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스터리츠 을유세계문학전집 19
W. G. 제발트 지음, 안미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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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때 의학드라마 <하우스>에 빠져서 살았다. (지금도 내 책상 위에는 빨간색 프린스턴 플레인스보로 머그컵이..) 하우스(House)라는 이름 자체가 셜록 홈즈(Holmes)에서 따오기도 했고, 원인 불명의 병을 찾는 것이 탐정이 범인을 찾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드라마 답게 의학드라마임에도 추리물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에피소드는, 정말 추리물 느낌이 진하게 들었던 시즌4의 시즌피날레 에피소드인데, 자기가 탔던 버스가 교통사고를 당해 기억을 잃어버린 하우스가 교통사고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찾아내는 에피소드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직감하기에 하우스는 단체로 병원에 들린 버스의 승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하다가, 급기야 그들의 소지품을 한군데 다 모아놓고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다. 실제로 후각은 기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아마도 그것은 기억에 대한 어떤 감정일텐데, 난 월터 형이 비오기 직전의 흙냄새(실제로는 미생물 냄새라고 한다. 인간이 이 냄새를 다른 동물보다 월등하게 잘 맡도록 진화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 줄곧 궁금했지만, 아직 시원한 답변은 읽어보지 못했다)를 맡으면 나에 대한 따뜻한 기억이 떠올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비싼 거금을 들여서 이 ‘비오기 전 흙냄새’ 향수를 사서 쓰고 있기 때문이다.

<아우스터리츠>를 읽으면 인간의 기억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작가 제발트는 기억을 공간과 엮고싶었나보다. 300페이지 내내 공간에 대한 묘사만 주구장창 하기 때문이다. 나는 원체 내 주위의 세상에 관심이 없는 족속이라, 때때로 누군가 부산의 볼거리나 맛집을 물어보면 당황한다. 부산에서 20년을 살았지만 집 근처에 뭐가 있는지 조차 별 관심이 없었으니까. 마찬가지로 정자동 맛집도 잘 몰라서, 처음 남자를 만난 뒤 준비된 레파토리가 끝나면 메뉴 선정에 고민이 시작된다. 그런 나에게 300페이지짜리 공간묘사는 정말이지 고난이었다. 저 기둥의 생김새는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하는걸. 내가 빠져드는 부분은, 외부세계보다는 인간의 내면이다. 난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고 그 사람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이 좋다. 사실 책보다 인간이 더 흥미롭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인간의 내면이란, 시간 바깥에 존재한다. 기억과 감정의 편린들은 어디에도 도달하지 못하고 그저 쌓인다. 마치 방 안에 잘못 들어온 나방처럼. 길 잃은 나방은 잘못된 공간과 시간 속에서, 가만히 정지한 채로, 혼란스러워하다 죽는다. 길 잃은 나방에게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난 그저 내가 이해한 내면들을 이야기로 남길 수 있길 간절히 소망할 뿐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비로소 인간의 기억에 공간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느끼게 된다. 길잃은 마음과 기억에 비치는 영원한 햇살. 공간은 사라져가는 기억을 구해낸다. 중반까지 너무나 지루했던 이야기에 결국 설득당해 이런 글을 쓰게 되는 이유다. 난 내 안으로 깊어지며 자라왔다. 혼자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면서. 월터형을 만나면서 동시에 넓어져가는 기분이다. 정선에서 모노레일을 타고, 충정로에서 철길 떡볶이를 먹으면서. 공간은 또한 삶을 넓힌다.

소설 중간 중간에 나오는 흑백 사진들이 참으로 감동적이다. 아우스터리츠에게 소중했던 공간과 가구, 잡동사니, 그리고 그의 어린 시절의 사진들이 기억에 물성을 더한다. 나도 사진을 찍고싶어졌다.

난 펜탁스 필름카메라를 하나 가지고 있는데, 셔터가 고장나 셔터스피드를 낮춰서 찍으면 카메라의 거울이 다시 내려오지 않는다. 어두운 것을 가만히 응시해 밝힐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다보니 손이 잘 안가 안에 들어있는 필름이 몇 달째 그대로다. 문득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하나 사볼까 싶어졌다. 최신 폴라로이드 카메라는 셔터스피드와 조리개도 조절이 가능하다던데. 현상하러 사진관 가는것도 귀찮으니까. 한 달을 살까 말까 고민하다 결국 어제 배송이 왔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 흘러나온 내 자아들이 눌러붙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그득그득한 내 집에서 형을 한 번 찍어봤다. 종종 사진을 남겨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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