그 나라가 바로 우리가 사는 나라다. 이 나라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혹시 윤리적, 혹은 도의적 이유에 의한 망명자들인지도 모른다. 정말 난민이 필요한 나라다.

칼럼을 읽을 당시에 몇 마디 촌평을 페이퍼로 써볼까 하는 생각을 가졌었지만 다른 일들에 치여 흐지부지됐었다. 칼럼의 반어적인 문제제기에 일부 공감하면서도 내가 가졌던 소박한 의문은 '난민'과 '망명자'자 과연 같은 부류인가? '한번쯤 국적을 버리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 한번" 해본 사람과 난민/망명자는 같은 부류인가? 하는 점. 그런 의문은 '노마드적 사유(노마디즘)'와 '노마드'는 구별되어야 한다는 나의 기본적인 입장에서 비롯된다. 물론 저자 서경식이 다루는 건 '재일 조선인'이라는 진짜 '난민', 혹은 국민도 난민도 아닌 어중간한 '난민'이다. 구체적인. 그리고 현실적인.     

책소개를 따라가자면, "총 3부 구성으로, 1부는 본격적인 시론과 시평에 앞서 지은이의 정치적 관점과 윤리적 감수성을 개괄할 수 있는 짤막한 에세이들을 실었다. 2부에서는 식민지배 시기부터 재일조선인의 과거를 구성하는 주요 사건들을 돌이켜보며 이들을 타자로 취급하고 차별하는 일본과 한국의 문제를 강도높게 비판한다. 국민의 영역 안에 들어와야만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부터가 오류라는 것."

 



 

 

"책 전반에서 드러나는 근대 국가 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은 또다른 디아스포라들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진다. 3부에선 윤이상, 에드워드 사이드 등 국가주의의 폭력에 저항한 이들의 삶과 죽음을 다루고 애도한다. 국가에 의해 배제당하고 추방당하고 희생되는 이들의 모습을 통해 과거사의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 우리 안에 숨어있는 근대의 문제를 극복한다는 것에 대한 고민을 독자들에게 던져준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는 책이다.

 

 

 

 

네번째 책은 팔 다리가 없는 장애를 딛고 화가가 된 여성, 앨리슨 래퍼(1965- )의 자서전 <앨리슨 래퍼 이야기>(황금나침반, 2006)이다. "태어남과 동시에 가족과 사회로부터 쏟아지던 편견과 배척을 이겨내고, 독창적인 예술가이자 당당한 엄마로 살아가게 된 자신의 인생이야기를 들려준다."그 래퍼가 23일(오늘) 방한했다.



'살아있는 비너스'라고 불리는 "앨리슨 래퍼는 양쪽 팔이 모두 없고 다리는 무릎 아래가 없이 넓적다리뼈에 발이 달려 있는 형상의, 이른바 '해표지증'이라는 기형을 갖고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얼마나 살 수 있을까를 모두가 의심했던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자신의 벗은 몸에 빛과 그림자를 이용하여 조각 같은 영상을 표현하는 구족화가이자 사진작가로 데뷔하게 된다." 그러니까 책은 그냥 한 예술가의 자서전이다.



그녀는 "이혼한 뒤인 1999년에 임신을 했고, 아이 역시 같은 장애를 가질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주변에서 출산을 반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의지로 생명을 지키기로 결정하고, 건강한 남자아기를 낳았다. 임신 9개월의 앨리슨 래퍼의 모습은, 트라팔가 광장에 역사적 영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조각상의 모델이 되었다. 모성 및 장애에 대한 편견에 도전하는 앨리슨의 예술작품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2005년 세계 여성 성취상'과 대영제국국민훈장(MBE)이 그녀에게 수여되었다."

한마디로 대단하다. 더불어 드는 생각은 장애나 콤플렉스가 없는 미래 '생명복제시대'의 인간이란 '위대함'의 조건을 박탈당한 '평균인'이 아닐까란 것이다. 포스트-휴먼 시대의 초상은' 완벽하지만 위대하지는 않은' 인간들의 군집은 아닐까? 

 

 

 

 

끝으로 다섯번째 책은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나비와 전사>(휴머니스트, 2006). 중앙일보의 리뷰는 "거침없는 '역사 비빔' 스페셜"이란 타이틀을 뽑았는데, 이 '비빔(퓨전)'에 있어서 저자의 솜씨는 단연 독보적이란 걸 우리는 이미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그린비, 2003)에서 확인한 바 있다. 저자가 다시 3년만에 내놓은 책은 "시공간, 인간, 성(性), 몸, 앎, 글쓰기 등을 주제로 2001년부터 5년여간 써온, 한국 근대성의 기원과 다양한 양상들을 살피고 탈근대의 미래를 논의하는 11개의 글을 실었다."

"책 전반에서 지은이가 시도하는 접근법은 근대, 18세기, 탈근대 이렇게 세 가지 시간대를 서로 충돌시키고 넘나드는 것이다. 즉 근대의 담론을 이질적인 다른 두 시간대의 담론에 '밀어넣음'으로써 근대성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 "푸코가 고고학적 탐사를 무기로 근대성의 지축을 뒤흔든 전사라면, 연암은 그 위를 사뿐히 날아올라 종횡으로 누비는 나비다!" '나비와 전사'라는 제목은 이 접근법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거기에) 다산, 이옥, 옹녀와 변강쇠, 대장금, 그리고 허준, 노신, 달라이라마 등 18세기와 탈근대 담론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지니 소문난 잔치상으로 충분하다. 챙겨먹는 건 독자의 몫이다.

 

 

 

 

다소 예외적이지만, 여섯번째 책도 꼽아본다. 존 릭던의 <1905 아인슈타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랜덤하우스중앙, 2006). 1905년, 러시아에서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고, 우리에겐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해에 아인슈타인은 무려 5편의 세기적인 논문들을 써냈는데, 그 논문들 이야기란다. "당시 물리학의 상황배경을 설명하고, 아인슈타인이 이들 논문의 아이디어를 생각해내고 발전시키기까지의 과정을 함께 보여주어, 아인슈타인 특유의 사고방식과 독창성을 엿볼 수 있도록 했다. 에필로그에서는 1905년 이후 물리학계의 흐름을 다루어 아인슈타인이 미친 영향을 실감하게 해준다." 과학사 산책으로 더없이 유익해 보인다.

게다가 책은 "수식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본문 중간에 삽화를 삽입하여 일반인들도 큰 어려움 없이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아인슈타인의 인간적인 면보다는 학자로서의 면모에 집중하고, 상대성이론 이외에 아인슈타인이 남긴 과학적 업적들을 대거 다루어, 우리가 그동안 잘 알지 못했던 아인슈타인의 진면목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 여타의 '아인슈타인'까지 같이 챙겨서 읽어볼 만하다. 

 

 

 

 

그리고 일곱번째 책은 러시아 특파원으로 활동한 일본인 기자 에가시라 히로시의 <푸틴의 제국>(달과소, 2006). 몇년 전에 나온 <푸틴 자서전>(문학사상사, 2001)과 함께 현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 그의 '제국'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자료가 될 듯하여 꼽아둔다. 나로선 불가피한 '전공관련서' 범주에 들어가기도 하고(얼마나 새로운 내용이 들어가 있을지는 궁금하기도 하고 미지수이기도 하다).

소개를 약간 옮겨오면, "지은이는 일본 특파원 기자로 활약한 경험을 바탕으로 푸틴 정권의 권력 메커니즘을 파헤친다. 미디어와 의회를 장악함은 물론, 소련 해체 이후 엄청난 부를 획득한 신흥 재벌(올리카키)들이 차지한 자원사업을 다시 국영화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푸틴 정권의 활동상이 자세히 그려진다. 이와 함께 러시아와 체첸 간 분쟁이 푸틴 정권에게 의미하는 바는 어떤 것인지, 남북정당회담에서 드러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놓지 않으려는 러시아의 야심 등이 흥미롭게 펼쳐진다."

