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렉트릭 스테이트
시몬 스톨렌하그 지음, 이유진 옮김 / 황금가지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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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드론 조종사들의 승리로 끝났으나 피폐해진 것은 그저 발붙이고 살던 땅만은 아니었다. 인류는 뇌와 직접 연결되어 작동하는 뉴로캐스터에 의존하고 그에 따르는 부작용으로 사산, 죽음을 겪는 등 삶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졌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동생과 헤어진 미셸은 남동생에게 주었던 것과 똑같은 장난감을 품에 안고 위탁가정으로 찾아온 노란 로봇과 함께 길을 떠난다.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이 아트 노블은 동생을 찾는 미셸의 여정을 따라간다. 여정 중간중간 미셸의 회상뿐 아니라 다른 누군가가 읊조리는 뇌, 뉴로캐스터, 다뇌간 지능 등 이런 미래를 야기한 것들에 대한 암울한 소회도 들을 수 있다. 처음에 이 디스토피아가 1997년이라는 사실이 좀 의외였다. 뇌와 뇌를 연결하여 지식과 경험을 공유할 수 있는 세상, 뇌와 연결된 드론이 대신하는 전쟁으로도 죄 없는 민간인들의 희생은 어쩔 수 없고 후유증으로 죽음을 맞은 조종사와 그 아기들까지, 역시나 어떤 형태로든 전쟁은 인류의 삶을 파괴하는 최악의 발명품이다.

앞뒤 자세한 설명 없이 일단 미셸의 여정을 따라가게 만드는 구성이 좀 어색할 수 있지만,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을 그대로 구현해낸 작가의 일러스트 덕에 마치 미셸이 보고 있는 걸 같이 보고 있는 듯이 느껴져 자연스럽게 빠져들어 읽게 된다. 여정 중에 만나게 되는 피폐하고 음울한 풍경들은 미셸의 여정에 걱정과 안쓰러움을 더하게 만들고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위험에 같이 긴장하게 만들었다. 안면 전부에서 느껴지는 불편한 느낌에 3D 안경 쓰고 영화 보는 것도 정말 어쩔 수 없는 대단한 이유가 있지 않은 한은 하지 않는 나로서는 뉴로캐스터를 쓰고 그대로 죽어가는 인간들의 모습이 낯설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뇌와 뇌를 직접 연결하여 지식, 경험 등을 공유할 수 있는 세상에도 자동차는 왜 날지 못하는가라는 생각이 계속 떠올랐다. ^^

이 책은 2번 읽으면 좋을 거 같다. 한 번은 페이지 순서대로 쭉 읽어나가고, 그다음에는 미셸의 이야기만 쭉, 검은 페이지로 된 누군가의 소회 부분만 쭉 요렇게 말이다. 페이지 순서대로 읽어나갈 때 살짝 끊기는 거 같았던, 검은 페이지의 이야기가 연결되어 한층 잘 읽힌다.

마침내 여정의 끝, 텍스트 없이 일러스트만으로 구성된 페이지들이 안도감과 불안감을 반반씩 느끼게 한다. 미셸은 동생과 제대로 만났을까.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일을 후회하는 듯한 검은 페이지의 누군가는 이 상황을 타개할 다른 노력을 할 생각은 없는 걸까.

저자인 시몬 스톨렌하그는 스웨덴의 작가이자 뮤지션이며 일러스트레이터라고 한다. (이런 욕심쟁이 같으니라고!!!) 전 세계 17개국에 번역 출간된 이 책은 <어벤저스>의 루소 형제, 영화 <그것>의 앤디 무시에티 감독을 통해 영화화가 확정되었다는데 어떻게 만들어질지 궁금하다. 그동안 봤던 디스토피아를 그린 SF 물과는 결이 좀 다르게 느껴지는 -북유럽 갬성(?)이라 그런가- 『일렉트릭 스테이트』, 할리우드 제작진을 만나 나름의 개성을 잃지 않으면서 업그레이드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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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 살인사건 에드거 월리스 미스터리 걸작선 3
에드거 월리스 지음, 허선영 옮김 / 양파(도서출판)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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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유능한 형사였던 탈링은 믿음직하고 충실한 동료 링추와 함께 영국으로 돌아와 사립탐정사무소를 열어 활동 중이다. 사촌이자 백화점 사장인 손튼의 의뢰로 백화점 매니저 밀버그의 횡령 혐의를 조사하였으나 미팅 자리에서 얘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흐르자 의뢰를 거절한다. 손튼의 개인적인 악감정 때문에 고초를 겪을지도 모르는 전 직원 오데트에게 경고 차 방문한 탈링은 손튼의 후원을 받는 범죄자 샘 스테이와 마주치게 되는데... 그다음 날 이른 아침 손튼이 공원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가슴에는 수선화 한 다발이 놓인 채로.

