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솔로지 -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종이 될 때까지의 거의 모든 역사
송준호 지음 / 흐름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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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내용을 한번 정리해보자. 200만 년 전 호모하빌리스는 지능은 있었지만 단편적이었고 아직 마음이 없는 존재였다. 180만 년 전 호모에렉투스는 강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그것이 자신인지 알아보는 자의식이 생겼다. 20~30만 년 전 호모네안데르탈렌시스는 아픈 자를 돌보고 사랑하던 이의 무덤에 꽃을 올려놓을 줄 알았다. 그리고 10만 년 전 호모사피엔스는 거침없이 유연한 상상을 하며 장신구와 추상적인 예술품을 쏟아냈다.

- 『사피엔솔로지』 中 p.101


학교의 교과과정 속에서 우리는 인류의 진화와 발전 과정을 배운다. 덕분에 시기와 명칭이 정확히 매칭되지는 않아도 관련 강의나 이야기를 들으면 어느 정도 생각이 나기도 한다. 이 책은 표지의 문구대로 '호모사피엔스가 지구의 지배종이 될 때까지의 거의 모든 역사'를 다룸과 동시에 어떤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미래가 불멸을 꿈꾸는 『두 번째 인류』와 연결되기도 한다.


우리는 참 신기한 생명체다. 체중의 2%에 불과한 뇌에 전체 에너지의 5분의 1을 소비하며 '지능'의 진화에 역량을 쏟아부어 스스로를 발전시키는 걸 지속하고 서로에 대한 돌봄과 배려, 공감의 능력으로 거대한 사회를 이뤘다. 게다가 미지의 것에 대한 개척과 과감한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자정을 위한 적절한 브레이크를 걸 줄도 안다. 그러나 배척과 적대심 또한 무한대로 발휘할 수 있으며 정말로 스스로를 멸종시키는 게 가능하기도 한 종족이다.


동물의 세계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혹독한 빙하기에 집단이 생존하려면 불구의 신체와 장애를 가진 타인은 버리는 것이 합리적이다. 선행인류가 무리 이동을 할 때 이동 능력이 없는 동족은 그 자리에 두고 떠났다.

반면, 이 늙고 병든 두 노인에게는 오랜 기간 돌봄을 받은 흔적이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호모 속들이 타인을 돌보고 배려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이런 일을 동물들은 하지 않는다. 6만 년 전부터 인간은 더 이상 동물이 아닌 존재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 『사피엔솔로지』 中 p.95~96


인간은 공감하는 데 필요한 마음을 갖기 시작하면서 확실한 차별점을 가진 존재가 되었으나 그 덕에 좀 더 악랄하고 불필요한 경쟁을 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마음에는 꼭 긍정적인 부분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편을 가르고 전쟁을 하고 교묘하게 타인을 수단화할 수 있는 종이 되었다.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는 법, 상대적으로 약한 육체적인 능력치에도 지능, 마음, 문화 등으로 지구의 지배종이 된 인간의 협업 능력은 좋은 면만 있는 건 아니다.



인류의 기원과 진화, 그리고 도시와 국가, 문명에 대해 다룬 4장까지 읽고 나면 우리가 처음에 가지고 태어난 거 대비 참 대단한 걸 이루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발전이 점점 가속화되고 있는 시점에 그냥 휩쓸려가지 않도록 하는 게 조금 더 나은 우리와 세상을 위해 필요한 일이라는 것도... 유전자 조작과 인공지능, 그리고 기후위기 등이 언급된 5장에서 7장까지의 내용은 이전에 읽은 『두 번째 인류』를 떠올리게도 했고, 동물복제로 주목받다가 논문 조작으로 몰락한 황우석 박사 사건부터 유전자 조작으로 일말의 결함도 없이 태어나는 인간, 크롬이 등장하는 드라마 <올모스트 휴먼> 등 여러 가지가 생각나게 만들었다. 