상대적으로 우리의 주변 4강 중에서 미, 일, 중에 대한 전문가들은 많다. 당신의 '희소가치'를 좀 살리기 위해서라면, '러시아'에 좀더 투자할 필요가 있다. 러시아 연구의 미답지들은 그 광활한 영토만큼이나 널려 있기에 5년만 공부하면, 자기분야의 국내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것이 러시아이다. 당신에게 러시아를 권한다.

06. 04.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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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레니 리펜슈탈을 만날 수 있는 작품들

 나치시대 히틀러와 함께 한 여인들의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소개하고 있는 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히틀러의 정부 에바 브라운을 비롯하여 제 3제국을 살았던 여성인물들의 삶을 다각적으로 파헤치고 있다. 당대를 살았던 독일 상류사회 여성의 삶과 정신세계를 함축하고 있으며, 흥미롭고 신선한 내용으로 감추어진 역사의 이면을 색다르게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눈과 마음을 자극한다.영혼을 저당 잡힌 히틀러의 여인들! 그녀들은 히틀러를 위해 저택, 고급 자동차, 값비싼 보석은 물론 식탁보에 이르기까지 아낌없이 바쳤을 뿐 아니라 히틀러를 위해서라면 절대적인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1923년 4월 3일, '뮌헤너 포스트' 지는 넋이 나간 표정으로 히틀러의 연설에 귀를 기울이는 여인들에 대한 기사를 실으면서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히틀러에게 바치는 여성 골수 신봉자들을 신랄하게 비꼬았다. 물론 나치는 폭력집단을 동원해서 이 신문사를 박살내버린다.
지금 독일에서는 제 2차 세계대전의 과정에서 가정에 충실하고 헌신적인 희생자로 묘사되었던 독일여성상을 뒤집고 나치정권의 열렬한 협력자로 독일 여성을 그리고 있는 TV 다큐멘터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독일 민족을 파멸로 이끈 배경에는 히틀러를 숭배한 많은 여성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히틀러는 여성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연설을 할 때는 맨 앞줄에 열광적인 여성을 배치하는 등 독일 여자들이 자신에게 '메시아적 매력'을 느끼도록 유도했으며,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남자보다는 여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정작 히틀러의 여성상은 정치나 사회에서 여성이 지도적인 위치에 올라서는 것을 절대로 용납치 않았다. 여성은 물레 앞에 앉아 실을 뽑거나 우월한 게르만인을 생산하는 도구로서의 역할만 인정되었을 뿐이다.
물론 이런 여성상에서 벗어나는 여자들도 있었다. 바로 핵심 권력층 주변에 있던 여인들이다. 이 책은 핵심 권력층 여인들의 삶을 통해 이들이 당시 일반 여성들과 얼마나 다른 삶을 살았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당시 이 '우아한' 여인들의 생활은 철저한 베일 속에 가려져 있었다. 입 소문으로 흘러 다니는 이야기도 잘못 입에 올렸다가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 책에서는 모두 여덟 명의 여성들을 증언대에 세운다. 사진관 점원으로 히틀러를 만나 1944년 총통 관저 방공호에서 결혼반지를 끼고 함께 자살하기까지 숨겨진 정부情婦 노릇을 해야 했던 에바 브라운, 삼촌 히틀러의 정부라는 소문과 함께 의문의 권총 사살로 삶을 마감했던 겔리 라우발, 세계적인 여성 영화감독으로서 히틀러와 염문을 뿌렸던 레니 리펜슈탈, 남편을 버리고 전설적인 전투기 조종사인 헤어만 괴링과 사랑에 빠진 스웨덴 귀족 카린 괴링, 여섯 명의 자식과 함께 히틀러를 따라 자살로 생을 마친 막다 괴벨스 등이다.
사랑의 광기로 죽어간 여성들을 통해 역사적 진실을 캐나가는 흥미로움과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수전 손택의 세 번째 에세이 모음집
“수전이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뉴욕 지성계는 그녀를 만들어냈어야 했을지도 모른다.”는 평을 받았던 수전 손택은 작년 12월 28일 뉴욕 메모리얼 슬론 케터링 기념 암센터에서 골수성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전후 비평의 전통적 태도를 버리고 예술 연구의 급진적 관능주의를 지지하며 내용이 아닌 형태를 중요시하고 고급과 저급의 경계를 “가장 파괴적으로 허물었”다는 그녀 특유의 날카롭고 시원스런 목소리는 이제 그녀의 남겨진 유작으로 만나보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손택에 뒤따르던 숱한 수식어가 말했던 것처럼 그녀에게는 특유의 풍부한 교양과 박식함으로, 때로는 거만하고 거침없이, 때로는 인간적이고 순수한 시선으로 소외되고 절망적인 것들에 따뜻한 시선을 담아 되살려내는 비범함이 가득했다. 수전 손택은 1960년대 미국 문단에 등장한 이후 철학과 예술, 문학 비평부터 영화, 연극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인 영역을 넘나들며 그녀만의 독자적인 안목과 간결하고 명쾌한 문장을 선보여 뉴욕 지성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특히 에세이 모음집으로는 세 번째 책인 이 책 ''우울한 열정 Under the Sign of Saturn''(1980)은 1972년에서 80년 사이, 손택이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던 정신적 절정기에 쓰인 글들이다.
앙토냉 아르토, 엘리아스 카네티, 레니 리펜슈탈, 발터 벤야민, 그리고 한스''위르겐 지버베르크, 거기에 더해 폴 굿맨과 롤랑 바르트와 같이 문학, 연극, 영화, 사진 등을 아우르는 다양한 영역에서, 우울함과 광기, 고통, 천재성 사이를 배회했던, 그리고 자신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일곱 명의 서구 아방가르드 지식인들에 대한 인물 평전이자 수전 손택 자신의 정신적 자서전이다.
'우울한 열정'이 담고 있는 글과 특징
첫 번째 에세이집 '해석에 반대한다'(1966)로 뉴욕 지성계에 스타덤에 오른 수전 손택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잘 알려지지 않거나 잘못 알려진 작가들을 오로지 “광기와 그릇된 소리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존중”하고, 그들의 예술을 옹호하기 위해 집필 작업에 몰두하게 된다. 거기에는 우울과 고독으로 거리를 배회하는 발터 벤야민도 있었으며, 오만하지만 순수한 윤리적 열정의 소유자 폴 굿맨, 치열한 광기로 시대와 불화한 앙토냉 아르토와 병적 아름다움 집착하는 레니 리펜슈탈도 있었다.
이 에세이들은 발표되는 족족 당시의 문화 지형을 상당히 바꿔놓았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에 등장하는 일곱 명의 인물들은 서구 현대예술사의 다양한 물결에서도 가장 ‘얄궂은’ 유형에 속한다. 그야말로 “학계와 전문가들의 용(龍)”이 지키는 지적 전문 분야에서 “학술적 무단침입자”로 살아온 사람들이자, 뿜어져 나오는 광기와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재료 삼아 자유와 예술, 그리고 삶의 진실에 관한 현란한 수완을 발휘한 예술가들이다. 하지만 동시대 대중과 문화예술계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버거워, 아방가르드적 난해함과 그노시스적인 광기로 이해될 뿐인 사람들. 그러한 그들을 손택은 그녀 특유의 냉정하고도 합리적이며, 애정 어린 시선으로 이들의 언어를 예술의 영역에 포함시키려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손택의 궁극적인 목표는 ‘열정’이 베인 아방가르드적인 언어의 확장에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원제로도 사용된 발터 벤야민에 관한 에세이 '토성의 영향 아래'는 사실 이 책에 시종일관 흐르는 기조이자 주제적인 글로 벤야민의 삶과 글을 작가의 ‘기질’이라는 측면에서 분석한 독특한 글이다. “나는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났다. 가장 느리게 공전하는 별, 우회와 지연의 행성……” 벤야민이 (심리학적 개념을 경멸하여 쓴) 점성술적 개념으로 동원해 스스로를 규정하듯 자신을 우울한(saturnine) 사람으로 생각했고, 향후 그의 모든 주요 연구와 글쓰기 과제에 그런 그의 기질은 투사된다. 벤야민은 프루스트, 카프카, 칼 크라우스 등과 심지어는 괴테에서도 토성적(우울한, 혹은 음울한) 기질을 발견하게 되는데, 특히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구체화된 산책자(flneur) 상에 19세기적 감성을 결부시키면서, 자기 자신의 감성도 도시와의 몽환적이고 예민하고 미묘한 관계에서 대부분 이끌어”내게 된다.
초현실주의라는 그릇으로 담아내기가 어려울 만큼 버거운 인물 앙토냉 아르토에 관한 글(이 책에서 가장 긴 글인) 아르토에 다가가기는 원래 아르토 저작 선집의 소개 글로 쓰인 글로 아르토에 관한한 가장 권위 있는 글로 손꼽힌다. “연극이라는 예술 분야에 아르토가 미친 영향은 엄청난 것이어서, 요즘 서유럽과 미국에서 상연되는 진지한 연극의 줄기를 아르토 전과 아르토 후 이렇게 둘로 나눌 수 있을 정도다.”라는 손택의 평가는 아직까지도 연극에서의 아르토의 성과를 가늠하는 기준이 될 만큼 유명하게 인용되는 문장이다. 손택은 이글에서 “작품에서나, 삶에서나” 아르토의 “결과로서의” 모든 것들을 실패했다고 규정하지만 “완성된 예술 작품이 아닌 독특한 존재, 모종의 시학, 사고의 미학, 문화의 신학, 수난의 현상”과 같은 새로운 예술적 시도를 “‘문학적 모더니즘이라는 영웅적 시대의 마지막 위대한 본보기”로 칭송한다. 난해하기 그지없는 아르토를 그에 버금가는 난해한 문체로 해설한 것은 손택 자신이 글에서 주장하고 있듯, 읽을 수 없는, 본질적으로 흡수할 수 없는 작가를 본질은 무시하고 제멋대로 먹기 좋게 요리해 피상적으로 다루는 현대 비평의 경향을 비난하며 아르토가 “문학과 역사에 엄청난 분량의 고통을 남”겼듯 독자들에게도 일정한 분량의 고통을 전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레니 리펜슈탈에 관한 글인 '매혹적인 파시즘'과 한스''위르겐 지버베르크에 관한 ''지버베르크의 히틀러''는 한때 우리 사회를 달궜던(그리고 현재까지도 의미 있는) ‘우리 안의 파시즘’의 원형적인 논의로 이해할 수 있는 흥미로운 글들이다. '매혹적인 파시즘'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아주 이질적인 두 개의 제시물, 즉 수단 남부의 마지막 부족에 관한 리펜슈탈의 유명한 사진집 ''누바족의 최후''와 “공항 잡지 판매대나 ‘성인’ 서점에서 살 수 있는 값싼” 포르노 사진집 ''SS 제복''을 병치해 비교하면서, 이들 제시물이 갖는 공통적 근저에는 “아름다움을 병적으로 추구”한 파시즘적 탐닉이 숨어있다고 분석한다. 손택은 그 증거로 리펜슈탈의 나치시대의 작품(영화 ''신념의 승리''나 ''올림피아'' 등)의 근저에 흐르는 “영웅에 대한 대중의 복종”과 찬양이 전후 누바족에 대한 사진집 근저에 담겨 있는 “육체적 기술과 용기를 드러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누르는 것이 공동체 문화의 통합의 상징인 사회, 싸움에서의 승리가 ‘사람의 인생의 주요한 열망’인 사회를 찬양”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으며, 더 나아가 ''SS 제복''에서 드러나듯이 나치식의 제복과 가죽 채찍에 숨은 “제복에 대한 환상, 즉 공동체, 질서, 정체성, 능력, 정당한 권위, 정당한 폭력”의 상징도 전혀 다른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계속해서 '지버베르크의 히틀러'는 “충성을 유고하고 강요하는 고귀한 명작의 범주에 속”하는 1인극 영화 ''히틀러, 독일 영화''를 다룬 글이다. “우리가 없었다면 히틀러가 어떻게 있을 수 있었겠는가'”라는 도발적인 내레이터의 반복을 발견되듯이, 지버베르크는 나치즘을 독일의 악마성에서 기원된 것으로 보는 토마스 만의 관점을 수용한다. 손택에 따르면, 지버베르크는 히틀러가 야기한 수천만 명의 살해가 역사적 괴물의 등장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보며, “히틀러 사후에 여전히 살아있는 일종의 히틀러적 본성, 현대 문화에 유령처럼 존재하는 것, 현재를 가득 채우고 과거를 재구성하는 변화무쌍한 악의 원칙을 환기”시킨다고 말한다. 하지만 지버베르크의 영화는 결코 이러한 ‘실재’에 기반해 “정보의 표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치유적 이상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밖에도, 사회와 대립하는 개인 및 군중심리를 탐구한 ''군중과 권력''의 저자이며 “은둔하는 기인의 상으로서, 20세기의 상상력 속에서의 삶에서나 문학에서나 가장 큰 성취이자 순교자의 모습을 한 진정한 영웅” 카네티에 관한 글 '열정의 정신'도 주목할 만한데, 특히 손택의 이글이 발표(1980)된 바로 다음 해, 스웨덴 한림원은 그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머지 짧은 글인 '폴 굿맨에 대하여'와 '바르트를 추억하며'는 고인들의 부고를 접하고 고인의 생전 모습을 회상하며 쓴 애정과 애도, 존경이 어우러진 우아한 감상의 표본과도 같은 글들이 포함되어있다. 이들은 모두 손택의 말처럼 “최후의 심판에서, 최후의 지성인, 현대 문화의 토성적 영웅, 잔해, 반항적 시각, 몽상, 억누를 수 없는 우울함, 내리깐 눈을 지닌 인물들로 자기가 여러 ‘위치’를 가졌음을 설명하고 최대한 공정하고 비인간적으로 지성인의 삶을 그 최후까지” 옹호받아 마땅한 우리시대의 지성이다.