많은 추리소설이나 범죄, 수사물에서 보면 우선 시체의 상태를 보고 어떤 범죄인지, 살인자의 피해자에 대한 감정 상태가 어떠했는지를 유추해낸다. 죽은 손튼의 시신은 '코트와 조끼를 제외하고 옷을 온전히 입고 있었고, 가슴에 난 상처는 피 묻은 여자 실크 잠옷으로 묶여 있었다. 가슴 위에는 두 손이 가지런히 모인 채 올려져 있었고 그 위에 수선화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사인은 심장을 관통한 총상이었고... 이제 어설프게나마 흉내를 내보자면, 일단 시신에 훼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데다 상처는 마치 지혈을 한 듯이 묶여 있었고 심지어 수선화 한 다발까지 놓여 있었다. 원한으로 인한 범죄는 아닌 거 같고, 시신의 자세, 수선화 등은 범인이 범행을 후회하고 피해자를 추도하는 듯한 분위기까지 느껴진다. ^^

용의자는 첫 번째로 교활한 백화점 매니저 밀버그, 손튼이 자신의 횡령 사실을 의심하고 탐정에게 의뢰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게다가 손튼이 그 사실로 자신을 압박하며 다른 희생양을 찾아 범행 조작을 하는 데 동조하게 만들었다. 두 번째 용의자는 손튼의 개인적인 호감을 단호하게 거절하여 백화점에서 해고된 직원 오데트, 이 연약한 여성은 손튼의 복수가 해고로 끝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고 사건 당시의 행방이 묘연한 데다가 범행 시각에 그녀의 아파트에서 총소리와 비명을 들었다는 이웃들의 증언이 있다. 세 번째 용의자는 손튼을 숭배하는 전과자 샘, 교도소를 들락거리는 자신을 출소 때마다 마중 나와 주고 일자리까지 주었던 손튼을 위해 목숨도 걸 수 있는 이 범죄자는 손튼의 거짓말에 속아 오데트에게 증오를 품고 함께 그녀를 궁지에 몰 계략을 짰다. 그리고 수사를 해 나가면서 탈링이 의심하게 되는 또 한 사람, 바로 탈링의 동료인 링추, 손튼이 중국에 있을 당시에 그에게 모욕당한 링추의 꽃다운 여동생이 명예 자살을 했고, 링추는 살인 흉기로 쓰인 탈링의 총을 꺼내갈 수 있었다. 자, 범인은 누굴까?

사실 추리소설을 읽는 이유는 꼭 범인이 누군인지 궁금해서만은 아니다. 어떻게 범죄가 발생했는지, 그걸 누가 어떻게 밝혀 나갔는지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게 맞을 것이다. 수사를 해 나가는 탈링과 링추 콤비는 얼핏 홈즈와 왓슨처럼 생각될 수도 있지만, 홈즈의 관찰자, 기록자의 역할이 컸던 게 왓슨이라면 링추는 탈링의 해결사 역할이 크다. 중국에서도 신출귀몰한 형사였던 링추는 탈링이 넘지 못하는 선을 교묘하게 넘나들며 특히 엄청난 관찰력과 강력한 신체적인 능력을 발휘한다. 과묵한 링추 대신에 런던 경찰국의 화이트사이드 경위가 왓슨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홈스 같은 탐정물을 기대한다면, 탈링에게 다소 실망할 수도 있다. 이 책은 누군가의 천재적인 추리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갈등 없는 협업과 인간미를 느낄 수 있다. 진짜 나쁜 놈은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가게 된 거 같아 개인적으로는 속이 후련하지 않지만, 우리가 사는 세상도 그러하지 않은가 싶었다.