우리는 점점 드라마나 영화, 소설 등으로 접했던 상황에 가까워지고 있다. 좋다, 나쁘다, 어느 한쪽으로 단정할 수 없는 현상이지만, 세계 평균으로 볼 때 7월 29일 이후로 다음 세대가 사용할 지구 자원을 빌려다 쓰고 있다는 2021년의 통계치를 보고 있으니 -우리나라는 4월 초부터 후손들의 것을 빌려 쓰고 있단다- 이제 우리는 발전, 개발보다는 균형과 지속에 신경을 써야 할 때가 진짜 온 게 아닌가 싶다. 이미 너무 늦은 걸지도 모르지만, 이토록 경이로운 발전을 이뤄낸 인류로서 어느 때보다 '혁신 본능'을 발휘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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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인류 - 죽음을 뛰어넘은 디지털 클론의 시대
한스 블록.모리츠 리제비크 지음, 강민경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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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배우는 시간』이라는 책을 읽으면서 죽음이 왜 우리 사회에서 극복해야 하는 질병같이 인지되고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했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자연스러운 일이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라는 게 여러 의미를 갖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불멸', 그리고 '디지털 불멸성'을 추구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기업의 이야기가 담긴 이 책을 읽고 나니 왜 이런 것에 집착하나 싶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공포스럽기도 했다. 그래서 저자들도 그런 기업, 사람들과의 만남(1부)과 더불어 우리 존재 자체에 대한 철학적 사유(2부)를 같이 다룬 게 아닐까.



| 영원한 삶의 의미

불멸을 제공한다는 '이터나임', 바비 인형에 말을 가르친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회사 '풀스트링', 어린아이와 비슷한 안드로이드인 '텔레노이드', 다시 소생할 것을 기대하며 급속 냉동된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알코어 생명 연장 재단의 시설, 죽은 이후에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스타트업 '곤낫곤', 24시간 내내 대화할 수 있는 디지털 친구, 챗봇을 제공하는 앱 '레플리카' 등 실체적인 삶에서뿐 아니라 인공의 세계에서까지 불멸을 실현시켜 주겠다는 기업, 단체, 연구소 등이 넘쳐난다.

세계 곳곳에서 여러 스타트업이 '디지털 불멸성'이라는 거대한 시장의 경쟁에 뛰어들었다고 하는데 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조차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이해가 되지 않는 시장이다. 불의의 사고로 갑작스럽게 소중한 사람을 잃은 누군가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있는 정도의 죽은 이와의 소통이라면 모르겠으나, 죽은 사람의 인생 자체를 디지털 존재에게 덧입혀 그 사람과 평생 계속 만날 수 있다는 게 과연 좋은 일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무리 데이터와 기록, 습관, 언어 등을 가르쳐서 만들어 냈다고 해도 그 존재가 살려내고 싶었던 그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또 디지털 존재로서 영속되는 삶이 진짜 그 존재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말하는 인공지공이 부딪치는 가장 큰 난관은 '말로 드러나지 않은' 모든 정보다. 인간은 효율성을 따지는 데 천재이기 때문에 최대한 적은 단어로 최대한 많은 내용을 빨리 표현해 정보를 전달하고자 한다. 게다가 우리는 말할 때 몸짓언어를 자주 활용해 말로 드러나지 않는 정보를 전한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말이다. 그리고 상대방이 나와 비슷한 일을 겪은 적이 있다면 내가 겪은 사건을 모두 말하지 않아도 상대방이 내 말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 『두 번째 인류』 中 p.263


인간은 데이터로만 단정 지어질 수 없는 다양한 면을 가지고 있는 존재다. 실존하는 친구나 가족도 한 번씩 내가 알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은 순간도 있고, 아주 드물지만 일련의 경험 이후로 아주 다른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관계라는 것에 재미가 있기도 하다. 물론 가끔은 뒷목 잡지만 말이다. 아마 내 지인의 데이터로 탄생한 AI는 진짜 지인보다 일관성 있지 않을까? 데이터로 탄생한 디지털 지인도 내 지인의 의외성이라는 걸 고스란히 물려받는 게 가능할까? 그렇다면 진짜 무서울 거 같다.  