 모계 사회로의 흐름이 느껴지는 21세기에도 대한민국에는 호주제가 건재하고 여성을 학대하는 인간의 잔악성은 동물들 안에서 유일하다. 경제권을 확보하고 발언권이 커졌다고 해도 보이지 않는 불평등 속에 고스란히 노출된 여성들은 그 스스로도 모른채 이런 현실에 젖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잘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현실 중에 하나인 것이 바로 여성의 위대성. 이 책은 9년 동안 자료를 모은 역자의 노력으로 탄생하였다. 삶의 치열함, 사회적 성취 등으로 일세를 풍미한 20세기의 여성 35명을 중심으로 여성사의 도도한 흐름을 잡아내었다. 여성 역할 모델의 한 조각을 찾아낸 기쁨이 크지만 이것으로 만족하면 안된다는 경각심마저 느껴진다.
1권은 사회운동가와 예술가 20명을 소개한다. 1993년 『불멸의 여인들』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되었던 책을 수정, 보완한 내용이다. 형형하고 맑은 눈빛의 흑백 사진 속 여성들과의 만남이 반갑고 가슴 뿌듯하다. - 영상의 미술사 레니 리펜슈탈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은 세상에 널리 알려진 50여 명의 여성인물을 소개한다. 이 책에 소개된 50여 명의 여성들은 역사를 이끌어간 여성들의 극히 일부분이지만 남성들에 비해 빛나지 않는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담당해온 수많은 여성들의 이름을 대변해 준다.
1부는 남자 못지않은 정치력과 카리스마를 보여준 선덕여왕이나 엘리자베스 1세와 같은 여성 정치인들을, 2부에서는 인류를 감동시킨 예술에 자신의 일생을 바친 예술가들을 소개한다. 3부는 세상 속에서 적극적으로 활약한 여성들의 이야기가, 4부에는 여성과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다. 독자들은 흥미로우면서도 진지한 그녀들의 삶을 돌이켜 보면서 인류 역사의 반을 담당해온 여성들의 위대한 업적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저자가 지난 일년여 동안 간 주간한국에 「역사 속 여성이야기」라는 이름으로 연재한 칼럼을 하나로 모은 책이다.이 책에 실린 여성들은 저자가 1여 년 간 주간한국에 「역사 속 여성이야기」라는 칼럼을 연재하면서 만났던 여성들이다. 저자는 역사 속에 그 흔적을 아로새긴 이들 여성들과 만나면서 그녀들의 인생과 업적, 또 그녀들의 여성으로서의 고뇌들을 재발견하고, 공감하고 영향받았다. 그녀들로 인해 한 개인으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역사를 이끌어가는 한 축인 여성의 위치와 입장, 그리고 앞으로의 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기도 했다. 여러분도 함께 생각해보면 어떨지.
이 책에 실린 50여 명의 여성들은 남성들에 비해 빛나지 않는 자리에 서서 자신의 역할을 묵묵히 담당해온 수많은 여성들의 이름을 대변해주는 존재들이다. 그녀들로 인해 인류 역사의 반을 담당해온 여성들의 위대한 업적의 흔적들을 조금이나마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이들 여성들은 때론 남성들보다 더한 카리스마로 세상을 바꾸어가기도 했고, 여성의 섬세함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만들어주기도 했다. 때론 세상의 가장 그늘지고 낮은 데에서 핍박받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던지기도 했다. 남성들과 더불어 함께 역사를 만들어간 여성도 적지 않다.
역사 속에 그 흔적을 아로새긴 이들 여성들과 만나면서 그녀들의 인생과 업적, 또 그녀들의 여성으로서의 고뇌들을 재발견하고, 공감하고 영향받았다. 그녀들로 인해 한 개인으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역사를 이끌어가는 한 축인 여성의 위치와 입장, 그리고 앞으로의 가야 할 길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보기도 했다.
이 책에 소개된 50여 명의 여성들은 역사를 이끌어간 여성들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더 많은, 더 다양한 분야에서 역사를 이끌어가는 축이 되고 힘이 되고 도화선이 되는 많은 여성들이 있다. 기회가 닿는다면 그녀들의 인생도 만나고 싶다. -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버린 천재 레니 리펜슈탈 

