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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차토를 쫓아서
팀 오브라이언 지음, 이승학 옮김 / 섬과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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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만 해도 사람이 어떻게 본인 나이를 헷갈릴 수 있을까 의아해 했지만, 이제는 누군가 나이를 물을 때 90년생이라고 말하는 나를 발견한다. 만화작가가 꿈이었던 시간과 2002년 월드컵에 들떴던 초등학교 6학년의 여름, 첫 이별에 울었던 20대 중반 성북동 시절, 꽈배기 내기 다트 게임을 했던 판교의 서른 초반. 나에게 시간이란 결국 그런 식으로 인식된다. 아마도 나에게 어떤 과거에 대해 물을 때 나는, 아마도 영원히, 2014년 4월 중순의 어느날 이후인지, 아버지가 돌아가셨던 2021년의 봄 이전인지를 고민할 것이다. 나에게 시간은 그렇게 가늠된다.

물색없는 천성 탓인지, 혹은 어쩌면 나이 탓인지, 기억은 자주 가물가물하다. 난 10년간 쓴 일기를 책으로 냈음에도 내 과거가 흐릿하다. 어느 날 월터형이 내 책을 반쯤 읽다 한숨을 푹푹 쉬며 이 사람이 누구냐 물었다. 난 웃으며 이건 거짓말로 진실을 말하는 책이라 대답했다. 대답하긴 쉬웠으나 아마 납득하긴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 글들은 어느 지점부터 상상이었지만 난 그것이 또한 진실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설 <카차토를 쫓아서>는 베트남전쟁 도중 파리로 간다며 도망간 ‘카차토’라는 탈영병을 쫓는 한 부대의 이야기다. 이 책은 이야기의 순서가 뒤죽박죽인 탓에, 읽어나가다보면 나름대로 이야기의 순서를 가늠하게 된다. 지금은 빌리 보이 왓킨스가 죽은 후의 시점이라거나, 프렌치 터커의 코가 멀쩡할 때의 이야기, 혹은 카차토가 아직 도망가기 전이라는 식으로. 상실과 상실 사이의 순서를 가늠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죽음과 죽음 사이에 기억을 끼워넣는 것은 또한 잔인한 일이다.

아마도 그 과정은 작가 팀 오브라이언이 겪었던 두서없는, 동시에 납득되지 않는 죽음들을 떠올리는 시간들과 흡사하리라. 소설 속 닥(Doc) 패럿은 묻는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사실의 확장일까? 그리고 사실과 가능성은 어떻게 구분될까? 무엇이 진짜 벌어진 일이고 무엇이 그저 벌어졌을지 모를 일일까? 요령은 찬찬히 사실이 물러나고 상상이 들어앉는 곳을 살피는 것. 그리고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것. 카차토는 왜 전쟁을 떴을까?
작가가 순서를 가늠하는 죽음들 사이 어느 순간부터 거짓말이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글쓰기에 관한 소설로 읽히기도 한다. 어떤 죽음과 상실이 창작을 추동한다는 다분히 예사롭지만 이상한 사실에 의해서. 그리고 상상이 시작되는 지렛목은 언제인가 하는 질문에 의해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은 진짜야. 소설의 제사(題辭)엔 이렇게 적혀있다. 사랑은 아마도 딸기맛 찹쌀떡과 비슷할 것이라 상상했던 2011년의 대학교 후배가 앞으로 할 사랑은, 꼭 말랑하고 달콤했기를. 작가는 그런 상상들을, 기도를, 혹은 후회와 망설임, 속죄의 다른 이름을 쓰는 것. 상상이 시작되는 곳을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그런 것들이 존재한다. 그것을 상상할 수 없으면 우린 말할수도 없다. 난 그것이 진짜라고, 삶에 올리는 제의라고 생각한다.

좋은 작가를 만나는 일은 항상 벅차다. 근래엔 나에게 팀 오브라이언이 그랬다. 이 작가를 알게 해준 1인출판사 섬과달에 감사의 인사를.. 팬심으로(?) 출판사 대표님이 격주로 하시는 워크샵에도 참석했다. 저번주에 사람이 적어서 슬펐는데, 다음주엔 사람이 더 왔으면 하는 마음에 글을 또 끄적여본다.

p.s 마지막으로 작가 팀 오브라이언의 인터뷰에서 인상깊었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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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제가 전쟁은 지옥이라고 말해요-실제로 그렇기는 해요-하지만 그 표현은 우리가 더 많이 느끼도록 허락해주질 않아요. 이야기라는 마법을 통해서, 인물들이 각자 선택을 하고 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우리는 종종 사건들에 실제로 몸담는 느낌을 받습니다. 심장박동이 빨라지죠. 눈물을 흘립니다. 빙그레 웃음을 지어요. 우리는 느낍니다. 베트남에서 벌어진 미국의 전쟁이 도덕적으로 모호하고 복잡했다 이해했다고 쳐요. 그런 모호함과 복잡함에 개인적으로 사로잡히는 건 또 다른 문젭니다.