| 누구에게 좋은 일인가

책을 다 읽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SNS 등 온라인에서의 활동을 좀 줄여야겠다는 것이었다. 어떤 기업에서 회원 정보 등이 유출되면 사람들은 정말 예민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SNS 등을 통해서는 자신의 개인정보를 그냥 자발적으로 제공하며 그것이 대기업에게 또 다른 독점 시장을 만들어준다. 이미 구글은 각종 서비스를 통해 다량의 개개인의 정보를 가지고 있고, 앞으로 그 양이 자연스럽게 더 늘어날 수 있도록 다른 기업들을 인수하고 있다. 심지어 '잊힐 권리'를 위해 웹사이트에서 개인 정보에 대한 삭제 요청을 할 수 있도록 데이터 보호법이 유럽 연합에서 개정되었는데 이에 대한 판단 권한이 전적으로 구글에 있다고 한다.

'디지털 불멸성'이라는 시장도 결국은 구글이라는 거대 기업의 독점 시장이 될 수 있고, 딥페이크 등의 기술과 엄청난 데이터를 이용해서 얼마든지 구글이 조작하는 세계가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지금도 우리는 충분히 많은 가짜 뉴스 속에 살고 있다. 실제 존재와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말하고 행동하는 AI, 챗봇, 안드로이드 등이 단지 소중한 이와의 계속 함께하고 싶다는 순진한 목적에만 머물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저 기술의 발전과 인류의 새로운 도약으로만 이런 상황을 바라볼 수가 없다. 

기록과 데이터를 통해 불멸을 추구하는 것이 결국은 누구, 무엇을 위한 일인지에 대한 윤리적, 도덕적인 통찰이 먼저 심도 있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런 기술의 주된 소비층은 상위 몇 %라는 부유한 집단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도 관련 기업, 단체, 연구소 등이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모두'라는 이름이 붙은 다양한 것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중에 정말 '모두'를 위한 것들이 얼마나 될까. 소중한 이들을 잃은 '모두', 영원히 살고 싶은 '모두', 이 '모두'를 위한 진정한 길에 대해 같이 고민할 만한 주제를 던져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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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사고 - 살아남는 콘셉트를 만드는 생각 시스템
다치카와 에이스케 지음, 신희라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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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 창조, 창작이라는 걸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 막연하게 느껴질 때 그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는 책이다. 저자는 생명체의 진화에서 힌트를 얻어 그 진화의 흐름과 창조의 사고를 연결시키는 '진화사고'라는 방법론을 만들었다. 생물이 변이와 선택을 통해 진화해왔듯이 사물 혹은 어떤 프로젝트도 다양한 변이와 그에 대한 선택으로 더 나은, 좋은 방향으로 창조를 향해 나갈 수 있다는 걸 사례와 경험들로 보여주는데 단순히 이론적인 설명에 그치는 게 직접 적용해 볼 수 있는 워크북 같은 느낌이라 좋았다. 



변이의 사고를 터득해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상상력을 익히자. 상식에서 벗어난 바보 같은 도전을 새로운 이름으로 찬미하며 고정관념을 던져버리자. 아이디어의 질은 중요하지 않다. 우스운 아이디어도 대환영이다. 아이디어를 일으키는 우연한 발상을 억누르지 말고 예상 밖의 가능성에 마음을 열자.


- 『진화사고』 中 p.98


어린 시절에 상상화 그리기 대화 같은 걸 했던 기억이 난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 등 실현 가능성 따위는 고려하지 않은 엉뚱한 것들을 잔뜩 그려 넣은 그림을 그리고 봤었는데 아마도 그중 몇 가지는 지금 실재하고 있을 것이다. 아는 게 없어서 그만큼 용감하고 한계 없이 상상할 수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그런 상상력을 잃는다. 상상한다고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눈치를 보게 되었는지... 


