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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의지 - 자유의 가능성 탐구
줄리언 바지니 지음, 서민아 옮김 / 스윙밴드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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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책은 자유의지가 과거부터 현재까지 어떻게 정립되어왔는 지 보여준다. 현대에 이르러서 많은 분야에서 자유의지를 어떻게 무너뜨리는 지 보여주는데 매우 흥미롭다.

자유의지 vs 결정론

자유의지 vs 문화

자유의지 vs 신경과학 or 뇌과학 or 유전학

시작은 라플라스의 악마를 예를 들면서 시작한다.

라플라스의 악마란?

‘우주에 있는 모든 원자의 정확한 위치와 운동량을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이것은 뉴턴의 운동 법칙을 이용해, 과거와 현재의 모든 현상을 설명해 주고, 미래까지 예언할 수 있을 것이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현재는 과거의 결과고, 미래는 현재의 원인이라는 소리다.

우리가 현재 하고있는 모든 것들이 과거의 원인이고 현재의 현상으로 미래까지 예측할 수 있다면, 이것으로 인해 자유의지는 부정되어 버리는 것이다..

본성이냐 or 양육이냐..

쌍둥이 연구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된다. 이책에서도 다양한 쌍둥이 사례가 나오는데, 다른 가정에서 크게 된 쌍둥이가 결론적으로 비슷한 삶의 형태를 보여준 사례도 있고, 전혀 다른 삶을 보여주기도 했다. 특히 재능이나 성격적인 성향, 개인의 병력 등 유사한 사례도 있었고 다른 사례도 있었다..

자유의지로 결정하는 것인가?

모태신앙이란 말이 있다. 부모님이 특정한 종교를 믿으면, 자식도 그 종교를 믿게될 확률이 높다. 종교적인 믿음도 자유의지로 선택하기 보다는 부모의 영향으로 좌지우지 되는 것이 크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신념, 정치적인 경향성, 문화적인 산물의 사례도 나온다. 특정 지역에서는 보수적인 정당을 지지하는 경향이 강해서 아이들도 자라면서 그에 따른 성향을 가지게 된다는 사례, 개고기를 먹는 것을 혐오스럽게 여기는 지역이 있는 가하면, 식재료로 생각하는 곳도 있다는 사례도 나온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개인이 선택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뇌과학이나 신경과학에서도 다양한 사례가 나온다.

평소에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소아성애적인 경향이 생기고 결국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이 나오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그 사람의 뇌에 종양이 생겼던 것이다. 그럼 이 사람은 자유의지로 범죄를 저지른 것인가..?

마지막 챕터에서 저자가 제시한 조건하에 자유의지가 건재함을 제시한다. 이미 이책의 마지막까지 오는 동안에 자유의지가 너무 후두려 맞아서, 오히려 안타깝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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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거율, 강의와 강연 하이데거 전집 10
마르틴 하이데거 지음, 김재철 옮김 / 파라아카데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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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때문에(weil)’에 머물고, ‘왜?’를 묻지 말라!” -괴테-

근거율은 다음과 같다. ‘이유 없이는 아무 것도 있지 않다.’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번역한다. ‘근거 없이는 아무것도 있지 않다.’ 라틴어 표현 양식으로 이것은 ‘모든 존재자는 이유를 가진다(omne ens habet rationem)’로 표현된다. 이것은 “각각의 존재는 근거를 가진다.”라는 식으로 표현된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알든 모르든, 그리고 우리가 알게 된 것에 대해 특별히 주목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가 체류하는 곳은 언제 어디에서나 세계 안에 있으며, 우리와 마주치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 근거를 탐구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때때로 배후로 들어가 보려고 시도하지만 사유의 심연에 이르기까지 충분하게 그 근거를 들어내는 것은 부족하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한 대답을 근거율이 내포하고 있지만 근거율은 대답을 주지 않는다고 말한다.