 어느 순간부터 소설보다 전기를 읽는 것이 더 재미있어졌다는 저자 최애리는 그동안 ‘여자와닷컴’에 연재했던 여성들의 전기를 엮어 《길 밖에서》 《길을 찾아》라는, 각각 독립된 책이면서 두 권이 하나가 되는 특별한 책을 출간하였다. 중세 문학 번역가로 더 잘 알려진 저자가 여성 인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2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책의 첫 작업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웹사이트에 실릴 <오늘의 인물>이라는 짤막한 연재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날그날 태어난 인물들 중에서 한 명을 골라 짧게 소개하는 글을 연재하던 저자는 인물 선정의 답답함 - 그날 태어난 유명한 인물을 다루다보니 여성 인물들을 고를 기회는 잘 오지 않았고, 모처럼 적당한 여성 인물을 발견해도 편집진의 권고로 남성으로 바꾸는 경우가 생기게 되었다 - 과, 시작과 끝을 생략하고 중간 이야기만을 다뤄야 하는 데서 큰 아쉬움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 시작한 것이 ‘여자와닷컴’의 새 칼럼 <세기의 여성>이었다.
그렇게 1년 넘게 연재했던 글을 책으로 내기까지는 다시 3년여의 시간이 흐르고 말았다. 미흡하다 싶은 원고들부터 고쳐보자고 한 명, 두 명, 전기를 읽기 시작한 것이 거의 모든 인물의 전기를 다시 읽게 되었고, 관련 자료를 찾기 위해 전 세계 서점과 인터넷 사이트를 검색하게 된 것이다. 한 사람의 일생을 몇 페이지로 압축해서 담아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따라서 한 인물의 삶을 이해하기 위해 수십 권의 원서를 읽어야 했고, 때로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때로는 주인공 자신이 되어 그녀들의 삶을 갈무리해야만 했다. 결국 저자는 몇 해를 여성들의 전기 속에 파묻혀 살았고, 그런 고단한 과정을 거쳐 태어난 책이 바로 《길 밖에서》 《길을 찾아》이다.
여자, 길 밖에서 길을 만들다
이 두 권의 책에는 중세에서 현대까지 수많은 여성들의 삶이 담겨 있다. 저자는 왜 하필이면 그녀들을 선택하였고, 왜 그녀들의 삶을 보여주고자 한 것일까.
여성에게는 오직 순결과 무지와 겸허한 순종을 강요하던 시대를 살면서 평범한 여성의 길을 거부하고 작가의 길을 걸었던 조지 엘리엇은, 여성에게 주어진 길을 벗어난 삶에 대해서 “영혼의 길은 황야의 가시밭 가운데로 나 있다. 예나 지금이나 그 길은 고독하게, 피나는 발로, 도움을 찾아 흐느끼며, 한 걸음씩 걸어가야 한다.”고 표현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여성들의 공통점은 이처럼 ‘상식적인 삶의 길을 거부하고 새로운 길을 찾은 여성’이라는 점이다. ‘역사를 뒤바꾼 여성들’처럼 무슨 대단한 업적을 이루었던 여성들이 아니라 여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살고자 했고, 그랬기에 ‘보이지 않는 험한 길’을 가야했던 여성들이 바로 그 주인공인 것이다.
여자에게 주어진 길 밖으로 나가 새로운 길을 찾았던 여인들, 그래서 피나는 발로 가시밭길을 거어야 했던 여인들, 역사 속에 숨겨져 있던 그녀들의 이야기가 이제 저자의 손을 빌어 세상에 나와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나의 도전이 당신에게는 길이 되길
이 책에 수록된 여성들은 우리와는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 살았던 여성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의 삶이 우리와 동떨어져 있지 않은 것은 그녀들이 걸었던 길이 지금 우리들이 걷고 있는 길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1928년 여성 최초로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하며 푸른 하늘에 새로운 길을 열었던 아멜리아 에어하트는 “여성들도 남성들이 하려 하는 일을 해보아야 한다. 그리고 만일 그녀들이 실패한다면, 그 실패는 다른 여성들에게 도전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길 밖의 길, 길이 아닌 길도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면 대로가 된다. 그녀들이 수없는 도전으로, 한걸음씩 가시밭길을 걸어가주었기에 현대 여성들에게는 수많은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녀들의 삶을 되짚다 보면 우리가 당연히 누리고 있는 자유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그리고 예전보다는 약해졌지만 여전히 많은 장벽에 막혀 있는 현대 여성들에게 간절히 원하고 노력하면 뛰어넘지 못하는 장벽은 없을 것이고, 설령 실패하더라고 나의 도전이 다른 여성들에게 길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특징
한 권이면서 동시에 두 권인 책
1권인 《길 밖에서 : 가둘 수 없는 바람처럼》에는 라인강의 예언녀로 불린 힐데가르트 폰 빙겐에서부터, 아내라는 안정된 구속보다 자유로운 사랑을 원했던 엘로이즈, 여성의 선거권도 없던 시절에 대통령 후보로 나선 빅토리아 우드헐, 자유롭게 날고 싶었으나 인습과 편견의 벽에 갇혀버린 카미유 클로델, 그림 속의 여인이 아닌 자신의 손과 영혼으로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쉬잔 발라동까지, 황무지에 살지언정 바람처럼 자유롭고 싶었던 여성들의 초상이 담겨있다.
2권인 《길을 찾아 :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에는 여성으로 두 번의 노벨상을 수상한 마리 퀴리부터,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이상을 양보하지 않았던 로자 룩셈부르크, 옥죄는 무용화를 벗어 던지고 영혼의 자유로움을 표현하고자 했던 이사도라 덩컨, 푸른 하늘에 새로운 길을 열고자 했던 아멜리아 에어하트, 아프리카의 우거진 숲 속에서 야생 고릴라와 평생을 함께한 다이앤 포시 등, 가시밭길을 갈지언정 꿈과 열정을 포기하지 않았던 여성들의 초상이 담겨있다.
1권은 1100년에서 1850년대 인물을 다루고 있고, 2권은 1860년대에서 1930년대 인물을 다루고 있다. 업적 위주로 인물을 고른 것이 아니기에 ‘작가’ ‘음악가’ ‘미술가’ ‘사상가’ 등 활동 분야에 따른 분류나 국적별로 엮는 것은 책의 균형을 깨뜨렸다. 그렇다고 몇 가지 주제에 따라 인물을 분류를 한다는 것은 그 인물에 대해서 미리 재단을 해버려 인물에 대한 또 다른 오해를 줄 수 있어 애초 기획 의도와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방법이 연대순 구성이었다. 연대순 구성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각 여성들의 삶의 배경을 이루는 시대 분위기가 좀더 잘 드러나게 되었고, 비슷한 시기를 산 여성들의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비교하며 볼 수 있을 뿐아니라, 여성들이 지나간 궤적이 그대로 그려진다는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원고의 분량 때문에 두 권으로 나누었지만 묘하게도 1권과 2권의 성격이 구분되어졌다. 1권에 수록된 여성들은 여성에게 주어지는 사회의 장벽 속에서 ‘가둘 수 없는 바람처럼’ 자유를 갈망했던 여성들이었다. 그리고 2권에 수록된 여성들은 이전의 여성들이 피나는 발로 만들어낸 길들 속에서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자신의 열정을 살랐던 여인들이었다. 이렇게 구성된 이 두 권의 책은 ‘길 밖에서 길을 찾아’ 나선 여성들의 초상이라는 공통점을 지니면서 ‘길 밖에서’ 자유롭고 싶었던 여성들, 자신의 원하는 ‘길을 찾아’ 열정적으로 살았던 여성들이라는 차별점을 지니게 되었다. 이런 성격을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 두 권이 각각 독립된 책이면서 둘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제목과 표지 컨셉트를 부여하였다.