변량, 의태, 소실, 증식, 이동, 교환, 분리, 역전, 융합에 이르는 저자의 변의 워크를 따라가다 보면 다시 마음껏 이상(?)하게 상상하고 싶어진다. 그리고 어쩌면 그 안에서 -대단하지는 않더라도- 지금 고민에 대한 실마리를 얻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팔리는 기획, 새로운 아이디어, 끌리는 공간'에 대한 고민은 일을 하고 있는 누구나 어느 정도는 가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자가 참여한 방사성폐기물 처리장 설득 프로젝트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쓰레기 처리장을 둘러싼 잡음과 지자체, 주민 간의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 기만이 아닌 신뢰감 있는 설득력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는가, 그런 것이 가능한가라는 생각이 들어서 '위험하고 더러운 처리장'이라는 사고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의 확장과 변이를 전개하는 저자의 사례가 흥미로웠다. 그 아이디어와 방식이 감탄스러우나 그럼에도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고 느껴지기도 했지만 말이다. 

다방면의 디자인 전략가로 활약하고 있는 저자는 디자인을 '형태를 바탕으로 아름다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일'이라는 나름의 정의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창조를 진화의 관점에서 바라봤을 때 자연에서의 진화를 중심에 두면 그 안에 관계는 절대 빠질 수 없는 요소일 것이다. 그래서 저자의 창조 안에는 '천적'(가치의 폐기)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물건에 천적이 있다는 건 생각해 본적도 없는데 저자의 진화사고를 통해서 창작이라는 걸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 창의력이라는 걸 가지고 태어난다. 하지만, 저자의 말대로 분업화 이후 여러 영역이 세분화되면서 각자 맡은 영역에 따라 새로운 발상이나 창조와는 담쌓는 일이 많아졌다. 창조라는 건 처음부터 할 수 있는 사람이 정해져 있는 분야가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언제든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내재된 힘이 있다는 걸 믿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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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의 문장 - 작고 말캉한 손을 잡자 내 마음이 단단해졌다
정혜영 지음 / 흐름출판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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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에 학교에 근무할 때, 아이들과 외부에 나가면 번호대로 두 줄로 서서 이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어느 날인가 1번 아이 옆에 서서 '너는 내 짝꿍이야'하면서 손을 잡고 다닌 적이 있었는데 한 번 그렇게 하고 나니 이 녀석이 이후에 이동할 때도 '나는 샘 짝꿍이야'하면서 계속 옆에서 내 손을 잡고 다녔다. 회장, 부회장에게 맨 뒷줄을 부탁한 터라 나는 맨 앞에서 1번 아이의 손을 잡고 바로 뒤에 선 아이들까지 함께 떠들고 웃으면서 돌아다녔는데 이 책의 표지 글을 읽고 나니 그때 기억이 났다. '작고 말캉한 손', 세상의 때가 한참 덜 묻은 손을 나도 즐겁게 잡고 다닌 기억이 있다. :)


때로는 근엄하고 때로는 세상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보이지만 엄마, 아빠는 자신의 아이가 처음이다. 그러니 아이를, 아이의 마음을 다 모른다고 하여 어찌 잘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만 자식은 어린 시절의 자신이 아니니 아이의 마음을 정성껏 들여다보아야 한다. 어제보다 나은 엄마, 아빠가 되기 위해 오늘 더 노력해야 한다. 먹고사느라 여유가 없었던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잘 해내지 못한 일이더라도 오늘의 나는 과감히 해내야 하는 일이다. 내가 더 나아져야 내 아이도 지금의 나보다 더 나아질 테니까.

- 『어린이의 문장』 中 p.97


같이 근무하던 선생님이 같은 상황에서 동생과 다른 처우에 항의하며 얼굴을 붉히던 큰 딸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다. 딸에게 그런 얘기를 들을 줄 몰랐던 데다가 무엇보다 잘못했구나 싶은 마음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서 너무 당황했다고 하셨다. 이야기를 다 들은 상담사 선생님은 딸에게 정식으로 사과하시라고, 엄마가 너 키울 때는 엄마가 처음이라서 그게 잘못인 줄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제대로 말해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었다.

