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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ㅣ 문학동네 시인선 184
고명재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12월
평점 :
어떤 시집은 읽고 나면 오래도록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다.
시집에 따라 다양한 좋은 시들이 있지만, 시집 전체가 일관되게 아름다운 경험은 드물다.
우리가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은
사둔지 오래된 시집인데 정말 한참만에 펼쳐보게 되었다.
이 시집을 읽고 정말 기뻤다. 순진무구한 풍경과 반짝이는 세상이 겹쳐져 있어서 매우 즐겁게 읽었다. 고르게 작품들이 재미있었고 무엇보다 거듭 다시 읽고 싶은 시집이라는 점에서 드문 독서 경험이었다.
소보로
그때 나는 골목에서 양팔만 벌려도
양파 밭을 넘어서 하늘로 떠올라 버렸다
그때 나는 무결한 무릎의 탄성이었다
산비탈을 보면 리듬부터 솟았고
그때 나는 돌아다니는 환대였으므로
개와 풀과 가로등까지 쓰다듬었다
그때 나는 잔혹했다 동생과 새에게
그때 나는 학교에서 학대당했고
그때 나는 모른 채로 사랑을 해냈다
동생 손을 쥐면 함께 고귀해졌다
그때 나는 빵을 물면 밀밭을 보았고
그때 나는 소금을 핥고 동해로 퍼졌고
그때 나는 시를 읽고 미간이 뚫렸다
그때부터 존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끔 그때의 네가 창을 흔든다
그때 살던 사람은 이제 흉부에 살고
그래서 가끔 양치를 하다 가슴을 쥔다
그럴 때 나는 사람을 넘어 존재가 된다
나는 이야기다 적설(積雪)이다 빵의 박자다
왜성(矮星)에 크림을 바르는 예쁜 너의 꿈이다
그렇게 너는 작은 빵가게를 차린다
무릎 안에 소보로가 부어오를 때
그때 나는 한입 가득 엄마를 깨문다
치매가 와도 매화는 핀다 그게 사랑
뚱뚱한 엄마가 너를 끌어안는다
그때 너는 이야기며 진실이다
이런 시는 말하기 어려운데, 그냥 너무 좋아서 계속 다시 읽고 싶어졌다.
오랜만에 읽고 정말 행복했던 시집.