데카르트가 모든 것을 의심하고, 명석하고 판명하게 제시되는 것만을 확실한 인식으로 허용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지식을 흔들리지 않는 근거위에 두려고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데카르트의 이러한 방식에 대해 라이프니츠는 그가 주도적인 원리로 여기는 표상작용의 명석함과 판명함이 어느 지점에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포기하였다고 지적한다. 라이프니츠가 데카르트는 그러한 지점에 별로 의심하지 않았다고 하이데거는 말한다. 근거율은 우리에 의해 언제 어디서나 버팀목이자 척도로서 사용되고 추구되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근거율은 그것의 가장 고유한 의미를 숙고하지 않을 때, 우리를 무근거에 빠뜨린다고 한다.

장미는 왜 없이 있다. 그것은 피기 때문에 핀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주의하지 않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지 안 보는지에 대해서도 묻지 않는다.

                                             -안겔루스 질레지우스-

장미는 장미이다. 그것은 틀림없이 자기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장미는 본래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장미는 자신이 존재하는 방식을 위해서 유달리 자기 자신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 장미는 피기 때문에 핀다. 장미의 개화와 개화의 근거들 사이에는 근거가 그때마다 비로서 근거로서 존재할 수 있게하는 그런 근거들에 대한 주의가 개입되어 있지 않다.

안겔루스 질레지우스는 장미의 개화가 근거를 가진다는 사실을 부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장미는 피기 때문에 핀다. 이에 반하여 인간은 자기 현존재의 본질적 가능성 속에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을 위해 그때마다 규정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어떻게 근거가 존재하는지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라이프니츠의 사유에 따르면 이는 다음을 의미한다. 즉 장미가 피기 위해서 장미는 자신의 개화가 근거하고 있는 근거의 송달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장미는 이유를 보충하는 것, 즉 근거의 송달이 장미-존재에 속하지 않아도 장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미는 결코 근거 없이 있지 않다. 장미와 근거율이 말하는 것과의 연관은 분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오히려 인간이 ‘왜’없는 장미와 같은 방식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인간은 가장 숨겨져 있는 본질적 근거 속에 참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근거율』에서 하이데거는 근대의 표상적 주체에 기초한 라이프니츠의 근거율을 비판하고, 근거의 본질이 탈-근거로서 존재 자체에서 유래하는 것을 밝힌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이데거의 이정표는 필수로 읽어야하는 듯하다. 이정표는 하이데거 전집 9권에 수록되어 있다. 주석이 풍부하지 않아서 철학사전에서 용어를 검색하지 않으면 읽기가 버거웠다. 처음부터 출판사와 번역자도 이 책의 독자를 하이데거의 이정표를 이해한 독자로 설정하고 출판한 것 같다.

책을 읽다보면 존재의 시간에 관한 내용도 나오고, 라이프니츠에 대한 근거율을 비판하는 것뿐만 아니라, 칸트와 헤겔의 관점도 나와서 이 둘을 모른다면 이 책은 활자만 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책에서 존재의 역운 등의 다양한 개념어가 쏟아져 나온다. 솔직히 매우 어렵다. 고대철학의 내용도 나오고, 그리스 비극에 관한 내용도 나온다. 물론 이에 대한 주석은 없다. 앞부분을 이해를 못했더라도, 이 책에 마지막 챕터인 「근거율 강연」에서 하이데거 무엇을 말하고 싶은 지 조금은 알 수 있다.

