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도록 멀쩡해 보이는 사람이, 놀랍도록 슬픔을 씻지 못한다. 전기 고문을 자청해서라도 기어코 닿고 싶어했던, 어떤 사람들의 이야기. 쉽게 정의할 수 없는데 절박했던 것만은 분명했던, 그런 사람들이 눈녹듯 사라졌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로 남는다.
올해 다시 펼쳐 읽었다. 역시 숨을 못 쉴만큼 어지러워 진다. 어떤 역의 대합실이 뒤틀리고 참을 수 없이 파괴된 기억이 눈을 흔든다. 망가진 내가 망가진 아이를 찾다가 어 순간 다 같이 슬퍼진다. 나는 아직 폐허의 소설은 제발트 이상을 본 적 없다.
내 인생 최고의 책. 언제나 지칠 땐 제발트를 본다. 청어의 자연사, 공장 지대, 어딘가 미묘하게 망가진 발음, 회색 눈 같은 거. 슬픔의 지대를 이토록 집요하게 걷던 사람이 있던가. 토성의 고리는 알갱이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제발트는 그 파편을 기어코 고리로 구현해낸다.
그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책. 이토록 생생한 윤리를 나는 제발트 외에는 잘 본 적이 없다. 제발트의 이 책은 독일의 맨살을, 거즈 밑에 가린 아직 뜨거운 화상 자국을 기어코 보여주고야 만다.
헤밍웨이의 노인이 인간이라는 의지의 그물을 쥐고 있다면 루이스 세풀베다의 노인은 그 인간성조차 뛰어넘는 자리에서 엽총을 든다. 아름답다. 그가 틀니를 빼서 손수건으로 감싸는 그 작은 동작부터, 최선을 다해 한 음절 한 음절 연애 소설을 읽는 모든 태도가 윤리적이다. 어쩌면 그가 연애 소설을 읽고자 하는 건, 세상과의 불가능한 화해를 그렇게라도 눈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