역사 속에 숨겨진 여인들의 삶을 복원하다
2008년에 힐러리 로댐 클린턴이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미 오래 전에 대통령 후보로 나섰던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것도 여성에게 선거권조차 없었던 1800년대에 말이다. 1869년 ‘검은 금요일’에 일어난 금시장 폭동에서 엄청난 이익을 거둔 빅토리아 우드헐은 끊임없이 여성의 평등권을 주장하였고 1872년에는 대통령 후보로 정식 지명을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혼 경력과 아내가 남편의 동침 요구를 거절할 수 있다거나 애정이 식은 결혼은 파기할 수 있다는 파격적인 결혼관으로 기득권 계층의 비난을 받았다. 자신을 모함하는 반대파의 우두머리 격인 비처의 분륜 사실에 대한 기사를 실었다 해서 외설물 유포죄로 투옥된 그녀는 결국 선거 당일 철창 신세를 져야 했다.
두 권의 책에는 잔 다르크, 예카테리나 여제, 클라라 슈만, 카미유 클로델, 마리 퀴리, 로자 룩셈부르트, 애거서 크리스티, 시몬 드 보부아르, 마릴린 먼로 등 우리에게 친숙한 인물들도 다루고 있지만 앤 허친슨, 마리아 미첼, 루시 스톤, 해리엇 터브먼, 빅토리아 우드헐, 이사크 디네센, 나디아 불랑제, 레니 리펜슈탈 등 우리에게 생소한 인물들도 다루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인물의 경우 하나의 이미지로 정형화되어 있는 그녀들의 삶에 새로운 해석을 부여하고, 남성 중심의 역사 기록 속에서 숨겨져 있고 악녀로 왜곡되어 있던 그녀들의 삶을 새롭게 복원했다는 데 이 책의 의의가 있다.
백의의 천사로만 알려져 있던 나이팅게일이 군의 위생 상태를 향상시키기 위해 싸웠던 저돌적인 행동가였다든가, DNA의 이중나선 구조 규명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제임스 왓슨의 저서 《이중나선》에서 퉁명스럽고 고집불통의 노처녀로 묘사된 로슬린드 플랭클린이 실은 그의 연구의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던 DNA의 방사선결정 사진을 찍은 장본인이었다든가, 수많은 흑인 노예들을 도피시켜 흑인들의 모세로 불리던 사람이 작은 체구의 해리엇 터브먼이었다는 사실 등 역사 속의 숨겨진 여성들의 삶이 두 권의 책에 빼곡히 담겨 있다.길을 찾아 - 꺼지지 않는 불꽃처럼 (여성인물탐구 2)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인물을 평가하고 판단해야 한다. 그렇다면 ‘인물읽기’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저자 김진애 박사는 그 기본 출발점을 “사람을 좋아해야 하는 것”으로 두고, 다음 단계는 해당 인물의 “매력”과 “쓸모”를 찾는 일이라고 한다. 김진애 박사는 자신의 인생을 통틀어 바라볼, 추구할, 지양할, 지향할, 참조할, 이끌리는 어떤 인물상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 쌓여 드디어 글이라는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그녀는 역할 모델이라는 말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한 인간의 성장에는 특정한 역할 모델보다는 수많은 인물들이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는 것. 실제 지향할 사표적인 인물에서 얻는 것만큼이나 지양할 반면교사적인 인물에서 얻는 것이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많은 인물들에 자신을 비출수록 자신이 자랄 수 있는 토양은 풍요로워진다는 논리. 그래서 ‘위인전’ 이상으로 ‘인물전’이 필요한 것 아닐까하고 묻는다. 그만큼 사람들은 우리 자신의 거울이다.
우리 주변에 얼마나 괜찮은 인물들이 많은가를 알면 살맛이 더해진다. 또한 인류의 역사 속에 얼마나 괜찮은 인물들이 많은가를 알면 인간에 대한 신뢰도 더해진다. 인간이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를 알면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도 피어오른다. 물론, 우리는 그 인물들처럼 될 수도 없거니와 꼭 되어야 할 이유도 없고 또한 전혀 되고 싶지 않아도 좋다. 다만 인물들의 가치에 우리가 눈을 뜬다면, 이 흥미롭고 즐겁고 끌리는 인물들에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 삶은 그리 무료하지도 그리 지루하지도 않을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기를 통하는 것만큼 흥미로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나는 출판일을 하고 있는 서른한 살 먹은 여자다. 지난 수년간 무수한 일들을 벌이고, 수습하고, 매진하고, 버리고 취하기를 반복하며, 다큐멘터리PD, 잡지기자, 방송작가, 대학강사, 출판기획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지내왔다. ‘한결같은 방황’ 속에 지내온 시절이라고, 도대체 이 복잡한 시절은 언제쯤 끝나는가 라며, 나 자신에게, 때로는 세상에 화를 냈다가, 화해했다가 하며…. 그러던 어느날 건축가이자 칼럼니스트인 김진애 씨의 글을 만났다. “30대를 팽팽한 긴장감으로 잘 보낸 여자들이 비로소 매력적인 여성이 된다. 물론 그 팽팽한 긴장감만으로도 매력적이다. 여자 30대는 흔들리는 게 아니라 중심을 찾아가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라는 즉, “너 잘 살고 있는 것이다”는 요지의 글이었더랬다. 갑자기 힘이 솟았다. 김진애, 그녀가 궁금해졌다. 그녀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고, 언제나 그렇듯, 서른한 살 출판인 구모니카, 일을 벌인다.
늘 일관되게 불안한 채로 흐르는 내 마음, 도대체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라는 의문을 품은 지 올해로 31년 째. 그 의문을 쪼개고 또 쪼개고 쪼개 보니, 그 안에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들 사이에는 위인도 있었고, 타인도 있었고, 지인도 있었고, 가족과 친구도 있었다. 그리고 그 안을 유영하는 내가 있었다. 내 주변에 인간이 없었다면, 난 결코 방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김진애 박사를 만나고 난 후에, 그녀의 원고를 받아 든 후에, 긴긴 방황을 끝낼 답을 찾았다. “인간에 대해 제대로 알자”는 것! 그래서 <남녀열전 : 파트너일까, 라이벌일까?>, 바로 그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관심과 탐구” 방법을 알려주는 책을 만들게 된다. -
레니 리펜슈탈 vs. 미켈란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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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토성의 영향 아래(1)

