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걸작선
브램 스토커 외 지음, 정진영 편역 / 책세상 / 2006년 7월
평점 :
품절


나는 화려하기 그지없는 어느 고성 안에 있다. 그리고 내 눈 앞에서 남녀 한 쌍이 온몸에서 땀을 흘리며 뒤엉킨다. 남자가 여자를 정성스럽고 끈질기게 애무하자 여자는 야릇한 콧소리를 내면서 몸을 뒤튼다. 그 감창소리가 남자 귀에 들어가고, 그에 자극을 받아 아드레날린과 테스토스테론이 더욱 왕성하게 분비되어 핏줄 안에서 갈수록 격렬하게 요동친다. 남자는 흥분을 이기지 못하고 애무를 그만 둔 뒤 여자를 꽉 끌어안은 채 꼴린 성기를 축축해진 여자 몸 안으로 사정없이 꽂아 넣는다. 자지러지는 비명이 울려 퍼져 내 귀를 강하게 자극한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두 남녀는 온몸을 거침없이 움직이고, 몸과 마음으로 서로 짜릿하게 공감한다. 그 순간만큼은 어떤 것도 그들 사이에 끼어들 수 없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도 흥분해 거칠어진 숨결을 가라앉히느라 애를 먹는다.
 

둘 다 거의 절정에 이른 것 같았고, 오르가슴이라는 황홀한 순간을 조금이라도 더욱 많이 강하게 느끼고자 벌거벗은 남녀는 접촉 면적을 할 수 있는 만큼 넓힌다. 남자는 여자 목에 입을 맞추고 여자는 그런 남자의 목을 힘껏 끌어안는다. 그런데 그 순간 여자는 날카로운 침 두 개가 목에 박히는 느낌을 받는다. 그 뒤 몸 안에 흐르는 피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뜨거운 흐름을 느낀다. 여자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공포에 휩싸이지만, 이미 그동안 겪어보지 못한 극대치에 이른 오르가슴이 찾아와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꼼짝도 할 수 없다. 게다가 피를 빨리는 느낌이 이상야릇한 쾌감을 오르가슴에 보탰다.

 

그녀는 절정에 겨운 신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고 있다. 남자 또한 부들부들 떨고 있다. 피를 빠는 쾌락에 젖어있기 때문인지 아니면 수 억 마리 정자를 내보내면서 뇌를 자극하는 강한 극치 쾌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눈을 크게 뜬다.

 

부들부들 떨던 남녀는 거의 동시에 멈췄다. 여자는 어느새 탄력을 잃고 새하얗게 질린 시체가 되었고, 남자는 그 위에서 극히 미묘한 절정까지 온전히 누리려는 듯이 잠시 동안 가만히 엎드려 있다. 얼마 정도 시간이 지나자 남자는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만족스러운 티를 내는 입술 사이로 뾰족하고 날카로운 두 이빨이 드러나 있고, 입가에는 피가 묻어 있다. 허기를 실컷 채운 남자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옷을 깔끔하게 챙겨 입고 자리를 뜬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나는 그만 공포에 질리고 만다. 그 남자는 유서 깊은 가문 여자들을 꼬드겨 희생양으로 삼는다는 무시무시한 흡혈귀였던 것이다.

 

 

오브리의 건강이 나쁘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루스벤 경이 그 이유를 모를 리야 없었다. 그러나 정신병자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소식을 전해준 사람들이 앞에 있음에도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서둘러 옛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그 후로 자주 들러서 오브리 남매의 앞날에 대단한 관심과 애정을 과시함으로써 조금씩 오브리 양의 환심을 얻었다. 그의 위력 앞에 누군들 무너지지 않겠는가? 자세히 설명하기 어려우리만큼 그의 언변은 위험하고 매혹적이었다. 그는 유혹의 대상으로 삼은 오브리 양에게, 북적이는 세상에서 그녀 외에는 공감을 나눌 만한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유혹의 대상으로 삼은 오브리 양에게 북적이는 세상에서 그녀 외에는 공감을 나눌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그녀를 알게 된 이후 그녀의 감미로운 목소리만 들어도 살아가야 할 이유를 느낀다고까지 했다. 그가 악마의 술수에 능했기 때문이든 그것이 예정된 운명이든 간에 그는 오브리 양의 사랑을 얻는데 성공했다. 마침내 유서 깊은 가문의 작위를 손에 넣은 그는 신부 오빠의 정신 상태가 나쁨에도, 중요한 사절 임무까지 맡음으로써 결혼을 서둘렀다. 그래서 결혼식은 그가 출국하기 바로 전날로 정해졌다.

 

……

 

후견인들은 다급히 오브리 양을 구하러 나섰다. 그러나 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루스벤 경은 자취를 감췄고, 오브리의 누이동생은 이미 뱀파이어의 허기를 실컷 채워준 희생양이 되어 있었다.

 

 

존 폴리도리(John Polidori) 지음. '뱀파이어(The Vampire)'에서. '뱀파이어 걸작선' 148~151쪽.