P317 ~ P318

존재는 근거로서 경험된다. 근거는 ‘라치오’ 즉 해명으로 제시된다. 인간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생명체, 즉 이성적 동물이다. 인간이 이상적 동물이라는 규정이 인간의 본질을 다 드러내고 있는가? ‘존재는 근거를 뜻한다’라는 말이 존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종적인 말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인간의 본질, 존재에 대한 인간의 귀속성, 존재의 본질은 여전히 계속해서 놀라움을 일으킬 만큼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고 한다면 오로지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의 질주와 그것의 엄청난 성과를 위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포기해도 되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면 계산적으로 고려하는 사유에 현혹되어 사유할 가치가 있는 것을 지나치는 대신에 사유가 그것에 응답할 수 있는 길을 찾으려고 우리는 애쓰고 있는가? 물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것은 사유가 물어야할 세계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한 대답에서 이 땅과 이 땅위의 현존재에서 무엇이 일어날 것인지가 결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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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 유성룡이 보고 겪은 참혹한 임진왜란
김기택 옮김, 임홍빈 해설, 이부록 그림, 유성룡 원작 / 알마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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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구절이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우리는 막연히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역사를 왜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인지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역사의 두 가지 모습을 바라보고 살고 있다. 승자의 역사와 다른 하나는 패자의 역사이다. 우리는 선현들의 승리의 역사를 바라보면, 마음이 흐뭇하며, 그 태평성대의 시절을 한번 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기도 한다. 반면에 패자의 역사를 바라보면, 분노를 하고 왜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까지 무너졌을까 라는 비참함에 치를 떤다.

아쉽게도 징비록은, 패배의 역사의 결정체이다. 임진왜란에 대해 유성룡이 보고 듣고 직접 기록한 것이다. 우리는 임진왜란을 어떻게 생각할까? 임진왜란을 떠올리면, 첫 번째로 이순신 장군을 떠올린다. 이순신 장군의 승리가 없었더라면, 우리는 지금과 같은 삶을 영위할 수 있었을까?

징비록을 읽다보면 비열함에 치를 떤다. 국토에서 죽어가는 백성들을 보면 한숨이 나오지만, 자신의 밥그릇을 지키고자 싸우는 모습에 한숨만 나온다. 전쟁에 대한 징조가 여럿 있었지만, 우리가 임진왜란을 대비하지 못한 것도 큰 잘못이다. 조선통신사로 파견을 나갔던 김성일은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조선을 침략하지 않을 것이라고 호언장담 했었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았다. 만약 당시에 김성일의 말을 듣지 않고, 황윤길의 말을 들었더라면,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가 조금이라도 더 나아졌을까? 역사에서 우연의 요소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일상생활에서 우연히 벌여진 일은 크지 않지만, 만약 역사에서 우연히 벌어진 일은 무엇이라고 해야 하는 지, 참으로 난감하다.

E.H 카의 저작인 역사란 무엇인가에서는 우연이란 요소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레닌이 조금 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스탈린이 아니라 트로츠키가 집권했더라면, 아직도 소련이라는 국가가 존재했으며, 공산주의 진영이 여전히 현존해 있었을까? 결론적으로는 아니라고 말한다. 사회전체적인 구조적인 문제와 공산주의의 폐해 그리고 점점 쇠약해져가는 체제에 있어서 공산주의는 멸망하고 만다. 결국 스탈린이 소련을 이끌었던, 그 누가 이끌었던 간에 공산주의가 더 지속되었던 덜 지속되었던 간의 기간의 차이이지, 계속해서 현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우연이라는 요소에 빠지게 되면, 운명론이라는 잘못 된 시각에 빠질 수 있다. 비유하자면,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고 해서, 셔츠를 제대로 입지 못한다는 논리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면 풀어서 다시 셔츠를 입으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상관없이 그러한 일은 이미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우리는 그러한 사건을 잊지 않고, 반면교사로 삼아서 앞날을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조선통신사 김성일의 보고 혹은 황윤길의 보고, 그 누구의 보고를 들었어도, 어차피 임진왜란을 벌어진 일이였다. 물론 대비하는 정도의 차이가 있었겠지만 말이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라는 구절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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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국사 교과서가 가르쳐주지 않는 우리 역사
신채호 지음, 김종성 옮김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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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역사란 무엇인가? 조선상고사를 저술한 신채호는 역사를 아와 비아와의 투쟁이라고 한다.주관적인 ‘아’가 있으면, 대립적인 ‘비아’가 있기 마련이다. ‘아’에 대한 ‘비아’의 접근이 빈번해질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분투도 더욱 더 맹렬해진다.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전개되고 공간적으로 펼쳐지는 정신적 활동 상태를 따라서 역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가 역사적인 ‘아’가 되려면 두 개의 속성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첫째는 시간성으로 ‘아’의 존재는 시간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둘째는 공간성으로, ‘아’의 영향력이 공간적으로 파급되어야 한다.

