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팽 양 이삭줍기 환상문학 3
테오필 고티에 지음, 권유현 옮김 / 열림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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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감상하기에 앞서, 우선 출판사의 소개글을 읽고 간략하게 어떤 소설임을 알고 도전하시기 바랍니다. 대충 어떤 내용이구나라고 감이 잡히신 분들도 이 책의 200p까지의 내용을 버티시기 힘드실 것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꼭 알아야 될 배경지식이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뜻대로 하세요」의 대략적인 줄거리를 알고 있어야 이 책을 온전히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오비디우스 「변신이야기」에서 나오는 살마키스와 헤르마프로디토스의 이야기의 내용을 알아야 이 소설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0p가까이 서간체로 진행이 되는데, ‘달베르’라는 인물이 친구에게 미인의 탐구에 매달리는 번민과 묘한 심리에 대해서 털어놓는 내용입니다. 이 부분을 읽으며 ‘내가 편지를 받는 사람의 입장이면 참 곤란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신화속의 인물과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묘사를 보며, 문체가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결말을 보면 앞서 200p에 가까운 편지내용을 쓴 달베르가 왜 이렇게 쓸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갈 것입니다. 진행 중에 ‘달베르’와 ‘로제트’가 주고받는 대화와 '테오도르'와 '로제트'가 주고받는 대화가 나오는데, 이 대화가 희곡의 극본을 읽는 느낌을 줍니다. 후에 실제로 인물들이 연극을 하는데, 이 장면이 소설에서 매우 중요한 장면입니다.

대략 200p에 가까워지면 작가도 미안한지 일반적인 소설의 전개로 바꾸겠다는 암시를 줍니다. 여기서부터 ‘테오도르’와 ‘로제트’의 일화로 전개됩니다. 로제트는 테오도르를 사랑해서 계속 구애하지만, 테오도르는 사랑을 받아주지 않고 로제트에게서 계속 도망칩니다. 후에 전개로는 시간의 순서대로 전개되다가 갑자기 테오도르의 과거 일화가 나오면서 테오도르의 정체가 밝혀집니다. 다음 전개에서 두 명의 인물이 번갈아가면서 각자의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데, 이 편지를 쓴 인물들이 누구인지는 서서히 드러납니다. 편지글 전에 테오도르의 시종에 대한 일화가 나오는데 두 인물이 각자 친구에게 편지를 주고받는 내용이 번갈아가면서 끝나면, 이 일화에 대한 떡밥회수가 기가 막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개가 거듭될수록 작가가 앞에 떡밥을 푼 것을 회수하는데 앞에 200p를 읽다가 지옥을 맛보다가 점점 재미가 있어지자 그 재미가 몇 배는 증폭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약간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느낌도 들었지만, 소설이라고 생각하면 이 정도는 봐줄만합니다. 특히 당시 사회에 존재하는 여성의 종속성을 꼬집으며, 비판하는 내용이 일품입니다. 나는 여성도 아니고 남성도 아닌 온전히 ‘나로서 존재한다.’라고 선언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보면서 현대사회에서 나타나는 젠더갈등의 해법이 아닌가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결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결말직전의 내용에서는 이 소설도 뻔하게 끝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결말을 보고 저의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이 책을 읽으신 후에는 오스카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읽어보실 것을 권합니다. 테오필 고티에가 유미주의(탐미주의)에 영향을 주었다고 하고, 실제로 읽어보니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도 많이 떠올랐습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어보신 분이라면, 이 책도 좋아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난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또 아름다움을 이해해. 내가 입고 있는 남자 옷은 나를 여성으로부터 분리하고 모든 종류의 경쟁심을 지워주었어. 그래서 누구보다도 여자를 잘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해. 나는 이미 여자가 아니야. 그렇다고 남자도 아니지. 또한 정욕에 눈이 멀어 마네킹을 신상으로 보는 일도 없을테고, 냉철하며 어떤 편견도 갖고 있지 않아. 내 입장은 완전한 중립이야. (P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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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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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끝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제목에서도 잘 보여준다. 소설은 이반일리치의 장례식에서 시작되는데,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결과가 이 소설이 전개되어 나가는 과정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이반일리치가 병에 걸려서 고통을 느끼며,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이 이 소설의 중요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는 죽는다.