역사는 축소를 합니다. 역사는 생략을 해요. 역사는 일반화를 하죠. 그런데도 대체로 우리는 역사 교과서를 진실하다 여기고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진실하지 않다 여깁니다. 이게 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어요. 하지만 부탁인데 오해는 마세요. 논픽션도 중요해요. 저는 좋은 역사물이나 좋은 자서전을 읽는게 아주아주 좋고, 내가 ‘실제 벌어진 일’을 발견한다는 착각도 대단히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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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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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해에서 태어났다.

-나는 하모니카를 수준급으로 분다.

-나는 햄버거를 좋아한다.

-나는 돈 욕심이 별로 없다.

-나는 행복하게 살고 있다.


 이 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군대에서다. 반년만에 들어온, 게이로 추정되는 맞후임과 나는 허구헌날 사무실에서 잡담을 하곤 했는데 그 친구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김애란이었다. 후임의 추천으로 단편들을 읽게 되었는데, 3년동안 고시원에서 살았던 나로선 <노크하지 않는 집>을 읽고 다른 단편들을 찾아보지 않을 도리는 없었다.

 얄궂게도 후임의 집은 꽤 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어느 날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이야기 했는데, 나는 햄버거 후임은 성게알이었다. 오마카세라는 말을 처음 들었던 것도 그 때였다. 후임은 기억나지 않는 여러 가게 이름들을 말하며, 성게알은 바다의 슈크림이라는 둥 성게알 맛을 열심히 묘사했다. 성게알이 꽤 비싼 식재료인지, 또 후임이 살았던 동네가 그렇게 부촌인지 알게된 건 전역하고 한 참 뒤다. 후임에게 간식을 그렇게 열심히 사주었건만, 전역하고 꼭 다시 보자는 후임의 마지막 인사는 아마도 거짓말이었던 듯 하다. 이놈자식!


 전역하고 한동안은 아둥바둥 살았다. 구복이 원수라며 종이상자 자르는 알바를 하다 손가락 살을 뭉텅 잘랐다. 힘든 건 불행이 아니라 행복을 기다리는게 지겨운 거였다는 김애란의 말이 생각났다. 사는게 지겨워 손가락을 자르는 사치를 부렸다.

 그 때 내 손가락에 붕대를 감아준 형과 연이 닿아 아직도 드문드문 연락을 한다. 아버지 장례식때도, 이번 생일에도 먼저 연락이 와서 참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손가락에 흉터는 아직 남아있어도 난 그 때의 구복이 참으로 복되다 여기며 살고 있다. 내가 분당으로 이사올 때 즈음, 우리 가족은 거짓말같은 모종의 행운으로 더이상 애면글면 살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다시 보자는 알바 형의 말은 아마도 거짓말이 아니었다.


 김애란의 이번 장편은 고등학생 2학년 어떤 반의 자기소개 게임으로 시작한다. 자신을 표현하는 문장을 5가지 이야기 하는데, 반드시 그 중 하나는 거짓말이 들어갈것. 이토록 매력적인 게임이라니. 책을 수없이 읽다보면, 넷플릭스를 하루종일 보다보면, 혹은 그냥 살다보면 결국 거짓말 언저리에야 진심이 담긴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게된다. 때로는 거짓말 속에, 때로는 거짓말이 끝나는 지점부터. 감명깊게 읽은 소설 속에서, 혹은 광고와 광고 사이 그 짧은 순간에.


 나 역시 소설과 비슷한 경험이 있다. 고등학생 시절에 음악 선생님이 참 이상한 사람이었는데, 노래부르기 시험땐 다른 곡을 다 놔두고 굳이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를 원어로 불렀다. 가사를 1주일동안 달달 외운 뒤에 파리넬리에 빙의해서 열심히 불렀던 기억.

 그러던 어느날은 갑자기 하모니카로 수행평가를 하겠다고 했다. (이게 교육과정에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린 음악시간에 참 괴상한 것들을 많이 배웠기에 킹리적 갓심이..) 쉬워보였던 하모니카에도 참 여러가지 기교가 많았는데 그 중 바이브레이션이 그렇게 어려웠다. 소리가 나오는 곳을 손으로 열었다 막았다 하면 되는 간단한 것인데 다들 그럴싸하게 들리진 않았던 이상한 기억. 열심히 연습하다 반쯤 포기했던 어느날 실수로 하모니카를 바닥에 떨구고 말았다. 이놈의 아귀힘. 횡액이 내 팔자는 아닐진 몰라도 이 약한 아귀힘은 날때부터 많은 걸 놓치게 만들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그 때부터 떨어뜨린 하모니카를 불기만 하면 바이브레이션이 자동으로 되는게 아닌가! 옆에서 열심히 바이브레이션을 연습하던 원태는 억울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고, 나는 덕분에 우리반에서 유일하게 하모니카 만점을 받았다. 열심히 연습했다는 사소한 거짓말과 함께.