부모는 부모가 처음이고, 아이는 아이가 처음이다. 맏이는 맏이가 처음이고 둘째는 둘째가 처음, 막내는 막내가 처음, 모두가 똑같이 처음이다. 처음인 사람들이 이렇게 떼로 모여서 제대로 하려고 고군분투하는 게 가족이라고 보면 사실 모두가 짠하다. 특히 부모는 첫아이를 키워냈다고 해서 두 번째 아이가 수월한 그런 역할이 아니다. 둘째는 또 처음이니까... ㅎㅎㅎ 그래서 모든 아이들을 정성껏 들여다보아야 하는 거 같다. 그리고 같은 원리로 그런 아이들이 모인 교실의 선생님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적 때문에 아이에게 가혹하게 군 일로 전화한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죄책감에 본인이 먼저 이야기를 꺼냈던 친구는 대화 내용이 잔소리처럼 느껴졌는지 '아이 낳아서 키워본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했다. 목구멍까지 올라온 '너는 30명이 넘는 남의 자식 키워본 적 있냐'는 말을 가까스로 삼키며 상한 기분을 달랬는데 교사라는 직업은 내 아이뿐 아니라 남의 아이도 그만큼 -어쩌면 더- 공들여 살펴야 하는 일이다. 친구에게 결혼하지 않은 나는 남편도, 아이도 없는 팔자 좋은 사람이었던 거 같은데 학교에 근무하던 매해 아이들로 인해 긴장과 비장함으로 안달복달했던 건 아는 사람은 다 안다.



두려움은 몰라서, 어려서 생기는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경험치가 쌓일수록, 비교치가 늘수록, 그렇게 세상을 더 많이 알아갈수록 두려움은 몸짓을 부풀린다. 더 배우고 성장했는데도 왜 두려움은 작아지지 않고 자꾸 커지는 걸까.

- 『어린이의 문장』 中 p.23


알아서 두렵고 피하고 싶은 것들이 있다. 그리고 그런 요소들은  나이를 먹고 경험이 쌓일수록 더 그렇게 느껴진다. 아는 게 많다는 이유로 앞선 걱정이 많아지고 그게 두려움을 키우는 거 같다. 아이의 두려움은 단순하다. '바이킹 맨 끝자리 타기', '독감 예방 접종하기' 등 명확하게 실제적인 것들에 대한 게 아이의 두려움이라면 실체가 없는 관계나 불안, 불신 등으로 인한 것들이 어른의 두려움에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일어나지 않은 일은 계속 일어나지 않을 확률이 높으니 지금 당장 나를 두렵게 하는 문제를 마주하고 해결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힘에 부칠 때는 흑기사도 구하고, 신나는 다른 일에 한눈팔기도 하면서 두려움과 거리 두기하는 걸로...


아이들과 글쓰기 노트로 교류하면서 느낀 감정과 생각들이 빼곡히 들어찬 에세이 『어린이의 문장』. 초등학교 교사인 저자는 순수하고 솔직한 아이들의 문장을 통해 감탄하기도 하고 깨달음을 얻기도 하면서 어제보다 더 나은 엄마, 선생님이 되려고 노력한다. 매일 글을 쓰는 아이들도, 이를 꼼꼼히 살피어 매번 세심한 코멘트를 적는 저자도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이런 정성과 진심 어린 교류는 아이의 삶 내내 두고두고 힘이 될 것이다. 원활한 글쓰기가 되지 않는 아이를 위한 배려 가득한 솔루션까지, 이런 저자 덕에 아이들이 성장하고 더불어 저자도 바라던 대로 어린 제자들에게 계속 부끄럽지 않은 선생님으로 남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나이를 먹어서 몸이 뻣뻣해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마음은 유연하고 말랑하게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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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걸 비추는 밤, 마음만은 보이지 않아 -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7가지 심리 처방전
도하타 가이토 지음, 이지수 옮김 / 흐름출판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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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융은 '우리가 마치 조각배로 거친 밤바다를 항해하는 것처럼 의지할 데 없'는 인생의 위기의 시기를 '밤의 항해'라고 불렀다고 한다.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인생이 '때로 길을 잃는 시기', 바로 그때 우리는 마치 암흑 속을 홀로 항해하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게 된다.

