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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의 죽음 ㅣ 창비세계문학 7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이강은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평점 :
이 소설의 끝은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제목에서도 잘 보여준다. 소설은 이반일리치의 장례식에서 시작되는데,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라는 결과가 이 소설이 전개되어 나가는 과정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오히려 이반일리치가 병에 걸려서 고통을 느끼며, 죽음을 맞이하기까지의 과정이 이 소설의 중요한 맥락이라고 볼 수 있겠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인간이다.
인간은 죽는다.
고로 카이사르는 죽는다.
이렇듯 인간의 죽음은 확정되어 있다. 이반 일리치도 키제베터 논리학에서 배운 삼단논법을 통해서 인간의 죽음이 무엇보다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반 일리치는 평소에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다. 병의 초기에 그는 약을 복용하며, 완치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의 병의 증세가 점점 심해지자, 병의 원인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는 창문 손잡이에 부딪혀서 상처가 난 곳이 심해져서 이렇게 아프게 됐는가 아니면 맹장 혹은 신장에 문제가 생긴 것인가에 대해서 나름의 고민을 해본다. 애꿎은 곳에 화풀이도 해보고, 병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서 원망한다. 이때까지도 그는 ‘죽음’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병의 증세가 점점 심해지자 이반 일리치는 병의 원인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병의 원인에 대해서 의사들도 확진을 내리지 못하고, 그에게 점점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게 돼서, 이러한 원인을 밝히는 것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 것이다. 이반은 왜 죽어야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는 신을 원망하며 지나온 삶에 대해서 회한을 남기는 동시에 ‘죽음’에 대해서 서서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죽음! 오 죽음! 그러나 남들은 죽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들은 결코 나를 동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여유 있게 삶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하이데거는 대중사회 속 안일한 일상에 젖어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잃어버린 사람을 ‘다스 만’(das Man : 일반적인 사람, 일상인)이라고 정의한다. 연예인이 음주운전을 냈다던가, 바람을 피웠다는 등의 소식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자신의 존재에 눈을 돌리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아는 듯해도 사실을 잘 모른다. 타인의 죽음을 알아도 그것을 직접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예인이 죽었대.”라며 수다를 떤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다. 하이데거는 ‘죽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 자신의 죽음은 누구와도 교환할 수 없다.
2. 고독해진다.
3. 반드시 죽는다.
4.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
5. 마지막에 온다.
하나씩 설명하자면 이렇다.
1. 자신의 죽음만은 아무도 대신하지 못한다. 스스로 받아들일 수 없다. 우리는 누군가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죽음에서 시선을 피하고 있을지 모른다.
2. 죽음이란 이제 아무와도 만날 수 없는 것이다.
3. 누구는 죽고 누구는 죽지 않는 불확실한 일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4. 언제 죽는지, 날짜와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당장 1초 후에 죽을지, 몇 년 후에 죽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5. 죽음은 인생의 마지막에 찾아온다. 죽음을 앞서 치르고 살 수 없다. 어김없이 마지막에 올 것이다.
누군가는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살아?”라는 생각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이데거는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인 자신을 감추고, 일상성에 파묻혀서 얼버무리며 사람들이 살고 있다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움츠려들지 말고, 감추지도 말며 자신이 ‘죽음을 향하는 존재’임을 직시해야 한다고 한다. 죽음을 받아들일 각오를 함(죽음에 대한 선구적 각오성)으로써 우리는 ‘다스 만’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신(실존)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자각하며, 죽음에 대해 조금씩 직시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평소에 생각하지 않았던 다른 사람들을 보게 된다. 자신이 거들떠보지도 않던 하인이 성심껏 자신을 수발하는 모습을 보자, 그는 당황한다. 누구도 자신을 동정하며 아픈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나, 열심히 자신을 수발하는 하인만이 이를 알고 있다고 느낀 것이다. 동시에 판사인 자신이 지금껏 해왔던 일과 생활 등의 모든 것을 부정당하지 않게 변호해야할 처지에 놓인 것을 깨닫는다. 점점 죽음이 다가오자 이반 일리치는 가족들을 바라본다. 그의 아들이 다가와 울고, 아내가 눈물을 머금고 절망의 표정을 보이자 가족을 원망하던 자신이 잘못됐다는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죽음을 맞이한다.
다시 소설의 처음으로 되돌아가면, 이 소설의 백미를 알 수 있다. 이반 일리치의 장례식이 진행되는데, 여기서 하이데거가 말하는 죽음에 대해 얼버무리며 일상성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동료 판사들이 장례식에 찾아와 추모보다는 젯밥에만 관심을 보이며, 자신의 이해득실만 따지는 모습은 압권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뾰뜨르 이바노비치가 마지못해 문상을 가야 한다는 의무감과 카드놀이를 하러 가고 싶은 마음 사이에 갈등하는 장면은 이러한 모습을 더 부각시킨다.
이반 일리치가 죽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기에 앞서 이반 일리치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주는데, 이와 같은 서술은 다른 사람의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이반 일리치는 집안에서 수재로 불리며 살아왔고, 판사가 되는 것과 결혼생활도 우아하게 상류층의 품위를 지키며 살기위한 증명의 일환이었다. 그는 가정생활이 원활하지 않자 일에 집중했고 부부간의 불화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남들이 보기에 이반 일리치는 행복한 삶을 사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못했다. 그는 가정의 문제에 대해서 해결하기보다는 회피하며, 일의 성공이 가정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자신이 아파오자 아내를 원망하기 시작하고, 가정에 불행이 찾아온다. 관직과 높은 보수만을 추구하면 가정의 행복을 지킬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결국 그가 틀린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도 잘 나타난다. 가정이 불행해지 시작하면 서로가 서로를 탓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되면 가정의 불행을 막을 수 없다.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죽음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삶에만 충실하면 죽음을 잘 맞이할 수 있을까? 한 때 웰빙(well-being)열풍이 분 적이 있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틀렸다고 지적할 수는 없지만, 죽음을 즉시하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을 대비할 수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과 함께 어떻게 죽을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끝없이 성찰하다보면 우리는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죽음에 대비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