 여기서 이야기가 끝이 났다면 그냥 내 사소한 행운 이야기로 끝이 났을 테지만, 1조 하모니카 시험이 끝나고 다음날 2조의 친구가 나에게 다가왔다. 평소에 말이 없고 조용히 공부만 하던 친구였는데, 하모니카를 집에 두고와서 내껄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난 흔쾌히 빌려주었지만 안타깝게도 그 친구 역시 내 하모니카를 떨구어버렸고, 그렇게 내 하모니카는 완전히 고장이 나며 운명을 다했다. 뭐, 시험은 끝났고 앞으로 평생 하모니카 불 일은 없지 않을까 싶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리고 며칠 후 그 친구가 나에게 새로 산 하모니카를 건네주었다.


“정호 니한테 하모니카 엄청 소중했을텐데 미안하다..”


 난 머쓱히 새 하모니카를 받아들며 고맙다고 인사를 건냈다. 왜인지 그 때 참 부끄러웠던 기억이다. 방정맞게 거짓말로 연주한 내게도, 그 거짓말에서 뭔가를 소중히 들었던 친구에게도. 그 친구가 사준 하모니카는 부산 집 서랍에 아직 남아있을 것이다.


 잡소리가 길었지만, 이번 김애란의 장편이 좋았다. 단편만큼 좋았느냐 하면 그건 아니지만, 거짓말로 진실을 이야기 하는 창작자로서는 마음이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글을 써서 돈을 벌어보자는 허황된 꿈은 이제 접어 두었지만, 나도 4줄의 진실과 줄의 거짓말을 생각하며 부지런히 글을 써야겠다 생각한다. 어쩌면 또한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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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들 - 숭배와 혐오, 우리 모두의 딜레마
클레어 데더러 지음, 노지양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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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보고싶은 책인데.. 목차에 마이클잭슨이 있어 고민이 됩니다. 황색언론에 의해 억울하게 성폭행범으로 몰려 죽임당한 인물인데 어떤 맥락으로 쓰여진 챕터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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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 2024-10-22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이클 잭슨 성추행 고발 다큐멘터리 “리빙 네버랜드leaving neverland” 보시길 추천드려요.

Teo 2024-10-23 07:25   좋아요 1 | URL
다큐맨터리의 주장은 전부 반박당했고 모순이 너무 많습니다

Ssong 2024-10-23 16: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보지도 않으시고 별점 1점을 남기시는건 뭔가요?

Teo 2024-10-24 07:44   좋아요 1 | URL
저도 그게 마음에 걸려 서점에서 마이클잭슨 파트를 읽어 보았지만.. 생각했던 그 맥락이 맞더라구요. 누군가를 괴물로 지칭하는 것은 굉장히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과, 세상에 괴물같은 창작자가 얼마나 많은데 왜 굳이 마이클잭슨을 정한걸까 하는 생각에 아쉬움이 남지만.. 말씀처럼 책을 다 읽고 별점을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영화광
워커 퍼시 지음, 이승학 옮김 / 섬과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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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말을 할 때 적확한 단어 대신 그 근처를 맴도는 부정확한 단어를 말하는 습관이 있다. 그러다보니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 때도, 틀렸다고 교정을 받을 때도 있다. 할머니처럼 나중에 나도 치매가 오려나 무서운데, 치매예방을 위해 고스톱을 열심히 쳐야하나 싶다. 


 이런 버릇이 망상을 할 때엔 적잖이 도움이 되는데, 전혀 상관없는 단어들이 들러붙어 재미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해주는 탓이다. 양 극단은 서로 닮았다는 것을 나는 내 말실수에서 느낀다.


 애드거 앨런 포의 소설을 읽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 사람의 망막은 중심보다 가장자리가 더 빛에 민감하기 때문에, 별을 볼때엔 그것을 똑바로 바라보지 않고 살짝 비껴 바라보아야 한다고. 금성을 지나치게 오랫동안, 지나치게 집중해서, 지나치게 똑바로 지켜보면 사라지는 법이라고. 아마도 진리나 깨달음을 향해 가는 자세에 대한 이야기였을텐데, 어릴 때 읽은 그 구절은 내 마음에 또렷하게 남았다. 다만 나는 그저 비껴간 단어를 말하고 별을 잘 보는 어른이 되었다. 


