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스타샤
조지수 지음 / 지혜정원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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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진정 알게 되는 건, 하나의 세계를 품는 것과도 같다.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 이후의 삶은 더이상 내가 살던 예전의 세상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 곳은 파멸의 세계일 수도 있고, 모든 것으로부터 초연한 자유의 세계일 수도 있으며, 죽음이라는 끝의 세상일수도 있다.
신 또는 우주, 우리가 불가사의라고 부르는 것들이 어쩌면
우리의 탄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들을 이미 정해놓은 것이라고, 모든 것은 정해져있다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없다고.
나는 이렇게 운명에 굴복하며, 지금껏 나의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던 꿈과 희망에 체념해가고 있었고, 그러던 어느날 운명적으로 '나스타샤'를 알게 되었다.
언제라도 나스타샤라는 이름을 듣게 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장면은 그들의 첫만남일 것이다.
조지가 케빈의 가게에서 처음으로 나스타샤를 만나게 된 장면이 눈 앞에 영상처럼, 아름답게 그려진다.
결말을 다 읽은 지금도 첫만남과 조지가 나스타샤의 미소를 보고 사랑을 느끼게 된 장면, 그리고 나스타샤라는 이름을 지어준 장면이 이야기의 마지막 장과 함께 오버랩되며 먹먹해진 가슴을 한층 더 슬프게 만들고 있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가 나스타샤를 위해 존재했던 것인가? 조지와 나스타샤가 서로의 이름을 물어보며 알아들 수 없음에 같이 웃음을 터뜨렸던 처음의 그때가 그들의 사랑에서 가장 행복해보였어서 마지막장에서 다시 이 페이지로 돌아가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나스타샤가 캐나다에 오지 않았더라면, 캐나다에 왔더라도 케빈의 가게가 아닌 다른 곳에서 일했더라면 조지와 만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조지와 나스타샤가 비극적인 사랑의 결말을 맞이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윗부분에 썼던 것처럼, 우리들은 신이 미리 결정해놓은 일들 사이에서 우리의 선택과 포기와 후회와 또 전진에의 삶을 반복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 나의 삶의 태도는 이러했다. 이미 다 결정된 것이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내 삶의 의미를 찾으려 몸부림쳤던 긴 세월의 방황 또한 운명이 정해놓은 것이라고 생각하며, 운명에 모든 책임을 전가하며, 삶 속에서 무기력하게 체념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나스타샤를 읽어나가면서, 정해진 운명 앞에서도 내가 선택하는 것들이 바꾸어나갈 미래를 믿고 싶다는 의지와 용기가 내 안에서 조금씩 싹트고 있었다. 조지가 나스타샤의 삶을 일으켜 세운 것처럼, 또 나스타샤가 자신의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던 것처럼.
어떠한 운명의 장난이 그 모든 걸 결정해놓았다고해도 결국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하게 된 건 조지와 나스타샤 그 둘의 의지이다. 그들의 선택이다. 조지는 케빈의 가게에서 전화벨 소리에 몸서리치며 두려워하던 나스타샤를 모른체할 수도 있었다. 누구나 쉽게 친절을 베풀지는 않는다. 그러나 조지는 스스럼없이 그녀에게 다가갔고, 그녀의 곤란한 상황을 함께하며, 도넛과 커피를 팔며 밤을 지새웠다. 그때까지만해도 그녀와 사랑하게 될줄은 몰랐겠지만.
조지는 좋은 남자이기 전에 좋은 사람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의식을 이렇게나 깊게 들여다보는 사람이라면, 정말로 좋은사람이다. 그래서 조지가 알코올 중독에 빠질수밖에 없었던 것이 이해된다. 그것밖에 할수 없었다고 조지는 말하지만, 사실 조지는 나스타샤에게 정말 많은 것을 주었다. 돈, 물질, 경제적 도움 이런것들은 마음이란 것 없이도 얼마든지 오갈 수 있는 것이다. 중요한 건, 아무것도 기댈 어깨가 없는 사람에게 기꺼이 어깨를 내어주는것, 살아갈 힘이 되어주는 것, 함께 살아갈 미래를 열어가는 일이다.