 

 

오싹한 한기를 느낀 나는 눈을 번쩍 떴다. 그런데 내 앞에 꿈속에서나 그렸던 그런 이상형인 완벽한 여자가 나타났다. 꿈인지 생시인지 믿을 수 없었다. 그저 모호하다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지경이었지만, 분명한 것은 그 여자를 바라보는 내 눈동자가 이글거리더니 불꽃을 튀기기 시작했고 온몸이 다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능수능란하게 몸을 뒤틀며 얇은 천 같은 옷을 알게 모르게 흘려 내리기 시작한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형용할 수 없는 깊이를 지닌 그윽한 두 눈동자를 보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욕정을 느꼈다. 나는 그 욕정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단숨에 깨달았다. 흡혈귀에게 넘어갔다는 냉철한 판단 따위는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그토록 간절하게 원했지만 결국 실패한 뼈저린 첫사랑이 내게 주었던 달콤하면서도 야릇한 고통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 눈동자는 점점 희미해져 갔어. 안젤로는 꿈이 끝나지 않으리라는 것과 자신이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 환영이 솟구친 골짜기 밑으로 점점 더 이끌리는 것을 깨달았지. 그녀는 더욱 가까이서 그에게 손짓하고 있었어. 그녀의 뺨은 망자와 같은 눈빛이 아니라 굶주림으로 창백해져 있었어. 달랠 수 없는 지독한 육체적 굶주림을 드러낸 그녀의 눈동자에 갇혀 그는 꼼짝도 할 수 없었지. 그 눈동자는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고 온몸에 마법을 걸었어. 마침내 그녀의 눈동자가 바짝 다가와 그를 꼼짝없이 가두어버렸지. 그녀의 숨결이 불처럼 뜨거운지 아니면 얼음처럼 차가운지 그는 알 수 없었어. 붉은 입술이 그의 입술을 불태우는지 아니면 얼어붙게 하는지도, 다섯 손가락이 그의 허리를 붙잡고 태워 들어가 재가 된 흉터를 남겼는지 아니면 서릿발처럼 맨살을 파고드는지도 알 수 없었어. 그녀가 깨어 있는지 아니면 잠들어 있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지. 하지만 속세와 이승을 통틀어 그녀만이 유일하게 그를 사랑하며, 자신이 그녀의 마법에 꼼짝없이 걸려들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지.

 

 

프랜시스 매리언 크로퍼드(Francis Marion Crawford) 지음. '피는 내 생명(For The Blood Is My Life)'에서. '뱀파이어 걸작선' 262~264쪽.

 

 

나는 콘스탄스에게 유혹받는 샘 윈체스터가 아니었다. 내가 요즘에 푹 빠져 있는 미국 연속극 'Supernatural'에 나오는 한 장면도 아니었다. 쾌락에 섞여 희미하지만 분명한 고통을 인식하는 순간 저항해야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면서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이미 엔도르핀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이 섞인 피가 흐르는 핏줄 때문에 주먹이 제대로 쥐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품은 차갑고 번뜩이지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미소를 보면서 나는 혼란에 빠졌다. 그 미소 속에 어느 것보다도 강한 치명타를 안길 칼날 두 개가 들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떨리는 온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형체를 알아보기 한참 전부터, 이글거리는 눈과 진홍색의 관능적인 입만은 줄곧 우리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자신의 무덤으로 곧장 다가갔지만, 들장미를 대하고는 딱 멈추어 섰다. 그러고는 묘의 오른쪽으로 빙 돌면서 들어갈 곳을 찾다가 우리를 발견했다. 극렬한 증오와 분노로 그녀의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그러나 그 표정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달콤하면서도 한층 사악한 사랑의 미소가 얼굴에 나타났다. 그녀는 우리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순간 그녀의 입가에 뭉쳐진 피거품이 보였고, 입술 아래로 기다랗고 날카로운 이빨이 드러났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마법을 걸 듯 달콤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는 우리에게, 특히 목사에게 기묘한 감흥을 주었다. 나는 목숨이 위태로울 만한 상황은 피하면서 최대한 뱀파이어의 능력을 시험해보고 싶었다. 최면 효과가 있는 그녀의 목소리, 나는 그것을 쉽게 물리쳤지만 목사는 황홀경에 빠진 것 같았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저항하려고 몸부림을 쳤음에도 그는 그녀에게 점점 끌려가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이리 와요! 이리 와요! 잠과 평화를 줄게요. 잠과 평화, 잠과 평화."

 

 

프레더릭 조지 로링(Frederick George Loring) 지음. '사라의 묘(The Tome of Sarah)'에서. '뱀파이어 걸작선' 346~347쪽.