 

 

같은 행위일지라도, 어느 것은 ‘아’가 되고 어느 것은 ‘아’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김석문이 지동설을 지오다노 부르노 보다 300년 먼저 주장했다고 해서, 그러한 사실이 ‘아’가 될 수 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아니다. 브루노의 학설은 유럽 각국의 탐험 열기를 이끌고 신대륙의 발견을 앞장서게 만들었지만, 김석문의 학설은 그렇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아’의 성립 요건은 시간성과 공간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며, 인류의 것이라 할지라도 사회적 행위일 때만 역사적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적인 행위가 역사적인 기록이 될 수 없듯이, ‘아’ 역시도 ‘비아’가 되지 않으려면, 시간과 공간에서 파급력을 갖추어야 한다. ‘아’는 주관적 입장에 선 쪽이라고 신채호 선생은 서술하는데, ‘아’를 단순히 계급, 국가, 민족에 한정해서는 안 된다. ‘아’는 배타성(계급, 국가, 민족)을 갖춘 것 뿐만 아니라 인류의 공존까지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는 주관적 입장에 선 쪽 이기 때문에, 이것은 ‘아’의 입장은 어디까지나 주관적 입장에 그칠 뿐 객관적 입장이 될 수 없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신채호 선생은 ‘아’ 속에 ‘아’와 ‘비아’가 있으면, ‘비아’ 속에서도 ‘아’와 ‘비아’가 있음을 강조했다. 이것은, ‘아’와 ‘비아’와의 공존을 인정한 것이다. 조선상고사는 민족주의적 사관에 입각해서 쓴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이라는 ‘아’를 설정해서 쓴 저술이므로, 신채호 선생을 단순히 민족주의자라고 여겨서는 안 된다. 그는 민족주의라기보다는 무정부주의자에 가까웠다.

 

 

그렇다면, 조선상고사는 우리민족인 ‘아’에 대해서 어떻게 서술하였는가? 신채호 선생은 과거 고대사에 대해 사라진 사료에 대해 아쉬워했다. 역사란 승자의 역사라는 말이 있듯이, 승자들이 ‘아’가 되어버리면, ‘비아’에 대한 기록들을 날조 및 생략하거나, 언급조차 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이러한 세태에 대해서 비판하면서, 신채호 선생은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이다. 사대파 김부식이 자주파 묘청을 숙청하고,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은 고대사를 정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대사를 청소하기 위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이 책에서는 과거 고조선 시대부터, 우리가 알고 있는,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삼국시대 역사를 다루고 있는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까지의 역사가 서술되며 미완성으로 종료된다. 이 책은 ‘아’가 되어 서술하지 않은 것과 그에 따라서 ‘비아’로 남게 된 역사를 재조명하고 있다. 또한 신채호 선생의 개인적인 평가와 역사에 대한 총론을 담고 있다.

 

 

앞서서 신채호 선생이 인정했듯이, ‘아’가 되더라도 ‘비아’와 함께 공존해야지, ‘비아’에 대해 날조하거나, 생략해서는 안 된다. 그런 고대사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신채호 선생은 고구려 및 백제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소서노를 최초의 여왕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러한 주장이 흥미롭다. 소서노가 죽은 뒤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가 미추홀과 위례성을 도읍으로 정하고 새롭게 백성들과 살아간다. 우리는 소서노가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의 부인 인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주몽의 친자식인 유리왕의 어머니인 예씨가 나타나게 되자, 비류와 온조는 소서노와 함께 떠나게 된다. 신채호 선생은 소서노를 단순히 두 자식의 어머니로만 여기지 않고 왕으로 본 여러 가지 이유를 설명한다.

