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탄탱고 - 2025 노벨문학상 수상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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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예뻐 살까말까 망설였던 라슬로의 책들. 노벨상을 받을 줄 알았으면 미리 사서 읽을걸. 마침 자주 가는 서점에서 독서모임을 하신다고 하여 반박자 느리게 읽었다. 암울한 세계의 종말을 그리는 소설이지만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결국 이어지는 모습을 보며 섬뜩함과 동시에 알 수 없는 희망을 느낀다. 영원히 반복되는 종말의 리듬 어디에서 희망을 느꼈던 걸까 생각해본다. 세계와 함께 진동하며 난 어디에 머무는지, 어디로 떠나는지, 혹은 어디로 돌아오고 있는지를 가늠하며. 앞으로 여섯 발자국, 뒤로 여섯 발자국.

10대를 돌이켜보면, 넌 커서 뭐가 되고싶니라고 누군가 물었을 때 주저했던 기억은 좀처럼 없다. 국어선생님을 좋아했을 때는 작가가 되려 했고, 동네 비디오가게에서 영화를 주구장창 빌려보던 때에는 영화감독이 되어야겠다 생각했다. 독립출판으로 책을 만들면서, 그리고 영화 <파이트클럽>을 따라 학교를 폭파시키는 단편영화를 만들면서 나는 반박자 빠르게 춤췄다.

400부나 뽑았던 책은 (아직도) 50권이 남아 침대 메트리스 꺼진 부분을 받치는데 쓰고 있고, 영화는 힘들어서 대학교 2학년에 관뒀다. 대신에 문학동아리방에 틀어박혀 시간을 보냈다. 한 번도 연애를 못해본 동아리 친구들은 연애소설 쓰기 대회를 하자고 했고, 서른 살에 죽을꺼라던 동아리 친구와는 거짓말쟁이를 찾는 보드게임을 했다. 잠깐 숨을 돌리던 스무살이었다.

시간은 흘러 나는 서른을 훌쩍 넘겼고, 저번 주말 동아리 친구 S는 결혼을 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S는 특유의 졸린 눈으로 날 반겼다. 그리고 인사도 없이 그녀의 첫마디는 이랬다.
“오빠. 다음달에 테포마(보드게임) 할거에요. 애들 모아요.”
응 그러자. 그래도 오늘은 결혼에 집중해야하지 않겠니. 왠지 결혼 못할 것 같았던 동아리 친구들이 이제 하나 둘 결혼을 한다. 기어코 보드게임덕후 신랑을 발견(!)하여 결혼에 성공한 S를 보며, 나는 뭔가 비껴가고 있다는 걸 느낀다. 이번엔 한 박자 느린 것 같다.

끊임없이 밀려오는 세계 속에서 가끔은 반박자 빠르게, 대체로 한박자 느리게 춤을 추며 살아왔다. 꿈이라고 할만한 걸 쫓아 여섯 발자국 걸어갔던 것이 10년 남짓, 꿈이란게 과대평가됐다는걸 깨닫는데 또 10년 남짓. 그리고 AI가 내 일을 언제쯤 대체하려나 생각하며 잠깐 숨을 고른다. 확실히 세계는 나보다 크게 진동하는 것 같은데, 나는 어디를 향해 걸음을 옮겨야 할까. <사탄탱고>의 마을사람들은 이리마아시의 뜻을 향해 움직인다. 의사는 멀리서 들리는 종소리에 희망을 꿈꾼다. 이리미아시의 세계가 그리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알게되기 전까지. 미치광이 노인이 종을 두드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되기 전까지. 난 종소리의 끝에서 보게되는 것을 견딜 수 있을까?

<사탄탱고>의 세계는 닫힌다. 시작과 끝이 이어진다. 이야기를 잇는 인물이 이야기의 작가라는 점에서 마치 예술에 관한 이야기로 읽힌다. 끝없이 진동하는 세계의 개곡선 위에서,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예술의 폐곡선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마을 사람들은 영원히 희망을 찾아 떠돌 것이고, 후터키는 영원히 종소리의 정체를 알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다시 시작된다. 사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를 지탱했던 것들도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는 매일의 폐곡선들이다. 매일 소파에 앉아 한시간 남짓 책을 읽고, 체육관에서 무거운 쇳덩이를 들었다 내리고 잠이 든다.

소설에서 의사는 종소리의 정체를 알게된 후 이야기를 원으로 닫는다. 의미를 찾기 위한 시도는 항상 실패하지만, 인간은 무의미를 견디기 위해 때로 예술의 폐곡선을 만든다. 의사는 종소리가 무엇인지 알지만, 이야기엔 영원히 종소리의 정체를 모를 후터키를 둔다. 어쩌면 난 여기서 희망을 느꼈던 걸지도 모르겠다. 원하던 곳에 결국 도달하진 못하겠지만 적어도 거미줄을 걷어낼 순 있는 세계를 만드는 것. 실패하는 세계 속에서 매일을 반복하는 우리의 모습에 위로와 약간의 희망을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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