 

 

그야말로 사악한 요물이었다. 사람이 창조해낸 괴물이 사람을 해치는 건 분명한 모순이었다. 특히 흡혈귀는 사람이 가진 세 가지 기본 욕구 가운데 가장 위험하면서도 강렬한 성욕을 교묘하게 이용하기에, 두렵지만 거부할 수 없어 상대하기 굉장히 힘든 존재이다. 그 괴물에게 금기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금기를 완전히 깨뜨리지도 않았다. 금기로 나뉜 두 영역을 아슬아슬하게 오고 가며 희생자에게 접근해 사랑을 가장한 사악한 마력으로 사로잡았다. 그 마력을 꾸준히 드러내는 데는 엄청난 인내가 필요한데, 정욕을 참아 동자공으로 활용하는 고승들처럼 흡혈귀는 피에 대한 강한 집착을 기묘한 마력으로 승화한다. 심장에 말뚝을 박고 목을 잘라 불태워버리기 전까지 그놈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얘. 마음이 상했구나. 내 정신력과 심약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할 것이 있다고 해서 나를 잔인하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줘. 너의 어여쁜 마음이 상처를 받으면 내 거친 마음에도 피가 난단다. 너의 따스한 삶 속에서 나는 굴종하며 사는 황홀을 맛봐. 너도 내 안에서 죽을 거야. 달콤하게 죽을 거야. 어쩔 수 없단다. 내가 네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너는 다른 이에게 가까워질 거야. 그렇게 사랑인 동시에 잔인한 환희를 배우는 거지. 한동안은 나와 내 것에 대해 더 알아내지 못할 거야. 하지만 사랑스러운 네 영혼으로 나를 믿어주렴."

 

그렇게 열정적으로 말할 때면 그녀는 떨리는 손길로 나를 더 세게 껴안고 부드럽게 내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가 왜 그리도 흥분하는지,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멋쩍은 포옹이 있을 때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손길에 따르면서도 거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맥이 풀려서 그러지도 못했다. 귓가에 자장가처럼 전해지는 그녀의 속삭임이 도망치려는 나를 황홀경으로 이끌었고, 언제나 그녀가 팔을 놓아주고 난 뒤에야 정신을 차렸다.

 

그처럼 야릇한 분위기에서는 그녀가 싫어졌다. 때때로 기이하면서도 격렬한 쾌락의 흥분, 그리고 막연한 공포와 혐오심이 뒤섞이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 기분이 지속되는 동안은 그녀에 대해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지만, 애정이 점점 커져 숭배가 되고 혐오가 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모순임을 알지만 그때의 감정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

 

기이하고 아름다운 내 친구는 한 시간 내내 냉담하다가도 어느새 내 손을 잡고 다정히 어루만질 때가 있는데, 그때는 좀처럼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약간 홍조를 띤 얼굴, 나를 황홀히 쳐다보는 나른하면서도 이글거리는 눈빛, 드레스가 살랑거릴 만큼 가쁜 숨결, 그것은 연인의 열정과도 같아서 나를 당혹하게 했다. 혐오스러웠지만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는 흡족한 눈빛으로 나를 끌어안고 뜨거운 입술로 내 뺨 구석구석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거의 흐느낌에 가깝게 속삭였다.

 

"너는 내 거야. 내 것이어야 해. 너와 나는 영원히 하나야."

 

 

조셉 세리든 레퍼뉴(Joseph Sehridan Le Fanu) 지음. '카르밀라(Carmilla)'에서. '뱀파이어 걸작선' 46~47쪽.

 

 

내 앞에 있는 여자는 분명한 흡혈귀이다! 그녀가 부드럽게 나를 감싸 안고 입을 맞춘다. 공포에 휩싸였으면서도 나는 그녀를 거부할 수 없다. 클라리몽드처럼 피를 빨기 전에 눈물을 흘리면서 괴로워하지도 않는다. 내가 완전히 사로잡힌 것을 확인한 그녀는 내 입에 은근하게 퍼붓던 키스를 목으로 옮겼다. 갑자기 키스가 날카롭게 변했다. 내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지 정액이 빠져나가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따끔한 느낌과 그 때문에 몰려오는 무시무시한 공포였다.

 

"총 기상. 총 침구 걷어. 조별 과업 병사 떠나 5분 전."

 

눈을 번쩍 떴다. 호접몽이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실제로 따끔한 느낌을 받은 까닭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버둥거렸다. 침낭을 말다가 어제 자기 전에 일기를 쓴 뒤 장판 옆에 아무렇게나 놔 둔 수첩과 샤프를 발견했다. 이리저리 뒹굴다가 그만 샤프 끝에 찔렸던 것이다.

 

그리고 이 책 '뱀파이어 걸작선'도 내 머리맡에 있었다. 찬물에 세수를 한 뒤 책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모호한 공포가 더욱 두려워졌다. 이러다가 정말 흡혈귀가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꼼짝없이 죽음을 부르는 애무 속에서 신음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피를 빨려 바싹 말라버릴 것이다. 상상도 하기 싫은 일이지만 그런 공포를 쫓아다니면서 느끼는 쾌감도 만만찮기에 나는 여전히 이런 책을 즐겨 읽는다. 그리고 다행히 지금까지 흡혈귀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걸작들만 모아 놓아서 그런지, 흠잡을 부분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내용이 치밀하고 묘사도 굉장히 뛰어나다. 이미 앞에서 여러 번 인용한 부분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은밀하게 사람을 매혹하는 더욱 뛰어나고 많은 문체로 수놓은 이야기를 만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기를 적극으로 추천한다. 더욱 강하고 화려하게 진화한 흡혈귀와 마주치면서 공포와 뒤섞인 쾌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