 

 

첫째로, 소서노의 지위가 단순히 왕의 어머니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둘째로, 소서노의 죽음이 정치적인 죽음이었고 그것이 도읍 천도의 원인이었다는 점이다. 셋째로 소서노가 죽을 당시에 소서노와 온조의 관계가 안 좋았다는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고대 동아시아에서는 자기 거처보다는 부모의 사당을 먼저 세우는 것이 상식이었다. 이런 상식을 위반한 인물은 통치자의 정당성을 얻기 힘들었다. 하지만, 온조는 이러한 상식을 위반한 채 소서노가 죽자마자 도읍을 옮기고 새로운 궁궐을 지었다. 이러한 종합적인 요소를 볼 때, 신채호 선생은 소서노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또 다른 부분을 들면서 이 독후감을 막을 내리려 한다. 신채호 선생의 연개소문이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이다. 신채호 선생은 혁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과 연개소문이라는 개인에 대해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P464

연개소문의 공적에 대한 평가

기존 역사가들은 ‘성공했나 실패했나’ 또는 ‘흥했나 망했나’라는 기준으로 사람의 우열을 판단하거나 유교적 윤리관으로 사람의 시시비비를 판단했다. 연개소문의 경우에는, 본인은 성공했지만, 불초한 자식들이 유업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 그래서 춘추필법을 흉내 내는 사람들은 연개소문을 배척하고 연개소문을 흉적으로 몰며 모독과 치욕을 가했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역사적 진보의 의의를 가진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다. 역사란 것은 어느 날 때고 변화하지 않는 경우가 없으니, 어느 날 어느 때고 간에 혁명 없는 순간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전체 역사를 다 혁명의 역사라고 해야 하지만, 역사가들은 혁명이란 어휘를 특히 중시하여 문화적, 정치적으로 시대를 구획할 만한 진보적 의의를 가진 인위적 대변혁을 혁명이라고 정의한다. 이런 의미의 정치적 혁명가를 찾자면, 우리 조선 수천 년 역사에서 이런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한양의 이씨가 송도의 왕씨를 대체한 것과, 이씨 조선의 이시애, 이괄 등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외형상의 성과 다르지만 두 가지 다 정권찬탈을 위한 행위에 불과하다. 이런 것들은 내란이나 역성이라고 부를 수 는 있어도 혁명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다르다. 그는 봉건 세습적인 호족 공화제를 타파하고 정권을 한 곳에 집중함으로써 분권적인 국면을 통일적인 상태로 바꾸었다. 또 반대파는 군주든 호족이든 불문하고 죄다 소탕했다. 그는 영류왕을 비롯해서 수백 명의 관료들을 주살했다. 또한 침략해온 당태종을 격파했을 뿐 아니라, 이를 추격하여 중국 전역을 진동시켰다. 그는 혁명가의 기백을 가지는 데 그치지 않고, 혁명의 능력과 지략까지 갖추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에 지혜롭고 유능한 사람을 자기의 후계자로 만들지 못했다. 그래서 조선 만대의 행복을 유지하지 못했다. 불초한 자식들에게 대권을 맡기는 바람에 결국 성과를 무너뜨리고 말았다. 그는 야심은 많았지만 덕은 부족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사 기록이 없는 탓에 오로지 적국의 붓으로 전해지는 기록만을 갖고 연개소문을 논평해야 하기 때문에, 그에 관한 사실의 전말을 종합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점 하나로 전모를 논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노예적인 사대주의 역사가들은 좁쌀과 팥알처럼 작은 자기 눈알에 보이는 대로 연개소문을 수백 년간 혹평해왔다. 그들은 ‘신하는 충성으로써 군주를 섬겨야 한다’는 불완전한 도덕률로 그의 행위를 탄핵하고 ‘대국을 섬기는 소국은 하늘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노예적 심리로 그의 공적을 부인했다. 이런 식으로 역사 인물의 시체를 한 점 살도 남지 않도록 씹어버린 것에 대해 나는 통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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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비타민 - 세상이 다르게 보이고 내가 바뀌는
도마스 아키나리 지음, 전선영 옮김 / 부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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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철학비타민

