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파? 눈먼 돈, 대한민국 예산 - 256조 예산을 읽는 14가지 코드
정광모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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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면으로 가려고 80번 버스를 탔다. 80번 버스를 타고 부산대학교에서 서면 방향으로 조금만 가면 온천장이 나온다. 온천장 곳곳에서 보도 벽돌을 갈아끼우는 공사가 한창 이어지고 있었다. 공사 현장 주변에서는 돌가루가 펄펄 날렸고, 인부들은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벽돌을 나르다가 양푼이 비빔밥으로 점심을 먹었다. 돌을 자르는 기계가 시끄러운 소리를 냈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차와 부딪칠까봐 조심스럽게 인도와 차도 경계를 걸었다.
 

워낙 보도 벽돌 교체 공사를 자주 본 탓인지, 이제는 보기만 해도 짜증이 밀려온다. 하지만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면, 그 짜증이 괜한 짜증이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여기에서 괜한 짜증이 아니라는 말은, 공사 때문에 시민들이 보도를 걸어갈 때 단순히 불편해서 불만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그 보도 벽돌 교체 공사를 그렇게 자주 볼 수밖에 없는 까닭에 있다.

 

왜 그렇게 보도 벽돌을 천편일률로 갈아끼우는 공사를 해마다 일정한 시기만 되면 밥 먹듯이 하는 걸까?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처럼 최소한 여성용 굽 높은 구두 뒷굽이 끼이는 문제를 막고자 보도 벽돌 틈새를 아예 없애버리는 정도라면 그나마 시민들에게 호평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 최소한 심의도 없이 멀쩡한 벽돌을 갈아엎어 예산을 헛되이 쓰고 시민들을 불편하게 하는 한심한 작태는 도대체 왜 벌어지는 것일까?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대부분 왜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알고 있는 듯하다. 분기마다 기획예산처에서 심의한 대로 각 행정 단체가 예산을 배정받는데, 예산 집행 실적에 따라 다음 분기에 배정될 예산 총액이 정해진다. 만약 예산 집행 실적이 저조해서 예산이 남았다면, 새로운 예산이 집행되기 전에 반드시 그 예산을 중앙 정부에 다시 돌려줘야 한다. 그리고 지난 분기보다 더 적은 예산을 배정받게 된다.

 

예산 집행 합리화 정책은 분명히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그 정책이 의도하는 대로 정말 국가 발전과 시민 복지 향상에 필요한 정책만이 실행되고, 그 실행 계획이 이치에 맞게 짜여 예산이 절약되고 있는가? 안타깝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위에서 이야기한 대로 보도 벽돌 교체 공사를 하고 그에 따라 예산을 배정하면, 분명히 예산은 집행된 것이다. 그렇기에 집행 실적 그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 집행 내역이 얼마나 타당한 것인지 상부 기관에서는 따져보지도 않는다는 말인가? 예산 집행 결과 보고를 받는 상부 기관이 보통 시민들도 다 알고 있는 문제점을 하부 기관에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보고 판단할 능력조차 없다는 것인가?

 

명백한 예산 낭비 사례는 기획예산처 자체 감찰단이나 감사원 같은 상부 기관에서 분명히 지적하는 게 원칙이다. 지적한 뒤에는 다음 분기 예산 편성 때 예산 총액에 반영하는 식으로 반드시 벌칙을 줘야 한다. 그렇게 남는 예산은 국가에 위급한 일이 생기거나 국가 재정 정책이 변동되면서 급히 더 많은 자금을 끌어와야 할 경우가 생길 때 요긴하게 활용할 수 있는 비상 국고로서 비축할 수도 있으며,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방안을 마련해 유익하게 쓸 수 있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예산 낭비 방지 방안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사실 경제에 관해서는 '경제학원론'도 제대로 모르는 거의 일자무식에 가깝기 때문에, 경제신문을 읽더라도 여전히 그 복잡한 내용을 명쾌하게 이해할 수 없다. 과학과 마찬가지로 경제도 주요 교양 서적과 주요 인터넷 경제 카페에 올라오는 게시물을 부지런히 읽을 뿐이다.