이렇듯 인간의 죽음은 확정되어 있다. 이반 일리치도 키제베터 논리학에서 배운 삼단논법을 통해서 인간의 죽음이 무엇보다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평소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병의 초기에 그는 약을 복용하며, 완치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병의 증세가 점점 심해지자, 병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는 창문 손잡이에 부딪혀서 상처가 난 곳이 심해져서 이렇게 아프게 됐는가 아니면 맹장 혹은 신장에 문제가 생긴 것인가에 대해서 나름의 고민을 해본다. 애꿎은 곳에 화풀이도 해보고, 병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서 원망한다. 이때까지도 그는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병의 증세가 점점 심해지자 이반 일리치는 병의 원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병의 원인에 대해서 의사들도 확진을 내리지 못하고, 그에게 점점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게 돼서, 이러한 원인을 밝히는 것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반은 왜 죽어야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는 신을 원망하며 지나온 삶에 대해서 회한을 남기는 동시에 ‘죽음’에 대해서 서서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죽음! 오 죽음! 그러나 남들은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나를 동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유 있게 삶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이데거는 대중사회 속 안일한 일상에 젖어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잃어버린 사람을 ‘다스 만’(das Man : 일반적인 사람, 일상인)이라고 정의한다. 연예인이 음주운전을 냈다던가, 바람을 피웠다는 등의 소식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아는 듯해도 사실을 잘 모른다. 타인의 죽음을 알아도 그것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예인이 죽었대.”라며 수다를 떤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 자신의 죽음은 누구와도 교환할 수 없다.
2. 고독해진다.
3. 반드시 죽는다.
4.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5. 마지막에 온다.


하나씩 설명하자면 이렇다.

1. 자신의 죽음만은 아무도 대신하지 못한다.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죽음에서 시선을 피하고 있을지 모른다.
2. 죽음이란 이제 아무와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3. 누구는 죽고 누구는 죽지 않는 불확실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4. 언제 죽는지, 날짜와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당장 1초 후에 죽을지, 몇 년 후에 죽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5.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에 찾아온다. 죽음을 앞서 치르고 살 수 없다. 어김없이 마지막에 올 것이다.


누군가는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살아?”라는 생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인 자신을 감추고, 일상성에 파묻혀서 얼버무리며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움츠려들지 말고, 감추지도 말며 자신이 ‘죽음을 향하는 존재’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한다. 죽음을 받아들일 각오를 함(죽음에 대한 선구적 각오성)으로써 우리는 ‘다스 만’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신(실존)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자각하며, 죽음에 대해 조금씩 직시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된다. 자신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하인이 성심껏 자신을 수발하는 모습을 보자, 그는 당황한다. 누구도 자신을 동정하며 아픈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나, 열심히 자신을 수발하는 하인만이 이를 알고 있다고 느낀 것이다. 동시에 판사인 자신이 지금껏 해왔던 일과 생활 등의 모든 것을 부정당하지 않게 변호해야할 처지에 놓인 것을 깨닫는다.  점점 죽음이 다가오자 이반 일리치는 가족들을 바라본다. 그의 아들이 다가와 울고, 아내가 눈물을 머금고 절망의 표정을 보이자 가족을 원망하던 자신이 잘못됐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다시 소설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면, 이 소설의 백미를 알 수 있다. 이반 일리치의 장례식이 진행되는데, 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에 대해 얼버무리며 일상성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동료 판사들이 장례식에 찾아와 추모보다는 젯밥에만 관심을 보이며, 자신의 이해득실만 따지는 모습은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뾰뜨르 이바노비치가 마지못해 문상을 가야 한다는 의무감과 카드놀이를 하러 가고 싶은 마음 사이에 갈등하는 장면은 이러한 모습을 더 부각시킨다. 