저자인 에드거 월리스는 코난 도일, 아가사 크리스티와 동시대에 활약한 영국 작가이다. 유명한 영화 <킹콩>의 원작자라고 하는데 추리소설뿐 아니라 영화 시나리오, 시, 역사소설 등 폭넓게 집필했다고 하니 정말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던 거 같다. 영국에는 대체 어떠한 기운이 흘렀길래 이런 추리 소설 작가들이 파도파도 나오는 건지 그것이 알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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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식 살인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시릴 헤어 지음, 이경아 옮김 / 엘릭시르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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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도 읽어도 계속 재미있는 추리 소설이 나타난다는 것은 이 장르 소설을 끊지 못하는 가장 확실한 이유 중에 하나다. 추리 소설이 주는 서스펜스와 스릴, 그리고 결말에 이르러서의 쾌감(?)까지, 그동안 읽는 내내 스토리를 따라가면서 겪는 감정적인 재미가 컸다면, 요 책이 좀 다른 맛을 알게 해 주었다.

제목이 '영국식 살인'이라서 영국식 살인이라는 건 무엇인가, 무엇이 다른가 계속 궁금해했는데 살인의 방법적인 측면이 아니라, 그 동기가 영국이라는 국가가 가지고 있는 풍습과 관습에 기인한 것이라는 게 굉장히 흥미로웠다. 책을 읽으면서 왕실, 여왕, 왕자들, 이런 것으로만 막연하게 알고 있던 영국에서의 귀족이라는 존재들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었고, 그게 단순히 사건에서 느껴지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재미를 주었다.

영국의 귀족이 왕실과 어떤 식으로든 혈연관계로 연결되어 있는 세습 귀족과 20세기 중반에 도입된 세습은 할 수 없지만 죽을 때까지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종신 귀족 이렇게 두 부류로 나뉘고, 영국 의회의 상원 의원은 이런 세습 귀족, 종신 귀족과 성직자로만 구성된다고 한다. -게다가 임기도 종신이란다- 그래서, 영국에서는 상원을 귀족들의 집이라는 의미로 'House of Lords', 국민들의 대표인 하원을 'House of Representatives', 대표자들의 집이라고 부른다고... 영국에서는 오로지 장남에게만 세습되는 귀족의 작위를 장남의 사망으로 그 자녀나 사촌이 물려받게 되면 상원 의원이 될 수 있다는데 이게 살인의 동기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이다.

『영국식 살인』이라는 것은 영국이라는 나라, 그 안에 귀족이라는 부류의 관습, 바로 그 때문에 발생한 살인 사건이었다. 워벡 가문의 고문서를 조사하러 왔다가 뜻하지 않게 사건에 휘말렸으나 이국의 이방인으로서 의심과 불안 속에서 관찰자의 입장을 고수했던 보트윙크 박사는 마지막에 이렇게 제안한다.

 

영국 헌법을 어느 정도 합리적으로 바꾼다면

추가적인 안전장치가 되지 않을까요?

장관님도 윌리엄 피트처럼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셨습니다.

하지만 다음 사람도 그렇게 운이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죠.

-『영국식 살인』 中 -

 

그냥 생각해 봐도 타고난 신분 때문에 저런 특혜를 가진다는 게 상황과 사람에 따라 상당히 부정적인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예상이 된다. 책의 주석에 따르면 입법과 예산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상원에 대한 각종 부작용과 여론 악화로 노동당 정부가 미국의 상원과 비슷하게 선출직으로 개혁하는 안을 추진했다고 하는데 찾아보니 개혁이 이루어지기는 했는데 직선제 도입은 아직인 거 같다.

특권과 부를 가지는 대신에 1, 2차 세계대전과 같은 큰 전쟁이 터지면 가장 먼저 참전하는 것이 귀족 청년들이라고 하니 이건 군대도 어떻게든 면제, 국적 때문에 원정 출산도 마다않는 우리네 소위 사회 지도층이라는 사람들 대비 참 훌륭하다고 해야 하나 싶다. 자신들이 누리는 것이 국민과 국가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그에 대한 귀족의 의무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라는데 하긴 영국 왕실의 왕자들도 군대 갔다 오지 않았던가...

