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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의 순간들 ㅣ 제프 다이어 선집
제프 다이어 지음, 이정현 옮김 / 을유문화사 / 2022년 3월
평점 :
연휴동안 제프 다이어의 <지속의 순간들>이라는 책을 읽었다. 에세이(라고 해야할지 사진 비평집이라고 해야할지 잘 모르겠지만)에 싫증을 느껴 에세이는 잘 안읽게 되었는데, 지속의 순간들은 책의 도입부부터 되게 놀라웠다.
작가는 다른 시대, 다른 작가들에 찍힌 같은 대상의 사진들을 찾아서 모은다. 만약 시각장애인을 찍은 사진들을 모아놓으면 어떤 이야기가 가능할까. 가장 처음 울타리를 찍은 사람은 누구일까. 오머로드의 길 사진은 스기모토의 자동차극장 사진과 어떻게 이어질까. 20년 전 랭의 사진에서 봤던 남자가 디캐러바의 사진에 나오는 남자와 동일인물이라면 어떨까. 그 과정에서 사진들의 연대표는 뒤죽박죽 섞이고, 때로는 사진작가의 이름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영화 어라이벌에 나오는 헵타포드 외계인들의 비선형적 시간관만큼 우스꽝스러운 질문들일 수 있지만, 점점 이런 이야기들이 삶의 큰 진실들과 닿는다. 어떤 슬픔은 슬퍼야하는 이유에 선행하여 찾아온다는 것. 어떤 구원은 또한 구원을 필요로하는 모든 것들에 앞서 찾아올 수도 있다는 것. 기차가 도착하지 않았거나 이미 출발해버린, 텅 빈 기차역에 우리 모두는 머문다.
사진가는 이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지, 어떤 사진이 될지 알 수 없다. 사진으로 무언가를 찍는 다는 사실이 그 무언가를 바꾼다. 사진은 이렇게 삶과 닿아있다. 젊음을 모르는 젊은 날 젊음을 이야기 하고, 사랑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랑을 이야기하는 우리들의 삶과. 우리 각자의 젊음과 사랑의 사진들 속에서 어떤 동시성과 연속성이 함께 생겨난다. (제프 다이어는 카메라도 없고 사진을 찍지도 않는다는 점이 재밌다)
사진에 대해선 문외한이지만, 이 책을 읽으니 사진이란 매체를 더 사랑하게 될 것 같다. 로버트 프랭크와 도로시아 랭, 마이클 오머로드의 사진집을 알라딘 장바구니에 담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