이반 일리치가 죽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에 앞서 이반 일리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는데, 이와 같은 서술은 다른 사람의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이반 일리치는 집안에서 수재로 불리며 살아왔고, 판사가 되는 것과 결혼생활도 우아하게 상류층의 품위를 지키며 살기위한 증명의 일환이었다. 그는 가정생활이 원활하지 않자 일에 집중했고 부부간의 불화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이반 일리치는 행복한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는 가정의 문제에 대해서 해결하기보다는 회피하며, 일의 성공이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아파오자 아내를 원망하기 시작하고, 가정에 불행이 찾아온다. 관직과 높은 보수만을 추구하면 가정의 행복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결국 그가 틀린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도 잘 나타난다. 가정이 불행해지 시작하면 서로가 서로를 탓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가정의 불행을 막을 수 없다.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삶에만 충실하면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을까? 한 때 웰빙(well-being)열풍이 분 적이 있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틀렸다고 지적할 수는 없지만, 죽음을 즉시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을 대비할 수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과 함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끝없이 성찰하다보면 우리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죽음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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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 열린책들 세계문학 111
유진 오닐 지음, 강유나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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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세계에서 생계형 범죄로 잡혔다는 기사, 일가족이 집단으로 자살을 하는 등의 안타까운 가족들의 소식들이 들려온다. 그러한 소식이 담긴 기사의 댓글과 반응들을 바라보면, 동정하는 이들도 있고, 가족구성원으로서 가정을 부양해야한다는 책임과 그에 따른 의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비판여론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사연은 그들밖에 모른다. 냉정하게 바라보면 그들이 한심하게 보일 수도 있다. 내가 그 사람이 되어보지 않는 한, 가족구성원으로서 얼마나 힘들었고, 이 책임에 대해서 회피하고 싶은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이 작품의 가족들을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비난을 받아야할 가족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왜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살펴보면, 참 가슴이 아프다. 어머니인 메리도 마약중독자가 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어려운 형편에 직접적으로 병을 치료하기보다는 모르핀을 투여한 것이 화근이 되어서 마약에 취하게 된다. 어려서 병에 걸려 죽은 아이에 대한 죄책감과 아들 에드먼드가 폐결핵에 걸려서 시한부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마약투여 없이는 제정신으로 살아갈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메리의 모습에 아버지인 제임스는 항상 죄책감을 가지고 살아왔다. 자신의 무능력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고, 항상 과거의 영광에 취해서 살고 있다. 그래서 항상 술에 취해서 산다. 아버지의 모습과 어머니의 마약투여 모습을 본 장남인 제임스 타이런 2세는 알콜중독자 및 패륜아가 된다. 안타깝게도 폐결핵에 걸려 시한부인생을 살아가는 에드먼드는 정말 손쓸 도리가 없다. 가족들을 위해서도,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도 참 답이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

이 작품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극의 전개를 기대하면 안 된다. 가족이 왜 불행하지에 대해서 서로 탓을 하면서 극이 전개된다. 아버지는 어머니 탓을 하고, 장남은 어머니와 아버지 탓을 하고, 차남은 아픈 자신의 몸을 탓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모습이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제각각의 불행을 안고 있다’는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가정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각 구성원들이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한다. 톱니바퀴 하나가 어긋나면 기계가 고장나듯이, 가정이 한번 불행해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그 불행을 되돌릴 수 없다. 내가 가족의 한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만 거창하게 생각할 것이 아니라, 부모님에게 안부는 잘 전해드리고 있는지, 형제와 친밀하게 지내고 있는지 등 사소한 것들부터 시작해야한다. 가정이 행복해질 수는 없더라도, 불행이 닥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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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 박사의 섬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87
허버트 조지 웰즈 지음, 한동훈 옮김 / 문예출판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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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생체실험을 통해 탄생한 동물인간들로 인하여 벌어지는 비극을 보여준다. 소설은 이방인이라 볼 수 있는 프렌딕의 시선에서 전개된다. 조난되어 모로박사의 섬에 정착하게 된 프렌딕은 처음 괴생명체들을 보았을 때, 인간이 실험을 당하여서 짐승같은 형태로 변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은 동물실험에 의하여 탄생된 동물인간들이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 나는 작가가 인간성을 잃고 살아가는 짐승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이 들었다.