이것은 애정이 없으면, 그것을 품는 인간의 따스한 마음이 없으면 절대로 가능하지 않을 일이기에.
나스타샤에 대한 조지의 사랑이 단지 동정이나 연민, 측은지심이 아니라, 진정한 사랑이었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된 장면이 바로 조지가 나스타샤에게 이별을 고하는 장면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스타샤가 보리스를 돌보며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찾아주고, 아니카의 학업계획까지 세우고. 나스타샤가 가족을 돌보며 자립할 수 있게 보내주는 장면에서 나는 드디어 조지의 사랑의 절정을 보았다. 낯선 땅에서 외롭게 지내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었던 한 여인에 대한 애정이 진정한 사랑으로 느껴졌던 순간이 바로 이별의 장면이라니. 나조차도 놀랐다.
사랑의 끝이 무조건 결혼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를 계속 원하는 나스타샤에게 머뭇거렸던 조지를 이해한다. 물론 그것이 보리스와 아니카의 존재 때문임이 크겠지만.
조지는 어쩌면 나스타샤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릴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있었다해도 조지가 책의 어느 부분에서 결혼 자체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던 부분에서 나스타샤와의 결말이 어느정도 예상되었다. 나스타샤도 그걸 알고선 "죽기는 쉬워. 고통 속에서 사는 것이 어려워. 당신과 헤어지면 나는 아마 죽을거야. 보고 싶어서 죽을거야."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닐까.
사랑이 시작되는 순간이 있다면, 반드시 끝나는 순간도 있게 마련이다. 보리스와 아니카를 부양해야만 하는 나스타샤의 처지가, 조지와 나스타샤가 이별하게 되는 진정한 원인이었을까?
그들의 사랑에 보리스와 아니카가 정말로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나?
나는 그저 그때가 바로 그들의 사랑이 끝나게 되는 순간이었다고, 더는 함께일 수 없는 순간이 오게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조지는 나스타샤와 아니카와 함께 살면서 보리스를 병원에 보낼 수도 있었다. 나스타샤와 함께 살면서 모든 걸 감내하는 결말도 가능했을 것이다. 나스타샤를 끝내 그들에게 보냈다고 해서 조지가 나스타샤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어진 건 아니기에.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과, 사랑이 끝나는 건 다른 문제이다.
사랑하더라도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순간이 오고야만다.
비극은 이때 비로소 시작된다.
사랑의 끝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대방의 실연과 아픔의 크기를 다른 한쪽은 온전히 체감할 수 없을때, 이별의 고통은 사람을 죽일만한 요소가 된다.
나스타샤는 이별을 끝내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조지와 함께 하는 삶이 아닌 다른 그 어떤 삶도 그녀에게 용납되지 못할만큼 나스타샤는 조지를 사랑했고, 우직했으며, 다른 삶으로의 전진을 끝내 부정했던 것이다.
이야기의 마지막에 이르러 나스타샤를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조지와 함께하는 삶을 꿈꾸었으나 그것이 더이상 불가능한 영역이라고 느꼈던 그녀의 좌절과 절망감을 느끼며 눈물이 났다. 조지가 알코올 중독에 빠지며 자신을 술과, 어쩌면 죽음에 내던졌던 시간에 나스타샤는 그 이상으로 고통스러워 했던 것이다.
전적으로 상대방의 보살핌을 받고, 정신적으로 의존한 상태에서 이별하게 되었을 때, 자립이라는 상황을 이겨내지 못하게 되면 인간은 벼랑 끝에서 더 이상 인생에 그 어떤 희망과 열정도 가지지 않게 된다. 살고 싶다는 욕구가 유지되기 위해 필요한 계기들,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간에 자신이 진정 원했던 것을 영원히 잃게 되었을 때의 절망감을 모두가 이겨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그렇게 강하지 않다. 조지의 친절과 온정과 사랑은 너무나도 따스했고, 안락했지만, 그것만으로 사랑이 유지될 수 없다. 스스로 자립할 수 없는 사랑의 결말은 이토록 비극적이다. 저자는 의존적인 사랑의 면모를 너무나도 잘 그려내었다.