 

 

 

 

'토성의 영향 아래(Under the Sign of Saturn)'는 작년말에 세상을 뜬 수잔 손택(1933-2004)의 신간 <우울한 열정>(시울, 2005)의 원제이면서 책에 실린 '발터 벤야민'론의 제목이기도 하다. 소설가이자 비평가이기도 한 이 전방위 지식인이 특히 빛을 발하는 것은 에세이들을 통해서인데(에세이의 한 전범을 보여준다), <토성의 영향 아래>(1980)는 <해석에 반대한다>(1966)와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1969)에 뒤이은 세번째 에세이집으로서 1972년부터 1980년까지, 그러니까 40대 중년의 손택이 쓴 에세이 7편을 묶은 책이다. 그녀는 이러한 에세이 30쪽짜리를 쓰기 위해 (믿거나 말거나) 수천 페이지를 쓴다고 하는데, 그 '열정'이 경이롭다(동시에 우리를 우울하게 만든다). 

<우울한 열정>의 속표지에는 근간예정으로 손택의 또다른 에세이집과 소설들도 거명돼 있는 걸로 보아 이대로라면 조만간 '손택 전집'이라도 갖추어질 듯하다. 나는 그녀의 다른 책들을 현재는 품절된 <급진적 의지의 스타일>을 제외하곤 모두 갖고 있다. 하니 나름대로 손택을 읽을 준비는 돼 있는 셈인데,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읽은 몇 편의 에세이들보다 이번 <우울한 열정>에 실려 있는 에세이들이(아직 다 읽지 않았지만) 더 편하게 다가왔다. 아마도 거꾸로 읽어나가야 할 모양이다.   

책을 열면, 처음에 '조지프 브로드스키에게'란 헌사가 나온다. 두 페이지 뒤에 가서 브로드스키에 대한 역주가 나오는데, 'Joseph Brodsky'(1940-1996)는 '러시아 태생의 미국망명시인'이다. 그의 이름은 러시아어로 '이오시프 브로드스키'라고 읽으며 국내에도 그렇게 소개돼 있다. 1987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면서 전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는데(러시아에서는 1990년대 이후에 소개되어 20세기 후반의 대표적인 '러시아 시인'의 한 사람으로 인정된다), 국내에서 브로드스키의 책들이 번역돼 나온 건 물론 그 수상을 계기로 해서이다.

예컨대 <소리없는 노래>(열린책들, 1987), <겨울결혼식>(정음사, 1987), <20세기의 역사>(문학사상사, 1987) 등의 시집과 에세이집 <하나반짜리 방에서>(고려원, 1987), 희곡인 <대리석>(한마당, 1987)까지 앞을 다투듯이 나왔던 것. 역주에서 '하나도 채 못되는(Less than one)'이란 옮겨진 것이 <하나반짜리 방에서>이며 안정효 번역이다(다른 역자에 의해 <하나도 채 못되는>(성원, 1987)이란 번역서도 나왔는데, 실물은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안정효의 책과 원저를 갖고 있다). 원저(1986)가 5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인 걸 고려하면 국역본은 발췌역이겠다. 

 

 

 

 

시집이 여러 권 번역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말로 브로드스키를 읽고 감상한다는 건 먹다 남은 가시만 가지고 생선의 맛을 음미하는 거나 마찬가지로 넌센스에 가깝다(브로드스키의 성탄시 한 편에 대해서 나는 '모스크바통신'에서 자세하게 분석한 바 있다). 러시아시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일찍부터 영시에도 조예가 깊었던 브로드스키는 특히 존 던을 애송했었고, 미국 망명 이후에는 로버트 프로스트에 바치는 시들을 쓰기도 했다. 지난 2002년에는 그가 쓴 영시들이 (사후)출간되기도 해지만, 러시아시만큼 평가받는 것은 아니며 그의 본령은 역시나 러시아시이다. 하지만, 에세이스트로서 그의 명성은 언어에 구애받지 않는데, 손택과의 교분은 그런 배경하에서 이루어진 듯하다(브로드스키에 대한 에세이도 손택이 썼음 직하다. 한번 찾아봐야겠다!).  

어쨌거나 생각난 김에 브로드스키의 시 한편을 옮겨놓는다. 아마도 국내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시이며, 노벨상 수상 기사와 함께 언론에 게재되었던 작품이기도 하다. <겨울 물고기>. 좀 드문 일이지만, 이 시는 우리말 번역으로도 시가 된다.

겨울 물고기

물고기는 겨울에도 산다.
물고기는 산소를 마신다.
물고기는 겨울에도 헤엄을 친다.
눈으로 얼음장을 헤치며,
저기
더 깊은곳
바다처럼 깊은곳으로.
물고기들
물고기들
물고기들
물고기는 겨울에도 헤엄을 친다.
영원히 같은
물고기 방식으로.
물고기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얼음덩이속에 머리를 기대고
차디찬 물속에서
얼어붙는다.
싸늘한 두눈의
물고기들이
물고기는 언제나 말이없다.
그것은 그들이
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고기에 대한 시도
물고기처럼
목구멍에 걸려 얼어붙는다. 

아직은 11월이고 '가을 물고기'의 목구멍은 아직 멀쩡하기에 계속 떠들어보기로 한다. 여하튼 손택이 <우울한 열정>을 브로드스키에게 헌정하고 있다는 말씀이고, 엊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나는 책에서 세편의 에세이를 읽었다. '폴 굿맨에 대하여' '토성의 영향 아래' '바르트를 추억하며'. '폴 굿맨'은 손택이 다루고 있는 인물들 가운데 내겐 가장 생소한 이름이었는데(내가 아는 '좋은 사람'은 '넬슨'밖에 없다), 그의 부고를 듣고 쓴 '폴 굿맨에 대하여'(1972)에서 그녀는 그가 자신의 '영웅'이었음을 열정적으로 고백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손택에 따르면, "D. H. 로렌스 이래로 여어를 그만큼 설득력 있고 진실하고 독창적으로 구사한 사람은 없다."(18쪽)

그런 그와 손택은 친하지 않았을 뿐아니라, 그녀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그를 싫어했다. 이유가 (이해할 만한) 가관인데 "그의 생전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소연하곤 했듯 그가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기 때문". 그럴 만했던 게 "폴 굿맨은 원래 여자를 인간적으로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나중에 그 자신이 터놓고 고백한 바대로 동성애자였기 때문이다. 해서 손택의 사랑은 일방적인 짝사랑일 수밖에 없었던 것. 아무려나 이 에세이를 읽은 독자라면 '폴 굿맨'이란 이름을 쉽게 잊어먹지 못할 것이다.