추리 소설 한 편으로 영국을 공부하게 될 줄이야. 사회적인 배경이 갖는 특수한 풍습이 사건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악질 범죄자, 사이코패스가 등장하는 것보다 참신하고 말이다. 물론, 이런 시대에도 귀족과 평민을 나누며 특권을 통해 계급 사회를 공고히 하고 있는 게 별로 좋아 보이지는 않지만...

혹시 이 책을 읽게 된다면, 마지막에 옮긴이의 글을 꼭 읽기를 추천한다. 번역가이자 미스터리 애호가인 역자가 영국 귀족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관련된 추리 소설을 짚어 주는데 코난 도일이나 아가사 크리스티의 작품 외에도 다양하게 등장하니 이런 장르 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은혜로운 역자 후기가 아닐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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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생의 첫날
비르지니 그리말디 지음, 이안 옮김 / 열림원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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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동경의 대상이었던 불어 선생님이 귀에 못이 박히게 얘기하던 두 명의 프랑스 가수가 있었다. 파트리샤 카스와 장 자크 골드만, 두 사람이었는데 수업 시간에 이들의 노래도 꽤 들려 주셨다. 그렇게 열심히 배웠던 불어를 전부 홀라댕 까먹은 지금도 저 두 사람의 이름과 몇몇 곡의 제목만은 또렷하니 참 웃긴 일이다. 친구에게 빌려온 이 책의 첫 장에서 바로 장 자크 골드만의 이름을 봤을 때 내가 알던 그 가수 맞나맞나 그랬는데 그가 맞았고 불어가 아닌 한국어로 된 그의 노래 가사를 계속 만날 수 있었다.

바람난 남편과의 결혼 생활을 끝내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고독 속의 세계 일주'라는 크루즈 여행을 떠난 마리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배 안에서 일생의 사랑과 겪은 위기를 완전한 해피엔딩 혹은 새드엔딩으로 매듭짓기 위해 온 안느와 비만에서 환골탈태하였으나 여전히 낮은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남자 사냥 여행을 온 카밀을 만나 절친이 된다.

마리와 안느, 카밀이 함께 더 이상 그립지 않은 것들이란 목록을 작성하고 태워 버리면서 주문처럼 외쳤던 '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날!'이라는 말은 마지막에 그녀들의 건배사가 된다. 40세가 된 마리, 60대인 안느, 20대의 카밀은 각기 다른 이유로 위기를 느끼고 일상을 떠나 왔다. 고독함을 느끼며 세계 일주를 하라는 여행 프로그램의 특성상 완전한 혼자를 꿈꿨지만, 세 사람은 서로를 의지해가며 인생의 다음 장으로 갈 수 있는 마무리를 지었고, 함께 남은 생으로 출발했다.

 

화장품과 목욕은

피부를 부드럽게 하지만

아무도 어루만지지 않는 이에게는

먼 세상의 일

여러 달과 여러 해를

사랑하는 이 아무도 없이

그렇게 시간이 갔네

사랑을 잊은 채

꿈과 욕망도 잊은 채

무엇이 지혜롭고 또 무엇이 가능하지 알지 못한 채

어떤 외침도 열정도 없이

받아들이고 만

빛 없이 보낸 여러 해들

그날들이 남긴 열, 혹은 스무 장의

평범한 사진들

그것이 신비가 사라진 그녀 삶의 결산이었네

그녀는 천 번도 넘게 이 노래를 들었었다. 단지 꿈꾸는 것이 아닌, 진정으로 살아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물으면서, 그러니 이제 더 이상 꿈과 현실을 혼동하며 흔들리는 일은 없으리라. 


