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바둑스토리 2
강철수 / 동아출판사(두산)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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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자라는 어린이들이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데 바둑이 매우 좋다는 말을 들으신 아버지 손에 이끌려 어린 나는 기원에 처음 갔다. 나와 또래이거나 나이가 엇비슷한 어린이들이 있는 곳은 좀 왁자지껄했지만, 나이가 좀 드신 분(?)들이 있는 곳은 그야말로 적막강산이었다. 무엇인지 모르는 분위기에 짓눌려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역시 어린이답게 거기에는 동화에서나 봤던 산신령들이 모여있는 줄 알았다. 산신령들이 흔히 바둑을 두면서 시간을 보내니까 말이다.
 

어떤 아이들이 바둑을 두는 것을 보았다. 흰 돌과 검은 돌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고 두 아이는 번갈아 가면서 계속 돌을 놓았다. 가끔씩 돌 한 두개를 들어내고, 어떤 때는 돌을 아주 많이 들어냈다. 들어내는 아이는 낄낄 웃었고 상대는 울상을 지었다. 그러더니 나중에 들어낸 돌을 다시 놓으면서 깔끔하게 정리(?)를 했다. 그러더니 몇 집이 났으니 누가 이겼다고 말하고 판을 치웠다. 도대체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고개를 갸우뚱하고 원장님에게 인사를 한 뒤, 그 날부터 바로 바둑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여러모로 좋다고 열심히 다니라고 으름장을 놓으셨지만, 그저 놀기만 좋아했던 나는 바둑에 그다지 흥미가 붙지 않았다. 그래도 그때 기원에 같이 다니던 친구들하고 나름대로 열심히 배웠다. 집, 옥집, 오궁도화, 화점, 삼삼, 소목 따위 기본 개념부터 배우고 그 뒤 축, 장문, 먹여치기, 패 따위 기본 기술을 배웠다. 어느 정도 실력이 쌓인 뒤에야 원장님은 다른 아이들과 대국을 허락했고, 그때부터 나는 신나게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얼마 다니지 않다가 그만 둔 뒤에도 나는 바둑을 계속 뒀다. 여러 사람들과 계속 둔 보람이 있었는지 한 자리 급수 실력으로 보인다는 소리도 들었다. 그러나 입시에 시달리고 컴퓨터 게임에 정신이 팔리기 시작하면서, 바둑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지금은 삼삼에 침투해 집을 지을 줄도 모르니 어떻게 이렇게 다 잊어버릴 수 있는지 신기하다. '박락형 지식'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 듯 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바둑을 못 두는 것보다 더욱 아쉬운 것이 있다. 바둑, 겉으로 보기에는 굉장히 단순해 보이는 그 놀이(?) 안에 담겨 있는 깊은 세계를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것과 직접 경험하는 것은 굉장히 큰 차이가 있기에, 바둑을 두지 못하는 것이 그렇게 가슴을 아프게 할 줄은 몰랐다.

 

어쨌든 바둑을 한창 둘 때 재미있게 읽었던 만화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만화가 가운데 한 사람인 강철수 화백이 지은 '新 바둑스토리'라는 책이다. '신(新)'이라는 글자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바둑스토리'도 있는데,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이 만화책이 정말 재미있어서 '바둑스토리'도 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구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다시 읽어도 재미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림도 재미있고 구수한 사투리도 재미있다. 바둑을 좀 둘 줄 아는 사람들은 자주 등장하는 문제 풀이와 바둑 기보를 분석하는 쏠쏠한 재미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

 

주요섭이 쓴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나오는 옥희가 여기에서는 요석이라는 아이로 나온다. 요석이라는 어린 아이가 바라보는 세상이기에 더욱 재미있다. 한 때 바둑을 접고 다른 길을 찾는 장면에서는 어린이다운 생각에 저절로 폭소가 터졌다. 그러나 더욱 재미있는 것은 만화에서 드러나는 깊이다. 어렸을 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다시 읽어보니까 그 깊이가 무엇인지 나름대로 깨달을 수 있었다. 책날개에 강철수가 왜 유명한지 나와 있던데, 만화를 보면서 과연 그 말이 사실임을 알 수 있었다.