 

 

 

 

'바르트를 추억하며'(1980)는 풀 굿맨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바르트의 부고를 듣고 쓴 에세이이다. 짤막한 분량이지만,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의 초상을 생생하게 스케치하고 있다. 그리고 바르트 정도라면 내게도 낯설지 않다. 청년시절 병약했던(폐결핵을 앓았다) 바르트가 첫 책을 출간한 것은 37살의 일이니까 우리 기준으로도 좀 늦깍이이다. 하지만 "뒤늦게 출발한 뒤에는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많은 책을 썼다." 특별히 손택만의 의견이랄 건 없는데, 하여간에 "그는 무엇에 관해서든지 간에 아이디어를 낼 수 있는 것 같"은 지식인이었다.

젊은시절에 바르트는 지방 극단에서 연기도 하고 연극비평도 했다. 거기서 비롯된지 모르지만, 그의 아이디어들을 극적이었다(His sense of ideas was dramatugical). "프랑스의 지적 무대에 스스로를 올리면서 그는 전통적인 적에 반기를 들었다. 그것은 플로베르가 '기성관념'이라고 불렀고 '부르주아'적 감성이라고도 알려진 것, 마르크스주의자가 허위의식이라는 개념으로, 사르트르 추종자들이 '나쁜 믿음'이라고 맹렬히 비난한 것, 고전 연구로 학위를 받은 바르트는 '최근 의견'이라고 이름붙인 것이다."(134쪽)

 

 

  

 

 

플로베르의 '기성관념'(received ideas)은 <통상관념사전>(책세상, 2003)에서 찾아볼 수 있다. '부르주아적 감성'은 부르주아적 멘탈리티를 가리키고 마르크스주의에서의 '허의의식'이란 말 그대로 '이데올로기'를 지칭하겠다. 사르트르의 '나쁜 믿음'은 흔히 '자기 기만'이라고 불리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런 바르트의 '최근 의견'이란 건 그리스어 'doxa'의 번역으로(예전엔 '억견'이라고 번역했다) 'current opinion'이라고 병기된 걸 참조한 듯하지만 오역에 가깝다. 근거 없는 믿음을 뜻하므로 '통속적인 의견' 정도가 어떨까 싶다. 어쨌든 그러한 '우상들'에 대한 바르트의 공격은 <신화학> 혹은 <현대의 신화>(동문선, 1997)로 묶여나왔다. 

"바르트를 매혹한 것은 정신적 분류학이다"라고 손택은 진단하는데, 구조주의자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초기 바르트의 세계가 특히 그에 해당한다. "그는 문학에 대해 말하는 행위를 통해 문학을 만들어내는, 무책임하고 장난스러운 형식주의자였다"라는 게 손택의 지적이며, 변태적인 것에 면밀한 관심을 가졌던 바르트는 "그것이 해방적이라는 낡은 시각을 갖고 있었다"라고 그녀는 꼬집는다(폴 굿맨과 마찬가지로 바르트 또한 동성애자였으며 "그와 같은 성적 취향과 유명세를 가진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상당한 성적 특권을 누렸다"). 그래도 "그가 쓴 글은 무엇이든 다 재미있다."

두 권 정도가 예외인데, "초기에 쓴 라신에 관한 논쟁적인 책." 흔히 프랑스 문학에서 신구비평 논쟁을 가져온 저작인데, <라신에 관하여>(동문선, 1998)로 국내에는 소개돼 있다. 또 한권은 "보통 책 길이의 패션 광고의 기호학에 관한 책"인데, 우리말로는 <모드의 체계>(동문선, 1998)로 번역돼 있다. "학회 회비를 내기 위해 쓴 것으로 몇 편의 거장다운 에세이를 담고 있다."라고 했는데, '학회회비를 내다'는 'to pay his academic dues'의 번역이다. 그런 관용표현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드의 체계>가 바르트가 제출한 박사학위청구논문이었으므로 직역해서 (학위논문심사에는 비용이 듦으로) '학위논문 수수료를 내기 위해 쓴'이라거나 의역해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쓴' 정도의 뜻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바르트의 지적 생애에 관심있는 독자에게 궁금한 것 중 하나는 <기호학 요강>과 <모드의 체계> 같은 책을 쓰던 그가 <텍스트의 즐거움>이나 'S/Z'의 저자로 변신한 내막이다. 이에 대한 손택의 해명이 명쾌하다. "바르트의 작업은 극복되거나 부인된 슬픔에 관한 것이다. 바르트는 모든 것을 하나의 체계, 하나의 담론, 하나의 분류체계로 취급할 수 있다고 결론 내렸다. 모든 것이 체계이므로, 무엇이든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체계에 싫증을 냈다. 그의 정신은 너무 민첨하고, 야심적이고, 모험에 끌렸기 때문이다."(138쪽, 번역 일부 수정)

체계 이후에 바르트가 선택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고, 그는 자기 자신의 '위대한 작가'가 되었다. 즉, "그는 자기 자신이라는 양떼를 끄는 양치기가 되었다."(139쪽에서 '바르트가 쓴 바르트가 쓴 바르트'란 책명은 '바르트에 대한 바르트에 대한 바르트'라는 '리뷰명'으로 바뀌어야 한다.) <롤랑 바르트가 쓴 롤랑 바르트>나 <사랑의 단상> 같은 책들은 그 대표적인 목록이다. 1977년부터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뒤늦은 명성을 구가하던 바르트도 남모르는 욕심을 품고 있었으니 그건 그가 흠모하던 프루스트 같은(그는 프루스트를 자신의 '수프'라고 말했었다) '진짜 소설'을 써보고 싶어했다는 것. 그러나 그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불의의 교통사고가 아니었다면 혹시 모를 일이다.

 

언제나 텍스트의 즐거움을 만끽할 줄 알았던 바르트는 '정신적 방탕자'이자 '위대한 화해자'였다. 해서 "그는 비극적인 것에 대해서는 별 감정이 없었다. 그는 늘 불리한 상태에서 유리한 점을 찾았다. 현대 문화비평가들의 고정 주제 중 여럿을 그도 다루지만 종말론적인 관념은 거의 없었다... 그는 극도로 정중하고, 약간 탈세속적이고, 쾌활했다. 그는... 언제나 슬픈 빛을 띤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 쾌락에 관한 그의 말 전체에 무언가 슬픔이 있다... 그는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며 그의 쓰지 못한 책의 목적은, 삶을 찬미하고,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기 위한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141-2쪽) 그의 '쓰지 못한 책'이란 그가 쓰려고 했던 '소설'을 말한다.

 

대략 이런 것이 생전에 "아, 수전, 언제나 충실한 친구(Ah, Suzan. Toujours fidele.)"라고 만날 때면 그녀를 호칭했다는 바르트에게 끝까지 충실하게 남은 손택의 스케치이다. 그리고 이만한 분량으로 바르트에 대한 이보다 더 예리하면서도 정감있는 스케치를 그려낼 수 있는 이는 따로 없을 듯하다. 그런 손택과 바르트가 만나는 또다른 지점은 바로 '사진'이고 국내에서 출간된 <사진론>(현대미학사, 1994)는 두 사람의 사진론을 묶어놓은 적이 있다(번역은 신뢰할 수 없지만). 각각 따로 읽어야 할 책은 물론 <카메라 루시다>(열화당, 1998)과 <사진에 관하여>(시울, 2005)이다.