보리스와 아니카를 찾기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던 조지의 선택은 '역사'를 만들었다. 보리스와 아니카가 살아갈 미래의 씨앗을 심은 건 조지였다. 나스타샤가 낯선 캐나다 땅에 내쳐졌고, 혼자서 해나갈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에서 가족을 찾을 노력으로 나아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러나 보리스와 아니카는 살아있었고, 나스타샤 앞에 조지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조지가 그녀에게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그녀가 조지의 친절과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보리스와 아니카의 미래가 어떠했을까? 사랑이 기적을 만든다는 건 바로 이런게 아닐까?
역사와 운명의 비극 속에서 상처받고 외로웠던 그들은 각자의 상황에서 각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사랑했고, 아파했고, 이별했다. '만약에'라는 가정이 무의미할만큼 더 이상의 좋은 결말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그들이 걸어온 길 그대로를 보아주고 싶다.
나스타샤가 죽지않고 살아남아서 언젠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조지와 스쳐지나간다해도, 그것만으로 그 아름답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면, 다시 사랑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추억을 간직하며 용기내서 삶을 살아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라는 바램도 있지만, 그러기엔 나스타샤의 고국에서의 비극과 상처는 쉽게 아물 수 없는 것이다. 사랑과 이별의 상처는 시간이 약이지만, 나스타샤가 우크라이나에서 당한 폭력은 세월이 얼마나 흐른다해도 지워지지 않을 것이기에. 그 사실만이 소설의 끝에서 가슴을 아프게 한다.
전쟁같은 정치적 상황 속에서 잔인하게 짓밟히는 쪽은 왜 항상 이렇게 정치와 무관한 사람들일까. 정작 정치권력의 핵심 당사자들은 어떻게든 삶을 보전한다. 그들이 직접 순수한 사람들을 괴롭히고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럼 비극은 어떻게, 누구에 의해 일어나게 되는가? 정치적 결정에 복종하고 명령을 내리고 어떻게든 권력에 빌붙어 이득을 얻으려는 중간 실무자들에 의해서, 정치와 제일 무관했던 사람들이 희생양이 되는것이다. 소설 속의 역사적 배경이 현실과 다름 없기에 참 와닿았다.
우리들은 언젠가 죽어도, 소설 속의 인물은 계속해서 살아간다.
나스타샤가 없는 세상 속에서 생의 남은 날들을 살아가야 할 조지에게 위로와 말을 건네고 싶다.
"조지, 당신은 진정으로 강한 사람이야. 연약하고 부서지기 쉬운 사람이라는 존재로서 그 모든 헌신과 책임을 감내했으므로. 사랑에서 도망가지 않았으므로. 당신이 나스타샤를 놓았다고 자책할지 몰라도, 그건 놓은 게 아니야. 사랑하는 사람이 강해질 수 있도록 멀리서 바라봐야만 하는 사람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안 겪어본 사람들은 모를거야. 당신은 그걸 해냈어. 당신은 그걸 자기포기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진정한 사랑을 품을 수 있는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이야. 당신은 보리스가 나았을때 세상 누구보다 기뻐했고, 아니카를 세상 누구보다 아꼈어.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하는 사람까지 사랑해낼 수 있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 그러니 조지, 당신이 언제 어디서든 행복을 느끼며 살아갔으면 좋겠어. 스스로를 사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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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느끼고 상상할 수 있도록 염두하고 쓴 글은 매우 역동적이라서 읽는 그자체로 영상미가 재현된다.
그런 글을 '좋은 글'이라고 생각한다.
나스타샤는 정말 좋은 소설이다.
시대와 국가를 초월하여 명작이라고 불리우는 영화 '첨밀밀'은 한사람이 생애주기에 따라 반복해서 감상하면, 느끼는 것들이 매번 달라진다고 한다.
인생 속 많은 경험과 가치관의 변화에 따라 영화를 감상하는 태도와, 보이는것, 느끼는 것들에도 변화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소설도 그럴 것 같다.
또 어떤 경험을 하게 되고, 지금보다 더 나이가 들었을 때
이 소설을 읽고 느끼는 것들에 대한 변화가 기대된다.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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