동물인간들은 모로박사가 규정한 법을 배운다. 규칙은 간단하다. 하지만, 그러한 규칙을 지키지 못하는 동물인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그들은 벌은 받게 된다. 이 장면들을 보면서, 가장 기본적인 법도 지키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들이 떠올랐다. 동물인간들은 점점 인간성을 잃어가게 되고, 동시에 자신들이 가진 본능으로 회귀하게 된다. 그러면서 섬에 비극이 발생한다.

그들이 자신의 본능을 찾는 것이, 본래 자연에 맞는 이치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공적으로 인간성을 얻게 된 동물들이 자신의 본능대로 돌아가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오히려 현대사회에서 나다움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면서, 원하지 않아도 해야 할 일들이 있다. 그러한 일들이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나다움을 잃게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누구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 무엇이 가장 인간에게 어울리는 삶일까? 과거에 산 사람들은 행복했을까? 문명이 발달하기 이전의 원시인들은 현대인들보다 행복했을까? 어떻게 균형을 맞출 수 있을까..? 너무 어렵고 복잡한 일이다. 나는 아직 규정할 수가 없다.

그 괴기스럽고 불가해한 몸짓을 지켜보면서 나는 문득 불쾌감의 근원을 처음으로 똑똑히 깨달았다. 철저히 낯설면서도 기묘하게 낯익은, 앞뒤가 안 맞고 서로 어긋나는 그 인상이 무엇 때문에 비롯되었는지를 알게 된 것이다. 이 불가사의한 의식에 참여한 세 녀석은 사람 형상이었다. - P. 60

“사람이다 법을 배워야 한다.”

“네발로 걷지 않는다. 그게 법이다. 우리는 사람 아닌가?”

“물고기나 고기를 먹지 않는다. 그게 법이다. 우리는 사람 아닌가?”

“나무껍질을 할퀴지 않는다. 그게 법이다. 우리는 사람 아닌가?”

“같은 인간을 뒤쫓지 않는다. 그게 법이다. 우리는 사람 아닌가?” - P.85

“저들은 다 뭐요?”

나는 동물인간들을 가리키며 그들도 들을 수 있도록 목청을 한껏 높여 말을 이었다.

“저들도 사람이었소. 당신 같은 사람이었소. 당신이 짐승 같은 수단으로 저들을 타락시켰소.

당신이 저들을 노예로 만들었고 당신은 아직 저들을 두려워하고 있소.” -P.96

“놈들은 회귀하고 있소. 놈들에게서 내가 손을 떼는 즉시 놈들은 슬금슬금 원상태로 돌아가오. 천성을 도로 드러내기 시작하오.” - P.113

박사는 그들에게 최면을 걸었다. 어떤 일들은 불가능하고 또 어떤 일들은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이런 금기들을 그들의 마음결에 새겨 불복종이나 반항의 가능성을 잠재운다는 것이다. - P.117

불쌍한 짐승들! 잔인한 모로의 나쁜 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로의 손을 거친 뒤에도

이 불쌍한 희생물들에게 고통과 불행이 또 찾아갈 거라곤 생각 못 했다. 돌담 안에서 실제 고문이 행해지던 순간에만 나는 몸서리쳤다. 전에 그들은 짐승이었고 환경에 본능을 맞추면서 하나의 생명으로서 나름대로 행복했으리라. 그런데 지금은 인간성이라는 족쇄에 묶여 몸부림친다. 결코 사그라들지 않는 두려움속에 산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법 때문에 불안해한다. 고통으로 시작된 그들 가짜 인간으로서의 삶은 하나의 긴 내적 몸부림이자 모로에 대한 기나긴 공포에 다름 아니다. 무엇을 위해? 나는 두서없이 생각하며 흥분했다. -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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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셰익스피어 4대 비극 (1577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금장 양장 에디션) - 햄릿, 오셀로, 맥베스, 리어왕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김민애.한우리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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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577년 초판본 진위논란 명백히 해명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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