 

 

 

 

 

 

 

 

05. 11. 15.

P.S. 분량상 벤야민론, 즉 '토성의 영향 아래'는 다른 자리에서 정리하기로 한다. 한편, 얼마전 '북데일리'란 저널에 <우울한 열정>에 관한 리뷰 기사가 실렸는데(다시 확인해보니 '얼마전'이 아니라 '오늘자' 리뷰이다), '독일 지성 벤야민이 독일어를 몰랐다?"란 제목을 달고 있다. 전반부의 내용은 이렇다.

 

지난해 12월 백혈병으로 타계한 ‘행동하는 지성’ 수전 손택(1933~2004)이 7명의 예술가에 대한 평전 <우울한 열정>(시울. 2005)을 통해 독일 유태계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왕성한 독서가가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실천하는 사회운동가, 에세이스트, 소설가, 극작가, 예술평론가였던 그녀는 발터 벤야민에 대해 “그가 쓴 글은 무엇이든 다 재미있다. 쾌활하고, 빠르고, 조밀하고, 날카롭다”고 말하고 “그는 꼼꼼한 독서가였지만 왕성한 독서가는 아니었다”는 독특한 해석을 내린다. 이런 판단은 벤야민이 읽은 내용에 대해서는 대부분 자신의 글 소재로 삼거나 평론을 썼기 때문에, 쓰지 않은 것은 읽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에 근거한다. 수전 손택은 “벤야민이 외국어를 몰랐고, 외국 문학은 번역된 것도 거의 읽지 않았다”고도 말한다. 독서를 하느라 글을 쓰지 못할 정도로 독서에 대한 호기심을 가졌던 사람은 아니며, 오히려 유명세를 즐겼다는 수전 손택의 평가는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그는 극도로 정중하고, 약간 탈세속적이고, 쾌활했다. 그는 폭력을 혐오했다. 언제나 슬픈 빛을 띤 아름다운 눈을 가졌다. 쾌락에 관한 그의 말 전체에 무언가 슬픔이 있다”

 

짐작하겠지만, 인용문에서 주어 '벤야민'은 전부 '바르트'로 바뀌어야 한다. 무얼 읽고 쓴 리뷰인지는 모르겠지만, 엉뚱한 내용을 받아적은 듯하다. 독일 사람인데다가 불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벤야민이 독일어를 몰랐다?" 이런 턱도 없는 '도발적인' 제목을 달고도 서평지 기자의 목이 아직 붙어 있는 건지, 나로선 그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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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황우석 스캔들 이후, 나는 그 다음이 더 걱정이다

현재 인터넷 포털 사이트를 중심으로 번지고 있는 대중적 광기는, 이번 주말을 고비로 좀 잦아들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MBC 앞의 촛불집회에 고작 50명 남짓 모였다는 것을 보면, 인터넷을 중심으로 선동하는

소수의 세력들이 이번 인터넷 광란의 근원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다수의 대중들은 '오랜만에 나온 위인'인 황우석 교수, 우리나라에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고,

노벨상을 타서 국위를 선양하고,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난치병 환자들에게 치료의 희망을 안겨다주는,

그야말로 경제적 이익과 상징적 위신, 인도주의적 감동의 화신인 황우석 교수가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의

'시기'와 '모함'에 빠지고, '시청률만을 노린 상업주의적 방송의 도발'의 희생물이 되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이런 저런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프레시안]이나 [오마이뉴스], [한겨레]를 중심으로 "일그러진 애국주의"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고,

대중들의 광기를 우려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제목소리를 내고 있고, 황우석 교수를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현재 인터넷에서 일어나는 극단적인 반응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댓글들을 달고 있는 것을 보면,

특별한 선동들이 지속되지 않는 한, 다음 주부터는 극단적인 광란은 어느 정도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사실

인터넷 포퓰리즘은 한번 타오를 때는 걷잡을 수 없지만 그만큼 지속력이 부족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이게 더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현재의 추세는, 일종의 "누이좋고 매부좋고" 식으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해 한편으로 황우석 교수를 비롯한 생명공학 연구자들의 작업에서

 준수되어야 할 윤리적 지침을 마련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황우석 교수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이번 사태를 겪은 뒤 오히려 더 공고해진 지원이 이루어질 것 같다. 이런 추세가 위험스럽다는 것은

앞으로 황우석 교수를 비판하거나 견제하는 일이 더 어려워지고, 그렇게 해서 문제의 진짜 핵심이

은폐될까 해서다.  

 

황우석 스캔들의 문제의 핵심은, 한편으로 첨단 생명공학과 자본의 결합(이번에 제기된 윤리적 문제는

이러한 결합이 필연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는 비인간적 현상의 극히 일부가 아닐까)이고, 다른 한편으로

포퓰리즘에 편승한 극우 민족주의의 등장, 또는 이 두 가지 경향의 행복한 결탁에 있는 것 같다.

어제 친구가 이번 사태에 관해 한 가지 언질을 준 게 있는데, 이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첨단 생명공학과

자본의 결탁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고 있는지, 적어도 그 한 단면을 시사해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일부만 그대로 소개해보자.

 

<우리형 연구분야가 관련 있어서 사실 10년전부터 황우석 얘기를 여러번 들었는데 지난주에 들은

게 바로 노와 황의 커넥션이다.

누가 먼저 접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둘 사이를 연결 한게 바로 박기영이란다 (형이 이 사람도 잘

아나 보던데 386들 따라다녀서 시골 국립대 교수 하다가 청와대 들어간 여자라고 혹평하더군).

그런데 문제는 노의 대중 선동 목적과 황의 연구비 욕심이 만난 것보다 더 큰 의도가 노무현에게

있다는 점이란다. 민노당 성명에서도 지적하듯이 박기영, 황우석, 노성일이 모두 속해 있는

의료산업선진화위원회는 우리나라 의료를 완전히 시장에 내주는 걸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사실 그 위원회의 플랜은 삼성에서 제공된거다.

삼성은 의료산업과 의료보험시장의 결합이 유망한 사업분야라고 판단해서 아주 조직적으로

준비해오고 있는데, 너도 알겠지만 삼성생명은 국내보험시장의 거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고

삼성의료원은 현재 의료시장의15%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형 얘기로는 공식적인 삼성의료원 외에 삼성이 실제로 지배하고 있는 병원은 훨씬더 많고

지방의 국립대병원들과도 부분적 제휴를 거의 맺고 있단다. 거기다가 범삼성계열인 Cj그룹은

제약업과 생명공학 분야에서 의료산업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형이 진행하고있는 연구도 CJ와 연결이 있단다. 그래서 지금 판단으로는 노무현과 주변 놈들이

황우석 연구의 시장가치를 잘 몰라서라기 보다는 의료의 산업화와 공보험의 무력화를 통한

사보험의 지배력 강화를 관철시키기 위한 대중 선동으로 황우석 연구를 띄워주고 있는 측면도

있을 것 같다. >

 

생명공학과 독점자본의 결합이 어떤 왜곡된 결과를 낳을지는 속단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현재

많은 난치병 환자들이 원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안타까운 노릇이지만 ...

더  중요한 문제는 이러한 결합이, 이번 사태를 계기로 더욱 확고한 이데올로기적 지주를 확보하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노무현은 사라져도 남한에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개혁과 참여라는 이름 아래 헤게모니를

확보했듯이, 설사 앞으로 황우석 교수가 이런저런 문제로 낙마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배후에 있는 첨단 생명공학과 독점 자본의 결합, 그리고 그것을 감싸고 있는 극단적 이데올로기는

죽은 아버지처럼 불멸의 권위를 휘두르게 되는 게 아닐지, 나는 그게 더 걱정스럽다.

 

 활동가들과 진보 지식인들이 좀더 고민하고 분석해봐야 할 문제가 바로 이것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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