 어릴적 읽은 포의 이야기가 다시 떠올랐던 건 수년 전 재야의 볼링고수 친구와 볼링을 치던 때이다. 곧잘 스트라이크를 치는 친구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중앙을 노리는게 아닌 그 살짝 옆을 노리는게 포인트라고 했다. 스트라이크를 노리고 한 가운데를 힘껏 치면 양 끝의 핀이 남아 다음 차례에 둘 중 하나만을 노려야 한다고. 어쨌든 공에 스핀을 줄 수 있어야 하기에 그리 도움되는 조언은 아니었지만, 생각 없어 보이던 친구놈이 포와 비슷한 말을 한다 싶어 다시 새삼 다시 보였다. 한평생 양 극단의 단어 사이를 오가는 여행자처럼, 중앙을 비껴치며 살아온 내 인생에 다시금 응원을 주는군. 물론 친구는 몰랐을 테지만.


 연말에 우연히 워커 퍼시의 <영화광>을 읽고 감동받아 결국 이런 글을 쓴다. 정말 별 내용 없이 30살이 된 주인공이 1주일 동안 일상을 때우는 이야기인데, 무엇보다 제목이 영화광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이야기는 손톱의 때만큼만 나온다는 점도 훌륭한 비껴감 포인트!.. 장난이고, 난 결국 이런 시시껄렁함을 사랑하는 족속인가보다. 내 단어처럼 방황하는 일상.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게 아닌 그저 주위를 맴도는 이야기. 일상성에 잠겼다 떠오르는 자맥질에 삶의 깊은 행복과 슬픔이 담겨있다.


 결국 올해 그렇게 살았다. 금성의 언저리를 바라보며, 단지 별을 많이 보는 사람이 되어서. 단어의 언저리를 가늠하며 더듬어가는 사람들을 포옹하며. 선의의 오해를 마음가짐으로 말에 귀기울여주는 따수움에 고마움을 느끼며. 교정보다 웃음이 선행하는 마음 씀씀이. 미끄러지는 단어의 가장자리를 함께 헤매며 살아온 해의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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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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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절마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모여서 보드게임을 하는 것이 나름 우리들의 작은 전통(?)이다. 원태가 안 해본 보드게임을 하나 들고오라고 해서 보드게임이 꽂혀진 창가의 책장을 살펴보았다.


 언젠가 쓴 적이 있지만 우리 집은 북향이라 해가 들지 않는다. 다만 하루 중 딱 한 번 빛이 집으로 들어올 때가 있는데 바로 해가 질 때다. 창가에 있는 책장으로 빛이 사선으로 얼마간 비쳤다 사라진다.


 책과 보드게임의 색이 미세하게 바랬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그 때였다. 하루중 30분 남짓 비치는 석양에도 꾸준히 색은 바래고 있었구나. 물건을 소중히 다루는 편은 아닌지라 슬프진 않았다. 다만 영속하는 상실을 조용히 감각했다. 가만히 멈춰있는 것들도 조용하게, 하지만 끊임없이 이별하고 있다.


 연휴에는 책을 4권 읽었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리플리는 레즈비언 친구에게 읽고 알려주기 위해, 그리고 클레어 키건의 소설 2권. 들고온 책은 이 3권이었지만 너무 빨리 읽는 바람에 동네 서점으로 가서 앤드루 포터의 새 단편집을 사서 올라오는 기차 안에서 읽었다. 


 읽을 때마다 레이먼드 카버를 떠올리게 하는 앤드루 포터는 상실을 표현하는 재능이 참 탁월하다. 포터의 소설에는 나도 모르게 지나온 것들, 달라진 것들, 그리고 사라진 것들이 담겨있다. 미처 자각하지 못하는 상실을, 어느날 문득 무언가 달라졌다는 감각을 그려낸다. 그게 무엇이었지는 결국 설명하지 않는다. 다만 잠시 멈춰 선 사람들을 조용히 응시한다. 아름다움과 슬픔은 모두 정지해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삶은 흐른다는 점이 비극이자 작은 위안이다. 이미 지나쳐버린, 그리고 가물거리는 빈 곳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결국 그 주위를 담담하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앤드루 포터는 잘 알고 있다.


 이번 설의 보드게임 모임은 승률이 좋았다. 1등을 여러번 했다. 아마도 게임 잘하는 재우가 오질 않은 탓일지도.. 재우는 결혼을 준비한다며 양가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간다고 했다. 태윤이는 자랑을, 원태는 인생네컷에 미쳐있는 사람처럼 집안이 여자친구와 찍은 인생네컷이다. 가만히 서있는데도 많은 것을 지나쳐온 느낌이 든다. 꺼져가는 불씨에 숨을 불어넣는 것이나, 100미터 전력질주 달리기나 숨가쁜건 매한가지 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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