 

그런데 그 수많은 글 가운데 국가 예산과 관련된 내용은 그다지 많지 않다. 내가 자주 가는 '김광수경제연구소포럼(http://cafe.daum.net/kseriforum)'은 내가 알고 있는 경제 관련 인터넷 사이트 가운데 가장 정확하고 수준 높은 토론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알고 있는데, 이 곳에서 가장 많은 게시물이 올라오는 '경제현안', '부동산정책'란에서는 예산과 관련된 게시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설사 게시물이 올라온다고 하더라도 국가 예산에 관해 세밀하게 파고든 게시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대개 언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혈세를 낭비하는' 온갖 전시 행정과 정책을 향한 여러 가지 지적과 비판을 담고 있을 뿐, 그 예산 기획과 집행 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 문제점은 무엇인지 밀도 있게 포착한 게시물은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 같다. 혹시 누군가가 자료를 제대로 찾아보지 않고 글을 쓴다고 실제 사례를 제시하면서 질타한다면 할 말이 없다만, 어쨌든 내가 읽어본 게시물 범위 안에서는 그렇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인터넷 서점에 이 책 '또 파? 눈 먼 돈 대한민국 예산'이 올라오자마자 나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책을 사서 한 장씩 넘길 때마다 감탄이 저절로 나왔다. 흔히 언론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는 갖가지 예산 관련 비판을 몇 가지 주요 주제로 묶어서 그 핵심 논리에 자기 생각을 덧붙여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솜씨며, 내가 지금까지 가장 궁금하게 여기고 있던 국가 예산과 관련된 온갖 구조 문제에 관해 저자 정광모가 정부에서 일한 경험을 토대로 명쾌하게 파헤친 논리력이며, 나무랄 것이 하나도 없다.

 

이 책에 나오는 여러 가지 내용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가 제시하는 '예산실명제'이다. 예산과 관련된 모든 정책 입안과 집행 과정에 실명을 기재한 사람이 책임을 지도록 하는 제도이다. 승객들에게 안전 운전과 친절한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운수업계에서 운행실명제를 실시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볼 수 있다. 난폭운전을 하거나 승객에게 친절하지 않은 기사를 고발하고 싶으면 자기가 탄 버스 정보를 회사에 알려주고 문제를 지적하면 되는 것처럼, 예산안 계획과 집행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다면 그 계획과 집행을 담당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으면 되는 것이다.

 

이는 국가 예산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고위 공무원 사회가 지니고 있는 온갖 병폐를 송두리째 개혁할 수 있는 매우 좋은 방안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대한민국 공무원 사회가 지닌 막강한 권력이 보여줄 수밖에 없는 치부를 건드릴 수밖에 없는 것이기에, 그만큼 저항 또한 극렬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 좋은 제안이 현실로 옮겨질 가능성을 짐작하기도 조심스럽다. 그렇기에 책을 읽으면서 감탄사를 연발하면서도 이 책에서 지적하는 여러 가지 문제점을 어떻게든지 개혁하려고 하지 않는 부패한 기득권 구조에 분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특히 대한민국 예산을 좌지우지하는 고위 공무원 사회가 저지르는 작태를 고발한 CHAPTER 13~14를 읽다 보면, 체념하는 버릇을 지닌 사람들은 또다시 한숨만 푹푹 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실 내가 앞에서 이야기한 것보다도 더 심각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이렇게 값어치 있는 책이 주요 서점에서 그다지 많이 팔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언론은 '혈세 낭비' 논란을 부추기고 사람들은 그에 분개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정작 그 혈세가 마구잡이로 쓰이는 실태와 그 까닭을 명민하게 분석해 놓은 자료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분개하면서도 막상 그런 현실 속에서도 사람들이 어떻게든지 콩고물을 챙겨먹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드는 걸 보면, 내가 대한민국에 얼마나 극심한 환멸을 느끼고 있는지 판단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다.

 

하지만 나 또한 그렇게 화를 내면서도 결국 어쩔 수 없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지 적응하면서 극히 어렵더라도 '점진적' 개혁을 해 나가는데 조금씩 보탬이 되어야 하는 게 사실이다. 사회 곳곳이 조금씩 바뀌어 나가는 희망찬 증거를 끊임없이 찾으면서, 이 책에 나오는 예산실명제가 실행되고 예산 기획과 집행 과정이 갈수록 투명성과 합리성을 더욱 많이 띠는 모습을 볼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리고 이 책 표지에 나오는 그림이 풍자하는 것처럼 제발 멀쩡한 보도 벽돌 좀 그만 파내고, 특히 이 미친 정부에서 추진하는 대운하 또한 첫 삽조차 뜨지 않기를 간곡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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