 

이 책은 과거 고대 철학부터 현대 사상까지 한눈에 정리한 철학이야기이다. 깊이가 있는 수준의 책을 원하신다면, 이 책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것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초심자를 위한 책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책에서 서술된 모든 부분이 이해하기 쉽다고는 못하겠다. 개인적으로 읽으면서, 마음에 들었던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의 서술 부분이다. 철학의 모든 부분을 알 수는 없지만, 철학에 어느 부분을 관심을 가지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처음부터 벽이 높으니, 우리는 다가기도 힘든 닿을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니 말이다. 자신이 철학사를 쭉 읽어보고 어느 철학자가, 자신에게 맞는지 파악하고, 그 철학자가 저술한 원작을 읽어보는 일이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를 ‘형상’과 ‘질료’로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비유해서 설명하자면, 질료는 재료이고, 형상은 재료로 만들어지는 구체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질료가 구리라면, 구리로 만들어지는 동전, 조각상, 컵 등은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을 질료인, 형상인, 동력인, 목적인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자면, 집을 지을 때 필요한 목재나 기왓장 같은 재료가 ‘질료인’이다. 집을 지을 때 필요한 설계도가 ‘형상인’이고, 집을 짓는 목수나 인부가 ‘동력인’이며, 만들어진 집에 들어가서 살 수 있어야한다는 최종적인 목적이 ‘목적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우리는 최고선을 추구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한다. 최고선이란 곧 행복이다. 앎을 추구하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하는데, 앎으로 인해 살아가는데 있어서 도움이 되어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앎 그 자체가 행복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을 갖추어야 한다고 말한다. 중용이란 다양한 감정에 대해 지나치게 강하거나 약하게 반응하지 않고 그 중간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덕은 습관으로 완성시킬 수 있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

종래의 철학은 객관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목표였다면, 그러한 철학에 대해 회의를 갖은 것이 키에르케고르이다. 내게 진리인 진리(주체적 진리) 즉, 내 생활에 정말 깊은 의미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인간은 실존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나 자신은 타인과 바꿔치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실존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지만, 이 병에 걸리는 것은 오직 인간뿐이다. 그러기에 인간은 동물보다 나은 존재이다. 절망하기에 인간은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실존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실존을 단계에 따라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한다. 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의 질적 변증법을 주장한다. 미적 실존은 쾌락을 추구하는 단계이다. 하루하루 즐거움을 추구하더라도, 어느 순간 그 즐거움에 대해 지루하고 우울하게 된다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윤리적 실존이란, 양심과 도덕에 맞추어 사는 인생을 지향하는 것이다. 하지만, 키에르케고르는 앞의 두 단계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한다.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인이므로 마지막 단계인 종교적 실존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런 실존의 단계가 헤겔의 변증법을 질적으로 비판한다. 헤겔의 변증법은 즉자(아직 모순이 표면화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자(즉자의 원래 다른 상태로 바뀐 두 번째 단계) 그리고 즉자적 대자(즉자와 대자의 대립을 지양한 새로운 것으로, 갈등이 통일되어 완전한 상태로 정리되는 단계)로 나아간다. 하지만, 대자에서 바로 즉자적 대자로 넘어갈 수는 없는 단계이다. 키에르케고르는 미적 실존, 윤리적 실존을 하지 않더라도, 종교적 실존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기에 변증법을 비판하는 것이다. 물론, 종교적인 가치가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가치의 우선순위를 두는 것에 따라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이 완전 틀릴 수 도 있다.

