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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없는 나라 - 제5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이광재 지음 / 다산책방 / 2015년 10월
평점 :
1894년 격변하는 시대를 살아낸 민중의 이야기
『나라 없는 나라』는 제5회 혼불 문학상 수상작이다. 원제는 '바람보다 큰'인데 출간하면서 제목을 고쳤다. 이광재 작가는 전북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으며, 이미 여러 소설집을 낸 바 있다. 특히 2012년에는 전봉준의 일대기를 그린 『봉준이, 온다』를 출간했다. 『나라 없는 나라』 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시점부터 전봉준이 체포되어 이송되는 장면 까지를 다룬다. 작가는 이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 굉장히 오랫동안 치열하게 공부했음이 틀림없다.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지역, 당시 사람들의 풍속, 음식, 무기 및 전술 등을 굉장히 공들여 표현했다. 풍부한 문학적 표현력과 세세한 묘사 덕분에 옛 사람들의 삶이 눈앞에 생생히 그려진다. 역사 소설을 대할 때 '이거 어디까지가 진짜야?'하고 의심을 품던 몹쓸 버릇도 잠시 잊었다. 새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며 죽는 길로 나아가는 이들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작품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을 충실히 재현한다. 전봉준은 단순히 수탈을 벗어나고자 하는 민란을 넘어서서 외세를 몰아내고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으려는 큰 뜻을 품는다. 저자는 전봉준이 각 지역의 농군을 수합하여 일을 도모하는 과정을 긴장감 넘치게 풀어낸다. 소설을 읽다 보면 동학의 5대 장군에 속하는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 최경선의 개성 넘치는 인물도 만날 수 있다. 그 밖에도 전봉준의 딸 갑례, 죽을 각오로 전봉준을 지키는 을개 , 대원군의 시중을 들다 동학에 가담하는 막둥이, 사랑하는 남자를 찾으러 전쟁터로 나아가는 호정 등 가슴 아린 인물도 등장한다. 사실과 허구를 능수능란하게 오가는 작가의 솜씨 덕분에 이 모든 인물이 실제하는 듯 느껴진다. 신식 무기를 든 정부와 외세에 맞서 화승총, 죽창, 도끼를 들고 나선 이들. 들판에 나가 땀 흘리며 일하고, 집으로 돌아와 소박한 밥상을 받아들고 행복해하던 이들이다. 무엇이 이들 피비린내 나는 싸움터로 달려나가게 했을까. 승산 없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도망치지 않아 끝내 죽어야 했을까. 저자는 단순히 농민의 한과 울분을 살피는데 머무르지 않는다. 흥선대원군, 이철래와 김교진, 조희연 김학우 등 정부 관료를 등장시켜 당시 정부 내의 갈등도 균형 있게 다룬다. 청국의 도움으로 농민군을 제압하려는 조정과 이틈을 노려 조선에 파병하여 지배하려는 일본. 그 사이에서 자신들의 이익이나 위치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는 관료들.
독자는 이미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다. 동학농민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전봉준은 체포된다. 책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이후에 청·일 전쟁이 일어나 조선은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간다. 그러나 결말을 안다고 해서 작품의 몰입도가 결코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결말을 알기에 인물들의 대립과 갈등이 더 절실하게 와 닿는다.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상황이 19세기 조선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주변 국가의 이해관계에 좌지우지되는 상황, 국민을 위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제 몸 챙기기 바쁜 정치인, 정치인과 재벌에게는 다르게 적용되는 법의 잣대. 눈앞에서 수 백 명의 생명이 어이없이 찬 바닷속으로 수장되던 끔찍한 그 어느 날. 돈도 없고 지위도 없는 국민은 불안한 삶을 살며 울분을 삭힌다. '나라 없는 나라' 라는 이 책의 제목이 낯설지 않고 오히려 친근하게 느껴지니 슬프다. 19세기 조선의 격변기를 읽으며 오늘의 우리를 돌아본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이 꿈꾸던 강한 나라, 민이 중심이 된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를 이룩하였는가. 책을 덮고도 곰곰이 생각해볼 거리가 많았다.
책에는 옛 선비들이 즐겨 쓰던 말투인 의고체가 등장한다. 작가가 의도적으로 고심해서 사용한 문체이고, 이 문체 덕분에 인물들의 호기로움과 비장함이 더 깊이 느껴진다. 하지만 처음에 읽을 때는 낯설어서 가독성이 다소 떨어진다. 또한 전봉준과 5대 동학 장군 중심으로 이야기를 속도감 있게 풀어가다 보니 인물들의 세세한 감정선은 깊이 느끼기 어렵다. 개인적으로는 을개와 갑례, 이철래와 호정의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의 감정을 깊이 느낄 수 없어 아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시간 내어 읽을만하다.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을 꼼꼼히 다루었고, 문학적 서사로 풀어내어 읽는 재미도 갖추었다. 연대와 인물을 외우는 역사에 지친 학생들이 읽어보면 좋겠다. 전봉준, 녹두장군 정도로 동학농민운동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이 책을 통해 그 시대를 살다간 다양한 민중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나라 없는 나라'라는 제목에 이끌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며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