책의 도입부에서 이 '밤의 항해'라는 표현을 보고 진짜 상황에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더불어 지금 나도 '밤의 항해' 중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살면서 크고 작은 문제는 언제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고, 그럼에도 그럭저럭 스스로를 다독이고 채찍질하며 일상을 유지해 나간다. 그러나 어느 순간 모든 믿음, 의지, 기대가 사라지고 절망, 체념, 부정적인 감정이 휘몰아치며 정말 길을 잃은 미아가 된 듯한 기분이 지속될 때가 있다. 

임상 심리사인 저자는 다른 상황, 다양한 문제로 힘들어하는 내담자들의 밑바닥에는 같은 괴로움이 있음을 느끼고, 연결되기 쉬운 만큼 더 고독해지기 쉬운 요즘의 세상에서 '밤의 항해'를 하는 모두를 위한 세심한 가이드북을 만들었다. 

책을 읽으면 내담자들의 사연을 재구성하여 만들어낸 K와 D의 이야기를 통해 저자의 보조선에 기대어 함께 '밤의 항해'를 하게 된다. 많은 임상 경험을 섞고 조합해서인지 K와 D의 이야기 속에서 어느 정도는 내가 겪었을 법한 비슷한 감정과 상황의 조각을 찾을 수 있다. 


생각해보세요.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기댈 때 꽤 기쁘잖아요? 또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을 때는 잘됐다고 생각하고요. 다른 사람을 도와주는 일은 그 자체로 보수가 됩니다. 그런데도 막상 내가 누군가에게 기대려고 하면 상대에게 민폐를 끼치는 짓, 상대가 싫어할 짓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한 일입니다.

그러니 용기를 내서 'SOS'를 쳐봅시다. 사람은 누가 도와달라고 하거나 상담을 요청하면 의외로 그에 응하려고 하는 법입니다. 물론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당신의 괴로움을 공유해주려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지탱해주는 게 아닐까요.


- 『모든 걸 비추는 밤, 마음만은 보이지 않아』 中 p.244-245


인간을 믿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현실의 복잡하게 뒤얽힌 인간관계는 영화나 드라마 속 인간관계처럼 해결되지 않습니다. 있는 것은 수수한 시간의 흐름뿐입니다.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믿는 데 유일한 힘이 됩니다. 납득이 안 되는 일, 모순으로 가득한 일,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 다시 말해 논리적 사고로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 일을 시간은 천천히 녹여줍니다.


- 『모든 걸 비추는 밤, 마음만은 보이지 않아』 中 p.292


시간은 그냥 흘러가는 듯 보이지만, 우리는 안다. 타이밍이라는 게 있다는 것, 그리고 가끔은 그 타이밍이 아주 기가 막힌 상황을 만들어 낸다는 것도... 물론 시간도, 누군가의 도움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고, 당장 아무 소용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해내야 하는 '밤의 항해'라면 가능한 모든 것에 기대어 보는 것도 방법이지 않을까.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을 때 개인적으로는 상황을 단순하게 만들려고 하는 편인데 저자는 우리가 지금 인생이 쉽게 단순해지는 사회에 살고 있지만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고, 흰색과 검은색이 뒤섞인 애매한 색이 세상의 모습이라고 한다. 그래서 복잡함을 잘라낼 게 아니라 복잡한 현실을 가능한 한 복잡하게 살아가는 것, 그게 행복이라고 말한다. 

머리를 싸맬 괴로운 순간이 이 책 한 권으로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옆에서 지켜보며 대화하듯 이끌어가는 저자의 보조선을 따라가다 보면 '밤의 항해'가 두렵지만은 않다. 결국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마주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러면 '밤의 항해'가 끝나고 어느덧 아침을 맞이하고 있을 테니... 또한 이건 혼자만의 유별난 경험이 아니다. 그러니 너무 외로워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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