 

니체

“아무리 자신의 인생이 고통스럽더라도 몇 번이건 그것을 받아들인다.” 운명애의 철학, “원한을 품지 말라! 비뚤어지지 말고 똑바로 나아가라!” 니체는 ‘힘을 향한 의지’에 대하여 주장한다. 만약에 누군가가 무단횡단을 통하여 급하게 길을 건너고,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게 무단횡단을 하지 말라고 도덕적으로 훈계했다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가? 니체는 결국 두 존재 모두가 ‘힘을 향한 의지’로 인해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무단횡단한 사람은 급하게 어떤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훈계한사람은 도덕적으로 더 높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더 높은 존재가 되는 것과 더 많은 힘을 갖는 것을 원한 것이다. 이것이 ‘힘을 향한 의지’이다. 힘을 향한 의지가 삐뚤어져 우리는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이 생기고 만다. 이러한 르상티망으로 인해 니체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한다. “지금 자신은 불행할지 모르지만 신의 나라에서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다”는 기독교를 비판한다. 누군가의 성공이나 행복 그리고 무엇인가를 시기하는 마음은 ‘힘의 향한 의지’가 비뚤어져 르상티망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마음이 계속 생겨나면, 결국 이 인생은 진짜가 아니라는 생각이 탄생하고, 천국이라는 허황된 곳을 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이 죽었다는 한마디에, 모든 철학은 분쇄된다. 플라톤의 이데아는 ‘영원한 존재‘를 바라는 바람(르상티망)이 만들어낸 망상이 되고, 기독교의 신도 마찬가지이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도 “내가 가난하므로 모두가 평등해야 한다.”는 망상이 되고 벤담의 공리주의도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말도 인간을 평균화하고 싶다는 르상티망에서 나온 발상이 된다. 이러한 발상은 참된 세상이나 진리가 없다는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로 나아간다.

 

“인간은 동물과 초인 사이를 건너질러 매어 놓은 한 줄기 밧줄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마음 깊숙이 용솟음치는 ‘힘을 향한 의지’가 있다면 현실의 사회에서 방해받아 잘 풀리지 않을 때도 끄떡없다. 어떤 인생이든 등을 돌리지 않고 견디며 상황을 원망하지도 않고 그 운명을 사랑하는 굳센 인간. 이것이 초인이다. 초인은 신을 대신하는 궁극의 가치다. 딱히 지금 자신이 초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그런 존재가 되기를 기대하면서 노력하며 살면 된다는 것이다. 초인 사상은 니힐리즘을 뛰어넘어 인생을 최고로 긍정하는 방향으로 이끈다.

 

“너는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지금까지 살아 온 이 인생을 한 번 더, 더 나아가 무수히 되풀이하며 살아야만 할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영원회귀’라는 사상을 표현한 구절이다.

끝없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난 일은 다 일어나고 만다는 사상이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빅뱅으로 우주가 태어나고 지구가 생겨서 인류의 역사가 시작되고, 언젠가 우주가 소멸하고 다시 우주가 생기는 것을 되풀이하다 보면 언젠가는 완전히 똑같은 유형의 지구와 인류의 역사가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바보 같은 말로 들릴지라도 어쩌면 우리는 같은 인생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수없이 여러 번. 니체는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자신의 인생을 긍정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다. 만약 조금도 다름없이 지금의 인생이 되풀이될 때, 그래도 “이것이 인생이었던가! 좋다. 다시 한 번 살아 보겠다!”라고 답할 수 있다면 당신은 인생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인생이 영원회귀된다면,

또 다시 살아보겠는가?