 

프로기사가 되고 싶은 요석이, 돈이 없어 사랑하는 여자에게 퇴짜를 맞아 내기바둑을 두기 시작하는 요석이 막내삼촌, 그런 막내삼촌에게 쓰라린 패배를 안기는 천재내기꾼 박봉, 그런 아버지를 싫어하면서도 아버지가 놓은 돌은 숭상하는 박봉의 딸 현정……이 사람들이 중심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주목해야 할 사람은 박봉이라는 노인이다. 프로 기사도 한 두 점 정도 접고(?) 절대 패배하지 않는다(?)는 바둑신에 가까운 기력을 자랑하는 이 노인은, 사기꾼이라고 봐야 할 지 진정으로 바둑을 사랑한 사람이라고 봐야 할 지 판단하기 힘든 인물이다. 그토록 쓴맛을 보고 한 때 폐인이 될 정도로 절망했던 막내삼촌도 박봉이 죽은 뒤 사기를 좀 쳐서 그렇지 훌륭한 노인(?)이었다고 말한다. 작가도 박봉이라는 노인이 보인 바둑에 대한 애착에 집중하고 싶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내가 공을 들여 묘사하려 했던 것은 묘기 백출의 기보도, '바둑 황제' 박봉의 인생 궤적도, 처절한 내기 바둑꾼의 세계도 아니다. 나는 다만 장인 정신으로 치부해 주고 싶은 한 인간의 집념을 소개하고 싶었다."

 

 

자질구레한 단상을 더는 남길 필요가 없을 듯 하다. 억지로 짜내는 글만큼 추한 것도 드물기 때문이다. 머리도 돌아가지 않는다. 다만 이 책에서 어쩌면 진짜 주인공이라고도 볼 수 있는 천재(?)내기꾼 박봉이 남긴 말 가운데 몇 마디만큼은 그냥 넘어가기 아까워서 여기에 남긴다. 어떻게 보면 잔인하고 인정머리없어 보이면서도, 또 다르게 생각하면 그런 것이야말로 바로 진리로 보인다. 순간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하는 생각에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바둑은 담소가 아니고 죽고 죽이는 전쟁이여! 내가 먼저 쏘지 않으면 상대가 나를 찔러죽이는 살인게임이여.

 

바둑을 조화라고 얼빠진 비유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먹고 살만 해져서 하는 헛소리! 바둑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략과 죽임의 예술이여.

 

바둑돌의 진퇴, 미동 하나까지도 죽임과 연관되지 않으면 바둑의 본질에 대한 배신행위여.

 

전장에서 포병의 오조준이 있듯이 바둑에도 자객의 실수가 있지만 그렇다고 살의를 중단해선 안돼.

 

전세가 기울어 이길 수 없을 때는 적장을 껴안고 동반폭사라도 해서 바둑과의 신의를 지켜야 해."

 

 

……

 

 

현정 : 오늘은 얼마 따셨어요?

 

박봉 : 별로여.

 

현정 : 그래도 많이 따셨네요. 행복하세요?

 

박봉 : 승부사의 분복이여.

 

현정 : 아빤 벌받구 말 거예요.

 

박봉 : 씨잘데없는 소리 말어.

 

현정 : 아빤 정말 벌받구 말 거에요!

 

박봉 : 야가 오늘 워째 안허던 소리를 허구 이래?

 

현정 : 아빠한테 바둑을 지고 돈을 잃은 사람 입장을 생각해 본 적 있으세요? 제발 사람들 그만 좀 괴롭히세요. 네? 

 

박봉 : 얼빠진 소리! 나한테 깨지지 않으면 다른 놈 누구헌테 깨잘 자들이여.

 

현정 : 이제 제발 내기바둑 그만 두세요! 저도 이제 직장 다닐 거예요.

 

박봉 : 이런 얼빠진! 세상이란데를 잘 보면 제법 아기자기 질서있게 굴러가는 것 같아도 세상은 승부의 각축장이여! 승부 아닌 데가 세상 천지에 어디 있어?

 

승부란 준엄하고 고결하고 공평한 거여! 승부를 피해간 민족은 모두 망했고 삼류국가가 되었어!

 

현정 : 사람들이 그 승부에 집착해서 세상이 사막처럼 황폐해져 가는걸 모르세요?

 

박봉 : 타협하고 담합해서 세상이 썩어가는 거여!

 

현정 : 남을 이기겠다고 기를 쓰고 악을 쓰기 때문에 몰염치해지고 잔악해진 거예요!

 

박봉 : 인류의 역사란게 뭐여? 그것은 단지 승자들의 기록이여! 문명이란게 뭐여? 그것은 승자들의 전리품이여!

 

나약한 패자들이 눈물로 써 내려간 비망록, 그것은 역사가 아니고 공배여!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는 덧없음이여!

 

현정 : 그래서 늘 승리해서 무엇을 얻으셨어요? 명예를? 재산을? 가정을?

 

박봉 : 승리의 보수는 승리일 뿐이여.

 

현정 : 아빤 패배자에요. 태어나서 한 번도 남을 사랑해 본 적이 없는 패배의 인생.

 

박봉 : 난 바둑을 사랑했어.

 

현정 : 아빤 패배한 거예요.

 

박봉 : 난 늘 즐거웠어. 승부가 있고 쓰러뜨릴 상대가 있는 한 난 항상 행복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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