『남은 생의 첫날』 中


이야기 속에서 마리가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등장하는 장 자크 골드만, 그녀와 디디에가 주고 받는 편지 속에서 계속 그의 노래 가사가 등장한다. 선생님이 들려줬던 노래들이 이런 가사들을 가지고 있었구나를 깨달으며 문득 이 책을 장 자크 골드만의 노래로 이루어진 뮤지컬로 각색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마리와 안느, 카밀의 얘기가 메인이기는 하지만 조르주와 이블린, 그 외에 그녀들이 관계 맺는 크루즈의 사람들 얘기가 가슴 따뜻하게 때로는 분통 터지게 그려진다. 이렇든 저렇든 해도 3개월 후 여행의 마지막에 작별 인사를 나누는 그들을 보며 같이 눈물이 그렁그렁해지는 걸 보면 읽으면서 나도 정이 든 모양이다. 읽는 내내 '고독 속의 세계 일주'라는 여행 프로그램이 진짜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아니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은 내 남은 생의 첫날, 그러니까 힘차게 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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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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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변호사 남편과 나름 안정적인 가정을 이룬 세 명의 자녀를 둔 조앤. 조앤은 스스로를 현명한 아내이자 헌신적인 엄마로서 성공한 삶이라고 자부하며 살고 있다. 자신이 없으면 가족들의 생활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거라고 굳게 믿는 그녀는 말리는 남편을 뒤로 하고 식중독에 걸려 아프다는 막내 딸을 만나러 바그다드에 갔다가 돌아오는 시점에 고등학교 동창인 블란치를 만난다. 학생 시절 모든 학생들의 동경을 샀던 블란치는 몇번의 스캔들과 생활고를 거치면서 몰라보게 늙어 있었는데 우월감과 동정심을 느끼며 대화를 이어가던 조앤은 오히려 당당하고 편안해 보이는 블란치의 모습에 불편함과 왠지 모를 찝찝함을 느낀다. 런던에 가기 위해 타려고 했던 이스탄불행 기차를 악천후로 놓치고 텔 아부 하미드에 발이 묶인 조앤은 자신의 생을 돌아보면서 몰랐던 아니 자신이 모르고 싶어 외면했던 진실을 깨닫는다.

 

이 소설은 아가사 크리스티가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쓴 여섯 편의 소설 중에 하나라고 한다. 포와로나 미스 마플이 등장하지 않는 그녀의 소설도 좋아하는 나로서는 굉장히 기대를 가지고 보았는데 역시 아가사 크리스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배경은 사막, 벌어지는 모든 일은 조앤의 머릿속의 회상과 그녀의 심리 변화가 다인 이 이야기가 한 순간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게 만든 건 전적으로 작가의 역량이니 말이다.

어떤 상황을 복합적으로 이해하고 기억하기는 쉽지 않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중심적으로 기억하고 이해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한테는 아름다운 기억이 누군가에는 고통으로 남기도 하는데 조앤이 바로 이런 자기 중심적인 사고, 자기 합리화가 너무나 체득화된 인간이었다. 자신을 좋은 엄마, 좋은 아내가 아닌 그저 집안의 하인들이나 부릴 줄 아는 하는 거 없는 인간으로 매번 팩트 폭행하는 큰 딸 에이버릴이 불편하기만 하고, 자신을 따르지만 좋아하지는 않는 고용인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데다 남편 로드니는 자신이 모르는 가족, 주변인들의 사정을 시시콜콜 알고 있다. 조앤은 할 거 없이 고립된 사막의 숙소에서 난생처음 오롯이 갖는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자신이 놓치고 있었던 가족들의 진심, 진실을 처절하게 깨닫고 달라지기로 결심한다. 여기까지는 그녀가 안타깝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하고, 조앤을 따라 함께 여러가지 감정의 파도를 탔다.
마지막 장을 넘기고 나서는 조앤처럼 나이 먹을 수도, 저렇게 눈 뜬 장님처럼 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다. 살다 보면, 남들은 다 보고 있는 아픔, 슬픔, 기쁨을 마치 시야를 차단당한 경주마처럼 살피지 못하고 자기 좋을대로 해석하고 판단하며 그걸 다른 사람한테까지 강요하는 조앤같은 사람을 볼 수 있다. 민폐아닌 민폐같은 인간 유형, 이런 사람은 나름의 공고한 논리 구조 속에서 자신이 꽤나 좋은 사람이다. 조앤의 남은 생이 어떨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딱히 모두가 살고 싶은 인생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그랬듯, 남편의, 세 자녀의, 그리고 그녀가 친구라고 가깝게 느꼈던 모든 이의 인생에 그녀는 없을 것 같으니 말이다. 게다가 그렇다는 걸 깨닫지도 못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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