 

 

하이데거

존재란 무엇인가? 존재를 사유하는 하이데거의 철학은 원래 현상학이라고 불리는 분야에 속한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삶의 자세를 말하는 부분이 부각되어 실존주의로 분류되고 만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 일상을 둘러싼 환경 세계에 먼저 나타는 것이 ‘도구’이다. 그리고 이런 도구는 의미 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OO을 위해서라는 식으로 서로 지시해서 하나로 연관을 맺고 있다. 망치는 못을 박기 위해서, 못은 널빤지를 고정하기 위해서라는 식으로 말이다. 이런 ‘도구 연관’을 성립시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의 염려(Sorge)이다.(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불렀으며 ‘염려’도 하이데거 철학에서 현존재의 존재 양식을 설명하는 철학 용어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염려란 무엇인가? 이를테면 내일 비가오니 우산을 챙겨야지라는 식이다. 왜 우산을 준비하는가? 젖기 않기 위해서, 혹은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즉 “내일도 무사히 있고 싶다.” 자신의 존재를 염려하기에 도구가 쓰이는 의미가 있다는 이야기다. 이것을 ‘유의미성’이라고 한다. 오늘 밤에 심장마비로 죽는다면 우산은 필요가 없다. 세계란 인간의 염려에서 시작되어 연결되는 거대한 의미의 틈새기와 같은 것이라고 하이데거는 생각했다.그런 틈새기가 풀려서 알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그리하여 생기는 것이 불안이라고 한다. 두려움이 대상이 있지만 불안은 대상이 없다. 어쩐지 불안하거나 아무튼 불안하거나 한다면, 대상이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이것을 두고 하이데거는 “불안은 무(無)를 드러나게 한다”라고 표현한다.

 

 

하이데거는 대중 사회 속 안일한 일상에 젖어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잃어버린 사람을 ‘다스 만(das Man,일반적인 사람, 일상인)이라고 한다. 연예인 누가 음주운전을 냈다더니, 누가 바람을 피웠다는 등하는 소식에 눈을 돌리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것이다. 왜 자신의 존재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것일까? 자신이 죽는 존재라는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을 아는 듯해도 사실을 잘 모른다. 타인의 죽음을 알아도 그것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가 토막살인되서 죽었대.”라고 신문에서 보고 수다를 떤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 자신의 죽음은 누구와도 교환할 수 없다.(교환 불가능성)

2. 고독해진다.(몰교역성)

3. 반드시 죽는다.(확실성)

4.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무규정성)

5. 마지막에 온다.(추월 불가능성)

 

 

하나하나 설명하자면 이렇다.

1. 자신의 죽음만은 아무도 대신하지 못한다.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죽음에서 시선을 피하고 있을지 모른다.

2. 죽음이란 이제 아무와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3. 게다가 누구는 죽고 누구는 죽지 않는 불확실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4. 덧붙여 언제 죽느지, 날짜와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당장 1초후에 죽을 지 몇 년 후에 죽을지 아무도 알 수없다.

5.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에 찾아온다. 죽음을 앞서 치르고 살 수 없다. 어김없이 마지막에 올 것이다.

 

 

죽음을 향하는 존재, “자신의 죽음을 피하려 하지 말고 마주하라.” 누구나 아는 사실이나 막연하고 있는 사실을 확실하게 확인하는 것이 현상학이다. 어처피 죽을건데 왜살아?라는 생각을 갖을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인 자신을 감추려고 사람들이 일상성에 파묻혀서 얼버무리며 살고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움츠려들지 말고, 감추지도 말고 자신이 ‘죽음을 향하는 존재’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한다. 죽음을 받아들일 각오를 함(죽음에 대한 선구적 각오성)으로써 우리는 ‘다스 만’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신(실존)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을 받아들여라. 죽음에 대해 생각하면 한 순간이 소중해진다. 만약에 영생이 가능하다면, 이 순간, 오늘, 그리고 내일이 소중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서평단으로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리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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