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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드 쿠쿠 랜드
앤서니 도어 지음, 최세희 옮김 / 민음사 / 2023년 6월
평점 :
3년 전, 진혁이, 동구리, 영인이와 함께 전주여행을 갔었더랬다. 원래 태민이와 유리도 함께해서 먹는모임 하계MT가 되어야 했지만 그 때 두 사람이 일이 너무 바빠 아쉽게도 4명만.
익산에 살고있는 동구리는 우리가 오기 한 달 전부터 숙소를 비롯해서 같이 가볼 곳들을 여기저기 알아보았는데, 그 중에는 산 중턱에 있는 한옥도 있었다. 차를 타고 꽤 올라가니 정말 산 중턱에 한옥으로 된 근사한 카페와 식당, 그리고 서점이 있었다. 이런 곳에 서점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한껏 여유와 멋이 느껴지는 서점이 나타났다.
“오 박준 시인이 사인한 시집이네. 이것봐”
내가 신기한듯 말하자 진혁이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인쇄한 것일 거라며 흘려 넘겼다. 괜히 약오른 나는 다른 시집을 펼쳐 필체를 대조해보이며 친필 사인임을 증명해냈다. 진혁이는 ‘그렇담 꽤 멋지군’ 하고 패배를 인정했다.
집에 읽지 않은 책들이 아직 한가득이면서, 나는 한 손에 박준 시인의 시집을 들었다. 아니, 아직 읽지 않은 책들로 가득한 곳만큼 근사한 곳이 또 어디 있겠나, 라고 책을 사모으는 것을 합리화하며 다른 책들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여행지의 기념품으로 책을 산다는 것은 참 곤란한 버릇 중의 하나인데, 기본적으로 인터넷에서 다 구할 수 있으며 무게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꼭 10년 전 1월, 25살 전재산을 털어서 갔던 한 달간의 유럽여행에서, 나는 프랑스 앙굴렘 만화축제에 눈이 뒤집혀 책을 말 그대로 가방 한가득 샀었다. 스페인으로 축구를 보러 갔다가 이탈리아에서 다시 만난 고등학교 친구는 책으로 가득 찬 트렁크를 끌고 나타난 나를 어이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내 싸구려 아메리칸 투어리스터 트렁크는 결국 바퀴가 박살이 나버렸고 자라(ZARA)에서 급하게 가방을 사 책을 낑낑대며 들고다녔던 기억이 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앞으로 트렁크는 무조건 비싸고 튼튼한 것만 살것이며, 이제 절대 여행에서 책을 사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나도 친구도 그게 거짓말이란 것을 알았다. 리모아 캐리어가 그런 가격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전주 서점에서는 시집 딱 한 권만 사야지 싶었는데 낯익은 이름이 보였다. 인스타 이웃분이신 안대근님이 쓰신 에세이집이었다. 평소 그 분의 글을 좋아하면서도 막상 책 사는 것을 까먹고 있었는데 이렇게 좋은 기회가. 기쁜 마음으로 책 두 권을 계산대에 올렸다. 대부분의 에세이는 과대평가되었다고 궁시렁대는 진혁이 명치를 한 대 치고 결제를 했다.
여행하며 그 동네 서점을 들리는 것이 습관이라, 여행하며 들른 서점 이야기는 끝도 없다. 월터형과 놀러간 제주에서 산 슈니츨러의 <한밤의 도박> (아마도 여행 얼마 전 강원랜드에서 신나게 돈을 딴 강렬한 기억으로 선택..), 선우정아가 내내 흘러나오고 짧은 머리의 여자분이 운영하셨던 익산의 서점에서 산 토머스 핀천 소설집, 파리의 ‘셰익스피어 인 컴퍼니’에서 산 헤밍웨이 소설들까지. 여행 내내 소설을 이고지며 여행하다 마침내 오디세우스처럼 집으로 돌아와 책장에 가지런히 꽂아 놓는다. 거짓말이고, 사실은 책상 위에 탑처럼 쌓아 놓는다.
친한 형님의 추천으로 소설 <클라우드 쿠쿠 랜드>를 읽고 그런 여행들이 생각났다. 책을, 이야기를 운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세대를 넘나드는 700년간의 이야기. 소설 속 지노와 안나, 오메이르처럼 목숨을 걸고 책을 지키고 운반한 것은 아니지만, 그 책들의 물성에는 그 때의 여행들이 담겨있다. 진혁이의 궁시렁거림, 제주 서점 강아지의 입냄새, 셰익스피어 인 컴퍼니의 분위기와 도장.
아마도 다음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면, 이삿짐 센터에 추가요금을 왕창 물며 월터형한테 욕을 한바가지 먹고 같이 책을 정리할 것이다. 아 이 책은 그 때 샀었지. 이건 10년 전 여행에서. 이야기들은 사라지지 않고 다만 감춰있을 뿐이고, 때로 다시 발견된다. 그 이야기는 헤밍웨이의 것이기도 하지만, 내 이야기기도 하다. 얼마 전 다시 본 영화 <더 폴>에서 꼬맹이가 소리쳤던 것처럼.
파라데이소스(παράδεισος)는 고대 그리스어로 정원을 뜻하는 단어다. 이게 파라다이스가 되었다니, 참으로 재미나다. 퇴근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가장먼저, 책상 위의 식물들이 보인다. 식물등과 높이를 맞추려고 읽은 책들을 화분 밑에 잔뜩 쌓아놓았다. 식물과 책이 쌓인 작은 정원을 보며 난 비로소 낙원에 도착했구나 싶다. 낙원을 찾아 떠났던 10년 전의 나는 고향으로 돌아와 비로소 세상이 지금 이대로 충분함을, 말없이 가없는 세계가 육박함을 느낀다.
아마도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사랑해 마지 않을 책인 것 같다. 민음사 유튜브를 보고 언젠가 읽어야지 하며 사놨다가 친한 형의 추천으로 꺼내들었다. 덕분에 행복한 설 연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